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샘(淸泉)

코핀과 스테이시의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 4부 중세에서 근대로 - 10장 중세 말기(1300~1500년) 4: 백년전쟁과 중세 말기 국가의 발전 본문

글과 그림

코핀과 스테이시의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 4부 중세에서 근대로 - 10장 중세 말기(1300~1500년) 4: 백년전쟁과 중세 말기 국가의 발전

새샘 2024. 4. 9. 22:17

왕과 귀족계급 사이의 앙시앵 레짐 Ancien Régime(영어 Old Regime, 구제도舊制度) 동맹은 부분적으로는 흑사병으로 조성된 새로운 사회적·경제적 환경에 대한 반응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또한 전쟁의 산물이자, 전쟁이 중세 말기 국가 발전에 미친 영향력의 산물이었다.

14·15세기에는 유럽 사회의 모든 수준에서 거의 끊임없이 전쟁이 지속되었다.

그리고 전쟁을 치르기 위해 각국 정부는 신민에게 세금을 부과할 권력과 신민의 삶을 통제하기 위한 권력을 새롭게 주장했다.

군대 규모는 한층 커졌고 군사 기술은 더욱 치명적인 것이 되었다.

전쟁은 더욱 파괴적으로 되었고 사회는 점점 군사화되었다.

이러한 사태 전개의 결과 1500년에 이르러 유럽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성공적인 국가—특히 포르투갈, 에스파냐, 프랑스 등과 같은 국민적 군주국가—는 200년 전에 비해 훨씬 강력하고 공격적인 팽창주의 국가가 되어 있었다.

1500년 당시 이들 신흥 강대국의 영향력은 주로 유럽에 국한되어 있었지만 1600년에 이르러 전 지구로 확산되었다.

 

 

○잉글랜드, 프랑스, 백년전쟁

 

1328년의 프랑스 왕위 계승(사진 출처-출처자료1)

 

백년전쟁은 중세 말기에 있었던 군사적 충돌 중 가장 규모가 크고 가장 오래 지속된, 그리고 가장 넓은 영역에서 치러진 전쟁이었다.

잉글랜드와 프랑스가 주역을 맡았지만 전쟁의 국면 변화에 따라 유럽 열강 대부분이 여기에 휘말려 들어갔다.

일시적 휴전으로 더러 중단되기도 했지만 잉글랜드와 프랑스 사이의 적극적인 전쟁 행위는 1337년부터 1453년까지 이어졌다.

그러나 이 충돌의 뿌리는 129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1세 Edward I(재위 1272~1307)는 이웃 스코틀랜드 왕국에 대한 정복을 시도함으로써 스코틀랜드가 프랑스와 동맹을 맺도록 자극했다.

전쟁 상황은 1558년까지 지속되었는데, 그해에 잉글랜드가 프랑스 땅에서 소유하고 있던 마지막 영토인 칼레 Calais 프랑스 수중에 넘어갔다.

그러므로 백년전쟁은 엄밀하게 말하자면 '200년 전쟁'이라고 불러도 무방할 것이다.

 

전쟁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충돌의 가장 근본 원인이자 해결하기 어려웠던 문제는, 잉글랜드 왕이 프랑스 왕의 봉신으로서 남부 프랑스의 가스코뉴 공국 Duchy of Gascony을 보유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중세 말기에 접어들면서 모름지기 왕국이란 국경 안에서 단일한 왕이 지배하는 영토적 실체여야 한다는 확신이 자라났고, 프랑스 왕의 입장에서 가스코뉴의 잉글랜드인이 점점 더 참기 어려운 존재가 되었다.

잉글랜드가 양모 무역을 통해 플랑드르 Flandre에 있는 신민—그들은 프랑스 왕에 대한 반란을 도모하고 있었다—과 긴밀한 상업적 유대 관계를 갖고 있다는 사실은 잉글랜드와 프랑스 사이의 적대감의 불길에 기름을 끼얹었다.

프랑스와 스코틀랜드의 지속적 동맹관계 또한 잉글랜드와의 불화를 심화시켰다.

