산행트레킹기

2014. 7/12 757차 서울 북한산(삼각산) 북한산성계곡(백운동계곡)-남장대지-구기계곡

새샘 2014. 7. 15. 20:58

산행로: 북한산성탐방안내소-백운동계곡(북한산성계곡)-북한동역사관-중성문-행궁터-남장대지-상원봉(715봉)-청수동암문-대남문-구기계곡-구기탐방안내소-구기터널입구(10km, 5시간20분)

 

산케들: 도연, 여산, 장산, 장부, 혜운, 회산, 백산, 대곡, 원형 , 새샘(10명)

 

 

2주전에는 삼각산 산행에서는 제봉능선으로 올라가 구기계곡으로 내려오는 코스였는데, 이번 주에는 백운동계곡(일명 북한산성계곡)으로 올라가 구기계곡으로 내려오는 코스를 탄다.

지난 주 태풍 너구리는 다행히도 일본으로 상륙하여 제주도와 남부지방에만 비를 뿌리고 지나갔다.

 

불광역 7번 출구에 모인 10명의 산케는 불광동 서부터미널로 걸어가 34번 버스 시외버스를 타고 북한산성 입구에 내린다.

북한산성 탐방안내소 가는 길로 들어서니 건물 뒤로 보이는 의상봉.

 

조금 더 들어가니 원효봉,의상봉이 마치 좌청룡 우백호처럼 가운데 있는 삼각산 세 봉우리를 보호하고 있다.

 

북한산성 탐방안내소

 

안내소를 지나서 직진하는 차량용 길로 가지 않고, 왼쪽으로 난 백운대 대남문 방향의 걸어가는 작은 흙길로 들어선다.

 

백운동 계곡을 건너는 둘레교 앞에서 다리를 건너지 않고 계속 직진. 

 

둘레교 위에 서서 백운동 계곡 끝자락에 늘어서 있는 북한산 봉우리들을 감상한다.

산케들오름길인 백운동 계곡은 용암봉과 의상능선 사이에 있다.

 

북한산성 교육정보센터

 

원효봉(505m)

 

백운동 계곡(북한산성 계곡)에는 작은 폭포도 흐른다.

 

북한동으로 으르는 계단 앞에서 잠시 휴식.

 

북한동 역사관 입구의 소나무.

 

북한동 역사관 앞 전망대에서 바라본 북한산.

왼쪽부터 차례로 원효봉(505m, 맨 왼쪽 잘린 봉우리), 염초봉(662m), 백운대(837m), 만경대(800m), 노적봉(716m), 용암봉(615m, 맨 오른쪽 전깃줄 위로 보이는 봉우리),

 

북한 동역사관은 과거 음식점이었던 '만석장' 건물이었으며, 2010년 북한산성 이주사업으로 기존 건물을 개보수하여 현 위치에 있었던 북한동의 역사와 문화를 알리는 역사관으로 만들었다.

 

선봉사

 

법용사 입구

 

이끼 낀 바위

 

북한산성 14개 성문 중 하나인 중성문中城門은 14개 성문 중 유일하게 북한산성 안에 있는 문이다.

북한산성 서쪽 문인 대서문이 너무 낮아 북한산성 행궁의 방어를 보강하기 위해 산성 안 협곡에 차단성으로 하나 더 쌓은 중성重城에 설치된 성문.

 

중성문 왼쪽 아래에는 암문도 있다.

중성문 암문을 통해 행궁 안의 시체를 북한산성 밖으로 운반하였기 때문에 시구문이라고도 불렀다.

북한산성에는 또 다른 시구문이 있는데, 그것은 원효봉 능선 끝자락에 위치한 산성 14개 성문 중 하나인 서암문 역시 시구문으로 불렸기 때문이다.

 

암문에서 본 중성문

 

노적교 앞을 지나고..

 

진국교를 건너 노적사(옛 진국사) 들머리 계단 앞 진국로를 따라 대남문으로 향한다.

 

백운동 계곡(북한산성 계곡)에서 발을 담그고 휴식을 취하고 있는 산행객들.

 

부왕동 암문으로 나뉘는 용학사 갈림길에서 왼쪽의 대남문 즉 중흥사 이정표를 따라 간다.

 

북한산성 선정비군善政碑群은 북한산성 안에 상주하던 주민인 승려들이 19세기에 세운 비석거리다.

이 비석들은 북한산성 관리를 맡았던 총융청과 무위소 관리들의 선정과 공덕을 기리기 위해 자연 암석 위에 세운 비석군으로서 현재 26기 정도가 남아 있다.

비석을 세운 선정비가 대부분이지만 비석 없이 암벽에 비문을 새긴 선정비도 있다.

