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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이후 서울에서 발굴된 유적들 22: 종로구 지역2-신문로, 세종로, 당주동, 도렴동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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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이후 서울에서 발굴된 유적들 22: 종로구 지역2-신문로, 세종로, 당주동, 도렴동

새샘 2023. 1. 6. 21:44

 

<2000년 이후 발굴조사 목록-종로구 지역2: 신문로·세종로·당주동·도렴동 유적>

 

 

종로구에서는 신문로 구역에 대한 발굴건수가 상당히 많은데, 이것은 경희궁 터 권역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먼저, 2003년 신문로2가 1-335번지 근린생활시설 신축부지에 대한 발굴 결과, 조선~근현대 건물 터 등이 확인되었다.

 

2004년에는 신문로2가 58번지에 교통순찰대 청사 주차장 부지에 대한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다.

조사구역 북쪽에 경희궁이 있고, 동쪽 가장자리에는 현재 복원된 경희궁 흥화문이 인접한다.

그러나 이미 심한 지형 변경이 이루어져 성격을 알 수 없는 석렬 1기만이 확인될 뿐이었다.

발굴단은 이 석렬을 경희궁과 관련된 건물 기단석基壇石(기초로 쌓는 돌)일 것으로 추측했다.

 

 

신문로 2구역 제5지구 조사지역 모습

2008년에는 신문로 2구역 제5지구 도시환경정비사업의 일환으로 발굴조사가 실시되었다.

조사지역의 남쪽 약 40m에 경희궁이, 북서쪽 약 230m 거리에 덕수궁이 있으며, 남쪽 끝 능선 위쪽에는 상림원上林園[조선 시대에, 궁중 정원의 꽃과 과실나무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관아. 많은 인터넷 자료에서 상림원上林苑과 같은 것으로 기록하고 있지만, 上林苑은 서원西苑이라고도 불리는 창덕궁 요금문耀金門 밖에 있는 궁원宮苑(궁궐 동산)이다]이 있었고, 이 지역에는 조선시대 민가들이 분포하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했다.

발굴 결과, 조선 전기로 추정되는 건물 터 1동, 조선 후기 건물 터 1동, 구덩이 유구 16기, 성격을 알 수 없는 도랑 1기, 배수로 2기 등이 확인되었다.

 

 

신문로2가 1-176번지 일대에 대한 발굴조사도 2008년 이루어졌다.

조사지역은 이전에 경희궁 영역에 속했던 지역으로, 서쪽과 남쪽 일부가 지금의 경희궁 터와 경계를 이루며, 남쪽에는 일제강점기에 조성된 방공 벙커가 자리하고 있고, 서쪽에는 복원된 경희궁의 편전便殿(임금이 평상시에 거처하는 궁전)인 자정전資政殿과 정전正殿(왕이 조회朝會를 하던 궁전)인 숭정전崇政殿이 위치하고 있다.

 

이번 조사에서는 고려 말기에서 조선 초기로 이어지는 문화층文化層(서로 다른 복수의 문화 영역이 접촉하거나 시간적 선후 관계에 따라 생기는 문화 영역의 단층)에서 건물 터 1동과 주거지 또는 여막旅幕(주막과 비슷한 조그만 집)으로 추정되는 구덩이 6기, 그밖에 용도를 알 수 없는 구덩이 40여 기가 확인되었다.

조선 전기 문화층의 유구로 확인된 2~3차례 중첩되어 형성된 건물 터에서는 적심積心돌(안쪽에 심을 박아 쌓는 돌)과 주춧돌(초석), 온돌시설 등의 상태는 양호한 편이었다.

경희궁 관련 유구는 확인하지 못했지만, 고려시대 서울 지역에서 고려인의 거주 지역 및 그 범위를 규명하는 데에 중요한 근거가 되는 유구일 것이다.

 

 

2009년에는 신문로1가 58-13번지 신축공사 부지에 대한 발굴조사가 있었으며, 조사지역에서 경희궁 궁장宮牆/宮墻(궁성宮城: 궁궐을 둘러 싼 성벽)으로 추정되는 담장 기초유구가 확인되었고, 건물 터와 관련된 장대석렬長臺石列(길게 다듬어 만든 돌들이 줄지어 늘어선 무리), 박석薄石(얇고 넓적한 돌), 그리고 담장 터를 확인했다.

 

 

신문로2가 1-158번지의 썬타워 빌딩(지금의 세계일보 빌딩) 예정 부지에 대한 발굴조사도 2009년부터 2010년까지 실시되었다.

조사지역의 서남쪽 가까이에 경희궁 터가 있다.

