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시대의 교역과 금관의 발달
○일본까지 건너간 초원의 기술
2010년, 경주慶州 탑동塔洞에서 나무로 된 관이 들어 있는 '나무널무덤(목관토광묘木棺土壙墓)'[구덩이를 파고 시체를 직접 넣거나 나무널(목관木棺)이나 나무덧널(목곽木槨)에 시체를 넣고 그 위에 흙을 쌓아 올린 무덤]이 발견되었다.
이 유적에서는 이전의 신라시대 유적에서 발견된 것과는 다른 특이한 유물이 많이 출토되었다.
특히 진한辰韓(삼한 가운데 경상북도를 중심으로 한 동북부 지역에 있던 12국으로 이루어진 고대국가)에서 신라로 건너온 사람들의 이야기는 그때까지 기록으로만 전해졌는데 이 유적의 발굴로 그 흔적이 증명되었다.
삼국시대를 연구하는 데에 가장 중요한 기록으로 평가받는 중국의 고대 역사책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남아 있다.
진한 지역, 지금의 경상남도에 살던 노인들이 말하길 자기들은 원래 중국 북방의 만리장성 부근에서 살았는데 노역을 너무 심하게 시키는 바람에 도망쳐 왔다는 것이다.
당시 경주와 만리장성은 거리가 상당히 멀었으므로 몇몇 사학자는 이 기록의 진위를 의심하기도 했다.
그런데 경주 탑동 나무널무덤에서 서기전 2세기에서 서기 1세기 무렵의 중국 북방의 사카 Saka 문화 유적이 발견된 것이다.
경주 탑동의 나무널무덤에서 발견된 유적 가운데 가장 독특한 것은 동물 모양 장신구였다.
위 사진에서 맨 위는 꼬리를 말고 있는 호랑이를 표현한 허리띠 장식이다.
가운데 있는 것은 실크로드가 시작되는 지점인 중국 간쑤성(감숙성甘肃省/甘肅省)에서 발견된 동물 모양 장식이다.
두 곳은 비행기로도 세 시간 가까이 걸리는 먼 지역이다.
그런데도 두 곳의 유물 모양이 놀랄 만큼 비슷하다.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형태나 조각 기법에서 닮은 점이 너무나 많아 사학자들은 초원문화가 확산되던 시기에 신라시대까지 퍼진 것으로 추측했다.
신라의 금관은 서기 4~5세기에 등장하지만, 그 이전에도 초원 지역과의 접점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위 사진에서 가장 아래에 있는 유물은 곰이 웅크린 모양을 표현한 단추다.
단추 뒤쪽에는 끈과 묶는 고리를 만들었다.
이러한 단추 역시 몽골에서부터 시작해 중국 북방과 초원 민족의 거주지를 비롯하여 다양한 곳에서 발견되었다.
몽골의 네이멍구(내몽골內蒙古) 유적에서 발견된 유물과 우리나라 대구에서 발견된 유물 역시 형태가 비슷하다.
유라시아와 중국, 우리나라의 금속 세공 기술의 유사성이 이 유물들 덕분에 확인된 것이다.
유라시아 초원 지대와 한반도는 거리상으로 무척 먼 것 같지만 그때로 돌아가 보면 현대인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심리적으로 멀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어느 시대나 이국적인 스타일은 늘 선망의 대상이었다.
쉼게 접하기 어렵고 값비싸고 새로운 물건을 처음 보면 누구나 끌리게 된다.
이러한 물건을 소유하려면 경제적 능력이 뛰어나야 했다.
따라서 국가가 성장하면 자동으로 고가품이 수입되거나 고급 기술이 유입되었다.
뛰어난 기술로 정교한 장신구나 도구를 만들었던 사람들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한반도로 유입된 기술은 바다를 건너서까지 널리 퍼졌다.
위 그림의 거푸집 두 개 가운데 위에 있는 것은 북방의 초원 지역에서 발견된 거푸집이다.
그리고 아래는 2011년 일본 오사카(대판大阪)의 가마고텐이라는 유적지에서 발견된 거푸집으로 약 2,400년 전의 것으로 추정한다.
만약 거푸집이 아니라 청동검이 발견되었다면 이것을 서로 주고받은 교역품이라고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
완성된 물건을 주고받는 것은 그 시대에도 흔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교역품이 아니라 청동기를 만드는 거푸집이 서로 멀리 떨어진 지역에서 발견되었다는 것은 드문 일이다.
이것은 청동기 장인들이 한반도를 거쳐 일본으로 건너갔다는 사실을 짐작하게 한다.
역사에 기록되지 않았던 많은 사람들이 산을 넘고 바다를 건너 지역과 지역을 이동하며 발전된 문화도 함께 퍼지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초원의 기술자들이 남북으로 이동한 이유는 단순히 기술을 전파하기 위해서였을까?
이는 당시 혼란스럽던 동아시아의 정세와도 관련되어 있다.
