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과 그림

신사임당 "가지와 방아깨비"

새샘 2025. 5. 4. 22:05

"신사임당은 조선을 빛낸 화가"

 

신사임당, 가지와 방아깨비, 16세기, 종이에 채색, 34x28.3cm, 국립중앙박물관(출처-출처자료1)

 

필자의 그림에 대한 글을 읽은 한 후배의 전화를 받았다.

"언니야, 동양화 작품도 좋지만 뭔가 색채가 강렬하고 쌈박한 현대 작품을 다루는 것은 어때? 추상화나 서양화 작품 말이다."

이 뜻밖의 제안에 필자는 이렇게 말했다.

"강렬한 작품도 좋지만 눈의 띄지 않아도 두고두고 보는 그림이 진(거짓이 없이 참된 것)일 수 있어. 우리의 전통 그림이 바로 그렇거든."

그리고 한마디 덧붙였다.

"미술 전공자는 좀 더 화끈한 그림을 바라겠지만 일반인들은 우리 전통 그림은 접하기가 쉽지 않잖아. 그래서 누군가가 우리 옛 그림 이야기를 한다면, 전통 미술을 감상하는 절호의 기회가 되지 않을까?"

물론 서양화나 추상화를 다루지 않겠다는 뜻은 아니다.

기왕이면, 이런 자리가 우리 옛 그림을 가까이하는 의미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해서다.

 

중국 청대淸代 화가이자 화론가인 석도石濤(1641?~1707?)는 "군자는 오직 옛것을 빌려 지금을 열 뿐"이라고 했는데, 이는 앞 시대 사람들이 남겨놓은 수많은 회화의 법칙을 깊이 받아들여 새로운 것을 창조하기 위한 발판으로 삼아야 한다는 뜻이다.

그런 뜻에서 조선시대의 여걸 신사임당師任堂(1504~1551) <가지와 방아깨비>는 '초충도草蟲圖"(풀과 풀벌레를 그린 그림)의 주요 작품으로 새겨볼 만하다.

소소한 일상에서 피워낸 아주 평범한 야생화 같은 그림이다.

 

화가는 늘 '무엇을 그릴 것인가'를 고민한다.

거창하고 화려한 것만 선호하지 않는다.

가까이 접하는 대상에서 소재를 선택한다.

평범한 소재는 화가의 손끝에서 특별한 생명체로 거듭난다.

티끌 속에서 우주를 보듯이 평범조차 비범하게 대접하는 것이 화가의 저력이다.

 

신사임당을 주인공으로 한 TV드라마 <사임당, 빛의 일기>(2017. 1. 26~5. 4)가 방영되어 화제를 모은 바 있다.

주로 위대한 남성의 일대기를 드라마로 만들거나 영화로 다루는 경우가 많았는데, 여성의 일대기를 다룬 것은 극히 드물었다.

그러하기에 제작 초기부터 스포트라이트 spotlight(주목注目)을 받았다.

'현모양처賢母良妻의 아이콘 icon(상징象徵)'이자 여성 화가로 산 신사임당의 일대기가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 지 기대를 갖게 했다.

 

신사임당은 유학자 율곡栗谷 이이李珥(1536~1584)의 어머니로 유명하다.

덕망 높은 어머니였고, 효성이 깊은 자식이었으며, 훌륭한 아내였다.

오만원권 지폐의 주인공 자리를 차지할 만큼 유명하다.

그녀를 지칭하는 수많은 수식어 가운데 개인으로서는 조선시대를 빛낸 화가가 단연 톱 top(으뜸)이다.

그녀는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를 그린 현동자玄洞子 안견安堅(?~?)의 산수화를 교본으로 그림을 익혔으며, 꽃이나 곤충, 풀 따위를 그림의 소재로 삼은 '초충草蟲'들의 친구였다.

초충은 인물화나 산수화의 배경에 등장하는 장식품의 일종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녀는 초충을 그림의 어엿한 주연으로 등극시켰다.

 

신사임당은 '초충도'를 비롯해 산수화 포도, 사군자, 서예 등 다양한 작품을 남겼지만 진위眞僞 여부에 대한 견해는 여전히 분분하다.

'초충도'는 흔히 여성들의 공간인 후원의 뒷마당에서 자라는 채소나 가지, 수박, 꽃 등과 곤충이나 벌, 나비 등이 어울려 놀고 있는 소소小小한(작고 대수롭지 않은) 풍경 그림이다.

산뜻한 이미지(심상心象/心像: 감각에 의하여 획득한 현상이 마음속에서 재생된 것)를 여성 특유의 시선으로 포착한 만큼 그림이 섬세하고 감성적이다.

 

<가지와 방아깨비>는 '초충도' 8폭 병풍 가운데 한 폭이다.

화면의 가지 줄기에는 자식들처럼 보랏빛 가지 열매 두 개가 매달려 있다.

가지 밑에서는 방아깨비가 어슬렁거리며 먹이를 찾고 있다.

두 마리의 개미도 일사불란一絲不亂하게(한 오리 실도 엉키지 아니함이란 뜻으로, 질서가 정연하여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게) 움직인다.

가지 주변에는 영역을 넓히는 쇠뜨기와 붉은 민들레꽃이 낙관처럼 피어 있다.

공중에는 한 쌍의 벌이 날고, 나비는 가지 쪽으로 향하는 중이다.

긴박하게 돌아가는 삶의 한 순간을 보는 듯하다.

 

신사임당의 '초충도'는 간결한 구도와 섬세한 기법으로 우리의 정서를 맑게 해준다.

짙은 보랏빛 가지와 붉은 민들레꽃과 나비는 식물의 건강한 생태계를 암시한다.

사실적으로 묘사한 식물과 곤충은 식물도감의 한 장면을 연상케 한다.

예전에는 흔하게 볼 수 있었던 소재였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우리는 태어나서 누군가의 자식, 연인, 부부, 부모로 살다가 생을 마감할 때는 업적에 따라 기억된다.

신사임당은 흔히 아이의 어머니로 부각되지만 누구의 그 '무엇'이 아닌 당당하게 자신의 예술혼을 불태운 화가였다.

그녀의 위대한 점은 지아비나 자식의 그늘에 머물지 않고, 한 명의 화가로서 눈부신 삶을 살았다는 사실이다.

 

신사임당의 뒤를 잇는 아득한 후배 화가로서, 그녀가 자신의 몫을 다했듯이 필자 또한 내 몫의 작업을 하고 있다.

일상에서 아름다움을 찾은 그녀는 영원한 빛이자 위로다.

작업이 풀리지 않을 때, 먼저 산 선배의 그림과 삶을 더 유심히 보는 이유다.

 

※출처

1. 김남희 지음, '옛 그림에 기대다', 2019. 계명대학교 출판부

2. 구글 관련 자료

 

2025. 5. 4 새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