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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디애나 존스로 재탄생한 미국의 실크로드 약탈자

새샘 2024. 3. 26. 10:20

(왼쪽)랭던 워너와 (오른쪽)인디애나 존스. 페도라(중절모)를 쓴 인디애나 존스는 고고학자를 상징하는 시그니처 이미지가 되었다.(사진 출처-출처자료1)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고고학자의 이름을 하나만 대보라고 하면 누가 가장 먼저 떠오르는가?

주저 없이 '인디애나 존스 Indiana Jones?'라고 답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 대답에 '인디애나 존스가 진짜 고고학자였어?'하며 놀라지 마시길.

그는 영화 속 주인공일 뿐이다.

그렇다고 실제 고고학자와 전혀 관련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그 이유는 차근차근 설명하기로 하자.

 

영화의 대중적인 인기에도 불구하고 고고학계에서 평가하는 인디애나 존스는 그리 우호적이지 않다.

지나치게 서구 중심적인데다가 제국주의 국가의 약탈을 합리화하는 캐릭터 character(특징물)이기 때문이다.

인디애나 존스에는 제국주의가 발흥하던 20세기 중반까지 서구에서 일반적으로 통용되었던 고고학자의 이미지가 압축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대체로 10여명 이상의 실제 고고학자들이 그 안에 녹아 있다고 알려져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영향을 주었던 인물로 꼽히는 이는 랭던 워너 Langdon Warner이다.

랭던 워너는 미국인 최초로 실크로드 silk road(비단길)를 탐험해 유명해졌고 대중적인 인기를 얻었다.

태평양전쟁 당시에는 일본 고고학 전공자로 활약해 일본에서 그는 지금까지도 일본의 문화재를 지켜낸 영웅으로 대접받는다.

하지만 랭던 워너의 실상은 알려진 것과는 많이 다르다.

인기 영화에 가려진 20세기 서구 고고학자들의 실제 모습을 랭던 워너를 통해 되짚어보자.

 

 

○미국의 때늦은 실크로드 탐사

 

20세기 초반 중국 신장新疆 일대의 실크로드는 그야말로 서구 고고학자들의 각축장이었다.

중앙아시아를 두고 100여 년 동안 벌어진 영국과 러시아의 '그레이트 게임 Great game(중앙아시아의 패권을 둘러싼 영국과 러시아의 경쟁이자 냉전을 총칭하는 용어)' 이후 실크로드에 본격적으로 탐험가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러시아에서는 니콜라이 프르제발스키 Nikolai Przheval'skii가, 이에 맞서 서유럽에서는 스웨덴의 스벤 헤딘 Sven Hedin과 영국의 오렐 스타인 Aurel Stein을 비롯한 여러 나라의 실크로드 탐험가들이 실크로드 유적 발굴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한참 늦은 1923~25년 미국도 실크로드 탐험에 나섰다.

미국의 실크로드 탐험대는 하버드대학의 고고미술사 교수인 랭던 워너가 이끌었다.

워너는 일본의 미학자 오카쿠라 덴신(강창천심岡倉天心)에게 사사師事한(스승으로 섬긴) 일본 전문가였지 실크로드 전문가는 아니었다.

하지만 하버드대학 부설 박물관인 포그 박물관 Fogg Museum(또는 포그 미술관)에서 실크로드의 유물을 채우기 위한 예산을 편성했고, 이에 워너는 당시 서구의 탐험가들이 가장 많이 모여들어 유물을 가져간 간쑤회랑(감숙회랑甘肅回廊)의 둔황(돈황敦煌)석굴(막고굴莫高窟)을 목적지로 정했다.

 

워너 탐험대는 여러모로 운이 좋지 않았다.

20세기 초반부터 둔황은 실크로드의 보물창고로 소문이 자자했다.

영국, 독일, 프랑스, 러시아 등의 탐험대가 경쟁적으로 둔황 일대에 찾아왔고, 들고 갈 수 없는 유물 대부분을 가져가버렸기 때문에 남아 있는 것이 거의 없었다.

