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샘(淸泉)

코핀과 스테이시의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 4부 중세에서 근대로 - 10장 중세 말기(1300~1500년) 3: 중세 말기의 사회 변화 본문

글과 그림

코핀과 스테이시의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 4부 중세에서 근대로 - 10장 중세 말기(1300~1500년) 3: 중세 말기의 사회 변화

새샘 2024. 3. 20. 20:18

1381년에 일어난 잉글랜드의 와트 타일러의 난(사진 출처-위키백과  https://ko.wikipedia.org/wiki/%EC%99%80%ED%8A%B8_%ED%83%80%EC%9D%BC%EB%9F%AC%EC%9D%98_%EB%82%9C)

 

굶주림, 흑사병, 전쟁 등은 중세 말기 유럽의 사회 질서에 엄청난 압박을 가했다.

혁명이 일어나지 않은 것이 오히려 놀라울 정도였다.

그렇지만 1500년의 유럽은 200년 전에 비해 크게 달라져 있다.

물론 이 모든 변화가 흑사병의 직접적인 결과로 나타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거의 모든 변화의 배후에서 흑사병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반란과 폭동

 

흑사병의 경제적 결과는 궁극적으로 살아남은 자들에게 유리한 것이었다.

그러나 유럽 사회는 흑사병의 여파로 조성된 새로운 세계에 쉽게 적응하지 못했다.

1350~1425년에는 몇백 건의 대중 반란이 일어나 중세 말기 유럽을 뒤흔들었다.

1358년 프랑스 파리 Paris 부근의 농민들은 방화, 살인, 강간 등을 저지르며 영주에게 반기를 들었다.

'자크리 Jacquerie'로 알려진 농민의 반란이었다(프랑스의 지배계급은 프랑스 농민을 '자크'라는 이름으로 희화화해 불렀다).

1381년 잉글랜드에서도 농민, 기술공, 도시 거주자의 대대적인 반란(와트 타일러의 난 Wat Tyler's Rebellion, '농민반란'으로 잘못 알려져 있다)이 런던 London을 휩쓸었다.

그들은 농노제 철폐, 고정 지대, 프랑스에서의 불리한 전쟁에 대한 책임 추궁 등을 요구했다.

1378년 피렌체 Firenze(영어 Florence)에서는 모직 산업에 종사하던 노동자(치옴피 Ciompi)가 높은 실업률과 고용주(양모 산업과 피렌체 정부를 지배했다)의 빈번한 속임수에 시달리다가, 세금 감면, 완전고용, 도시 정부에서의 정치적 대의권 등을 요구하면서 도시 지배권을 장악했다.

그러나 6주가 지난 뒤 치옴피는 세력을 잃었고, 고용주로 구성된 새로운 정부는 모든 개혁 조치를 철회해버렸다.

 

이들 반란의 동기는 모두 제각각이었다.

하지만 이 시기에 발생한 몇백 건의 반란에는 공통점이 있었다.

가장 중요한 사실은 이들 반란이 빵을 요구한 것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반란에 가담한 사람들은 가난하지 않았고 그들의 요구 대부분은 생활필수품에 관한 것이 아니었다.

1381년 잉글랜드의 와트 타일러의 난과 1408년 독일 뤼베Lübeck에서의 반란처럼 일부 반란은 새로 도입된 높은 세금 때문에 촉발되었다.

자크리나 치옴피의 반란 같은 경우는 인기 없는 정부가 파벌주의와 군사적 패배로 허약해졌을 때 일어났다.

 

역사가 새뮤얼 콘 Samuel Cohn Jr.이 지적했듯이

"곤궁함과 봉건적 강탈이 아닌, 정략, 배신, 부패야말로 반란을 촉발시킨 불똥이었다.

자크리를 초래한 것은 귀족들의 정치적 실패였다.

그들은 잉글랜드인과 프랑스 섭정의 공격으로부터 마을을 방어하는데 실패했고 적과 내통해 농민의 재산을 마구 약탈했다."

 

마찬가지로 농민반란의 배후에는 프랑스에서의 잉글랜드 군대의 패배, 그리고 14세의 국왕 리처드 2세 이름으로 다스리던 지배층의 부패가 패배를 초래했다고 하는 반란자들의 확신 등이 가로놓여 있었다.

동일한 관점은 이 시기의 많은 도시 반란에도 적용된다.

새뮤얼 콘이 지적했듯이

"기술공과 노동자가 직접 고용주를 공격한 경우는 거의 없었다.

대신 그들의 폭동은 정치를 겨냥했다.······

이 시기의 반란들은 지배 귀족 및 상인 과두寡頭(적은 수의 우두머리) 세력의 오만, 폭력, 부패에 대한 공격이었다."

 

그러므로 이 시기의 사회적·정치적 불안의 배후에는 가난과 굶주림이 아니라, 흑사병에서 비롯된 변화된 경제 환경 속에서 촌락 공동체와 도시 노동자가 누렸던 번영과 자신감이 가로놓여 있었다.

