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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서울에서 발굴된 유적들 2: 석촌동 가옥잔구 유적, 암사동 유적, 석촌동 3·4호분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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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서울에서 발굴된 유적들 2: 석촌동 가옥잔구 유적, 암사동 유적, 석촌동 3·4호분

새샘 2021. 7. 5. 21:56

<1970년대 발굴된 서울 유적지 증 석촌동 유적과 암사동 유적(사진 출처-출처자료1)>

 

 

서울 석촌동 가옥잔구 유적

 

<서울 석촌동 가옥잔구 유적 발굴 모습(사진 출처-출처자료1)>

김원룡은 송파동 한강변에 지붕 서까래 같은 것이 꽂혀 있다는 말을 1970년 가을에 들었는데, 서울에 거주하고 있던 미국인 에디 R. Eddy와 넬슨 Nelson이 토기 파편을 줍기 위해 강변을 다니다 발견한 것이다.

이에 발굴자 김원룡은 1970년 10월 15일에 에디 그리고 동아일보 사진기자 박상진과 함께 예비조사를 하였는데, 인공이 가해진 것으로 울타리로 생각이 들었으며, 그 위치 일대가 백제시대 유물산포지 내지 포함지라 백제시대 것으로 생각하였다.

 

이후 발굴을 하지 못하고 있다가 1971년부터 이 지역이 잠실지구개발사업에 따라 매몰된다는 소식을 듣고 5월 2일에 급히 구제적 발굴을 실시하였는데, 김원룡 외에 국립박물관의 한병삼과 김종철이 참가하였다.

 

유적 위치는 행정구역상 석촌동에 속하며 현재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다.

단지 이 유적의 약간 상류에는 송파나루터가 있고, 더 올라가 약 3킬로미터 상류에는 풍납리토성이 있다고 하여 현재 풍납토성에서 잠실 방향으로 3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강변인 현 석촌동石村洞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유적은 1970년 가을 조사 때에는 수면에서부터 불과 20~30센티미터 정도밖에 안 되는 곳에 있었으나 발굴 때에는 잠실리 쪽에서부터 강을 매워 물이 빠져 수면이 많이 내려가 있었다.

처음 조사 때에는 정면의 폭 약 7~8미터 내에 두 군데서 서까래 같은 것이 일부 노출되어 있었고, 발굴 때에는 중심부라 생각되는 폭 3미터, 깊이 2미터의 구형矩形평면[직사각형 모양의 평면]을 드러냈다.

 

당초 서까래 또는 울타리라 생각한 목재들은 발굴을 해보니 헛간과 같은 지붕이었고, 지름 8~10센티미터, 깊이 2.7미터의 참나무를 마룻도리(마룻대)[용마루 밑에 서까래가 걸리게 된 도리('도리'는 서까래를 놓는 나무)]로 하고 거기에 굵은 가지를 잘라서 걸쳐 서까래를 하고 그 위에 나무껍질과 가는 가지들을 씌웠던 것으로 생각되는 나무껍질 일부가 관찰되었다.

 

발굴자는 발굴한 집의 연대를 청동기 후기인 서기전 4~서기전 1세기나 열국시대인 서기 1~3세기라고 추정하였다.

또한 발굴 전 서까래 일부분을 원자력연구소에 보내 서기 250년이란 연대를 얻었고, 발굴 후 국립박물관에서도 따로 한 부분을 보내어 역시 250년이란 연대를 얻었다.

이런 결과를 가지고 발굴자는 이 지붕 유적이 열국시대에 속하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보았다.

 

이 발굴은 많이 알려지지 않았고 소규모 발굴이지만, 1970년대 이후 본격적인 도시의 개발 과정에서 드러난 이 유적은 이후 서울의 발굴 방향을 보여주는 상징성이 강한 유적이라 할 수 있다.

