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고대사의 열국시대17 - 가야의 건국과 체제1: 건국
1. 들어가며
가야는 고구려·백제·신라와 더불어 6세기까지 존속했던 국가다.
그런데도 가야는 이들 삼국과 비교해볼 때 충분한 평가를 받지 못했다.
그것은 가야에 대한 기록이 너무 부족하다는 점에도 원인이 있었지만, 그동안 학계에서 가야가 존재했던 대부분의 기간을 삼국시대라고 이름지어 고구려·백제·신라가 그 시대의 주역이었던 것으로 인식한 데도 원인이 있었다.
이 시기를 삼국시대라 부르게 된 것은 고구려·백제·신라 삼국을 중심으로 기술한 『삼국사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일본이 가야에 임나일본부를 설치하고 그 지역을 지배했으므로 가야사는 한국사보다는 일본사에 속해야 한다는 일본인들의 생각이 반영된 것이기도 했다.
요즈음 고고학적 발굴에 따라 가야의 실체와 높은 국력이 확인되고 그에 대한 연구 성과도 크게 늘어나고 있는 것은 매우 바람직한 일이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가야의 건국 연대나 초기의 사회 수준, 그 성장 과정 등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가야가 건국되기 전 그 지역의 사회 수준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일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가야가 건국되기 전 그 지역은 한韓[삼한]의 영토였고 그 전에는 고조선의 영토였다.
가야 지역은 고조선이나 한의 중심부가 아니었기 때문에 그 당시를 대표할 수 있는 수준의 사회나 문화가 그 지역에 있었다는 기록은 있을 수 없고 그에 상응하는 유적도 남아 있을 수 없다.
그렇다 하더라도 가야는 고조선과 한의 영토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고조선과 한을 계승한 세력임은 분명하다.
따라서 가야를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고조선과 한에 대한 이해가 충분히 있어야 한다.
그런데 지난날에는 고조선의 영토를 가야 지역까지 포함해서 생각하지도 않았고, 한에 대해서도 국가사회 단계가 아닌 낮은 사회 단계였을 것으로 보았다.
따라서 가야 초기는 당연히 국가 단계가 아닌 낮은 단계의 사회였을 것으로 평가했다.
그 결과 가야의 건국 연대를 옛 문헌에 기록된 연대보다 늦게 잡거나, 가야 초기의 사회 수준과 그 사회의 성장 과정 들을 실제보다 낮게 평가하는 잘못을 저질렀다.
그러나 요즈음에 와서 고조선은 이미 국가 단계의 사회에 진입해 있었고 그 영토는 가야 지역을 포괄하고 있었으며, 고조선의 뒤를 이은 한은 상당히 발달한 수준의 국가사회였다는 사실을 확인해 주는 연구 결과를 보이고 있다.
그러므로 그런 기초 위에서 가야의 건국 연대와 초기의 사회 성격 및 성장 과정 등을 고찰할 필요가 있다.
이는 가야 자체에 대한 인식을 바르게 할 뿐만 아니라 당시의 한반도 사회 전반을 바르게 이해하는 데도 도움을 줄 것이다.
2. 가야의 건국 연대
가야에 관한 기본사료가 『삼국유사』 <가락국기駕洛國記>라는 점에는 이의가 없다.
<가락국기>에 실린 수로왕의 가야 건국 연대는 '후한 세조世祖 광무제光武帝 건무建武 18년 임인壬寅년'인 서기 42년이다.
『삼국유사』 「왕력王歷」편도 '가락국을 가야라고 부른다고'하면서 건국 연대를 똑같이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한국사학계에서는 일반적으로 가야 건국 연대에 관한 이런 문헌 기록을 믿지 않는 경향이 있다.
그러면서도 가야의 건국 연대에 대한 통일된 견해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
그동안 나온 가야의 건국 연대에 관한 견해는 대략 3가지다.
