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샘(淸泉)

코핀과 스테이시의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 2부 그리스•로마 세계 - 5장 로마 문명 7: 로마 원수정 시대의 문화와 생활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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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핀과 스테이시의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 2부 그리스•로마 세계 - 5장 로마 문명 7: 로마 원수정 시대의 문화와 생활

새샘 2023. 2. 4. 17:32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출처: https://ko.wikipedia.org/wiki/%EB%A7%88%EB%A5%B4%EC%BF%A0%EC%8A%A4_%EC%95%84%EC%9A%B0%EB%A0%90%EB%A6%AC%EC%9A%B0%EC%8A%A4)

 

고대 로마의 후기 공화정 시대에 시작된 문화적·지적 변화는 원수정 시대에 열매를 맺었다.

이 시기에 세 명의 탁월한 스토아 철학자가 로마에 살았다.

거부로서 한때 네로 Nero 황제의 자문관이었던 세네카 Seneca(서기전 4?~서기 65), 노예였던 에픽테토스 Epictetus(55~135?), 그리고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Marcus Aurelius Antoninus(121~180, 재위 161~180)가 그들이다.

 

그들 모두는 내적 평정이야말로 인간이 추구해야 할 궁극적 목표이며, 참다운 행복은 우주의 자애로운 질서에 복종함으로써만 찾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미덕 자체를 목적으로 삼았으며, 인간 본성의 죄악성을 개탄했고 양심에 복종할 것을 당부했다.

세네카와 에픽테토스는 깊은 신비적 갈망을 철학의 일부라고 천명함으로써 스토아 철학을 거의 종교처럼 만들었다.

그들은 우주를 전능한 신—그들은 만사를 궁극적인 선이 되도록 규정한다—에 의해 지배되는 신성한 존재로 숭배했다.

 

로마 최후의 스토아 철학자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한층 더 운명주의적이고 비관적이었다.

그는 질서 있고 이성적인 우주의 개념을 거부하지 않았지만, 인간을 사악한 운명에 의해 시달리는 존재로 생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인간이라면 마땅히 고귀한 삶을 살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천박한 탐욕에 자신을 내던지거나 분노에 대한 저항으로 스스로를 포기해서는 안 되며, 고통을 위엄 있게 인내하고 죽음에 평안히 순종하는 데서 만족을 이끌어내야 한다고 그는 말했다.

 

 

○황금시대와 백은시대의 문학

 

원수정 시대의 로마 문학(라틴 문학)은 보통 두 시기로 나뉜다.

아우구스투스 치세에 작성된 황금黃金시대 Golden Age(서기전 70경~서기 18)의 작품, 그리고 1세기와 2세기 초에 집필된 백은白銀시대 Silver Age(18~133)의 작품이 그것이다.

 

황금시대 문학의 대부분은 활기차고 긍정적이며 희망적이었다.

유의할 점은 이 시기 문학의 상당수는 아우구스투스 정부를 선전하려는 목적을 갖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로마가 배출한 가장 위대한 시인 베르길리우스 Vergilius(영어 Virgil)(서기전 70~19)가 대표적이다.

목가시집인 ≪전원시 Eclogues≫에서 베르길리우스는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이상적인 인간의 삶을 표현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암암리에 아우구스투스를 그러한 평화와 풍요를 가져다준 인물로 찬양했다.

베르길리우스의 걸작인 ≪아이네이스 Aineis≫는 트로이의 영웅 아이네아스 Aeneas(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 가문은 아이네아스를 자신들의 선조라고 주장했다)에 관한 서사시인데, 아이네아스는 로마 민족 형성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되었다.

숭고하면서도 힘 있고 감동적인 운율의 시로 이루어진 ≪아이네이스 Aineis≫("전쟁과 한 남자를 나는 노래하노라"로 시작한다)는 전쟁과 노고를 통해 이루어진 위대한 국가 건설 과정을 들려주면서 로마의 위대한 미래를 예언한다.

 

황금시대의 다른 작가로는 호라티우스 Horatius(서기전 65~8), 리비우스 Livius(서기전 59~서기 17), 오비디우스Ovidius(서기전 43~서기 17?) 등이 있었다.

그중 호라티우스는 가장 철학적이었다.

그의 ≪송시 Odes≫는 쾌락을 정당화한 에피쿠로스 철학과 고통 앞에서의 의연함을 강조한 스토아 철학을 결합시켰다.

리비우스의 ≪로마사≫는 종종 역사적 사실의 측면에서 신뢰성이 떨어지지만, 애국적 감정에 호소하는 극적인 이야기로 가득하다.

