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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과 그림

연담, 허주, 공재의 예술 세계를 평하노라

새샘 2024. 3. 20. 10:52

한 시대 미술의 수준은 그 시대 비평의 수준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창작은 뛰어난데 볼 만한 비평이 없다거나, 비평의 수준은 높은데 창작이 따르지 못한 시절은 없다.

어느 시대든 다소 그 질에 차이가 있을 수는 있어도 창작과 비평은 함께했다.

 

조선시대 회화사에서 비평다운 비평이 나오는 것은 영조 대에 들어와서다.

그 대표적인 업적이 남태응南泰膺(1687~1740)청죽화사聽竹畫史이다.

청죽은 남태응의 아호다.

 

남태응의 관직은 미미하고 행적은 별로 알려진 것이 없지만 미발간 육필 문집인 청죽만록聽竹漫錄≫(전 8권)의 별책으로 실려 있는 청죽화사≫는 조선시대 전체를 통틀어도 가장 수준 높은 회화 비평이라고 할 만하며, 영조 이전 회화에 대하여 가장 많은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특히 연담연 김명국, 허주 이징, 공재 윤두서의 삶과 예술에 대한 수많은 증언은 우리 회화사의 내용을 풍부하게 해준다.

 

남태응은 이러한 회화 관계 기술을 화사畵史, 즉 회화사라고 하였는데,

그중에는 본격적이면서도 미학적이고 철학적인 담론이 들어 있는 <삼화가유평三畵家喩評>이라는 명문이 실려 있다.

 

이 글은 17세기를 대표하는 연담蓮潭 김명국金明國(1600~1662 이후), 허주虛舟 이징李澄(1581~1653 이후), 공재恭齋 윤두서尹斗緖(1668~1715) 세 화가의 예술 세계를 비유적으로 평한 글이다.

 

김명국, 비급전관도, 17세기 중엽, 종이에 담채, 121.5x82.5cm, 간송미술관(사진 출처-출처자료1)

 

이징, 연사모종도, 17세기 중엽, 비단에 담채, 103.9x55.1cm, 국립중앙박물관(사진 출처-출처자료1)

 

윤두서, 마상처사도, 18세기 초, 비단에 담채, 98.2x57.7cm, 국립중앙박물관(사진 출처-출처자료1)

 

"문장가에 삼품이 있는데 신품神品, 법품法品, 묘품妙品이 그것이다.

이를 화가에 비유해서 말한다면 김명국은 신품에 가깝고, 이징은 법품에 가깝고, 윤두서는 묘품에 가깝다.

 

학문에 비유하자면 김명국은 태어나면서 아는 자[생이지지生而知之], 윤두서는 배워서 아는 자[학이지지學而知之], 이징은 노력해서 아는 자[곤이지지困而知之]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루어지면 매한가지이다.

 

이를 또 우리나라의 서예가에 비유해서 말하자면 김명국은 봉래 양사언, 이징은 석봉 한호, 윤두서는 안평대군 이용에 해당하다.

 

김명국의 폐단은 거친 데에 있고, 이징의 폐단은 속俗됨에 있고, 윤두서의 폐단은 작음에 있다.

작은 것은 크게 할 수 있고, 거친 것은 정밀하게 할 수 있으나, 속된 것은 고칠 수 없다.

 

김명국은 배워서 되는 것이 아니며, 윤두서는 배울 수 있으나 이룰 수 없고, 이징은 배울 수 있고 또한 가능하다."

 

이어서 남태응은 세 화가의 화풍이 제각기 다른 점에 대해서도 평하고 있다.

그는 이 글 앞의 <화사>에서 세 화가의 화품을 자세히 말하고 있는데 요체만 말한다면

김명국은 신들린 듯한 호방한 필치이고, 윤두서는 묘사가 정확하며, 이징은 화법에 어긋남이 없다고 했다.

남태응은 이를 비유적으로 평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김명국은 해상海上의 신기루처럼 모습(결구結構: 일정한 형태로 만든 얼개 즉 모습)이 아득하고 기틀(어떤 일의 가장 중요한 계기나 조건)이 공교로우며 변화(신변神變)가 많기 때문에 그 제작을 상세히 설명할 수 없다.

떠도는 것이 일정치 않고, 보이고 사라짐이 무상無常(모든 것이 덧없음)하여 그 방향을 가리킬 수 없다.

바라보면 있으나 다가가면 없어지니 그 멀고 가까움을 측량할 수도 없다.

이처럼 찾아서 잡으려 해도 얻을 수 없고, 황홀하여 표현하기 어려우니 어떻게 그것을 배울 수 있겠는가.

