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과 그림

중세의 삶과 죽음

새샘 2020. 3. 15. 17:25

<세상의 왕 Fürst der Welt ― 독일 뉘른베르큰 성 제발두스 St. Sebaldus 교회에 있는 1330년 경의 석상. 웃고 있는 앞모습은 세상의 모든 것을 지배하지만, 그의 등에는 뱀과 구더기가 기어 다닌다. 권력의 덧없음과 죽음의 무자비한 평등성을 이보다 더 잘 표현할 수 있을까?>(출처―

http://www.portalsaeule.de/index.php?cat=Portale%2C%20Kapitelle%20und%20Fassaden%2FGotik%2FDeutschland&page=N%C3%BCrnberg)

 

 

1346년 동서양 교역의 접점이던 크림 반도 Crimean Peninsula(우크라이나 남단에서 흑해쪽으로 튀어나온 반도)의 항구도시 페오도시아 Feodosia[카파 Ceffe 또는 Kaffe]. 3년이나 이곳을 포위했던 몽골 통치자 자니베크 칸 Janibek Khan이 아쉽게 발길을 돌리며 작별 선물을 남긴다. 

 

병에 걸려 사망한 군사들의 시체를 투석기에 실어 성벽 안으로 던져 넣은 것이다. 일종의 세균탄이다. 시체와 더불어 치명적인 병원균이 성 안으로 침투했다. 아시아에서 발생해 실크로드를 타고 날개 돋친 듯 퍼진 흑사병 plague[페스트 pest]이 마침내 유럽에 발을 내디딘 순간이었다.

 

성에 피신해 있던 제노바 상인들이 본의 아니게 균의 전파자가 되었다. 이듬해 여름, 이들이 고향으로 향하며 들른 지중해 항구마다 환자가 속출했다. 유럽 방방곡곡으로 번진 병은 1년 만에 잉글랜드와 아라비아 반도, 나일강 삼각주까지 미쳤다.

 

신대륙을 제외한 전 세계의 대부분을 휩쓸었던 흑사병은 역사상 전무후무한 전염병이다. 1347년에서 1350년 사이에 처음으로 전 유럽에 걸쳐 창궐했고, 그 후 약 100년 동안 시간적 간격을 두고 반복됐다. 이 재앙은―죽음과 혼란, 그리고 그것이 야기한 공포라는 점에서―실로 20세기의 두 차례에 걸친 세계대전에 견줄 만한 것이었다.

 

흑사병에는 림프절[선腺] 페스트와 허파[폐肺] 페스트의 두 병형이 대표적이다. 이 전염병의 임상적 결과는 소름 끼치는 것이었다. 일단 벼룩에 의해 림프절페스트에 걸리기만 하면 환자는 사타구니와 겨드랑이에 종기가 걷잡을 수 없이 생기게 되며, 팔다리에 검은 반점이 생기고, 설사를 하다가 결국에는 3일 내지 길어야 5일 만에 죽음을 맞게 된다.

 

질병이 폐렴의 형태로, 즉 공기 흡입을 통해 침투하게 되면, 종기 대신 기침을 하면서 피를 통하고 3일 내로 죽음을 맞게 된다. 어떤 사람들은 건강한 몸으로 침대에 들어갔다가 밤새 고통에 시달린 후 다음날 아침에 시체로 발견되기도 했다. '밤새 안녕'이란 말 그대로다. 또 어떤 경우에는 선원들이 모두 이 병에 걸려 죽는 바람에 시체를 실은 배들이 바다에서 정처 없이 표류하기도 했다. 소설 등 문학작품에서 볼 수 있는 유령선의 이미지는 여기에서 유래된 것이다.

 

그 결과 나라마다 인구의 3분의 1, 많게는 절반이 목숨을 잃었다. 사망자가 4,200만 명에 달했고 이 가운데 2,500만 명이 유럽인이라는 통계도 있다. 이 역병이 창궐한 것은 페스트균[예르시니아 페스티스 Yersinia pestis]을 지닌 벼룩이 쥐의 몸에 서식하고, 이 쥐들이 식량을 좇아 사람 가까이에 머물렀기 때문이다. 