오비디우스는 라틴 황금시대의 작가 가운데 전형적인 인물은 아니었다.

그의 문학은 영웅적 확신보다는 풍자적 경향을 띠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시인으로서의 주요 업적은 그리스 신화를 지극히 세련되게 고쳐 쓴 15권짜리 ≪변신 Metamophoses≫이며, 이 작품은 위트와 에로티시즘으로 충만하다.

아우구스투스는 ≪아이네이스≫를 매우 좋아했지만, 오비디우스의 시에 나타난 냉소와 방종은 몹시 싫어해 그를 로마에서 추방해버렸다.

아우구스투스는 스스로를 엄격한 도덕가로 보이고 싶어 했던 반면, 오비디우스는 여자를 유혹하는 방법이라든가 자신과 유부녀—로마 원로원 의원 부인—의 간통 사건(아마도 상상력의 산물일지도 모르지만) 따위의 주제를 다루었던 것이다.

 

백은시대의 문학은 황금시대에 비해 차분함이나 균형감이 부족했고, 문학적 효과를 인위적 방법으로 이끌어내곤 했다.

페트로니우스 Petronius(27?~66?)와 아풀레이우스 Apuleius(124?~170?)는 로마인의 삶에서 이국적이고 천박한 국면을 이야기로 풀어냈다.

이 작가들의 목적은 가르침을 베풀거나 정신을 고양시키는 것이 아니라 재미있는 이야기를 재치 있는 문구로 멋들어지게 표현하는 데 있었다.

그러나 두 명의 다른 작가는 전적으로 다른 관점을 제시했다.

풍자 작가인 유베날리스 Iuvenalis(60?~140?)는 동시대인의 도덕적 타락에 대한 분노를 거침없이 글로 썼다.

그는 신랄하고도 압축적인 수사적 문구로 인해 널리 인용되는 인기 작가가 되었다.

타키투스 Tacitus(56?~120?)의 저술 역시 로마 사회의 타락을 비판하는 태도를 보여주었다.

원로원 역사가이기도 했던 타키투스는 동시대의 사건들을 냉철한 분석적 입장에서가 아니라 대체로 도덕적 규탄을 목적으로 서술했다.

그의 ≪연대기 Annals≫는 아우구스투스가 건설하고 그의 후계자들이 지배한 정치체제에 대한 교묘하고도 통렬한 서술이다.

그의 ≪게르마니아 Germania≫는 야만인 게르만족의 남성적인 미덕과 퇴폐적인 로마인의 나약한 악덕 사이의 차이점을 극명하게 대조시키고 있다.

유베날리스와 마찬가지로 타키투스는 아이러니한 기지와 현란한 금언의 대가였다.

그의 저작 속에서 한 야만인 족장은 로마인의 정복을 빗대어 이렇게 말한다.

"로마인들은 황무지를 만들어놓고 그것을 평화라고 부른다."

 

 

○예술과 건축

 

로마의 예술은 원수정 시기에 처음으로 로마 고유의 특징을 갖게 되었다.

이 시기 이전에 로마 예술로 간주되어온 것은 실상은 헬레니즘 동방에서 수입한 것이었다.

로마 정복군은 그리스와 소아시아에서 조각상, 부조, 대리석 기둥과 같은 전리품을 마차에 가득 싣고 이탈리아로 가져왔다.

이것들은 부유한 사업가들의 소장품이 되어 그들의 화려한 저택을 장식하는 데 사용되었다.

수요가 늘어나자 로마의 기술공은 수백 개의 복제품을 만들었다.

그러나 그 어느 것도 진정한 의미의 로마 예술 양식을 대표하지는 못했다.

 

아우구스투스의 후원에 힘입어 원수정 시대에는 좀 더 로마다운 예술이 발달했다.

이 예술품들은 흔히 알려진 것보다 훨씬 다양한 것이어서, 장엄한 공공 건축물에서 개인 주택의 벽화까지 광범한 영역에 걸쳐 있다.

로마 건축물은 대체로 웅장했는데, 그 당당한 조화와 균형은 로마 기술자가 발전시킨 콘크리트 기술에 의해 가능했다.

규모가 가장 큰 공공 건축물로는 돔의 직경이 무려 42미터에 달하는 판테온 Pantheon, 5만 명의 관객이 검투 경기를 관람할 수 있는 콜로세움 Colosseum 등이 있었다.

공공 기념물에 새겨진 것을 제외하면 로마의 조각 중 화려한 것은 별로 없었다.

이 시기의 부조는 섬세함과 자연스러움으로 특히 유명하다.

심지어 주화에 새겨진 황제의 초상까지 실물과 아주 흡사했다.