삶의 사회적·정치적 조건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고자 했던 반란자들의 소망은 대부분 좌절되었다.

왕, 귀족, 도시 과두 세력은 반란이 일어나면 일시적으로 주눅 들기도 했지만 시간이 흐른 뒤에는 거의 언제나 통제력을 되찾고 지배권을 재확립했다.

1425년 이후 대중 반란의 횟수는 줄어들었다.

그러나 결코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었다.

중세 말기에 확립된 대중 반란의 전통은 그 후 200년 동안 유럽인의 삶에서 중요한 특징으로 남았다.

 

 

○중세 말기의 귀족생활

 

중세 말기의 일부 영주는 흑사병으로 인해 조성된 새로운 세계에 적응하는데 실패했다.

곡물 가격이 떨어지고 지대 수입은 오르지 않는데다 노동자와 하인의 임금까지 상승하면서 영주의 재산은 크게 줄어들었다.

그러나 중세 말기는 귀족에게 결코 위기의 시대가 아니었다.

오히려 15세기 유럽의 대귀족 가문들은 대체로 200년 전에 비해 한층 부유해졌다.
흑사병도 중세 전성기에 귀족계급이 유럽 사회에서 확립한 지배적 지위를 손상시키지는 못했다.

하지만 흑사병은 귀족의 세계를 좀 더 복잡하고 불확실하게 만들었다.

그 시기에는 귀족다운 생활방식을 영위하기 위한 비용이 급속히 상승하는 추세였기 때문이다.

그 결과 중세 말기 귀족계급은 흑사병 이전에 비해 자신의 부와 사회적 지위가 불안정해졌다고 느꼈다.

이와 같은 불안정성은 중세 말기 귀족들의 삶의 거의 모든 국면을 물들이고 있었다.

 

유럽 대부분의 귀족 가문은 중세 전성기에 그랬듯이 그들의 수입을 방대한 규모의 토지에서 얻고 있었다.

그러나 중세 말기의 많은 영주는 비농업적인 수입원을 늘리는 데도 힘을 쏟았다.

카탈루냐 Catalunya(영어 Catalonia), 이탈리아, 독일, 잉글랜드 등지에서 귀족이 모험적인 상업에 투자하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그러나 프랑스와 카스티야에서는 소매업에 직접 손대는 것을 사회적 품격이 떨어지는 일로 간주했고, 따라서 전통 귀족 가문에서는 이를 회피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업에서의 성공은 (프랑스와 카스티야 Castilla에서조차도) 귀족계급으로 진입할 수 있는 하나의 통로였다.

하지만 성공한 상인이 왕이나 제후로부터 '귀족의 지위'를 얻을 경우, 과거의 직업을 포기하고 귀족다운 생활방식에 적응할 것이 기대되었다.

지방의 성이나 도시의 궁정에서 사치에 물든 귀족에 둘러싸여 살면서 기사도의 가치와 관습—가문의 문장紋章을 포함—을 받아들이고, 궁정과 전쟁에서 제후를 섬겨야만 했다.

왕이나 주군에 대한 봉사는 중세 말기의 귀족계급에게 더욱 강력하게 요구되었다.

귀족의 부는 지배자만이 수여할 수 있는 은사와 호의—세금 감면과 유리한 결혼을 포함—에 상당 부분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귀족의 지위를 유지한다는 것은 여전히 불안하고 힘든 일이었다.

무엇이 사람을 귀족으로 만들어주는가?

귀족계급이 명료한 법적 특권을 누리는 국가에서는 선조가 귀족임이 입증되고 공인된 문장이 있으면 법적으로 귀족 가문의 자격을 인정받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이런 종류의 합법적 귀족계급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배타적·폐쇄적이지 않았다.

15세기 카스티야와 나바라 Navarra에서 전체 인구의 10~15퍼센트가 이 조건에 부합하는 귀족이라고 주장했다.

폴란드 Poland, 헝가리 Hungary, 스코틀랜드 Scotland에서 법적 특권을 지닌 귀족은 약 5퍼센트에 달했다.

반면 잉글랜드와 프랑스에서는 1~2퍼센트만이 귀족 지위에 따르는 법적 특권을 주장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귀족계급이란 한 개인의 고상한 생활방식에 의해 사회적 신분이 표시되는 존재였다.

기사도, 품격, 정치적 영향력, 하층민과의 차별성, 부의 화려한 과시 등이 모두 합쳐져서 한 가문의 명예를 만들고 이로부터 귀족으로서의 차별성을 얻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귀족 가문과 비귀족 가문의 사회적 구분이 선명하지 않은 경우가 빈번했다.

신흥 부호는 귀족을 조상으로 두지 않았어도 귀족처럼 살 수 있었다.

한미한 가문 출신의 남성은 왕에 대한 봉사를 통해 귀족의 지위에 오를 수 있었다.