뒤늦게 경쟁에 뛰어든 워너 탐험대는 유물이 없으니 벽화라도 뜯어가기로 했다.

 

실크로드의 벽화는 서양 탐험대 이전부터 끊임없는 수난을 겪었다.

누군가 금칠을 한 벽화에서 금만 긁어가기도 했고, 불교를 믿지 않는 위구르인 Uyghur people(웨이우얼족)들이 우상숭배라며 벽화를 파괴한 적도 있다.

러시아의 백군白軍(10월 혁명으로 집권한 러시아 볼셰비키에 대항하여 러시아 내전에서 싸운 반혁명세력으로서, 적색을 상징으로 삼은 볼셰비키나 붉은군대에 대비하여 붙여진 이름)들은 심지어 벽화에 낙서를 하기도 했다.

하지만 벽화를 손상시키는 것과 벽화를 뜯는 건 차원이 다르다.

게다가 더 큰 문제는 워너 탐험대에게 벽화를 떼어내는 기술이 없었다는 데 있다.

그들은 검증되지 않은 수법으로 무리하게 벽화 26점을 떼어냈다.

그 결과 둔황석굴에는 극히 일부의 벽화만 남게 되었다.

하버드대학 포그 박물관의 설명에 따르면 현재 여섯 개 굴에서 떼어온 11점의 벽화가 남아 있는데, 그나마도 절반 가까이는 상태가 굉장히 좋지 않다고 한다.

 

문화재를 보호하고 지켜야 할 고고학자가 문화재 파괴에 앞장섰으니 이는 최악의 발굴 참사라고 해도 할 말이 없다.

워너 탐험대는 벽화를 뜯은 흉측한 흔적과 함께 실크로드 최악의 탐험대라는 지워지지 않는 오명을 남겼다.

물론 워너의 입장에서도 할 말은 있다.

다른 실크로드 탐험대들이 문서를 비롯해 들고 갈 수 있는 유물을 다 털어갔으니 워너 탐험대만 비난하는 것이 그들의 입장에서는 억울할 수도 있다.

비유하면 대도大盜들이 다 털어간 후 뒤늦게 들어간 좀도둑이 모든 죄를 뒤집어쓴 격이다.

 

워너 탐험대는 자신들에게 쏟아지는 비판에 중국 정부가 조직적으로 탐험대를 방해했고 조력자인 줄 알았던 중국인 동료는 사실 스파이였다고 항변했다.

하지만 이마저도 실제와 많이 달랐다.

워너가 죽은 뒤 공개된 자료에 따르면 당시 미국에 호의적이었던 중국 정부는 워너의 발굴에 제대로 협조했으며 워너가 지목한 중국인 동료인 베이징대학의 천완리(진만리陳萬里) 교수도 상당한 도움을 주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사실 워너의 탐험대를 방해한 것은 중국 정부가 아니라 현지 주민들이었다.

천완리가 쓴 조사 보고서에 중국 최고의 역사가 구제강(고힐강顧頡剛/顾颉刚)이 쓴 서문을 보면 현지 주민의 방해로 원하는 뜻을 이루지 못해 유감이라고 밝히고 있다.

워너 탐험대의 근본적인 문제는 제대로 된 현지 정보가 없었던 데에 있다.

당시 신장의 실크로드는 거듭된 전란과 굶주림으로 사람들이 굶어죽을 정도인데다 몇십 년 동안 이어진 약탈로 외부인에 대한 주민들의 반발이 거셌다.

이런 현지 상황에 대한 이해와 준비 없이 감행한 탐험이었으니 주민들이 곱게 볼 리가 없지 않은가.

그럼에도 중국 정부의 방해를 구실로 내세우며 거짓말을 한 것은 아마도 자신들의 실패를 변호하기 위해서였던 것 같다.

 

 

○고고학자의 시그니처가 된 랭던 워너

 

객관적으로 볼 때 실패에 가까운 성과를 낸 워너 탐험대였지만 유럽의 각축장으로만 여겨졌던 실크로드 발굴에 미국이 도전장을 냈다는 사실만으로도 미국 사회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워너의 모험을 담은 책 ≪중국으로 가는 길고 오랜 길 The Long Old Road in China≫은 대중들에게 큰 인기를 얻었다.