 

러나 질병의 '전염'이란 개념이 전혀 없었던 당시 사람들은 쥐를 박멸하기는커녕 원인을 엉뚱한 곳에 돌렸다. 인간의 죄에 분노한 신의 천벌이라며 수만 명이 스스로를 채찍으로 때리는 고행에 나섰다. 마녀사냥도 기승을 부렸다. 유대인들이 우물과 공기 중에 병균을 퍼뜨렸다는 소문이 돌면서 그들을 산 채로 태워 죽이는 비극이 곳곳에서 벌어지기도 했다.

 

흑사병으로 참극을 겪은 중세 말기(1300~1500) 유럽만큼 죽음에 큰 의미를 부여한 시대는 찾아보기 힘들다. '메멘토 모리 memento mori(죽음을 기억하라)'라는 호소가 끊임없이이 메아리쳤다. 죽음의 이미지는 멸망과 덧없음이었다.

 

지상의 화려함이 쇠락해가는 것을 한탄하면서 세 가지 주제가 부각되었다. 

첫째, "한때 명성을 날리고 권력을 휘두르던 그들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둘째, 인간의 육체적 아름다움이 해체되고 무너지는 무시무시한 광경이었다.

셋째, 죽음은 나이와 신분을 초월해 모든 사람을 공평하게 데리고 간다는 것이다.

 

14세기에는 죽음이 초래하는 육체적 파괴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무시무시한 형태로 드러낸 무덤들이 등장했다. 어떤 무덤의 비석에는 "이 무덤을 구경하는 사람이 머지않아 악취 풍기는 시체로 구더기의 먹이가 될 것"이라는 문구가 새겨졌다. 다른 비문은 음산하게 경고한다. "지금의 당신 모습은 과거의 내 모습이고, 지금의 내 모습은 미래의 당신 모습이다." 죽음 뒤에 나타나는 육체의 부패는 공포를 야기했다. '성모 마리아가 임종한 후 육체와 영혼을 온전히 구비한 채 천국에 들어 올림을 받았다''성모몽소승천聖母蒙召勝天[성모승천 Assumption of the Virgin]'은 그녀의 육체를 썩음에서 건져냈다는 점에서 가장 소중한 은총으로 여겨졌다.

 

저승사자가 낫을 들고 히죽거리며 아름답고 건강한 사람들을 데려가는 모습, 마귀가 지옥에서 고통으로 절규하는 사람들을 불로 지지는 잔혹한 모습을 담은 그림들을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었다. 독일 뉘른베르크의 성 제발두스 교회에서 1330년 경 제작된 석상 '세상의 왕'이 있다. 앞모습은 현세를 지배하는 왕으로서 웃고 있지만, 그의 등에는 뱀과 구더기들이 기어 다닌다. 무덤 속에서 부패해가는 시체의 모습이다.

 

20세기 영구 역사가이자 문명비평가인 아놀드 토인비 Arnold Joseph Toynbee(1889~1975)는 <대화>에서 현대 미국인들 사이에 죽음을 '입에 올려서도 안 되는 것'으로 여기면서 죽음의 불가피성에 직면하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풍조가 있다고 말한다. 

어디 미국인뿐이겠는가? 21세기 한국인도 다르지 않다. 토인비는 오직 인간만이 자기가 언제가 죽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음을 상기시키면서, 죽음을 외면하는 우리의 풍조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한다. 토인비에 의하면, 수많은 사람들이 어린 시절 형제자매와 사별한 경험이 있던 19세기까지만 해도 죽음은 인간의 삶에 대단히 가까운 것이었다. 암이나 교통사고가 아니면 죽음을 목격할 일이 드문 오늘날과는 사뭇 다른 풍경이었다. 죽음을 외면하는 풍조는 20세기 이후에 처음으로 나타난 현상임을 알아둘 필요가 있다.

 

<구약성서> 전도서 기자는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낫다"고 말한다(7장 2절). 흥청대는 잔칫집보다 죽음을 지켜보는 초상집에서 인생의 진리를 깨달을 수 있다는 말이다. 우리는 모두 죽는다. 그러니 가끔씩 유서를 써보는 건 어떨까. 죽음에 대한 준비는 삶에 대한 성찰을 이끌어낸.

 

※사진을 제외한 이 글은 박상익 지음, <나의 서양사 편력 1>(푸른역사, 2014)에 실린 글을 옮긴 것이며, 일부 내용은 수정·보완

하였다.

 

2020. 3. 15 새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