반면 오랜 전통의 기족 가문은 상속인의 파산이나 정치적 판단 착오로 졸지에 파멸할 수 있었다.

전쟁터에서도 귀족의 우월성은 위협을 받았다.

중세 말기 군대에서 하층계급 병사, 궁수, 대포 전문가의 중요성이 커지면서 기마 귀족 기사의 지위는 흔들리고 있었다.

귀족계급의 천부적인 우월성에 대한 매우 급진적인 비판도 제기되었다.

1381년의 잉글랜드 반란자들은 이렇게 물었다.

"아담이 땅을 파고 이브가 실을 낼 때 누가 젠틀맨이었는가?"

 

중세 말기 귀족계급의 지위에 논란의 여지가 다분했던 까닭에, 귀족 신분임을 주장하는 자들은 지위의 배타성과 사회적 차별성을 주장하기 위해 정교한 방책을 강구했다.

중세 말기 귀족은 높이가 14미터나 되는 식탁 장식물을 설치하고 여러 날에 걸쳐 몇백 가지 요리가 등장하는 호화스런 잔치를 열었다.

그들은 사치스럽고 값비씬 옷을 걸쳤다.

남성은 몸에 꼭 끼는 상의에 스타킹과 길고 뾰족한 구두를 신었고, 여성은 켜켜이 싼 비단 옷을 입고 화려한 꽃 줄로 만든 머리장식을 드리웠다.

그들은 엄청난 수의 가솔家率(식솔食率)(1400년 무렵 프랑스의 베리 공작은 사냥개 400쌍과 1,000명의 하인을 몰고 다녔다)을 거느리고 정교한 의식의 마상 경기와 호화로운 행렬에 참가했는데, 그런 경우 귀족은 13세기 로망스에 등장하는 기사 영웅으로 분장하고 나타났다.

귀족은 저술가와 예술가를 후원함으로써 그리고 때로는 직접 세련된 시인이 됨으로써 자신의 문화적 취향과 우아함을 강조했다.

귀족계급은 인정받을 때에만 존립이 가능했다.

그리고 인정을 받기 위해서 귀족의 지위는 지속적으로 재천명되어야만 했다.

 

지배자는 귀족의 권리 주장을 정당화시켜주었다.

사실 지배자는 귀족계급의 으뜸가는 지지자이자 후원자였다.

유럽의 왕과 제후는 잉글랜드의 가터 기사단(Knights of the Garter 또는 Order of the Garter), 프랑스의 별 기사단(Order of the Star) 같은 기사단을 경쟁적으로 설립했다.

기사단은 전쟁터에서 무용, 충성심, 용맹, 관대, 예의 등 이상적인 기사도의 미덕을 보여준 기사에게 존경심을 표했다.

이들 기사단은 가입 자격이 엄격하게 제한되었지만, 그들이 찬양한 미덕은 마치 귀족계급 전체의 특징이라도 되는 것처럼 간주되었다.

하나의 계급으로서 귀족을 찬양함으로써, 기사단은 귀족계급을 왕과 제후에게 이어주는 연결고리를 강화시켜주었다.

왕과 제후가 추종자인 귀족에게 제공한 수수료, 연금, 결혼 등도 마찬가지 역할을 했다.

귀족 영지에서의 농산물 세입이 감소하던 상황에서, 제후에게 바친 노고에 대한 그 같은 보상은 귀족의 재산 유지를 위해 지극히 중요한 것이었다.

 

중세 말기 귀족이 거행한 정교한 의식을 단순한 연극적 행위—역사가 요한 호이징가 Johann Huizinga의 말을 빌면 "꿈의 환상을 실행에 옮기기 위한 대규모 시도"—라고 간단히 결론 내리기 쉽다.

하지만 그것은 오해이다.

중세 말기 지배자는 귀족계급만이 제공할 수 있는 군사적·외교적·정치적 봉사에 의존하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귀족계급은 왕이나 제후의 궁정에서 행하는 봉사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관직, 세입, 위신, 사회적 승인 등에 의존하고 있었다.

15세기에 왕과 귀족계급 사이에 맺어진 동맹관계는 상호 필요성에 부응한 것이었고, 그것은 앙시앵 레짐 Ancien Régime (영어 Old Regime, 구제도舊制度) 유럽의 가장 특징적이고 지속적인 양상이었다.

프랑스에서는 왕과 귀족계급 사이에 체결된 앙시앵 레짐 동맹이 1789년의 프랑스 혁명까지 지속되었고, 잉글랜드와 독일에서는 제1차 세계대전 발발 무렵까지 지속되었다.

 

※출처
1. 주디스 코핀 Judith G. Coffin·로버트 스테이시 Robert C. Stacey 지음, 박상익 옮김,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상): 문명의 기원에서 종교개혁까지, Western Civilizations 16th ed., 소나무, 2014.

2. 구글 관련 자료

 

2024. 3. 13 새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