 

 

서울 암사동 유적

 

<(위)1971년 암사동 1차 발굴조사단 모습과 (아래)1973년 암사동 2차 발굴조사 시굴 트렌치 test trench 설정 모습(사진 출처-출처자료1)>

암사동岩寺洞 유적1970년에 이르러 국립박물관에 의해 지속적으로 발굴조사가 이루어진다.

1971년에 제1차, 1973년에 제2차, 1974년에 제3차, 그리고 1975년에 제4차 등 총 4차에 걸쳐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다.
이런 조사 경향은 서울 지역에서 학술 목적을 위해 특정 지역에 대한 꾸준한 발굴을 시도하였다는 의미가 있으며, 이후 암사동 유적이 서울의 대표적인 유적으로 자리 잡은 것은 이런 초기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처음으로 국가 차원에서 진행된 암사동 유적에 대한 제1차 발굴조사국립중앙박물관에 의해 1971년 11월 12일부터 12월 2일까지 실시되었다.

그러나 정식 발굴보고서는 35년이 지난 2006년에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암사동 ≫으로 발간하였다.

 

제1차 조사에서는 총 8기의 움집터(수혈주거지竪穴住居地)[땅을 파고 내려가 벽체 없이 지붕만 씌운 건축물이 있던 터]가 확인되었으며, 모두 신석기시대에 해당하는 문화층에서 발견되었다.

집터(집자리)의 평면 형태는 네모와 원형으로, 네모 집터는 한 변의 길이가 5~7미터, 원형 집터는 지름 4미터 내외로 네모 형태의 집터가 훨씬 크다.

이들 집터는 네모와 원형 형태가 2~3개 서로 겹치는 상태로 발견되었는데, 그 선후 관계는 알 수 없다.

또한 네모 집터에서는 네 모퉁이에 기둥구멍이 1개씩 있지만 원형 집터에서는 기둥구멍을 찾을 수 없었다.

 

출토유물 중 토기는 대부분이 바닥이 뾰족하거나 둥근 포탄 모양이긴 하지만 일부는 밑이 납작한 납작바닥토기(평저平底토기)였다.

석기는 긁개와 찍개, 도끼 등의 뗀석기(타제打製석기)가 주류를 이루며, 어망추도 상당량 출토되었다.

그리고 갈돌과 갈판도 나왔다.

 

이후 1973년에 2차 발굴이 이루어졌다.

제2차 발굴조사는 1973년 12월 10일부터 19일까지 실시되었고, 발굴기관은 1차때와 같이 국립중앙박물관이었다.

2차 발굴보고서도 바로 발간되지 못하다가 35년이 지난 2007년에 ≪암사동 ≫가 발간되었다.

 

2차 발굴에서는 신석기시대 집터 1기만이 확인되었다.

집터 평면 형태는 원형이며 지름이 약 4.5미터로 보이나 정확한 크기는 알 수 없다.

주거지 가운데의 화덕자리는 네모 형태로 크기는 너비 50~63센티미터, 길이 60~75센티미터이다.

진흙이 섞인 모래 때문에 바닥에서 기둥구멍 흔적은 확인할 수 없었다.

출토유물로는 빗살무늬토기와 돌도끼, 갈돌, 갈석 등이 나왔다.

 

<1974년 3차 암사동 유적 발굴 당시 모습(사진 출처-출처자료1)>

1974년에도 발굴은 계속되었다.

제3차 발굴조사는 1974년 4월 8일부터 25일까지로 발굴기관은 국립중앙박물관이다.

2차 발굴과 마찬가지로 35년 후인 2008년 ≪암사동≫란 제목의 발간보고서가 나왔다.

 

3차 발굴조사에서는 집터 5기대형 빗살무늬토기 몇 점, 석기 다수가 출토되었다.

먼저 집터 5기는 비고적 지역에 걸쳐 몰려 있어 발굴단은 마을(촌락村落 또는 취락聚落) 형태를 이루고 있었던 것으로 추측했다.

집터 형태는 원형 내지 말각방형抹角方形[네 모서리를 둥글게 만든 네모 형태]으로 지름 5.5~6미터, 깊이는 1미터 규모의 움집터이다.