주화의 이미지를 해마다 다시 새겨 넣었으므로 우리는 주화의 발행연도에 따라 황제의 이마가 넓어지고 두 턱이 생겨나는 과정을 추적할 수 있다.

그러나 로마인이 보여준 가장 독창적이고 심오한 예술은 회화였다.

로마인은 진한 색감을 좋아했다.

경제적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화려한 벽화와 모자이크 mosaic(작은 색유리나 돌 조각을 짜 맞추어 만든 그림)로 주변을 온통 에워쌌다.

이런 그림은 환상적인 바다 경치에서 몽환적인 풍경과 내향적인 초상화에 이르기까지 실로 다양한 시각적 효과를 자아냈다.

 

로마인이 건축에서 이룬 업적은 그들의 우수한 기술 수준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로마인은 훌륭한 도로와 교량을 건설했는데, 그 대부분이 지금도 남아 있다.

트라야누스 Traianus 치세(재위 98~117)에는 11개의 수로가 설치되어 인근 언덕에서 로마 시로 물을 공급했다.

이 수로를 통해 매일 100만 톤 이상의 물이 로마에 공급되어 먹는물과 목욕물로 사용되었으며, 발생된 하수는 훌륭하게 설계된 하수도를 통해 흘러내리게 만들었다.

물은 또한 정교한 관로를 따라 부호들의 저택으로 흘러가 정원과 연못과 풀장까지 도달했다.

네로 Ner황제는 로마 중심부에 유명한 황금저택 Domus Aurea을 지었다.

이 저택에는 찾아오는 손님에게 향수를 뿜어주는 파이프가 설치되어 있었고, 약효 성분이 녹아있는 물이 쏟아지는 목욕탕이 있었으며, '바다처럼 넓은 연못'도 있었다.

게다가 연회장의 둥근 천장은 밤낮으로 마치 하늘처럼 회전했는데, 이 모든 것은 난봉꾼 네로의 이미지를 고착시키는 데 기여했다.

네로 황제는 황금저택으로 걸어 들어오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마침내 나는 인간답게 살 수 있게 되었도다!"

 

 

○원수정 시대의 귀족 여성

 

원수정 시대 로마 사회의 가장 놀라운 국면 중 하나는 상류계급 여성의 역할이 매우 컸다는 점이다.

앞서 보았듯이, 후기 공화정 로마의 부유층 여성은 고전기 그리스 여성에 비해 가정에 덜 얽매어 있었으며 이런 경향은 원수정 시대에 더욱 두드러졌다.

물론 로마의 여성은 자신의 이름도 갖지 못한 채 아버지 이름에 여성 어미를 붙여 이름으로 대용하곤 했다.

예를 들면 율리우스에서 율리아, 클라우디우스에서 클라우디아, 마르키우스에서 마르키아라는 이름이 나왔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로마 여성은 남편에게서 매우 독립적인 지위를 갖고 있었다.

여성은 결혼할 때 통상 남편의 이름을 취하지 않았다.

법률에 따라 형식상 남성 보호자의 감독 아래 놓이긴 했지만, 부유층 여성은 자기 재산을 소유했고 모험적 사험에 투자했으며 자유의사로 공공 자선활동을 했다.

여성은 정무직에 오를 수는 없었지만 여사제와 시민 후원자로서 활동할 수 있었다.

이 두 가지 역할 때문에 여성은 공공 문제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가사를 돌봐줄 수많은 노예와 자기 소유의 재산이 있었기에 부유층 여성은 지적·예술적 활동에 자유롭게 참여할 수 있었다.

어떤 여성은 시를 썼고, 어떤 여성은 철학을 연구했으며, 또 다른 여성은 문학 살롱을 주관했다.

또한 그녀들은 상당한 정도의 성적 자유도 누렸는데, 이는 고대 세계의 여타 지역에서는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것으로서, 보수적인 현대 남성이 봐도 충격으로 받아들일 것이다.

로마의 귀족 여성은 흔히 자신의 초상화를 그리게 하거나 돌로 조각하도록 했다.

황제의 부인이나 딸의 얼굴이 주화 속에 새겨진 경우도 많았다.

여성이 주화에 등장한 이유는 황제가 자기 가문의 위대성을 선포하기 원했기 때문이거나, 그 여성들이 실제로 중요한 국사—비공식적인 것이긴 했지만—를 맡아보았기 때문이다.

 

하층계급 여성의 삶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드물다.

그들 대부분은 나이가 차면 결혼을 했고, 상점 주인의 아내는 가족 부양 업무에서 특별히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이다.