 

윤두서는 마치 공수반公輸般(≪맹자≫에 나오는 노나라의 명장)이 끌을 갖고 사람의 상을 만드는 것과 같아서, 먼저 몸체와 손발을 만들고 다음에 이목구비를 새기는데 아주 교묘하게 만들어 터럭 하나 사람과 다르지 않게 하였다.

그러면서도 이에 만족하지 않고 그 가운데에 기관機關(엔진)을 설치하여 스스로 발동하게끔 함으로써 손은 쥘 수 있고, 발은 걷고 달릴 수 있고, 눈은 꿈쩍거릴 수 있고, 입은 열고 벌릴 수 있게 한 다음에야 참모습과 거짓모습(가상假像)이 서로 뒤엉키는 조화로움까지 얻어낸 것과 같다.

그러니까 기관이 발동하기 이전까지는 아직 배울 수 있으나, 그 이후는 불가능할 것이다.

 

이징은 마치 위대한 장인(대장大匠)이 방을 만들고 집을 세우는 것과 같아서 짜임새가 법도의 틀에 부합하지 않음이 없고 컴퍼스와 자로 네모와 원을 만들고 먹줄로 수평과 수직을 맞추어 대단한 설계와 기교를 쓰지 않고도 작업을 마치고 나서 보면 규모가 가지런하고  어디 한 군데 법도에 어긋남이 없으니, 이것은 모두가 인공人工(사람이 하는 일)으로 미칠 수 있는 바이다.

그래서 배울 수 있고 도 가능하다는 것이다."

 

남태응은 이 글을 쓴 것이 1732년(영조 8), 46세 때라고 명확히 밝혀놓았다.

이어서 그는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삼화가유평>을 보완한다며 이번에는 세 화가의 작가적 역량에 대해 평했다.

역시 비유법을 동원하였다.

 

"김명국은 그 재주를 충분히 발휘하지 못했고, 그 기술을 끝까지 구사하지 못했다.

따라서 비록 신품이라도 거친 자취를 가리지 못했다.

 

윤두서는 그 재주를 극진히 다했고, 그 기술을 끝까지 다하였다.

따라서 묘妙하기는 하나 난숙爛熟(무르익음)이 조금 모자랐다.

 

이징은 이미 재주를 극진히 다했고, 그 기술도 극진히 했으며 도 난숙했다.

그러나 법도의 밖에서 논할 그 무엇이 없었다."

 

남태응은 이와 아울러 중국의 역사를 끌어와 세 화가의 역량을 비유적으로 평하고 있는데, 중국 역사에 밝지 않은 사람이라면 무슨 말인지 모를 것이고,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무릎을 치면서 적절한 비유라고 감탄하게 될 것이다.

조선시대 문인들은 이 정도로 말하면 다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로 중국 역사에 대한 상식이 있었다.

 

"세 화가를 춘추시대에 비유하면 김명국과 윤두서는 초楚나라·진晉나라가 서로 동맹하여 번갈아 맹주 노릇하는 것과 같다.

김명국은 초나라와 비슷하니 초는 힘[력力]이다.

 

윤두서는 진나라와 비슷하니 진은 의義이다. 의는 오히려 힘쓸 수 있으나 힘은 억지로 할 수 없는 것이다.

 

이에 반해 이징은 진秦과 비슷하니 비록 한편에서는 스스로 우두머리를 차지하지만 감히 동쪽을 바라보면서 진·초에 항거하거나 제후들과 다툴 수는 없는 것과 같다."

 

남태응의 비평적 견해로 볼 때 이징은 테크닉이 뛰어난 화가이기는 해도 김명국이나 윤두서의 예술적 경지에는 못 미친다고 본 것이다.

남들이 이에 동의하든 아니하든 그는 다음과 같이 명확히 말했다.

역시 비유법을 사용했다.

 

"그래서 세 사람으로 하여금 같은 장소에서 나란히 달리게 한다면, 질주할 때는 같이 질주하고, 천천히 달릴 때는 똑같이 천천히 달려 대략 서로 앞뒤가 같을 것이다.

그러나 급기야 분연히 먼지를 일으키며 달리고자 한다면 이징은 거의 맨 뒤에서 눈을 휘둥그레 뜨고 이들의 뒷모습만 바라봐야 할 것이다."

 

이렇게 명확하고, 재미있고, 자신 있게, 그것도 문화사적 지식을 동원한 적절한 비유를 통하여 비평을 하고 있다는 것은 남태응의 뛰어난 비평적 역량이자, 영조 시대 미술문화의 높은 수준을 말해주는 것이다.

 

※출처
1. 유홍준 지음, '명작 순례 - 옛 그림과 글씨를 보는 눈', (주)눌와, 2013
2. 구글 관련 자료
 
2024. 3. 20 새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