 

북한승도절목北漢僧徒節目 암각문.

1855년 바위에 새긴 총 325자의 명문으로 승병 대장인 총섭總攝(승통僧統)을 임명하는 규칙 3가지가 새겨져 있다.

이는 총섭의 부적절한 임명에서 비롯된 폐단을 없애기 위한 것으로 대체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사찰을 세우고 승도(승려)를 모집하는 중요한 목적이 산성을 쌓아 수호하는 일이요, 승도들이 질거나 마르거나 가리지 않고 나라에 봉사하는 것은 오직 장수 한 사람 즉 총섭에 기대하는 바가 큰데 성 안의 승려 중에서 총섭을 임명하지 않고 다른 곳에서 총섭을 임명하는 것을 엄히 막겠다."

이 절목을 통해 당시 사찰이 피폐하여 승도 즉 승려들이 흩어지고 있었고, 산성 밖의 승려가 총섭에 임명되는 경우가 있었으며, 다수결 비밀투표를 통해 총섭이 임명되었다는 사실 따위다.

임진왜란 때 서산대사 휴정에 의해 승군이 조직되고 나라에서는 총섭이라는 벼슬로 승려들을 대우했다.

서산대사가 초대 총섭이었고 사명대사 유정과 벽암 등이 그 뒤를 이어 총섭이 되었다.

북한산성 축조를 명령했던 숙종 때는 '북한지北漢誌'를 쓴 성능 스님이 총섭을 맡으면서 산성 축성을 담당했다. 

 

복원공사 중인 산영루山映樓.

선정비군 맞은편 북한동 계곡의 넓은 암반에 그림 같은 누각이 하나 있었다고 한다.

이곳은 당시 다산, 추사와 같은 스님들과 친분이 두터운 시인 묵객들이 다녀가며 풍류를 즐겼던 곳이라 하는데, 아마도 북한산성 축성 당시에는 없었던 것을 뒤에 승려들이 조정의 관리를 대접하는 장소로 만든 것으로 보여진다.

1902년까지 누각이 있었지만 화재로 소실되어 주춧돌 13개만 남은 것을 지금 복원하고 있다.

다산과 추사는 이곳을 찾아 삼각산을 찬양하는 시를 남겼다.

 

다산의 수채화 같은 시 하나를 읊어보자.

  "바윗길마저 끊어진 곳에 위태로운 난간이 보이면

    겨드랑이 서늘하게 날개깃이 돋는 듯하네

    성글게 들려오는 저녁 종소리에 가을이 저물고

    산은 단풍으로 물들어 물소리도 차구나

    숲속에 말 매놓고 웃고 떠드는 사이

    구름 속에서 만난 스님 인자하게 웃네

    해가 지니 안개가 푸른 물을 감싸는데

    부엌에서는 술상을 내간다고 알려오네"

 

1885년 촬영한 산영루 사진과 산영루를 그린 산수화.

 

산영루 복원공사 현장 직상류의 백운동계곡 암반.

 

용학사 약수터.

 

 

중흥사重興寺 앞을 지난다.

중흥사는 평상시 북한산성에 주된 상주인력이었던 약 350명의 승려들이 거주하던 곳으로 행궁의 중심 사찰이었다(전시에는 군사 1천명, 일반인 250명을 포함하여 모두 1,600명 상주).

고려 초에 창건된 절이며, 고려 말 태고보우대사에 의해 중수되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조선 숙종 때 북한산성 축성 이후 산성 주비를 위해 창건된 13개 사찰을 관장하는 총섭의 거처였다.

당시의 중흥사는 없어지고 터만 남아 있으며, 위치는 현 중흥사와 백운동계곡 사이의 공터로서 아래 사진의 현수막이 붙은 담 앞쪽에 해당한다.

평상시 산성내 승려는 산성을 수축하거나 성곽의 유지나 보수를 담당하였는데, 억불정책의 조선시대에는 승려 취급이 말이 아니었을 것이다.

따라서 이같은 처지에 반발하여 탈주해서 무리를 지어 다니다가 조선 후기 숱한 민란에 참여하거나 의적들과 의기투합한 것이 바로 당취黨聚다.

'파당을 취하다'는 뜻으로 당취하 했지만 나중에는 땡초로 와전되어 전해 내려오게 되었다.

 

1902년 당시의 중흥사 사진

 

행궁터 갈림목에서 대남문 방향으로 직진하지 않고 오른쪽 좁은 길인 청수동암문 이정표 방향으로 들어선다.

이 길을 따라 가면 행궁터가 나온다.

 

북한산성 행궁권역行宮圈域.

행궁을 중심으로 필요한 조정 관청이었던 경리청 관성소, 상창, 호조창 등이 있던 지역.