더 큰 원인은 중국의 만리장성 건축이었다.
진나라 시황제는 북방 유목민족인 흉노의 침공을 막기 위해 만리장성을 쌓아 올렸다.
초원을 옮겨 다니며 사는 유목민에게 땅이란 나와 네 것의 구분이 없는 공유 재산과 같은 것이었다,
그런데 만리장성이 생기면서 땅의 소유권이 생겨났고, 농사를 짓고 가축을 키울 땅을 차지하기 위한 싸움이 시작되었다.
그 와중에 밀려난 사람들이 사방으로 흩어지면서 자연스럽게 문화와 기술도 옮겨간 것이다.
○신라의 외국인
4~5세기의 신라는 북방계 문화의 전성기라고 할 정도로 새로운 문화가 많이 유입되었다.
그렇지만 외국인들이 건국 초기부터 서라벌에 많이 거주한 것은 아니었다.
초창기에는 마치 큰 욕조에 담긴 물에 잉크 한두 방울을 떨어뜨린 정도로 그들이 지역 사회에 미친 영향은 미미했다.
그러다 제17대 내물왕이 나라를 통치하면서 전환점을 맞이했다.
외국인이 대거 유입된 시점은 신라가 거대한 국가로 폭발적인 성장을 한 시기와도 맞물렸다.
신라는 그전까지 박朴 씨, 석昔 씨, 김金 씨 성을 가진 세 가문이 교대로 왕좌를 차지했는데, 내물왕 시대부터는 김 씨가 왕을 독점 세습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신라에는 거대한 고분古墳이 만들어졌다.
이전에는 없었던 이런 형식의 고분에는 서역이나 북방, 유라시아 등지의 외국에서 수입해온 명품이 가득히 들어찼다.
이 때문에 고고학계에서는 지난 100년 동안 주인이 흉노족이 아닐까 하는 의견이 분분했다.
무덤을 발굴한 학자들은 유물로 미루어 고분의 주인이 신라인이 아니라고 생각했고, 당시 고분을 만든 사람들 역시 스스로를 '흉노匈奴의 후손'이라고 말하고 다녔다는 기록도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최근, 그들은 흉노의 자손이 아니라 단지 그들을 흉내내는 사람들이었다는 데 의견이 모아졌다.
왜 귀족 계급의 신라인들은 왜 자신들을 흉노의 후손이라고 말했을까?
그 이유는 자신의 정체성을 북방 민족에 둠으로써 일종의 선민의식選民意識(한 사회에서 남달리 특별한 혜택을 받고 잘사는 소수의 사람들이 가지는 우월감)을 표출한 것이다.
그들은 다른 사람과 구별되는 특별한 스토리텔링(이야기하기) storytelling을 만들고 지위가 높은 가문 출신이라는 사실을 강조했다.
특히 진귀하고 새로운 유물을 고분에 넣으면서 경제력을 과시했고, 대대로 전해지는 고유한 문화의 전수자로써 귀하게 대접받아야 한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이즈음 신라는 돌을 쌓은 거대한 무덤도 만들었다.
이런 고분은 카자흐스탄 Kazakhstan에 있었던 돌무지덧널무덤(적석목곽분積石木槨墳: 지하에 구덩이를 파거나 지상에 나무덧널을 짜 놓고 사람 머리 크기의 강자갈을 덮은 후 다시 그 위에 점토 따위의 흙을 입혀 다진 신라 특유의 무덤)과 상당히 비슷하다.
위 사진의 무덤에서 위는 알타이 Altai 지역의 무덤이고, 아래는 경주에 있는 신라의 황남대총皇南大塚이라는 왕릉이다.
초원 지역에서는 튀르크 Türk의 왕족까지 신라가 있었던 서기 5~7세기부터 무려 1천 년 동안 이런 무덤을 만들었다.
한마디로 돌무덤은 초원의 왕족을 대표하는 것이었다.
신라시대에는 특이하게 수도인 경주에 수많은 고분을 만들었다.
보통 다른 나라의 경우, 왕릉과 수도는 멀리 떨어져 있다.
그런데 경주에서는 눈만 돌리면 어느 곳에서든 언덕처럼 생긴 봉긋한 고분을 볼 수 있다.
거대한 고분을 만들려면 몇백 명이 몇십 년 동안 매일같이 일해야 한다.
그전에는 없던 큰 돌로 거대한 무덤을 쌓으면서 왕족은 백성과 구분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사람이라는 것을 보란 듯이 과시하게 된다.
그리고 그 거대한 무덤 안을 값비싸고 화려한 물건을 껴묻거리(부장품副葬品)로 가득 채움으로써 높은 지위를 한 번 더 강조하는 것이다.
신라 고분을 상징하는 대표 유물인 천마도天馬圖도 알타이 문화와 이어지는 또 하나의 증거다.
천마라는 상징은 북방 유목민들이 갖고 있던 풍습에서 유래했다.