첫째는 가야 건국 연대를 <가락국기> 기록보다 올려보아 서기전 2세기 무렵 위만조선 시기로 보는 견해이며,
둘째는 <가락국기> 기록을 어느 정도 인정하여 서기전후 시기로 보는 견해이고,
셋째는 <가락국기> 기록보다 훨씬 내려보아 서기 2세기 무렵이나 그 이후로 보는 견해이다.
이 가운데 셋째의 견해가 가장 우세하다.
이런 기존 견해들은 대체로 가야 건국 연대에 관한 기본사료의 내용을 가볍게 취급하고 있다는 데 공통점이 있다.
그런데 그들이 내놓은 근거들 또한 매우 불확실하고 추상적이다.
그들 견해를 분명하게 알기 위해 그들이 제시한 주요 근거들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1) 가야 건국 연대를 서기전 2세기 위만조선 시기로 보는 견해
이 견해는 가야 수로왕은 가야 시조가 아니라 여섯 가야 연맹체가 형성될 때 그 맹주였던 인물로 본 것으로서,
가야 성립을 수로왕 출현 이전으로 올려본 것이다.
그리고 <가락국기>에 따르면 가야는 수로왕부터 10세世가 지나 532년 멸망했는데, 1세의 기간을 평균 30년으로 친다면 수로왕이 가야 맹주가 된 것은 200년대가 되어야 하므로 가야 건국과 수로왕 등장을 42년으로 기록한 <가락국기> 내용은 믿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 견해는 위만조선은 그 옆에 있었던 진국[또는 중衆국]이 중국 한漢나라와 교통하는 것을 막았다는 『사기』<조선열전> 기록에 근거하고 있다.
지금까지의 통설에 따라 위만조선 위치를 한반도 북부로, 진국 위치를 한반도 남부로 상정한다면 당시 진국 주변에는 진국과 같은 소국들이 많이 있었을 것이므로 가야도 그 가운데 하나였을 것이라고 본 것이다.
따라서 가야는 위만조선시대에 이미 존재했다고 보아야 하며, 수로왕은 가야 시조가 아닌 가야연맹체 형성 시기의 맹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 견해에는 다음 3가지 문제점이 있다.
첫째는 위만조선과 진국의 위치 문제다. 이 견해는 위만조선은 한반도 북부에, 진국은 한반도 남부에 있었던 것으로 보고서 제기된 견해다. 하지만 위만조선은 오늘날 요서 지역에 있었으며 진국은 오늘날 요하 동부 지역에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따라서 가야 건국지인 한반도 남부의 사회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 오늘날 만주 지역에 있었던 위만조선이나 진국의 상황을 연결하는 것은 무리인 것이다.
둘째는 가야의 왕력 문제다. 일부 학자들은 가야 왕 10명이 즉위한 기간을 300년으로 잡고 이를 가야의 멸망 연대에서 거꾸로 계산하여 수로왕의 등장 연대를 확인하는 방법을 취하고 있다.
그렇게 보면 수로왕의 등장 연대는 200년대가 되어 문헌에 기록된 가야 건국 연대인 42년보다 훨씬 늦게 된다.
그러나 이런 연구 방법은 옳지 않다. 왜냐면 가야 왕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장수했을 수도 있고, <가락국기>를 포함한 여러 문헌 기록에 일부 가야 왕들이 누락되었을 수가 있기 때문이다.
셋째는 가야라는 이름을 가진 정치세력의 등장과 가야라는 독립국가가 출현한 것을 구분해야 한다는 것이다.
가야라는 이름을 가진 정치세력이 등장했다 하더라도 그것이 독립국이 아니라 어떤 국가에 속해 있었던 정치집단의 이름이었거나 국가 단계의 사회수준에 이르지 못한 정치집단의 이름이었다면 그 시대를 가야의 건국 연대로 잡을 수는 없다.
이는 역사에서 논하는 가야 건국 연대는 가야라는 이름이 출현한 연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닌 가야가 독립국으로 출발한 연대를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위와 같은 문제점이 있는데도 가야 건국 연대를 <가락국기>에 기록된 연대보다 올려본 견해는 중요한 시사를 한다.
