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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해부학의 창시자 베살리우스

새샘 2024. 4. 7. 21:00

벨기에 출신인 안드레아스 베살리우스 Andreas Vesalius(1514~1564)는 어릴 때부터 해부를 좋아해 개, 고양이, 쥐 등 주변에 있는 동물들을 가리지 않고 해부하곤 했다.

해부학을 본격적으로 공부하기로 결정한 그는 파리 의대에 들어갔지만 크게 실망했다.

의대 교수들이 직접 해부하지 않고 갈레노스 Galenos(영어: 갈렌 Galen)의 책만 구구절절 읽어 내려갔기 때문이다.

그들은 갈레노스라는 안경을 끼고 인체를 바라보았다.

간혹 해부 과정에서 갈레노스 이론과 맞지 않는 소견이 발견되어도 그것은 해부 사체만의 특징이라고 무시했다.

답답한 파리 의대 생활은 해부학에 대한 갈증을 더욱 키우기만 하여 베살리우스는 공동묘지에서 사체를 가져다 홀로 해부학을 연구하기도 했다.

이탈리아 파도바 대학 Università degli studi di Padova(UNIPD)으로 자리를 옮긴 그는 능력과 열정을 인정받아 그곳에서 23세에 해부학 교수가 되었다.

파리 의대에서 학생으로서 느꼈던 불만족스러운 경험을 바탕으로 베살리우스는 학생들을 최선을 다해 가르쳤다.

그의 수업 방식 중 가장 특별한 점은 교수 자신이 직접 해부하면서 해부학 강의를 한다는 점이다.

드디어 직접 해부하는 의사가 나타난 것이다.

 

6장으로 된 '해부 도보'의 일부(사진 출처-출처자료1)

 

베살리우스는 교육뿐 아니라 해부학 연구에도 열정적으로 매달렸다.

화가 친구인 칼카르 Jann Stephen van Calcar와의 공동작업으로 1538년 6장으로 된 '해부 도보 Tabulae Anatomicae'를 발표했다.
칼카르는 위대한 예술 티치아노 Tiziano의 제자였다.

'해부 도보'는 자세한 인체 해부 그림이 있는 해부학 해설서였는데, 그런 식의 사실적인 표현은 처음이어서 인기가 많았다.

하지만 '해부 도보'에는 베살리우스가 현실과 타협한 부분이 있었다.

실제로는 관찰되지 않았던 '5등분된 간'이나 '뇌의 괴망'이 묘사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소견들은 갈레노스가 주장했던 것들이다.

베살리우스는 기존 의학자들의 반발과 적대감을 피하기 위해 처음에는 어느 정도 갈레노스의 이론을 따랐다.

 

'해부 도보'로 명성을 얻기 시작할 무렵 베살리우스에게 갈레노스의 '해부학'에 대한 개정판의 원고 의뢰가 들어왔다.

베살리우스는 그동안 출간된 갈레노스의 책들을 모아 꼼꼼히 검토하는 동안 몇 가지 오류를 발견했다.

갈레노스는 인간의 아래턱뼈가 두 개로 갈라져 있다고 했으며, 간은 5등분되어 있고, 뇌 안쪽에 괴망이라는 그물 같은 혈관망이 있다고 주장했다.

베살리우스는 그동안 자신이 해부한 인간의 사체에서 그런 소견을 발견한 적이 없었다.

어떻게 된 것일까?

어릴 때부터 해부를 좋아해 많은 동물의 신체 구조를 알고 있었던 베살리우스는 깨달았다.

그것들은 모두 동물의 소견이었다.

그렇다.

갈레노스는 인체를 해부한 적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왜 이 사실을 아직까지 깨닫지 못했을까?

동물 해부 소견을 사람의 것으로 착각하고 갈레노스의 권위에 눌려 모든 의학자들이 1,500년을 지내온 것이다.

어릴 때부터 동물을 해부하고 스스로 인간의 사체를 해부했던 베살리우스만이 발견할 수 있었던 커다란 오류였다.

이제부터 베살리우스에게는 갈레노스를 벗어난 새로운 해부학의 시대를 열어야 하는 사명이 주어졌다.

 

베살리우스가 지은 '파브리카'의 속표지(사진 출처-출처자료1)

 

한때 의대생이었던 코페르니쿠스 Nicolaus Copernicus(1473~1543)가 세기의 걸작 ≪천체의 회전에 관하여≫를 통해 지동설을 세상에 소개했던 1543년 베살리우스는 해부도 300여 개가 담긴 걸작 ≪인체의 구조에 대하여 De humani corporis fabrica≫를 세상에 내놓았다.

제목의 라틴어 마지막 단어를 따서 그냥 ≪파브리카라고도 한다.

파브리카는 구조라는 뜻이다.

베살리우스가 완성한 필생의 역작 속표지 삽화를 들여다보자.

그림 한가운데 기존의 의대 교수가 길다란 지시봉을 들고 앉아 있다.

그런데 해골이다!

본인의 지식이 아니라 고대 의학자의 의견을 맹목적으로 따르는 기존의 의대 교수들을 해골로 묘사한 것이다.