5기 중 3기는 불에 탄 채 발견되었으며, 불탄 기둥들이 이리저리 무질서하게 깔려 있고 그 밑에서 토기와 석기 등이 발견되었다.

 

<1974년 3차 암사동 유적에서 출토된 빗살무늬토기(사진 출처-출처자료1)>

출토된 빗살무늬토기는 대형의 반계란형 토기(위 사진)와 소형이면서 밑바닥이 둥글고 평평한 둥근바닥토기(원저圓底 또는 환저丸底 토기)로 나눌 수 있다.

집터 내부에서 출토된 석기로는 돌도끼, 돌화살촉, 어망추, 갈돌과 갈판 등이다.

그리고 집터에서 채취한 목탄의 방사성탄소연대측정 결과 4950±200년 전(before present=B.P.)이란 절대연대가 산출되었다.

 

<1975년 4차 암사동 유적 발굴 당시 모습(사진 출처-출처자료1)>

1974년에 이어 1975년에도 암사동 유적에 대한 발굴은 계속되었다.

제4차 암사동 유적 발굴조사는 1975년 4월 7일부터 6월 5일까지로 역시 국립중앙박물관이 담당하였다.

역시 정식 발굴보고서가 없었다가 20년이 지난 1994년에 발간하였다.

 

4차 조사에서는 신석기시대 집터 11기와 돌무지유구(적석유구積石遺構: 돌로 쌓은 건물의 자취), 삼국시대 독무덤(옹관묘甕棺墓) 2기, 건물터 일부가 확인되었다.

집터는 지름 5~6미터의 원형이거나 한 변이 4~6미터의 말각방형의 움집터다.

 

저장시설로는 저장구멍(저장공貯藏孔), 바닥을 잘라 만든 토기, 구덩이 시설 등이 확인되는데, 이 중 저장구멍은 움집터 바깥에 있다.

출토유물은 토기의 경우 중·서부지방 빗살무늬토기의 전형적 형태인 아래가 뾰족한 반계란형인 뾰족밑반계란모양(첨저반란형尖底半卵形)이 일반적이고, 이밖에 비교적 다양한 모양이 확인되는데, 주로 대동강·재령강지역 유적에서 출토되는 토기 모양과 비슷한 것이 많다.

 

이처럼 서울 암사동 유적은 1970년대 네 차례에 걸친 발굴조사를 통해 가치와 의미를 확인하였으며, 서울의 역사성을 보여줌으로서 서울을 대표하는 유적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서울 석촌동 3·4호분

 

석촌동 고분에 대한 발굴조사는 이 시기 진행된 잠실지구개발사업에 대한 학계의 대응이었다 할 수 있다.

즉 이미 일제강점기부터 알려진 석촌동 소재 돌무지무덤(적석총積石塚)이 아무런 학술조사 없이 파손된 상태로 방치되어 있었는데, 1975년부터 개발이라는 미명 아래 방이동과 석촌동 일대의 유적들이 없어질 위기에 처하자 1974년 8월 초에 서울대·고려대·숭전대가 합동으로 발굴조사를 실시할 계획을 세웠다.

 

<1974년 석촌동 3호분 발굴 모습(사진 출처-출처자료1)>

이에 1974년 8월 26일 김원룡 교수 등 각 대학 관계자들이 석촌동 현장을 답사하여 당시 남아있던 돌무지무덤과 흙무덤(봉토분封土墳: 흙을 둥글게 쌓아올린 무덤) 등 총 2기를 빠른 시일 안에 발굴조사를 하기로 하였다.

하지만 사정이 여의치 않아 서울대 박물관과 고고학과 주관으로 1974년 9월 20일부터 11월 11일까지 파괴된 돌무지무덤인 제3호분과 흙무덤으로 추정되는 4호분에 대한 발굴조사를 단독으로 실시하였다.

 

먼저 석촌동 제3호분 발굴조사 내용을 살펴보자.