발굴 결과, 건물 터 1동, 방형전方形甎(정사각형의 벽돌) 유구 1기, 배수로 2기, 구상球狀유구(배수로 구실을 하는 원형 도랑) 1기, 축대 등이 조사되었다.

유구들은 위치상 경희궁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이지만 유구 상태가 좋지 않아 그 정확한 성격과 형태는 알 수가 없다.

 

 

2013년에는 신문로2가 1-124번지의 직장 어린이집(지금의 현대해상온마음 어린이집) 신축공사 부지에 대한 발굴조사가 있었다.

조사지역은 경희궁 권역의 동쪽이며, 일제강점기에는 조선총독부 관사가 있었던 곳이다.

조사 결과, 조선시대 건물 터의 석렬과 구덩이 등이 확인되었고, 출토 유물은 주로 15~17세기의 자기 조각이었다.

 

 

2014년에는 신문로2가 1-116번지의 근린생활주택신축 부에 대한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다.

이 조사지역 역시 옛 경희궁 권역으로 추정되는 곳으로 일제강점기에 전매국 관사로 사용되었다.

여기서는 조선 전기 건물 터 2동, 배수시설 2기, 석렬 2기, 잡석시설 1기 등이 확인되었다.

발굴단은 이번 조사에서 확인된 유구에서 16세기 이후 유물이 전혀 확인되지 않는 점으로 보아 조선 전기부터 경희궁 조성 이전까지 사용되던 것으로 추정했다.

 

 

철거 이전인 2007년 당시 새문안교회 모습(사진 출처-출처자료1)

2014년에는 새문안교회 선축 부지에 대한 발굴조사가 실시되었다.

조사지역은 경희궁의 동쪽 담장과 직선거리로 약 100m 떨어져 있다.

조사 결과, 총 4개의 문화층에서 고려시대 기와가마 2기, 조선 중·후기 건물 터 16동, 구덩이 유구 22기, 구상유구 3기, 근대 건물 터 3동, 현대 건물 터 3동 등 모두 49기의 유구들이 확인되었다.

 

 

새문안교회 조사지역에서 출토된 고려시대 기와가마 모습(사진 출처-출처자료1)

이번 조사에서 주목되는 부분은 고려시대 기와가마와 6호 건물 터다.

고려시대 기와가마 가운데 2호 기와가마는 상당 부분이 파괴되어 정확한 형태와 구조를 파악하기 어렵지만, 발굴단은 잔존 상태를 통해 대략 12~13세기로 추정했다.

이는 조사지역을 포함한 변 유적 일대에서는 확인된 바 없었던 고려시대 생산유구로, 조선시대 이전 고려시대 유적의 존재를 추정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인 것으로 발굴단은 판단했다.

 

6호 건물 터는 그 전모를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대형의 적심돌과 석축암거石築暗渠(돌 속도랑: 땅속이나 구조물 밑으로 낸 돌로 쌓아 만든 도랑) 시설의 규모와 축조기법으로 보아 경희궁이나 훈련도감 등과 관련된 시설의 일부일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건물을 처음 건축한 시점을 대략 16~17세기로 추정했다.

 

이에 발굴단은 6호 건물 터는 앞으로 신축될 교회의 공개된 터 가운데 적정한 장소로 이전복원하여 교육자료로 활용하는 의견과 함께, 고려시대 1호 기와가마는 앞으로 서울시와 협의를 거쳐 활용방안을 마련하는 의견을 제시했다.

 

 

광화문광장 조성 부지 조사 모습(사진 출처-출처자료1)

광화문 구역도 광화문광장을 조성하면서 지속적으로 발굴이 이루어진다.

서울시는 2006년 주작대로의 역사적 의미를 되살리고자 광화문광장 조성계획을 발표하고 2007년부터 본격적인 사업을 추진하면서 발굴을 실시했다.

먼저, 2007년과 2008년에는 광화문광장 조성부지에 대한 발굴이 이루어졌으며, 2009년에는 광화문광장에 조성되는 세종대왕 동상 건립 부지에 대한 발굴도 이루어졌다.

 

 

20세기 초 육조거리 모습(사진 출처-출처자료1)

조사지역은 황토현에서 광화문에 이르는 대로 양쪽에 의정부를 비롯하여 육조관청이 들어서 있었기 때문에 육조대로 또는 육조거리로 불리면서 조선시대 정치의 중심무대였을 뿐만 아니라 지금도 서울은 물론 대한민국의 정치·사회·경제·문화의 중심지이다.

 

발굴 결과, 조사지역이 육조거리의 중앙에 위치하고 있어서 관청 유적의 유무는 확인하기 어려웠지만 육조거리 및 도로 조성 방식 등 도로의 양상을 파악할 수 있었다.