북방 민족들은 사람이 죽으면 하늘로 올라갈 때 천마를 탄다고 믿었다.
천마도는 자작나무 껍질에 그린 그림으로서, 이 나무는 남한에서 찾아볼 수 없고, 대체로 추운 북쪽 지역에서만 자란다.
시베리아 Siberia 횡단 열차를 타고 가면서 끝없이 보이는 하얀색 나무가 바로 자작나무다.
유목민들은 이 나무를 베어 텐트도 짓고, 장작으로 쓰는 것은 물론 하얀 껍질을 벗겨 가방, 그릇, 공예품 따위의 다양한 생필품을 만들었다.
천마도를 만드는 재료로 사용된 큰 판의 자작나무는 북쪽 초원지대에서 벌목한 것을 수입해 왔을 가능성이 가장 크다.
신라에서 북방 민족이 만든 것과 닮은 유물이 발견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또 하나, 신라인들이 확실하게 북쪽에서 가져온 유물이 있는데, 바로 위 사진의 보물 제635호 경주 계림로鷄林路 보검寶劍이다.
이것은 대릉원을 따라 도로를 내는 공사를 하던 중 발견한 작은 고분인 계림로에서 출토되었다.
이 정도로 화려하고 정교한 전체 길이 36.8센티미터 최대 너비 9.05센티미터의 단검短劍은 유라시아를 통틀어 열 손가락 안에 꼽힐 정도로 최고급에 속한다.
카자흐스탄이나 러시아 Russia 학계에서도 신라시대에 이런 황금보검이 존재했었다는 것을 믿지 못할 정도다.
일반인이 수입했다고 하기에는 상당히 고가의 물건이기 때문에 왕국 차원에서 교환한 물건이라는 추측도 있었지만 발견된 고분이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 작았으므로 보검의 주인은 일반 무사라고 결론 내리게 되었다.
아마도 신라인이 지금의 카자흐스탄 지역에서 북방 지역의 군인으로 활동하면서 큰 공을 세우고 하사품으로 받아 오지 않았을까 막연하게 추측할 뿐이다.
이러한 검은 주로 카자흐스탄 북쪽에서 발견된다.
몇몇 신라인은 실제로 자신들이 북방 민족의 후예라고 믿으면서 북쪽 나라들과 활발하게 교류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살펴볼 교류의 흔적은 신라시대의 청년 조직인 화랑花郞이다.
화랑은 진흥왕 시절 젊은 소년 가운데 인재를 모집할 목적으로 만든 조직이다.
이들은 전쟁 때는 무사로 활동하고 평소에는 심신을 수양하며 다방면에서 활약했다.
앞서 북방 초원에서 거주했던 사람들은 거친 유목민의 삶을 살다 보니 수명이 길지 않다고 언급했다.
어떤 학자들은 신라시대의 화랑이 북방 초원 유목민 후예들의 소년병과 비슷한 군사 조직이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한편, 유목민 사회는 전쟁과 군사력을 중요시하는 문화이다 보니 스키타이 Scythai 시대에는 여성 무덤을 거의 만들지 않았고, 부부를 합장하는 문화도 없었다.
가끔 발견되는 여성의 무덤은 주로 점을 치는 샤먼 shaman이 주인이었다.
샤먼들 역시 전쟁에서 군사들이 잘 싸우도록 힘을 북돋는 역할을 했으므로 사후에 대접을 받는 것이다.
이런 경우를 제외하면 여성의 무덤은 거의 찾아볼 수 없어 비율로 따지면 남성 무덤의 10퍼센트도 채 되지 않는다.
얼마 전 시베리아 지역의 우코크고원 Ukok Plateau이라는 곳에서 합장묘가 발견되어 부부를 같이 묻은 게 아니냐는 설도 있었지만, DNA를 분석한 결과 둘 다 남자로 밝혀져 가설은 사실이 아님이 증명되었다.
신라가 시작된 서기전 1세기부터 흉노족은 유라시아를 통틀어 가장 발전한 민족이었다.
≪니벨룽(또는 니벨룽겐)의 노래 Das Nibelungenlied(The Song of the Nibelungs)≫의 모티프 motif(동기動機)가 된 헝가리인 Hungarians의 조상 훈족 Huns도 흉노족의 후예임을 자처했다.
신라 또한 흉노의 후예라고 주장했음이 밝혀졌다.
즉, 흉노는 그 당시 선진 문화, 선진국의 대명사였던 셈이다.
신라는 이러한 선진국의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겠다는 강력한 의지가 있었다.
또한 서기 전후로 중국 북방지역에 모습을 드러내던 사카인 Saka들은 이후에 한반도에도 나타났다.
조사하면 할수록 동쪽 변방의 끝에 떨어졌다고 생각한 한반도에서도 넓은 대륙과 교류한 흔적이 계속해서 발견되는 것이다.
※출처
1. 강인욱 지음, 우리의 기원-단일하든 다채롭든, 21세기 북스,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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