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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핀과 스테이시의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 5부 근대 초 유럽 - 15장 절대주의와 제국(1660~1789) 6: 상업과 소비

새샘 2025. 2. 24. 17:44

1600년 무렵의 유럽 인구 증가(출처-출처자료1)

 

러시아 Russia·프로이센 Prussia·오스트리아 Austria의 군사력 증강에도 불구하고 유럽에서의 세력 균형은 18세기 동안 꾸준히 서쪽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특히 북대서양의 경제는 유럽의 어느 지역보다도 훨씬 더 빠르게 성장하고 있었다.

그 결과 프랑스 France와 영국 England은 유럽뿐만 아니라 더욱 넓어진 세계에서 압도적으로 우세한 세력이 되었다.

 

 

○18세기 유럽의 경제 성장

 

북서부 유럽에서의 급속한 경제 성장과 인구 증가의 요인은 복합적이며, 역사가들 사이에서 계속 논란 되고 있다.

영국과 홀란드 Holland에서는 새롭고 한층 더 집약적인 농업 체계가 발달해 이전보다 에이커 acre(1 에이커는 약 4,047 제곱미터) 당 훨씬 더 많은 식량을 생산하고 있었다.

이 새로운 농업 방식은 운송 체계의 개선과 결합해 기근의 발생 빈도를 훨씬 줄이고 사람들에게 보다 많은 음식을 제공했다.

새로운 작물, 특히 옥수수와 감자(둘 다 아메리카 America 대륙에서 유럽 Europe으로 건너왔다)는 늘어나는 유럽 인구를 먹일 수 있는 식량 공급의 증대에 기여했다.

그러나 기근이 덜 발생하고 그다지 광범위하지 않았지만 전염병은 계속해서 유럽인의 절반을 20세가 되기도 전에 사망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여기에서도 약간의 진전이 이루어졌다.

특히 페스트 pest(흑사병)에 대해 어느 정도의 면역(아마도 유전적인 돌연변이의 결과로)이 유럽인 사이에서 나타나기 시작하자 페스트는 주요 사망 원인에서 제외되었다.

또한 더 나은 식사와 향상된 위생 시설은 장티푸스, 콜레라 cholera, 천연두, 홍역 같은 사망 요인의 감염률을 낮추는데 어느 정도 역할을 했을 것이다.

 

또한 북서 유럽은 점차 도시화되어가고 있었다.

유럽 전역에 걸쳐 도시 거주민의 숫자는 1600년부터 1800년 사이에는 눈에 띄개 변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첫 번째로 도시가 점차 북부와 서부 유럽에 집중되는 변화가 나타났고, 두 번째로 매우 큰 도시들이 급속하게 성장하는 변화가 나타났다.

무역과 통상의 유형이 이러한 변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독일 Germany의 함부르크 Hamburg, 영국의 리버풀 Liverpool, 프랑스의 툴롱 Toulon, 에스파냐 España의 카디스 Cádiz 같은 도시들은 1600년과 1750년 사이에 약 250퍼센트 정도 성장했으며, 근대 초 국제적 상업의 중추였던 홀랜드의 암스테르담 Amsterdam의 인구는 1530년 3만 명에서 1630년 11만 5,000명으로 그리고 1800년 무렵에는 20만 명으로 증가했다.

지중해의 번잡한 항구인 나폴리 Napoli(영어 Naples)의 인구는 1600년 30만 명에서 18세기 말에는 거의 50만 명에 달했다.

그러나 층 더 경이로운 인구 증가는 유럽의 행정 수도들에서 일어났다.

런던 London의 인구는 1700년 67만 4,000명에서 한 세기 뒤에는 86만 명으로 증가했으며, 파리 Paris의 인구는 1600년 18만 명에서 1800년 50만 명 이상으로 늘었다.

베를린 Berlin의 인구는 1661년 6,500명에서 1721년 6만 명, 1783년 14만 명으로 급증했는데, 그중 약 6만 5,000명은 국가의 피고용인이거나 그 가족이었다.

 

이들 신흥 도시를 먹여 살리기 위해서는 식량 공급의 증가가 필요했지만, 북서 유럽의 증대되는 번영에는 농업보다 무역과 제조업의 발전이 한층 더 큰 기여를 했다.