출산의 위험 속에서 살아남은 기혼 여성은 보통 3~4명의 자녀를 낳았지만, 그들 모두가 성년이 될 때까지 살아남는 것은 아니었다.

사망률은 높았고, 특히 여성 사망률이 높았다.

로마 여성의 평균 수명은 34세, 남성은 40~46세였다.

이 통계에 여성 노예 인구를 포함시킨다면 여성의 평균 수명은 더 짧아질 것이다.

 

 

○검투 경기

 

현대적 관점에서 볼 때 원수정 시대 로마 문화는 깜짝 놀랄 정도의 잔인성 때문에 혐오감을 준다.

검투 경기는 이미 새로울 것이 없었지만, 이 시기에 와서 달라진 점은 검투 경기가 수천 명의 관중을 수용할 수 있는 원형경기장에서 진행되었다는 사실이다.

평민과 귀족은 물론이고 황제도 이 경기를 관람했으며, 경기는 갈수록 유혈이 낭자한 잔인한 것으로 변했다.

검투사들은 손에 칼과 삼지창을 들었고, 주먹에 쇠나 납이박힌 가죽 끈을 감고 죽을 때까지 싸웠다.

한쪽 검투사가 치명적 부상을 입고 쓰러지면, 관중은 그의 목숨을 살려줄 것인지 아니면 상대편 검투사가 그 자리에서 그를 죽일 것인지 결정해 줄 것을 요청받았다.

검투 경기가 벌어지는 막간에는 죄수들이 경기장에 풀려나와 짐승에게 갈가리 찢기고 먹이가 되었다.

경기장에 피가 흥건히 고이면 새로 모래를 한 겹 뿌리고 다시 경기를 진행했다.

 

대부분의 검투사는 죄수나 노예였지만 때때로 신분 높은 자원자도 있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망나니 아들로서 황제가 된 콤모두스 Commodus(재위 177~192)는 여러 차례 검투사로서 싸워 무패의 기록을 세웠는데, 군중의 갈채를 즐기면서 자신을 헤라클레스의 환생이라고 칭했다.

 

 

○로마법

 

로마가 후대에 남긴 최대의 유산 가운데 하나는 법체계이다.

로마법체계는 서기전 450년 무렵의 12표법 공포와 더불어 시작되어 서서히 발전해온 결과물이다.

여러 세기를 거치면서 이 원시적 법규는 관습의 변화를 반영한 새로운 선례와 원칙에 따라 변화되었다.

새로운 선례와 원칙에는 스토아 철학 같은 새로운 철학 사상, 재판관의 판결, 그리고 법무관 praetor—특정 사건에서 법률을 정의·해석하고 재판관에게 지침을 전달한 권한을 갖는다의 고시告示 edicta 등을 들 수 있다.

 

그러나 가장 획기적 변화는 원수정 시대에 일어났다.

변화의 부분적 원인은 로마제국의 성장과 더불어 로마법의 관할구역이 광대한 영역—이탈리아의 시민뿐만 아니라 멀리 떨어진 속주민까지 포함—으로 확대된 데 있었다.

그러나 이 무렵 로마의 법사상이 급속히 발달한 가장 큰 이유는, 아우구스투스 이래 누대의 로마 황제들이 소수의 탁월한 법학자들을 지명하여 법정 심리 증언 사건에 대한 법률적 조언을 제공할 수 있도록 조치했기 때문이다.

이 방침에 따라 선임된 법학자들 중 대표적 인물로는 가이우스, 울피아누스, 파피니아누스, 파울루스 등이 있다.

그들 대다수는 최고위 법관의 직분을 갖고 있었지만, 그들이 명성을 얻은 것은 무엇보다도 법학자 및 법률 저술가로서였다.

이들의 법률적 견해는 체계적인 법철학을 구체화했고 후대의 모든 로마 법제의 토대가 되었다.

 

이들 법학자에 의해 발달된 로마법은 크게 시민법, 만민법, 자연법의 세 갈래로 구분되었다.

시민법이란 로마 및 그 시민들에 대한 법으로서, 성문법과 불문법의 두 가지 형태로 존재했다.

여기에는 원로원의 법령, 황제의 칙령, 정무관의 고시, 그리고 법적 효력을 갖는 고대의 관습이 포함되었다.

만민법은 민족에 관계없이 누구에게나 통용되는 법률로서 초보적 형태의 국제법이었다.

이 법은 노예제와 사유재산을 정당화했고 상거래·동업·계약의 원칙을 규정했다.

만민법은 시민법보다 우월하지는 않았지만 각별히 제국의 외래 거주자에게 적용됨으로써 시민법을 보완했다.

