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과 그림

청룡사 감로탱화

새샘 2025. 6. 25. 18:38

"붉은 아귀의 깊은 슬픔"

 

작자 모름, 청룡사 감로탱화, 1962, 삼베에 채색, 204.0x236.5cm, 경기 안성 청룡사(출처-출처자료1)

 

고모에게서 전화가 왔다.

선산을 단장하는데, 조상을 기리는 시를 써 달란다.

필자는 화가이지 시인이 아니라고 하니, 신문에 칼럼(특별 기고) column도 쓰는데 그런 것쯤은 '쉬운 일' 아니냐고 한다.

막무가내였다.

윤달에 산소를 정비해야 하니 촉박하단다.

뭔가 거창한 일이 진행되는 모양이다.

 

7월은 음력으로 윤 5월이 있어, 한 달을 덤으로 받은 셈이다.

공짜로 받은 시간이기에, 인간은 신의 경계를 넘어설 수 있는 가상의 시간으로 의미를 부여했다.

일종의 인간과 신의 '야자 타임'(반말하면서 맞먹는 시간) 같은 것이다.

이 기회를 놓칠세라 인간은 신의 영역을 거스르지 않고 죽음과 관련된 이장을 하거나 수의를 마련한다.

 

무언가를 기억하려고 할 때, 인간은 과거 속으로 들어간다.

조상의 묘를 꾸미거나 비석을 세우는 일이 대표적이다.

죽음 이후의 세계는 조상이 음덕에서 베풀어진다는 믿음에서다.

현세의 자손 또한 조상의 가피加被(부처나 보살이 자비를 베풀어 중생에게 힘을 줌)를 입기 위함이다.

 

윤달에는 사찰에서도 분주하다.

이름 없는 고혼을 위해 수륙굿(수륙재水陸齋: 물과 육지의 홀로 떠도는 귀신들과 아귀餓鬼에게 공양하는 재)를 지내주거나 조상을 천도하는 천도재薦度齋(죽은 사람의 넋이 정토나 천상에 나도록 기원하는 불교 의식)를 지낸다.

현실에서는 생전 예수재豫修齋(죽어서 좋은 곳으로 가기 위하여 생전에 부처에게 올리는 재)를 지내 여생을 무탈하게 보내기를 기원한다.

사찰에서 천도재를 거행할 때 사용하는 탱화가 있다.

바로 조선시대에 제작된 '감로탱화甘露幀畫'다.

감로탱화는 후손들이 망자亡者(망인亡仁: 생명이 끊어진 죽은 사람)를 극락세계로 천도하고 나의 복덕福德(선행의 과보果報로 받는 복스러운 공덕)까지 기원하는 장면을 그린 불교 회화다.

<청룡사靑龍寺 감로탱화>는 살벌한 죽음과 극락의 세계로 인도되는 인간의 삶에 대한 의지를 담은 숙연한 그림이다.

 

인간은 죽음에서 겸허를 배운다.

죽음은 인간이 극복해야 할 대상이었고, 인간이 선택한 것은 영혼불멸의 세계를 이어주는 종교였다.

그리고 종교를 빌려 죽음의 세계를 예술로 승화시켰다.

예로부터 종교미술은 인간의 도덕성을 일깨워주는 역할을 해왔다.

나라를 다스리고 백성을 하나로 이어주는 원천이 되었다.

끔찍한 지옥의 모습이나 천상의 세계를 보여주며, 인간이 올바른 삶을 살도록 이끌어주는데 한몫했다.

그런 뜻에서 감로탱화는 거대한 삶의 교본이었다.

 

조선시대 불교는 숭유억불 정책으로 겨우 명맥을 유지했다.

당시 지배이념이었던 유교는 천재지변에 대한 구원의 손길이나 인간의 무병장수와 같은 사후명복을 비는 행위 따위를 해줄 수 없었다.

감로탱화가 16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400여 년 동안 꾸준하게 조성되었던 것은 서민을 위한 민간 신앙적 차원에서였다.

 

감로탱화는 지옥地獄·아귀餓鬼·축생畜生·아수라阿修羅·인간人間·천天 따위의 육도중생六道衆生[중생은 스스로 지은 업에 따라 생사를 반복하는 지옥도·아귀도·축생도의 삼악도三惡道와 인간도·아수라도·천도의 삼선도三善道를 윤회]이 등장한다.