그것은 42년 이전에 가야 지역에는 이미 가야국의 뿌리가 되는 정치세력이 존재했다고 본 점이다.
그들이 아직 가야라는 독립국가를 출현시키지 못했다 하더라도 그 기초가 된 정치세력이 존재했던 것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2) 가야 건국 연대를 2세기 무렵이나 그 이후로 내려보는 견해
이 견해가 갖는 문제점은 다음 3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가야 건국 연대가 42년으로 기록된 『삼국유사』 <가락국기>는 고려 문종 말기 금관지주사金官知州事가 찬술한 것을 요약해서 실은 것으로, 그 내용을 믿을 수 없다는 것이다.
특히 <가락국기>에서 참고했다는 개황력開皇歷에 실린 가야국 왕력은 신라 왕력과의 관계 아래 정해졌을 것으로 추정되므로 이를 믿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그러나 42년이란 가야 건국 연대는 『삼국유사』 <가락국기>에서만 보이는 것이 아니다.
『삼국사기』 <김유신전>에도 가야국을 세운 김수로왕이 김유신의 12대조라고 하면서 『삼국유사』 <가락국기>와 같은 연대를 싣고 있다.
편찬자들이 유학자와 불교 승려라는 전혀 다른 학문 성향을 지닌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가야의 건국 연대가 똑같이 기록되었다는 것은 적어도 고려시대에는 가야 건국 연대를 42년으로 보는 것이 일반화되어 있었음을 알게 해준다.
둘째, <가락국기>에 따르면 수로왕 재위 기간은 42년부터 199년까지 158년 동안인데 이렇게 긴 기간 동안 왕위에 있었다는 것은 믿을 수 없다는 것이다.
수로왕의 재위 기간이 너무 긴 것이라든가 수로왕부터 마지막 왕인 구형왕까지는 불과 10세世이데 그 기간이 너무 길다는 것 때문에 가야 왕력에 의문을 제기할 수는 있다.
그리고 그에 따라 가야 왕력을 재검토하거나 그 복원을 위해 연구를 진행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내용이 바로 가야 건국 연대를 상향 조정한 것으로 단정하면서 건국 연대를 끌어내리는 데에는 문제가 있다.
그런 문제점은 여러 가지 이유로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가야 왕실의 세계世系가 전해지는 과정에서 왕명이 누락되었을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왕력에 대한 의문을 바로 가야 건국 연대를 끌어내리는 방향으로 논리를 전개하는 것은 가야 건국이 그렇게 빠를 수 없을 것이라는 선입관이 작용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셋째, 중국 삼국시대에 관한 기록인 『삼국지』 「동이전」 <한전>에 한韓 지역에 있었던 78개 나라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 것을 근거로 그 시대에 해당하는 3세기 무렵까지 한반도 남부에는 78개의 나라가 존재했으며, 가야는 그 가운데 하나였을 뿐이지 독립국일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런 『삼국지』 「동이전」 <한전>의 기록에 관한 인식은 가야뿐 아니라 신라·백제의 건국 연대까지도 『삼국사기』의 기록보다 내려잡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그런 견해는 사료를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삼국지』 「동이전」 <한전>에는 한에 속해 있었던 78개의 나라 이름이 기록되어 있기도 하지만, 한의 진왕은 그 가운데 12국만을 다스렸다는 기록도 있다.
이 내용은 서로 모순된 것처럼 보인다.
『후한서』 「동이열전」 <한전>에는 진왕이 한에 있었던 78개 국을 모두 통치했다고 적혀 있는 것으로 보아 『후한서』가 말하는 중국 동한시대보다 늦은 삼국시대에도 한에 78개 국이 있었다면 당연히 그 나라들은 진왕의 통치를 받아야 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 가운데 12국만이 진왕의 통치를 받고 있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한에는 원래 78개 국이 있어 진왕의 통치를 받았지만 중국 삼국시대에 해당하는 시기에 이르러서는 그 가운데 12개 국만 진왕의 통치를 받고 있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나머지 66개 국이 있었던 지역은 이미 진왕의 통치를 벗어난 상태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내용을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신라·고구려·백제·가야에 관한 기록과 연결해보면 66개 국이 진왕의 통치를 벗어나게 된 이유를 알게 된다.
