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과 그림

석창 홍세섭 "유압도"

새샘 2025. 5. 10. 13:57

"다정한 오리 한 쌍, 한반도의 봄을 열다"

 

홍세섭, 유압도, 비단에 수묵, 119.5x47.8cm, 국립중앙박물관(출처-출처자료)

 

봄은 노란 색 선이 그어진 계절의 출발선이다.

그 출발선에서 개나리를 비롯하여 만물이 몸을 풀기 시작한다.

거실 안쪽까지 비치던 우리집 햇살도 살이 포동포동 올랐다.

베란다(쪽마루) veranda에 즐비한 꽃들은 달릴 채비를 마쳤다.

앙증맞은 꽃망울들이 신호대기 중이다.

한란寒蘭을 첫 주자로 꽃들은 저마다 향기를 피우며 사계절을 이어갈 것이다.

 

계절의 온기는 곳곳에서 기지개를 켠다.

얼었던 물이 풀린 모양이다.

싱그러운 물살을 가르는 오리 한 쌍이 사랑스럽다.

석창石窓 홍세섭洪世燮(1832~1884)의 <유압도遊鴨圖>다.

그림 속에는 봄을 알리는 오리의 설렘이 가득하다.

파릇한 물풀(수초水草) 사이로 오리가 미끄러지듯 내려온다.

바로 봄의 전령사들이다.

 

아침의 산 공기는 싸하다.

새가 부리로 나무를 쪼는지, 맑은 소리가 울려 퍼진다.

햇살 사이로 묵은 이파리가 흔들린다.

가지 끝에는 새 생명이 맺혀 있다.

흙도 봄맞이에 가세한다.

자두(오얏) 과수원에는 거름 포대가 놓여 있고, 가지치기한 나무들이 단정하다.

 

홍세섭은 이색적인 화풍의 맥을 이어받은 조선시대의 문인화가다.

여기서 이색화풍異色畵風이란 화가들이 독특한 개성과 독창력을 발휘한 그림 스타일을 일컫는다.

그중 홍세섭이 단연 돋보인다.

그는 공조판서에 오른 아버지 덕분에 무난하게 벼슬길을 걸으며, 자신이 좋아하는 그림에 마음껏 집중할 수 있었다.

서른다섯에 진사가 되었고, 마흔다섯에 정시로 병과에 급제하여 승정원의 정삼품에까지 올랐다.

승지에 제수된 이듬해에 쉰두 살의 일기로 생을 마쳤다.

화가로서는 기량을 제대로 펼쳐보지도 못하고 세상을 떠난 셈이다.

그래서 현존하는 작품이 많지 않다.

 

19세기 중엽, 조선 사회는 안으로는 활발한 상업 활돌을 통해 신분 상승과 부를 축적한 중인들의 세력이 성장하고 있었고, 밖으로는 일본과 서구열강이 밀려오는 난세였다.

화단에는 남종문인화가 대세를 이루었지만 새로운 화풍의 현대적 감각을 지닌 화가들의 활약으로 이색화풍이 인기를 누렸다.

홍세섭은 주로 시대정신을 반영한 영모화翎毛畫(새나 짐승을 그린 그림)에 몰두했다.

영모절지화翎毛折枝畫(새나 짐승을 곁들여서 꽃이 핀 가지의 일부를 그린 그림)에는 오리, 백로, 따오기, 기러기, 까치 등을 갈대, 수초와 함께 그렸다.

작품의 화면 구성이 특이하고 대범한 필치가 특징이다.

새로운 투시법과 자유로운 필법 구사로 근대적인 감각이 물씬 풍긴다.

 

<유압도>에는 세로로 긴 화면에 오리 두 마리가 화면을 압도한다.

얼었던 물이 풀리자 신이 안 오리는 물살을 헤치며 정겹게 놀고 있다.

수채화처럼 먹의 농담이 맑고 투명하다.

먹 맛이 순박하여 물 밑의 세계까지 흔히 들여다보이는 것 같다.

곳곳에 물풀을 더해서 변화와 긴장감을 준다.

앞의 오리는 뒤의 오리에게 빨리 따라오라고 채근하는 중이다.

 

다정스럽게도 오리는 한 쌍이다.

화가의 애틋한 정을 볼 수 있다.

앞의 오리는 고개를 돌려 뒤돌아보고 있다.

수묵으로 강하게 묘사하여 진중하고 화려하다.

그림의 주인공인 모양이다.

뒤의 오리는 날렵하다.

담묵으로 오리의 특징만 묘사하여 상쾌함을 살렸다.

발갈퀴까지 그려서 오리의 움직임을 생동감 있게 표현했다.

두 마리의 표정에 장난기가 넘친다.

애정 어린 눈빛을 주고받는 모습이 갓 결혼한 신혼부부 같다.

 

수묵담채水墨淡彩(먹색을 기본으로 하고 그 외 여러 가지 채색을 보조적으로 써서 그림)의 자연스러운 효과는 홍세섭만의 솜씨다.

물결이 리드미컬하게 살아 있다.

오리는 사실적으로 표현하고, 배경은 대범하게 처리했다.

화면 곳곳에 태점笞點(바위나 흙, 나무에 자란 이끼나 작은 식물을 표현하기 위해 찍은 점)을 찍어서 그림의 단조로움을 없앴다.

오리의 깃털은 독필법禿筆法[끝이 거의 다 닳아서 없어진 몽당붓(독필)을 사용하여 그리는 법]을 사용하여 특징적인 세부를 간략하게 묘사했다.

독필법은 이색화풍의 화가들이 즐겨 사용한 필법이다.

그림은 오리를 중심으로, 부감법 俯瞰法(위에서 밑으로 내려다본 모습처럼 그리는 화법)으로 잡았다.

마치 유유히 노니는 오리 한 쌍을 '몰카'(몰래카메라)로 포착한 것 같다.

오리 두 마리의 연애 장면을 훔쳐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홍세섭은 많은 작품을 남기지 않았지만 몇몇 작품만으로도 충분히 개성을 확인할 수 있다.

그는 신선한 화풍으로 근대화를 이어준 중요한 화가임이 틀림없다.

 

※출처

1. 김남희 지음, '옛 그림에 기대다', 2019. 계명대학교 출판부

2. 구글 관련 자료

 

2025. 5. 10 새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