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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과 그림

겸재 정선 "우화등선" "웅연계람"

새샘 2024. 3. 29. 13:06

<임진강에 보름달이 떴다. 시와 그림으로 만나자꾸나>

 

정선, (위)우화등선, 35.5x96.6cm, (아래)웅연계람, 연강임술첩, 35.5x96.8cm, 1742년, 종이에 담채, 개인(사진 출처-출처자료1)

 

정선, 우화등선 부분

 

겸재謙齋 정선鄭敾(1676~1759)은 진경산수眞景山水(조선 후기에 유행한 우리나라에 실재하는 산천 경관의 사생寫生에 주력하는 화풍)라는 한국적인 산수화 양식을 확립한 대가이다.

만약 겸재가 없었다면 한국회화사가 어찌 되었을까 상상할 수도 없다.

그러나 겸재는 화가의 천분을 타고나지는 않은 듯, 그의 작품에는 천재적 기질이 보이지 않는다.

 

현재까지 알려진 겸재의 기년작紀年作(제작연도를 알 수 있는 작품) 가운데 진실로 겸재다운 첫 작품은 59세인 1743년 청하현감 시절에 그린 <금강전도金剛全圖>이다.

이후 모친상을 당하여 서울로 올라온 뒤에는 이전과는 전혀 다른 원숙한 경지의 진경산수를 그린다.

63세 때의 <청풍계도淸風溪圖>, 65세 때의 <삼승정도三勝亭圖>에 이르면 겸재는 한 차원 높은 진경산수의 명작으로 보여준다.

그는 참으로 대기만성의 화가였다.

 

이후 그의 창조적 열정은 순풍을 만난 듯 이어졌고 명작을 탄생시킬 계기가 연이어 마련되었다.

1740년 초가을, 65세에 양천현령에 부임한 겸재는 이듬해에 사천 이병연과 시와 그림을 서로 바꾸어보는 ≪경교명승첩京郊名勝帖≫을 제작하였고, 그 다음 해에는 ≪연강임술첩漣江壬戌帖≫이라는 기념비적인 작품을 남겼다.

 

1742년, 67세의 겸재는 직속상관인 경기도 관찰사 홍경보로부터 급히 연천으로 오라는 전갈을 받았다.

홍경보는 경기도 최북단의 고을인 삭령과 연천을 순시하기 위해 배를 타고 임진강 상류를 거슬러 올라가는 중이었는데 강변 곳곳에 펼쳐진 적벽赤壁의 장중한 풍광에 그윽한 시정詩情이 일어났다.

 

때는 마침 송나라 소동파가 <후적벽부後赤壁賦>를 지은 때와 같은 임술녀 시월 보름날인지라 더욱 흥이 일었다.

게다가 연천군수 신유한은 당대의 시인이었다.

이에 홍경보는 관내 고을의 수령인 양천현령 겸재도 불러 함께 뱃놀이하며 시를 짓고 그림을 그리면 더없이 훌륭한 모임이 될 것이라 생각했다.

 

이리하여 이들 셋은 우화정에서 만났다.

여기서 배를 타고 강을 따라 내려와 저녁 무렵 웅연에 닿았다.

이때의 모임을 기념해서 그린 것이 바로 <우화등선羽化登船>과 <웅연계람熊淵繫纜> 두 폭으로 이루어진≪연강임술첩이다.

홍경보는 이 화첩에 서序(요지를 기록한 글)를 지었고, 신유한은 장문의 부賦(생각이나 경관에 대한 느낌을 비유를 쓰지 아니하고 있는 그대로 표현한 글)를 지었다.

 

"높은 암벽 성벽처럼 가팔라서 구름을 꿰뚫었고, 고목의 나뭇가지는 서리를 맞았구나.

 조용히 출렁대며 머뭇머뭇 나아가니 문득 재빨리 바라봐야 굽이진 경치 구경하겠다.

 · · · · · · · ·

 때마침 부드러운 산들바람 홀연히 불어와서 엷은 구름 폈다 말아가고, 둥근 달이 산마루로 솟아오르자 비단 무늬는 

 거울 바닥에 어려 퍼지고 여울 물소리 홀연히 저녁으로 사나워져 노 젓는 소리와 함께 번개 치듯 달려 나간다.

 · · · · · · · ·

 밝은 모래는 마전하듯 덮여 있고, 가린 안개는 비단 장막 이루는데, 말 타고 악기 불며기슭 돌고 기다리는 횃불은

 도시와 같다."

 

겸재는 이러한 광경을 장폭의 화면에 파노라마식으로 전개하면 장대한 진경산수로 그렸다.

우화정에서 배를 타는 장면인 <우화등선>과 웅연에서 내리는 장면인 <웅연계람>을 나누어 그렸는데, 그가 박진감 있는 진경산수를 그릴 때 보여주던 적묵법積墨法(선을 한 번에 그리지 않고 순차적으로 쌓아가듯 칠하는 화법)을 구사하여 흑백을 격렬하게 대비시켰다.

여백으로 남겨둔 누런 비단 바탕은 어둠이 깔린 듯하여 화면에 더욱 진중한 무게감이 감돈다.

 

겸재의 뱃놀이의 사실감을 나타내기 위하여 나룻배를 기다리는 사람, 횃불을 밝혀든 사람, 관찰사의 배를 따라오는 작은 배, 정박해 있는 배, 강변의 정자와 마을 집 등을 세세하게 묘사하였다.

 

그리하여 이 그림은 한 폭의 진경산수화이자 풍속화이며 모임을 기념하는 기록화이면서도 완벽한 감상화로 승화되었다.

진실로 노대가老大家 겸재의 원숙한 필력이 아니고서는 이룩어낼 수 없는 명작이다.

 

겸재는 그림을 세 벌 그려서 세 명이 하나씩 나누어 갖도록 했다고 한다.

그중 두 벌이 전하는데 하나는 관찰사 홍경보 소장본이고 또 하나는 겸재의 소장본으로 생각된다.

관찰사 소장본은 필치가 깔끔한 데 비해 다른 한 폭은 사생풍이 역력하기 때문이다.

먼저 그린 것은 겸재가 갖고 관찰사에겐 보다 정제된 작품을 준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래서 회화적으로 볼 때는 겸재 소장본이 훨씬 박진감 있는 진경산수로 다가온다.

 

나는 이 그림을 보면서 겸재도 겸재지만 겸재가 이처럼 대작을 그릴 수 있도록 창작의 계기를 제공한 관찰사 홍경보에게 감사하는 마음이 일어난다.

그는 진실로 풍류가 무엇인지, 예술이 무엇인지를 아는 교양 높은 사대부였던 것이다.

 

※출처
1. 유홍준 지음, '명작 순례 - 옛 그림과 글씨를 보는 눈', (주)눌와, 2013
2. 구글 관련 자료
 
2024. 3. 29 새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