더 나은 도로와 교량, 새로운 운하 등과 같은 운송의 개선에 자극받은 사업가들은 시골에서 직물 산업을 촉진시키기 시작했다.

그들은 농촌 노동자들에게 양모와 아마를 분배(이른바 '선대先貸')한 뒤 성과급제로 빗질하고 실을 잣고 천으로 짜서 옷을 만들어내도록 했다.

그런 다음 사업가들은 완성된 옷을 모아 이제 지방 도시에서 국제적 수출업자로 확대된 시장에 내다팔았다.

이러한 체제 즉 '원原 산업화(가내공업에 의한 생산체제)'는 농한기 동안 지방 거주민에게 반가운 고용을 제공해주었다.'

이를 관리하는 상인-사업가에게는 이 체제가 비용이 많이 드는 도시에서의 길드 guild에 의한 제한을 피할 수 있게 해주었고 자본 투자의 수준을 경감시켜주었기 때문에 전체적인 생산비를 줄여주었다.

도시의 의류 노동자들은 고통을 겪었지만, 원산업화 체제는 직물뿐만 아니라 철, 금속 가공, 심지어 장난감과 시계 제조 등에서 고용을 눈에 띄게 증대시켜주었으며 더 높은 수준의 산업 생산을 이끌었다.

 

농촌의 원산업화에도 불구하고 제조업 중심지로서의 도시의 역할은 18세기 내내 계속 성장했다.

북부 프랑스에서는 직물업에 고용된 몇백만 명의 남녀가 아미앵 Amiens, 릴 Lille, 랭스 Reims 같은 도시에서 일하면서 생활했다.

프로이센의 통치자들은 프랑스의 프로테스탄트 Protestant(개신교도)들이 견직물 제조업을 하기 위해 베를린으로 몰려들고 있다는 점을 이용해 베를린과 브레슬라우 Breslau(지금은 폴란드 Poland 브로츠와프 Wroclaw) 및 함부르크를 연결하는 운하를 건설하면서 그 도시를 제조업 중심지로 육성할 정책을 세웠다.

대부분의 도시 제조업은 소규모 작업장에서 이루어졌으며, 이들 작업장에서는 장인의 감독 아래 일하는 통상 5명에서 20명에 이르는 품팔이 일꾼이 고용되어 있었다.

하지만 몇천 명의 노동자가 동일한 제품을 생산할 수 있도록 소규모 작업장들이 한데 모이기 시작하여 단일한 제조업 지역을 형성하자 사업의 규모는 커지고 한층 더 전문화되어 갔다.

 

일부 업종에서는 여러 세기 동안 아무런 기술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다른 업종에서는 새로운 발명이 생산의 질뿐만 아니라 노동의 형태까지 변화시켰다.

직물 제조의 속도를 높이기 위한 단순한 장치인 편물 기계가 영국과 홀란드에서 그 모습을 드러냈다.

철사를 뽑아내는 신선기伸線機 wire drawing machine와 못 제조공이 철 봉강棒鋼(강철 덩어리나 조각을 압연하여 막대 모양으로 만든 제품)을 가늘고 긴 쇠막대로 만들 수 있게 해주는 절삭기切削機(금속 따위를 자르거나 깎는 기계)가 독일에서 영국으로 전파되었다.

캘리코 calico 면직(가로로 짠 올이 촘촘하고 색깔이 흰 무명베로서 시트나 옷 따위를 만드는 재료)에 색채 무늬를 직접 물들이는 기법이 아시아에서 수입되었고, 홀란드를 시작으로 여러 곳에서 한층 더 효율적인 신형 인쇄기가 등장했다.

네덜란드인 Dutch은 '낙타 camel'라고 부르는 기계를 발명했는데, 이 기계를 이용해 배의 선체를 물위로 끌어올릴 수 있어 수리하기가 쉬워졌다.

 

노동자들은 이런 기술 혁신을 쉽게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노동 절약형 기계는 사람들의 일자리를 빼앗기 때문이었다.