제3호분은 원래 사각형 기단基段을 쌓은 단축段築피라밋형 즉 기단돌무지무덤이었으나 발굴 당시 그 원형을 알 수 없을 정도로 심하게 파괴되어 있었다.

즉 기단부 주위에는 10여 호의 민가가 들어섰고, 돌무지무덤의 큰 돌들은 담장이나 장독대, 빨래밑돌로 사용하여 조사 당시에는 돌무지무덤의 외형 윤곽을 파악하기조차 어려웠다.

다만 돌기단, 묘 주위 도랑(묘역주구墓域周溝), 분묘의 외형, 지반 위 돌무지 상태의 일부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무덤 형식은 기단돌무지무덤(기단식적석총基段式積石塚)으로 발굴 당시 2단까지 남아있었으며, 각 단의 높이는 0.7~0.8미터, 폭은 4~4.2미터이다.

발굴 당시 높이는 4.2미터이고, 첫 번째 기단의 한쪽인 남북 길이는 약 30미터로 추정된다.

그러나 덧널(묘곽墓槨)의 구조는 알 수 없다.

출토유물로는 둥근 얇은금판(금제박판金製薄板)을 가는 금줄로 꿰매어 단 금제 드리개(금제영락형金製瓔珞形: 금으로 만든 귀걸이 형태) 장식품 1점과 돌무지 사이에서 발굴한 푸른 빛이 도는 잿빛 바탕색(회청색灰靑色)의 무른 연軟질토기 파편이 몇 개 있다.

 

제3호분의 발굴은 미완성의 발굴이었다.

의욕적으로 학술발굴을 실시하였으나 3호분의 경우 파괴 정도가 심하여 전체 발굴로는 이어지지 못했고, 성격 규명도꼼꼼하지 못하고 엉성했다.

그러나 다행히 3호분에 대한 발굴은 1980년대에 다시 한번 이루어진다.

 

<석촌동 4호분 덧널과 널길(사진 출처-출처자료1)>
<석촌동 4호분 현재 모습(사진 출처-출처자료1)>

석촌동 제4호분은 3호분과는 달리 겉으로는 거의 원형을 유지하고 있었으며, 봉분 정상부는 편평하고 고추밭으로 되어 있었다.

4호분은 정사각형으로 잔 자갈을 깔아 묘역을 구성하고 제일 바깥선의 한 변이 약 30미터이고, 그 안으로 점차 좁혀 들어가면서 각각의 한 변이 24미터, 17.2미터, 13.2미터, 그리고 가장 안쪽 중심부를 이루는 묘곽의 한 변은 4.8미터다.

돌덧널(석곽石槨) 시설도 눈여겨 볼 부분이다.

고분의 정상부 중앙에는 동서 4.6미터, 남북 4.8미터의 거의 정사각형 덧널과 그 남쪽 벽 중앙에 달린 널길이 있다.

 

보고서에서는 4호분의 축조 연대를 4세기에서 5세기 전반의 고분으로 고구려 돌무덤(석총石塚: 돌을 높게 쌓아 올린 무덤)에서 시작해 한강유역에서 지역적 변화를 일으킨 백제 돌무지무덤(적석총積石塚)으로 보았다.

 

4호분 주변에서 집터도 확인되었다.

4호분 중앙에서 동남 방향으로 약 21미터 떨어진 배추밭 안에서 동서로 3.6미터, 남북으로 3.2미터의 거의 정사각형의 모서리가 둥근 말각방형 움집터를 발견하였다.

보고서에서는 이 집자리를 4호분과 연관이 있다고 보고, 4호분의 빈소殯所[발인 때까지 관을 놓아두는 방]나 수직소守直所[묘역 지킴이 방], 또는 고분 축조 인부들의 임시 거처 등으로 추정하였다.

 

※출처

1. 서울역사편찬원, '서울의 발굴현장'(역사공간, 2017)

2. 구글 관련 자료

 

2021. 7. 5 새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