특히 모래 성분이 많은 사질토沙質土를 강江돌(천석川石)이나 깬돌(할석割石)과 혼합하지 않고 단단하게 해서 도로를 조성한 점은 지방도로의 조성 방법과는 확연한 차이를 보여주었다.

 

 

2010년에는 당주동 29번지 일대인 세종로 구역 2지구 도시환경정비사업 부지(지금의 포시즌스 호텔 서울)에 대한 발굴조사가 있었다.

조사 결과, 조선 전기인 15세기부터 일제강점기까지 총 6개의 문화층이 있었고, 각 층위별로 모두 조선시대 건물 터가 확인되었다.

맨 위층인 조선 후기~일제강점기 문화층에서는 28동의 건물 터와 우물 5기, 공조功曹(육조 중 공조가 있었던 세종로 사거리에서 세종문화회관으로 이어지는 샛길로서 서울시가 붙인 이름) 등이 확인되었다.

건물 터 영역들은 일제강점기의 지적地籍(토지 기록)과 대부분 일치하며, 공조길 및 연결되는 작은 길도 그대로 확인되었다.

이는 발굴 전 예상과는 달리 광화문 지역은 조선 전기까지 고스란히 문화층을 그대로 품고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도렴24지구 호안목책 모습(사진 출처-출처자료1)

2010년에는 도렴24지구 도시환경정비사업 부지에 대한 발굴조사도 실시되었으며, 이곳에는 주상복합건물을 신축할 예정이었다.

조사지역은 근현대 일반가옥들이 있었던 곳으로 가까이 세종문화회관이 있고, 북쪽 북악산 기슭에서 내려오는 백운동천의 중하류 동쪽이다.

발굴 결과, 조선시대 건물 터 10동과 근현대 건물 터 5동, 그리고 경복궁 안에서 밖으로 흘러나오는 물줄기인 내수천內水川 보호 시설로 추정되는 호안목책木柵(호안울짱)이 확인되었다.

 

 

대한민국 역사박물관 부지에 대한 발굴도 2010년 이루어졌다.

조사지역은 조선시대 육조거리 동쪽이며, 육조 가운데 이조吏曹가 자리 잡았던 곳으로 추정된다.

이곳에서는 조선시대 장대석과 조선 후기에 축조된 것으로 보이는 주춧돌 1매가 확인되었으며, 일제강점기의 벽돌조 건물의 기초가 노출되었다.

유물은 조선 전기의 것으로 추측되는 지진구地鎭具(건물을 짓거나, 도로를 낼 때, 또는 농경지나 무덤 등을 만들 때 땅의 기운을 누르기 위해 묻는 의례용 유물)로 사용된 분청사기 단지(분청사기호粉靑沙器壺=분청자호粉靑瓷壺), 도기 항아리(도기호陶器壺) 등이 출토되었다.

 

 

그밖에 세종문화회관 예술동 증축 부지에 대한 발굴이 2011년 5월부터 6월까지 있었다.

 

 

2013년에는 한글 도렴2 녹지 정비 및 상징조형물 건립부지에 대한 발굴조사가 실시된다.

조사지역은 세종로동 76-14번지로서 광화문 시민열린문화마당 안이며 의정부 터로 알려졌다.

조사 결과에 따르면, 조선 전기 건물 터 1기와 중복된 후대 건물 터 2기 등 모두 3기의 건물 터가 확인되었다.

이 가운데 1호 건물 터는 조선 전기에 처음 지은 의정부 터와 관련된 유구로 추정되어 문화재위원회에서 원형보존을 결정함으로써 발굴조사 후 원형보존 즉 복토하도록 조치했다.

이후 이 지역은 서울시가 2016년부터 의정부 터를 확인하기 위한 발굴을 추진 중이다.

 

 

2013년에 발굴조사가 실시된 당주동 108번지에 대한 발굴은 앞서 있었던 한글 도렴2 녹지 정비 및 상징조형물 건립부지이다.

조사지역은 경희궁과 인접되어 있고, 반경 150m 안에 봉상시奉常寺(조선 시대에, 제사祭祀와 시호諡號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관아), 사역원司譯院(고려ㆍ조선 시대에, 외국어의 번역 및 통역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관아), 의영고義盈庫(조선 시대에, 호조戶曹에 속하여 기름, 꿀, 후추 따위의 공급·관리를 맡아보던 관아) 등의 관청 터가 있었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발굴 결과, 조선 전기의 돌무지(돌 더미) 시설과 적심(건물 붕괴를 막기 위해 주춧돌 밑에 자갈 등으로 까는 바닥다짐 시설) 1기, 중복된 후대 적심 2기가 확인되었다.

 

※출처
1. 서울역사편찬원, '서울의 발굴현장'(역사공간, 2017)
2. 구글 관련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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