그것은 이 지역에 신라·백제·가야가 건국되어 영토를 확장했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삼국지』 「동이전」 기록은 가야가 3세기 이전에 이미 건국되었음을 간접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이상과 같이 가야의 건국연대를 올려보거나 내려잡은 지금까지의 견해는 분명한 근거가 없었다.
특히 가야의 건국 연대를 내려본 견해에는 고구려·백제·신라를 포함한 한국 고대사회의 수준을 실제보다 낮게 평가해온 지난날의 학문 경향이 영향을 주었다고 볼 수 있다.
가야의 건국 연대를 정확하게 알기 위해서는 당시 한반도의 정치 상황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주변 여건으로 보아 가야 건국이 가능했겠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가야가 건국되기 전인 서기전 1세기 무렵에 한반도와 만주에는 정치적인 변화가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고조선의 붕괴와 동부여·고구려·읍루·동옥저·동예·최씨낙랑국·한 등의 건국이 그것이다.
고조선의 붕괴와 위의 여러 나라들은 건국은 단순한 왕조의 분열과 교체가 아니라 주민 이동을 동반하는 격동의 상황을 가져왔다.
동부여·고구려·읍루·동옥저·동예·최씨낙랑국의 건국 주체세력들은 원래 오늘날 요서 지역에 거주하고 있었으나 그곳에 위만조선이 서자 동쪽으로 이둉하여 오늘날 요하 동쪽의 만주와 연해주 및 한반도 북부에 나라를 세웠던 것이다.
그 과정에서 큰 사회 혼란이 있었을 것은 말한 필요가 없다.
고조선이 붕괴됨에 따라 한반도 남부의 한韓도 독립을 했는데, 한 지역은 북부만큼 큰 혼란을 겪지는 않았지만 오늘날 요동 지역에 있었던 진국에서 주민이 이동해 온 데다 급작스러운 독립으로 충분한 통치력을 갖추지 못했다.
따라서 한 사회는 안정되지 못한 사회였고, 그 변방이었던 진한과 변한 지역은 더 심했을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서기전 57년에 진한 지역에서 신라가 건국되었고, 서기전 18년에는 마한의 북부에서 백제가 건국되었다.
그리고 백제와 신라는 건국하자마자 영토를 확장하기 시작했는데, 이에 따라 한의 영토는 크게 줄어들게 되었다.
이러한 당시의 한반도 남부 상황으로 보아 그 영향을 받은 변한 지역 주민들이 42년 무렵에 가야를 건국했을 개연성은 충분하다.
그러므로 분명한 근거 없이 문헌에 보이는 가야 건국 연대를 부인하고 그보다 올려보거나 내려볼 이유가 없다.
가야 건국 연대에 관한 분명한 자료를 새로 발견하지 못하는 한 기존 문헌 기록을 부인할 수는 없는 것이다.
따라서 지금으로서는 42년이라는 연대를 사용하는 것이 지극히 당연하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탈해 이사금>조에는 77년 신라와 가야의 전쟁이 기록되어 있고, 87년에 신라는 서쪽으로 백제와 이웃하고 남쪽으로는 가야와 접하고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런 기록들은 가야가 77년 이전에 건국되었음을 분명히 말해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문제로 등장하는 것은 가야가 건국되었던 42년 무렵에 변한 사회가 국가 단계 사회에 진입해 있었느냐 그렇지 못하느냐 하는 점이다.
이 점을 확인하려면 가야 건국 시기의 사회 상황을 검토하는 것이 필요하다.
3. 건국기의 가야 사회
건국기 가야의 사회 성격을 알기 위해서는 먼저 건국 과정에 대한 기록을 볼 필요가 있다.