워너의 시그니처 signature(대표) 사진이라고 할 만한, 페도라 fedora(중절모中折帽)를 쓰고 실크로드에서 발굴을 하는 모습은 세상의 어떤 고고학자보다 인디애나 존스와 닮았다.

워너의 여정 또한 중국과 티베트가 배경인 <인디애나 존스> 1편, 2편의 여정과 비슷하다.

현지 중국인의 방해, 유적지 근처의 굶주린 농민들, 주인공인 미국 유명 대학의 교수가 유물을 미국으로 가져오는 스토리 등 영화에 표현된 여러 클리셰 cliché(뻔한 설정·표현·상황·연출 등) 역시 워너의 탐험과 상당히 비슷하다.

 

워너뿐만 아니라, 20세기 중반까지 세계의 여러 고대문명을 탐험하던 서양 고고학자 모두가 인디애나 존스의 모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수많은 서양의 인디애나 존스가 누린 화려한 성공 뒤에는 희화화되고 폄하된 식민지 사람들, 그들에게 약탈당했던 현지인들이 있었다.

그들이 활동하던 시기에 한국 역시 일본인에 의한 문화재 약탈을 속절없이 당하고만 있었으니, 이는 곧 우리의 모습이기도 하다.

만약 당시 서양인의 관심이 실크로드가 아니라 한국이었다면 아마 고구려의 고분이 도굴되고 신라의 석굴암도 무사하지 못했윽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1954년 맺어진 문화재 보호를 위한 '1954 헤이그 협약 Hague Convention'이 체결된 이후 더이상 인디애나 존스와 같은 사람은 등장하지 않았다.

현실 사회에서 인디애나 존스는 솔직히 말해 고고학을 빙자한 범법자일 뿐이다.

하지만 최근까지 영화의 속편이 제작되는 등 서양 고고학자에게 씌워진 레이더스 raiders(약탈자) 이미지를 미화하는 일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교토를 지킨 '워너 리스트'의 실체

 

랭던 워너가 둔황에서 훔쳐온 관음보살상. 하버드대학 박물관의 주요 전시품 중 하나다.(사진 출처-출처자료1)

 

실크로드에서는 약탈자의 대명사로 낙인찍힌 랭던 워너지만, 바다 건너 일본에서 랭던 워너는 일본의 문화재를 원자폭탄의 위협에서 지켜낸 사람으로 유명하다.

그는 일본 전공이라는 전문성을 살려 제2차 세계대전 중 미군에서 기념물, 미술품, 기록물 전담반으로 활동했다.

이들은 일본, 독일, 이탈리아 등 적국의 문화재를 관리하기 위해 조직된 특수부대로 흔히 '모뉴먼츠 맨 Monuments Men'이라고 불렀다.

그들의 이야기는 <모뉴먼츠 맨: 세기의 작전 The Monuments Man>(2014)이라는 영화로도 만들어진 바 있다.

 

워너는 일본의 중요 문화재 151점을 정리한 '워너 리스트 Warner's List'를 작성했다.

그 목록으로 상부를 설득해 미국이 원래 핵을 투하하기로 결정했던 교토(경도京都)가 투하 직전 제외되었고, 그 덕에 천년고도 교토가 지금의 모습을 유지할 수 있었다고 한다.

독일의 '쉰들러 리스트'를 연상케 하는 극적인 스토리로 전후 일본은 워너를 신격화했고, 1955년 교토와 가마쿠라시(겸창시鎌倉市)에 그의 추모비까지 세우기도 했다.

 

하지만 워너 교수의 영웅적 미담은 상당 부분 만들어진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말기 소련의 동아시아 전출이 가시화되자 미국은 이미 패색이 짙어진 일본 본토에 원자탄을 투하해서 전쟁을 빨리 종결지으려는 계획을 세운다.

미군이 설정한 원폭 투하 도시의 조건은 인구 100만 명 이상에 공업이 발달한 도시였다.