화면은 3단으로 나누어, 아랫단에는 과거세계인 지옥 장면이 배치되고, 가운데단에는 현실세계인 상주喪主와 설재자設齋者(재를 베푸는 사람)가 등장하며, 윗단에는 불·보살이 있는 미래세계를 구성하는 것이 특징이다.

 

감로탱화는 한 편의 영화처럼 펼쳐진다.

예컨대 둥둥 북소리가 울려퍼지면 카메라는 아귀를 클로즈업 close-up(돋찍기)한다.

몰골이 이상한 아귀는 항하恒河(갠지스 강 Ganges)의 모래알이 흩어져 있는 물결무늬 속에 홀로 앉아 있다.

승려들의 북장단에 맞춰 바라哱囉춤(마음을 깨끗이 하고, 도를 닦는 장소를 깨끗이 한다는 뜻으로 추는 불교 의식 무용) 사위는 이어지고, 상주는 망자를 위해서 최선의 공덕을 표시한다.

지옥세계에는 수많은 고통스러운 죽음이 등장하고, 주인공이 아귀는 그릇을 들고 음식이 성대하게 차려진 재단 중앙을 차지한다.

부초의 '감로甘露'(도리천에 있다는 달콤하고 신령스러운 액체로서, 한 방울만 먹어도 온갖 번뇌와 고통이 사라지며 죽지 않고 오래 살 수 있다고 함)를 받기 위해서다.

이 순간, 아귀에게는 절체절명의 시간이다.

감로를 받지 못하면 반복되는 윤회를 거쳐 무한의 선업을 쌓아야 한다.

아귀가 감로를 받도록 애타게 기다리는 인로왕보살引路王菩薩이 있다.

이 보살은 아귀를 천도하기 위해서 늘 대기하고 있다.

영화는 절정을 향해 달려간다.

주인공인 망자를 중심으로 상주, 설치된 재단, 그리고 의식에 참석한 승려들은 그림이라는 스크린에 투여되어 일사불란하게 움직인다.

 

<청룡사 감로탱화>에서 가장 주목받는 것은 화면 아랫단의 한가운데를 차지하고 있는 아귀다.

보통 악행을 저지른 이를 가리켜 '아귀 같은 놈'이라고 한다.

아귀餓鬼는 '죽은 자'를 뜻하는 '귀신鬼神'을 뜻한다.

'귀鬼' 자에 굶주림을 뜻하는 '아餓' 자가 덧붙여진 말이다.

 

아귀는 추하고 말랐으며, 입에서 불을 내뿜고 목은 바늘처럼 가늘어 음식을 삼키지 못한다.

머리카락은 흐트러지고 손톱과 어금니가 길어 그 모습이 가히 공포감을 준다.

아귀는 나 자신이며, 조상이며, 구원받아야 할 대상이다.

 

아귀는 감로라는 매개체를 통해 윤회의 고리를 끊을 수 있다.

감로는 하늘이 영액靈液을 뜻하는 '단 이슬'이란 뜻이다.

천도재에서 감로는 굶주린 고혼의 배고픔과 갈증 해소는 물론 극락에 태어날 수 있게 해주는 생명수가 된다.

 

감로탱화는 인생의 전 과정을 담고 있는 한 편의 지침서다.

정신을 번쩍 차리게 만드는 것은 붉은 아귀의 울부짖음이다.

밥그릇은 업경대業鏡臺(명경대明鏡臺: 저승의 입구에 있다는 거울로서, 지나는 사람의 생전의 행실을 그대로 비춘다고 함)가 되어 감로를 기다릴 것이다.

 

고모의 간곡한 부탁에 정말 어처구니없이 글을 써 주고 말았다.

글을 받은 고모는 흡족해했다.

이렇게 잘 쓰는데 왜 거절했냐고.

고모의 과찬은 필자를 부끄럽게 했지만 윤달이어서 가능했다.

붉은 아귀의 슬픔을 위해······.

 

※출처

1. 김남희 지음, '옛 그림에 기대다', 2019. 계명대학교 출판부

2. 구글 관련 자료

 

2025. 6. 25 새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