 

로마법에서 가장 흥미롭고 여러모로 가장 중요했던 부분은 자연법이었다.

그것은 법적 관행의 소산이 아닌 철학의 소산이었다.

스토아 철학자들은 자연의 이성적 질서라는 관념을 발전시켰는데, 이성적 질서란 정의와 권리를 구체화한 것이었다.

그들은 모든 인간이 자연적으로 평등하며 정부도 침범할 수 없는 기본 권리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법적 권리로서의 자연법'의 아버지는 헬레니즘 스토아 철학자가 아니라 로마의 키케Cicero(서기전 106~43)였다.

그는 이렇게 선언했다.

"진정한 법은 자연과 조화되는 올바른 이성이다. 올바른 이성은 모든 인간이 공통으로 갖고 있으며 영원불변하다. 이 법을 침범하는 규정을 만드는 것은 종교에 의해 금지된다. 우리는 그것을 일부분일지라도 철회할 수 없다. 우리는 원로원이나 인민을 통해 우리 자신을 자연법에서 벗어나게 할 권리 또한 갖고 있지 않다."

자연법은 국가 자체보다 우위에 놓여 있었고, 그것을 위배하는 모든 지배자는 자동적으로 폭군이 되었다.

 

위대한 법학자들은 대부분 스토아 철학자들이 설파한 자연법 개념에 동의했다.

법학자들은 이 법이 자동적으로 시민법을 한정한다고 여기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자연법이야말로 인간의 법이 마땅히 따라야 할 이상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로마의 지방 법정에서 통용된 실정법은 자연법과는 거리가 먼 것이 사실이었다.

하지만 법률적 원리로서 추상적인 정의 개념의 발달이야말로 로마 문명이 이룩한 가장 고귀한 업적 중 하나였다.

 

 

○원수정 시대의 이탈리아 경제

 

로마제국의 원수정 시대는 제조업의 성장과 도자기·직물·금속·유리제품의 대량생산 덕분에 이제 로마의 빈민조차도 과거의 어느 지중해 사회와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물질적 풍요와 가정적 안락함을 누릴 수 있었다.

상인은 전문화되었고 대량생산된 상품을 제국 전역으로 실어 보냈다.

상공업은 대단히 성공적이었고 취급하는 물량 또한 엄청났다.

로마 시에는 지금도 2세기와 3세기의 도기 조각들로 쌓아올린 45미터 높이의 언덕이 있다.

암포라 amphora라고 부르는 이 도기들은 로마에서 소비할 올리브유를 서남 에스파냐까지 실어 나르는 용기로 사용되었다.

역사가들은 이 도기 조각 언덕이 약 5,300만 개의 암포라로 이루어졌을 것으로 계산한다.

이 도기의 용량을 모두 합치면 대략 570만 톤의 올리브유를 담을 수 있다.

 

그러나 정교하고 복잡하면서도 부스러지기 쉬운 이 경제 세계에는 피로의 징조가 있었다.

상류계급은 도시와 시골의 저택에서 호화스럽게 살았다.

그러나 지방에 있는 귀족 소유의 대농장인 라티푼디움 Latifundium에서는 전쟁 포로 노예의 수가 줄면서 노동력 부족 현상이 시작되었다.

이 같은 노동력 부족은 사회경제적 지위가 하락한 소농들에 의해 제한적으로만 채워졌다.

다시 말해서 다수의 소농은 대농장에서 반노예적 농업노동자인 콜로누스 colonus의 지위로 전락하고 말았다,

게다가 제국 서반부, 특히 이탈리아는 동부 속주들에 대해 현저한 무역역조 현상을 겪고 있었다.

서로마의 벌크 bulk 화물(곡물이나 광석처럼 포장하지 않은 화물), 특히 포도주, 곡물, 기름, 도기 등이 대규모로 동쪽으로 운송되었지만, 그것은 동부 속주들, 인도, 중국 등지에서 서로마로 흘러든 사치품에 지불된 대금에 비하면 미미한 규모였다.

제국의 수입이 동쪽에서 서쪽으로 지속적으로 흘러와 군대와 제국의 행정을 지원하는 한 후기 원수정의 경제체제는 비교적 안정적일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현금 흐름이 고갈되거나 동서간의 교역로가 붕괴되는 사태가 닥칠 경우 로마제국 서반부 이탈리아의 경제는 급속히 위기 국면으로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출처

1. 주디스 코핀 Judith G. Coffin·로버트 스테이시 Robert C. Stacey 지음, 박상익 옮김,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상): 문명의 기원에서 종교개혁까지, Western Civilizations 16th ed., 소나무,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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