『삼국유사』 <가락국기>에 기록된 가야 건국 과정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천지가 처음 열린 뒤 나라 이름도 없고 군주나 신하도 없던 곳에 세월이 지나면서 아홉 간干이 추장으로서 백성을 거느리다가 42년 하늘에서 내려온 6개의 황금알에서 6명의 동자가 나와, 그 중 처음 나타난 동자가 즉위하여 이름을 수로首露 또는 수릉首陵이라 하고 나라 이름을 대가락 또는 가야국이라고 일컬었으며 나머지 다섯 동자는 각각 다섯 가야의 주主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가야 건국시조가 하늘에서 내려온 알에서 태어났다는 것은 건국시조를 신성화하기 위한 고대인들의 의식이 반영된 것으로 고조선 이래 전승되어온 한민족의 하느님 숭배사상이 이어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천지가 개벽했던 태초에 가야 지역에는 나라도 없고 군주나 신하의 칭호도 없다가 오랜 세월이 흘러 한汗 또는 칸[간干]이라 불리는 추장이 나타나 그 지역을 다스렸다고 했다. 칸[간干] 또는 한汗은 고대에 동북아시아 지역에서 우두머리 또는 통치자를 부르는 칭호였다.
그러므로 이 시기에 이미 정치권력이 출현했음을 알 수 있다.
국가가 출현하기 직전에 정치권력을 가진 추장이 다스리는 사회가 형성되는 것은 세계사의 보편적인 발전 과정이다.
오늘날 국제학계에서는 이 단계의 사회를 추방酋邦 chiefdom 사회라 부른다.
이런 내용으로 보아 가야 지역에는 가야라는 국가가 출현하기 전에 9개의 추방이 형성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추방은 마을사회가 발전하여 마을연맹체를 형성한 시기로서 고고학적으로 후기 신석기시대에 해당하며 이를 고을사회 또는 고을나라라고 부른다.
고을나라 단계의 사회를 거쳐 가야가 건국되었다는 것은 가야 지역이 인류사회의 보편적인 발전 과정을 거쳤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또한 『삼국유사』 <가락국기>에는 9개 고을나라에 사는 주민 수가 모두 7만 5천 명이라 했는데 1호당 인구를 5명으로 계산하면 1만 5천 호가 되며, 이를 아홉으로 나누면 1개 추방 당 1,600호이다.
즉 가야 지역에는 1,600호 정도의 고을나라가 9개 있었다는 것이 된다.
이를 『삼국지』 「동이전」 <한韓전>에 따르면 가야가 건국되기 전 한의 진한과 변한에는 24개 국이 있었고 대국은 4,000~5,000가家, 소국은 600~700가였다 했으므로 가야 지역 고을나라들은 한에 있었던 국 가운데 중급 정도 인구에 해당한다.
그런데 이것은 가야 지역에 있었던 고을나라들의 크기를 평준화한 것이어서 실제로는 그 크기가 같지 않았을 것이므로 그 규모가 한전에 기록된 국과 비슷했을 것이다.
이밖에도 『삼국지』 「동이전」 <한전>에는 고을나라 단계의 가야 지역은 이미 우물을 파서 수원을 만들고 논밭을 갈아 종사짓는 발달한 농경사회를 이루고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는 자연을 활용하는 기술이 매우 발달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삼국지』 「동이전」 <한전>은 이렇게 높은 사회 수준의 가야 지역에서 42년 가야가 건국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삼국유사』 <가락국기>의 기록에 따르면 수로왕은 가야 지역의 토착인 출신이며 그 출생을 신비화하는 과정에서 하늘에서 내려온 금빛 알에서 태어났다고 전해졌을 것으로 보인다.
즉 가야 건국 세력은 가야 지역의 토착인들로 고조선 이래 그 지역에 세력 기반을 가지고 있었던 명문거족이었을 것이다.
이들은 고조선이 붕괴된 뒤 한이 독립했으나 사회가 혼란하고 북쪽에서는 신라가, 한의 북부에서는 백제가 독립국을 세우자 이에 자극을 받아 가야의 토착세력들도 독립국을 세웠을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가야는 건국되기 훨씬 전 고조선시대에 이미 국가 단계의 사회에 진입해 있었다는 것이 된다.