수공업자 특히 길드로 조직되어 있던 수공업자들은 본래 보수적이었으며, 자신의 권리뿐만 아니라 직종상의 비밀, 특 '비법'의 보호를 갈망했다.

따라서 각국 정부는 실업을 증가시키거나 다른 방식으로 불안을 조장할 가능성이 있을 경우 기계의 확산을 막기 위해 개입했다.

예를 들어 네덜란드와 일부 독일 지역 국가들은 '악마의 발명품'이라고 부르는 기계의 사용을 금지시켰다.

이 기계는 한꺼번에 16개 또는 그 이상의 리본을 짤 수 있는 리본 직조기였다.

하지만 각국은 자국의 강력한 상업 및 금융 지원 세력의 이해관계를 보호하기 위해 간섭하기도 했다.

영국과 프랑스는 자국의 직물업자와 인도 상품 수입업자를 대신해 얼마 동안 캘리코 면직 날염 기법을 불법화했다.

중상주의重商主義(상업을 중히 여기고, 보호 무역주의의 입장에서 수출 산업을 육성하여 무역 차액으로 자본을 축적) 이론 또한 기술 혁신을 방해했다.

예를 들어 파리와 리옹 Lyon에서는 모두 인디고 indigo(염색에 쓰이는 검푸른 물감) 염료의 사용을 금지시켰는데, 이는 이 염료가 해외에서 제조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경제적 기술 혁신을 향한 압력을 막아내기 어려웠다.

그 압력의 이면에는 상품에 대한 18세기의 그칠 줄 모르는 갈망이 있었기 때문이다.

 

 

○상품의 세계

 

18세기에 처음으로 소비재를 거래하는 대규모 시장이 유럽 특히 북서 유럽에서 등장했다.

주택은 특히 소읍에서 규모가 더 커졌으나, 놀랍게도 상대적으로 보통 사람들의 주택이 그때까지는 흔치 않았던 사치품으로 채워지기 시작했다.

그런 사치품으로는 설탕, 담배, 차, 커피 coffee, 초콜릿 chocolate, 신문, 책, 그림, 시계, 장난감, 도자기, 유리제품, 백랍, 은쟁반, 비누, 면도기, 가구(매트리스 mattress가 깔린 침대, 의자, 서랍장), 신발, 면직 의류, 여분의 옷가지 등이 있었다.

이런 상품에 대한 수요는 항상 공급을 초과했으며, 이는 이들 품목의 가격을 18세기 내내 식료품 가격보다 빠르게 상승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이들 상품에 대한 수요는 여전히 증가했다.

물론 그러한 상품의 구입은 즐거움을 주기도 했지만, 이들 상품은 각 가정이 자신의 잉여 현금을 투자할 수 있는 교환가치의 저장고이기도 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만약 현금이 필요한 어려운 시기에 그것들을 전당잡힐 수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18세기의 폭발적인 소비 경제는 모든 종류의 제조 상품에 대한 수요를 자극했다.

하지만 그것은 서비스의 공급 또한 촉진시켰다.

18세기 영국에서 서비스 부문은 농업 및 제조업 분야를 능가해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경제 부문이었다.

거의 모든 유럽 도시에서 18세기는 소규모 상점주의 전성기였다

사람들은 조리된 식품과 기성복(개인적으로 재단한 옷에 반대되는 것)을 더 많이 구입햇다.

광고는 사업에서 중요한 부분이 되었다.
광고는 새로운 상품에 대한 수요를 창출하고 변화하는 패션 fashion에 대한 대중의 기호를 형성했다.

심지어 정치적 충성조차 사람들이 좋아하는 통치자나 단체를 기념하는 받침 접시나 유리잔을 구입하는 것도 소비를 통해 표현될 수 있었다.

 

이러한 모든 발전의 결과는 유례없이 한층 더 복합적이고, 한결 더 특화되며, 좀 더 통합된, 더욱더 상업화된 유렵 경제였다.

 

※출처
1. 주디스 코핀 Judith G. Coffin·로버트 스테이시 Robert C. Stacey 지음, 손세호 옮김,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하): 근대 유럽에서 지구화에 이르기까지, Western Civilizations 16th ed., 소나무,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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