해골 교수가 지시봉으로 가리키는 시신의 왼쪽에 하위 계층의 이발사나 외과의가 아닌 베살리우스 본인이 서 있다.

그는 묘한 표정으로 앞쪽을 응시하고 있다.

"잘 봐. 이제부터 깜짝 놀라게 될 거야."라고 말하는 것 같다.

그림의 좌우에는 갈레노스가 해부할 때 주로 대상으로 삼았던 원숭이와 강아지가 다행인지 지켜보고 있다.

베살리우스는 책 전반에 걸쳐 이런 유머 감각을 잃지 않았다.

≪파브리카≫가 일반인에게도 매우 인기 있었던 이유다.

 

'파브리카' 2권 근육 편. 정밀한 묘사가 매우 뛰어나다.(사진 출처-출처자료1)

 

663쪽의 분량을 자랑하는 베살리우스의 ≪파브리카≫는 모두 7권이다.

1권은 골격으로, 뼈만 있는 인간이 재미있고 상징적인 여러 자세를 취하고 있는데, 그 상태에서 뼈의 위치와 모양이 아주 상세히 묘사되어 있다.

2권은 가장 인기가 많았던 '근육'편이다.

인간이 가진 여러 겹의 근육을 베살리우스는 밖에서부터 한겹 한겹 벗겨내며 보여준다.

사람들은 그림의 주인공을 '근육맨 muscle man'이라 부르며 좋아했다.

재미있었던 것은 근육이 한 겹씩 줄어들 때마다 근육맨이 서 있는 배경 그림도 점점 황폐해지면서 겨울로 변해가는 유머 코드였다.

당시 ≪파브리카≫의 배경이 되었던 파도바 대학의 언덕은 많은 의사와 일반인들이 찾아오는 관광 명소였다고 한다.

오늘날이었다면 그 언덕은 근육맨과 같은 자세를 취하고 SNS 사진을 찍는 사람들로 붐볐을 것이다.

3권은 동맥과 정맥, 4권은 신경인데, 베살리우스는 갈레노스가 뇌 깊숙한 곳에 있다고 주장했던 혈관망(괴망)을 과감히 삭제하고 자신의 관찰 결과에 대한 확신을 보여준다.

5권 복부 장기 편에서도 자시의 관찰 결과대로 간을 5엽, 즉 5개의 덩어리가 아닌 2엽으로 정확히 묘사했다.

6권은 흉부 장기, 7권은 뇌였다.

이처럼 ≪파브리카≫는 정확하고 섬세한 묘사로 당시 의사뿐 아니라 일반인에게도 큰 충격을 준 멋진 걸작이었다.

 

베살리우스의 ≪파브리카≫에 대한 사회적 파장은 엄청났다.

삽화가 매우 예술적이면서도 재미있었기 때문에 의사가 아닌 일반인도 가정에 한 권씩 두고 보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베살리우스의 인기와 권위는 하늘을 찔렀다.

하지만 그의 업적은 기존 해부학 교수들의 권위를 손상시키면서 이룩한 것이었다.

따라서 평생 갈레노스의 이론을 바탕으로 제자들을 가르쳐왔던 타대학 의대 교수들은 그에게 엄청난 비난을 쏟아냈다.

한 가지 교과서로 몇십 년을 가르쳐온 선생들에게 그 교과서에 틀린 내용이 수두룩하다는 한 젊은 선생의 지적은 어떻게 받아들여졌을까?

베살리우스는 결국 의대 교수직을 사임해야 했다.

다행히 사회적 명성에 힘입어 황제의 주치의가 될 수 있었지만 황제의 주치의 역시 한 명이 아니었다.

황궁에서도 비난과 견제가 끊이지 않았다.

베살리우스가 해부하던 중 사체가 움직이는 것을 보고는 산 사람을 실수로 해부했다는 음해를 당하기도 했다.

사체의 몸이 굳을 때 발생하는 경직 현상이었는지 실제로 산 사람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그는 황제의 궁에서 쫓기듯이 도망 나와 1564년 성지순례를 떠났다.

그리고 돌아오지 못했다.

성지순례 후 돌아오던 중 풍랑을 만나 지중해의 한 섬에서 표류하다 사망했다고 하다.

그의 나이 49세, 너무 젊은 나이였다.

 

베살리우스는 새로운 '해부학'의 시대를 열었다.

그는 직접 메스를 들고 인체를 해부함으로써 의심 없이 전해오던 갈레노스 해부학의 오류를 바라잡고, 근대적이고 과학적인 해부학을 보여주었다.

우리 몸에 병이 나면 어디가 어떻게 고장 났는지 살펴보는 것, 즉 병의 원리를 연구하는 학문이 '병리학'이다.

또한 고장을 수리하려면 평상시에 어떻게 작동하는지 알아야 하는데, 이것을 생명의 이치를 연구하는 '생리학'이라 한다.

병리학과 생리학이 발달하려면 인체 구조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이다.

그래서 해부학은 모든 의학 발전의 기반이 된다.

베살리우스의 해부학에서 본격적인 근대 의학이 시작되는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출처
1. 김은중, '이토록 재밌는 의학 이야기'(반니, 2022)
2. 구글 관련 자료

 

2024. 4. 7 새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