그리고 국가 단계였던 고조선이 붕괴하고 여러 나라가 건국되면서 그곳은 독립국인 한韓의 일부가 되었다.
따라서 건국 당시의 가야는 당연히 국가 단계의 사회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특별한 재해가 없는 한 뒤의 사회는 앞의 사회 수준을 계승하기 때문이다.
건국 당시 가야가 국가 단계의 사회였음은 『후한서』와 『삼국지』의 기록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후한서』 「동이열전」 <한전>에는 변진과 진한은 형刑과 法이 준엄했다고 되어 있고, 『삼국지』 「동이전」 <한전>에도 변진과 진한은 법과 풍속은 특별히 준엄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미 잘 알려진 바와 같이 법이 존재하여 그것이 권력을 뒷받침하는 합법적인 권력이 출현하면 그 사회가 국가 단계의 사회라고 하는데, 한민족의 역사에서 법이 출현한 사회는 고조선시대였다.
따라서 그 뒤의 사회는 당연히 국가 단계 사회가 되는 것이다.
가야가 국가 단계의 사회였다는 것은 고고학 자료로도 확인된다.
대표적인 유적인 경남 창원시 동읍의 덕천리 유적과 다호리 유적의 묘지에서 출토된 석물들은 매우 발달된 가공기술을 보여주어 당시 석물을 가공하는 전문 기능인이 있었음을 알게해 주었다.
1992~1993년에 발굴된 덕천리 유적의 제1호 지석묘[고인돌]는 다른 묘들과는 달리 상석上石 무게가 29톤에 이르는 대형이며, 주위는 잘 다음은 돌판을 쌓아 동서 17.5미터, 남북 56미터에 이르는 묘역을 만들었는데 바닥에도 돌판을 깔았다.
이러한 구조의 이 묘는 당시 상당히 높은 신분의 묘였음에 틀림없다.
이것은 당시 사회가 신분이나 직업 면에서 매우 분화되어 있었음을 알게 해준다.
아마도 이 고분은 고조선 말기 이 지역의 거수의 묘이거나 명문거족의 족장 묘일 것이다.
덕천리 유적의 연대는 방사성탄소연대측정 결과 서기전 9세기 무렵으로 나타났다.
따라서 이 유적은 가야가 건국되기 훨씬 전인 고조선 후기에 해당한다.
가야가 건국되기 훨씬 전에 이 지역은 이미 사회신분의 분화와 빈부의 차이가 심하고 직능에 따른 전문인들이 출현한 사회를 이루고 있었던 것이다.
1988~1991년 발굴된 다호리 유적은 50기가 넘는 무덤이 밀집되어 있는 공동묘역이다.
출토된 유물은 여러 종류의 청동기와 철기, 그리고 칠기, 석기, 목제, 토기, 유리구슬 등 아주 다양했으며, 유적 연대는 서기전 1세기 무렵으로 추정되었다.
이렇게 가야는 건국 이전이었던 서기전 1세기에 이미 매우 발달된 철기문화시대에 진입해 있었음을 말해준다.
유물 중 다섯 자루의 붓은 중국 한漢시대에 사용했던 것들과 같은 것으로 문자 필사용이었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이 붓은 교역에 필요한 서류를 만든데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로 보아 그 당시 이 지역에서는 이미 활발한 교역이 이루어지고 있었고 매우 높은 서사書寫문화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이렇게 수준 높은 사회는 매우 발달한 국가 단계여야 한다.
따라서 가야 지역은 가야가 건국되기 훨씬 전 고조선 말기인 서기전 1세기 무렵에 이미 발달한 국가 단계의 사회에 진입해 있었고, 이런 수준 높은 사회는 고조선이 붕괴된 뒤 한韓시대로 이어졌으며 이를 이어 가야가 건국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가야가 건국되던 시기에 그 지역은 발달한 국가사회 단계에 이르고 있었을 것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이 글은 윤내현 지음, '한국 열국사 연구(만권당, 2016)'에 실린 글을 발췌하여 옮긴 것이다.
2020. 4. 18 새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