1940년 기준으로 일본에서 인구 100만 명 이상의 도시는 도쿄, 오사카, 나고야, 교토 등 4개 도시였다.

그중 도쿄는 일왕이 있으므로 그곳을 겨냥해 폭격할 경우 분노한 일본인들이 어떤 극단적인 반발을 할지 모른다는 판단 아래 배제되었다.

반면 교토는 별로 폭격을 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방공시설이 없을 것으로 예상되어 유력한 후보지로 떠올랐다

지금은 세계문화유산이 17개나 있는 교토지만 당시 미군 수뇌부 인사 중 교토가 역사도시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실제 교토의 폭격을 막은 사람은 당시 전쟁장관 Secretary of Wars(현 육군장관)인 헨리 스팀슨 Henry Stimson이었다.

스팀슨은 전쟁 전 교토에서 근무한 경력을 바탕으로 대통령과 면담까지 하는 노력 끝에 핵폭탄 투하 2주 전에 교토를 극적으로 명단에서 제외할 수 있었고, 대신 나가사키가 선택되었다.

앞서 원폭 투하 조건 도시에서도 언급했듯 히로시마나 나가사키 둘 다 애초에 고려 대상 도시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잔혹한 운명이 그 두 도시를 선택하고야 말았다.

 

그렇다면 랭던 워너가 작성한 리스트는 무엇일까.

그것은 폭격 방지용이 아니라 미국이 일본 본토에 상륙하여 적국의 문화재를 접수할 때를 대비한 목록이었다.

모뉴먼츠 맨의 가장 큰 역할은 전쟁의 포화 속에서 유물들을 지켜내고 보존하는 것이다.

실제로 이런 전문가들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많은 유물들이 살아남은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상대국의 유물을 전리품으로 얻기 위한 국가 간 치열한 경쟁이 있었다.

'워너 리스트'는 적국의 도시를 접수한 뒤 가장 귀중한 유물만을 골라 노획품으로 가져가기 위해 작성된, 전쟁을 앞세워 합법적인 약탈을 하기 위한 자료였던 셈이다.

우리가 잘 아는 하인리히 슐리만 Heinrich Schliemann이 발굴한 트로이의 황금 유물도 베를린 침공 때 소련의 모뉴먼츠 맨이 미국을 따돌리고 먼저 노획한 까닭에 현재 러시아에 있다.

미국은 전쟁 직후 핵폭탄 투하에 따른 일본 여론의 악화를 막기 위해 '워너 리스트'라는 신화를 만들었다.

일본의 문화재를 접수하기 위한 목록을 작성한 사람이 지일파 이미지로 둔갑하여 널리 선전되고 기념비까지 세워졌으니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렇듯 인디애나 존스로 대표되는 20세기 서구 고고학자들의 행위는 미화되고 선전되어왔다.

지금도 하버드대학 박물관에는 워너가 실크로드에서 가져온 보살상이 주요 전시품으로 소개되고 있다.

그러나 그 아름다움에 대한 설명만 있을 뿐 워너 탐험대가 했던 활동의 자세한 경위는 빠져 있다.

반면 둔황 막고굴에는 워너 탐험대가 뜯어간 벽화의 흔적이 그대로 보존되어 서양인들이 실크로드 유물을 약탈한 대표적인 예로 전시되고 있다.

 

인디애나 존스의 모델이 되었던 워너의 실제 활동은 대중들이 생각하는 신나는 모험이 가득한 고고학이라는 이미지의 이면에 감춰진 진실을 잘 보여준다.

그 멋지고 용감한 캐릭터는 오랫동안 동양에 대한 편견을 드러내는 오리엔탈리즘 orientalism(동양주의東洋主義: 제국주의적 관점에서 바라보는 동양편견주의), 전쟁으로 희생되는 식민지, 약탈된 유물 등 어두운 면을 감추는 역할을 해왔다.

인디애나 존스는 어쩌면, 서구 열강의 제국주의가 마지막으로 남긴 일그러진 히어로 hero(영웅)일지도 모른다.

 

※출처

1. 강인욱 지음, 테라 인코그니타, (주)창비,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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