스코틀랜드인은 1290년대 이래 자국을 정복하려던 잉글랜드에 단호히 저항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모든 것을 더욱 복잡하게 만든 것은 프랑스의 왕위 계승 다툼이었다.

1328년 발루아의 필리프 4세 Philippe IV의 세 아들 중 막내아들이 뒤를 이어줄 아들을 남기지 못한 채 사망했다.

카페 왕조 Capétiens dynasty를 대신해 새로운 발루아 왕조 Valois dynasty가 들어섰다.

그러나 발루아 왕조의 왕은 여성 상속을 금할 경우에만 카페 왕조의 가장 가까운 상속자임을 주장할 수 있었다.

그렇지 않을 경우 프랑스 왕위의 정당한 계승자는 잉글랜드 왕 에드워드 3세 Edward III였다.

에드워드 3세의 모후母后(임금의 어머니) 이사벨라 Isabella는 프랑스 필리프 4세의 딸이었다.

1328년 에드워드 3세는 겨우 15세였고 사촌인 발루아 왕가의 왕위 계승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그러나 1337년 스코틀랜드 및 가스코뉴에 관련된 문제로 프랑스와 잉글랜드 사이에 전쟁이 벌어지자 에드워드 3세는 자신이 프랑스의 정당한 왕임으로 주장했다.

그것은 18세기까지 모든 잉글랜드 왕이 한결같이 견지한 주장이었다.

 

 

백년전쟁(1337~1453년)
발루아 왕조 시작
에드워드 3세의 프랑스 왕위 주장
크레시 전투
푸아티에 전투
아쟁쿠르 전투
프랑스 부르고뉴, 잉들랜드와 동맹
잔 다르크의 프랑스군 지휘
보르도 함락으로 백년전쟁 종식
          1328년
          1337년
          1346년
          1356년
          1415년
          1419~1435년
          1429~1430년
          1453년

 

백년전쟁 시기의 프랑스(사진 출처-출처자료1)

 

백년전쟁은 다시 세 시기로 구분된다.

 

첫 단계는 1337년에서 1360년까지이다.

이 시기에 잉글랜드는 일련의 놀라운 군사적 성공을 거두었는데, 가장 유명한 것은 크레시 Crécy(1346), 칼레 Calais(1347), 푸아티에 Poitiers(1356) 등에서의 전투였다.

프랑스는 잉글랜드보다 적어도 세 배 이상 부유하고 인구도 많았지만, 잉글랜드의 정치 체제는 전인구의 전쟁 동원 능력 측면에서 훨씬 효율적이었다.

에드워드 3세는 금고에 쏟아져 들어온 풍족한 세금 덕분에 경험 많고 훈련 잘된 병사, 귀족, 궁수 등으로 구성된 직업 군대를 고용, 유지할 수 있었다.

프랑스의 필리프 4세와 그의 아들이 동원한 봉건 군대는 규모는 컸지만 형편없는 리더십 때문에 막상 전투가 벌어지면 소규모 잉글랜드 군대의 우월한 전술에 도저히 맞수가 되지 못했다.

잉글랜드 군대는 프랑스의 이곳저곳을 멋대로 약탈했고, 프랑스 영주들 사이에는 내전이 발발했다.

급기야 장 2세 Jean II가 푸아티에 전투에서 포로로 잡히자 프랑스 왕국은 와해된 채 혼돈에 빠지고 말았다.

프랑스 및 잉글랜드 병사들로 구성된 '용병단'들은 지방을 헤집고 다니면서 농촌 마을을 공격·약탈했고 도시를 장악해 몸값을 받아냈는데, 그 무렵의 프랑스는 유럽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흑사병의 첫 번째 타격에서 벗어나고자 안간힘을 쓰고 있는 중이었다.

1358년에는 프랑스 왕과 귀족계급이 자신들을 보호해주지 못한 데 좌절한 농민들이 야만적인 자크리 Jacquerie의 반란을 일으켰다.

 

1360년 브레티니 조약 Treaty of Brétigny으로 전쟁의 첫 단계는 끝났다.

프랑스 왕위 요구를 포기하는 대가로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3세는 영토가 크게 확장된 가스코뉴 공국에 대한 완전한 지배권(나중에 에드워드 3세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흑태자 Black Prince의 통치를 받게 되었다)과 포로로 잡힌 프랑스 왕의 막대한 몸값을 약속받았다.