행궁이란 전란시 왕이 임시로 거처하는 별궁이며, 경리청 관성소는 산성관리를 총괄하는 주관부서인 경리청의 산성내 현지관청, 상창과 호조창은 산성 안에서 가장 규모가 큰 식량 창고였다.

행궁권역이 북한산성에거 가장 안전한 장소인 중심지역에 자리잡고 있는 것은 당연하다.

 

발굴공사 중인 행궁권역

 

1902년 당시의 행궁터 사진

 

남장대 터로 향하는 가파른 오름길이다.

오늘 산행로의 최고 깔딱이로서 가장 많은 양의 땀을 흘렸던 코스!

 

가파른 오름길을 따라 어느 정도 올랐다고 생각하니 뒤를 돌아보고 싶어진다. 

북한산성 주능선이 병풍처럼 펼쳐지면서 산봉우리 위에 동장대東將臺의 모습이 아련하다.

장대란 북한산성을 지키는 장수가 주둔하면서 지휘하는 누각이며 시단봉에 위치하고 있으며, 북한산성에는 동장대, 남장대, 북장대의 3개의 장대가 있다.

동장대에는 금위영의 장수가 주둔하였다.

현재 셋 중 동장대만이 유일하게 복원되었으며, 우리가 오르는 남장대를 비롯하여 북장대는 터만 남아 있다.

 

남장대南將臺 터 능선부터는 평탄한 능선길이 계속된다.

 

남장대 터 직전 봉우리인 미영봉에는 앉기 좋게 굽어진 소나무 한 그루가 우릴 반긴다.

미영봉이란 이름이 정식 명칭인지 애매하다.

그건 누군가가 이 소나무 위에 미영봉이라고 쓴 푯말을 얹어 놓았기 때문이다.

 

누군지는 모르지만 미영봉이라는 이름을 걸어놓았으니 이 푯말을 본 사람들은 모두가 미영봉이라고 부르는 것 같다.

미영봉에서 바라본 삼각산 세 봉우리

 

미영봉에서 자리를 잡고 평소보다 긴 1시간 정도 얼음 막걸리 정상주를 즐겼다.

.

 

정상주 타임을 마치고 출발 직전 미영봉에서의 산케 인증샷

 

도연, 혜운과 함께 한 장 더 찰칵

 

미영봉에서 남장대 터까진 1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남장대는 어영청의 장수 주둔지로서 부왕동 암문, 대남문은 물론 대동문과 동장대까지 시야에 들어와 사방을 관측할 수 있다.

한편 훈련도감의 장수가 주둔했던 북장대는 노적봉 서쪽에 그 터가 있다.

 

남장대 터에서 바라본 삼각산 북한산성주능선

 

남장대 터에서 바라본 의상능선

 

의상능선의 맨 위 봉우리이자 가장 높은 봉우리인 문수봉에 이어 나타나는 2번째 봉우리인 상원봉上元峰은 해발고도가 715m이므로 715봉이라고도 부른다.

상원이란 불교에서 북두칠성을 뜻한다.

상원봉 정상에 국토지리정보원이 박아 놓은 지리 좌표에는 표고가 715.5m라고 되어 있다.

 

청수동 암문을 향해 가다가 바라본 의상능선의 맨 위에 위치하면서 의상능선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인 문수봉文殊峰(727m)의 기암괴석

 

청수동 암문(694m)은 지금까지 보이지 않았던 북한산성과 함께 나타난다.

청수동 암문은 서쪽으로는 비봉능선을 거쳐 불광동으로 연결되고, 동쪽으로는 우리가 올라왔던 백운동 계곡으로 연결된다.

 

구기계곡으로 하산하려면 대남문(683m)을 빠져 나가야 한다.

 

대남문 뒤로 보이는 능선이 보현봉능선이며 맨 오른쪽 봉우리가 보현봉普賢峰(714m).

 

대남문을 통해 북한산성을 빠져나와  밖에서 본 대남문.

 

대남문에서 구기동 가는 내림길 계단

 

대남문 출발 약 20분 뒤 깔딱고개에서 휴식.

 

구기계곡 끝자락

 

식당이 보이니 이제 북한산은 벗어난 셈이다.

 

구기동 도심지의 계곡길에 전에 보이지 않던 휴식공간과 체육시설이 설치되어 있다.

 

늘 가던 구기터널 입구의 목욕탕에서 목욕을 끝내고 길 건너 호프집에서 시원한 생맥주와 함께 치킨을 안주 겸 점심으로 먹으면서 산케들은 오늘 산행의 즐거움을 다시 한번 복기해 본다.

2014. 7. 15 새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