그러나 어느 쪽도 조약 협정을 존중하지 않았다.

프랑스 왕은 가스코뉴 공작을 여전히 봉신으로 대했고 잉글랜드 왕은 자신이 프랑스의 정당한 왕이라는 주장을 철회하지 않았다.

조약은 프랑스와 잉글랜드 사이에 16년 동안의 평화를 가져왔고 프랑스는 그 틈을 타서 전쟁 피해를 복구했다.

또한 조약 덕분에 잉글랜드는 포로로 잡은 장 2세의 몸값으로 거액의 현금을 확보했다.

그러나 조약은 전쟁의 원인이 된 근본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1360년대와 1370년대에는 대리전쟁이 벌어졌다.

즉, 잉글랜드 군대와 프랑스 군대는 카스티야 Castilla 왕권을 주장하는 두 경쟁 세력을 지원해 서로 싸웠고, 교전 중이던 북부 이탈리아 도시 국가들을 위한 용병으로 고용되어 참전했다.

1376년 잉글랜드와 프랑스 사이에 전쟁이 재발하자 백년전쟁은 전 유럽적인 동란이 되었다.

 

1376년 이후 전세는 급속히 프랑스에게 유리해졌다.

잉글랜드에서는 흑태자가 사망했고 그의 아들 리처드 2세 Richard II(재위 1377~1399)당시 나이 겨우 10세였다가 늙고 허약한 에드워드 3세를 계승했다.

한편 프랑스의 새로운 왕 샤를 5세 Charles V(재위 1364~1380)는 브레티니 조약으로 조성된 평화를 유리하게 이용했다.

샤를 5세는 프랑스 평민에게 일련의 새로운 국세를 부과해 상비군을 갖추고, 지방으로 용병단의 손아귀에서 풀려나게 함으로써 질서를 회복할 수 있었다.

그리고 용병단 지도자 중 한 사람인 베르트랑 뒤 게클랭 Bertrand du Guesclin을 군사령관으로 임명함으로써 샤를 5세는 훈련과 전술 면에서 잉글랜드 군대에 필적하는 직업 군대를 창설할 수 있었다.

1380년 샤를 5세가 죽었을 때 프랑스 내의 잉글랜드 본토는 보르도와 칼레 부근의 작은 영역으로 축소되어 있었다.

 

부친이나 조부와는 달리 잉글랜드의 새로운 왕 리처드 2세는 프랑스 전쟁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

1394년 그는 프랑스 왕의 딸과 결혼하기도 했다.

그러나 에드워드 3세 치세의 잉글랜드에서 전쟁은 지극히 대중적인 관심사가 되어 있었다.

전쟁은 국가적 명예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나가서 싸우는 사람들에게는 신뢰할 만한 수익의 원천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리처드 2세의 전쟁 속행 불이행은 왕과 지방의 관계, 특히 귀족계급과의 관계를 손상시켰다.

1399년 리처드 2세가 그의 사촌 헨리 볼링브룩 Henry Bolingbroke의 유산을 몰수하려 하자 볼링브룩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리처드 2세를 폐위시키고 헨리 4세 Henry IV(재위 1399~1413)로서 왕위에 올랐다.

최초의 랭커스터 가문 House of Lancaster 출신 잉글랜드 왕이 등장한 것이다.

 

찬탈자인 헨리 4세는 일련의 반발에 맞서 싸우며 왕으로서의 권위를 유지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종종 병고에 시달리곤 했던 그는 프랑스와의 전쟁을 재개할 처지가 못 되었다.

그러나 1413년 그의 아들 헨리 5세 Henry V(재위 1413~1422)는 즉각 프랑스와의 새로운 전쟁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탁월한 외교관인 헨리 5세는 독일 황제 지기스문트 Sigismund 및 부르고뉴 공작 Duke of Burgundy(프랑스어 Duché de Bourgogne)프랑스 왕과 대립각을 세우고 있었다—과 동맹을 맺었다.

그 무렵 부르고뉴 공작은 프랑스 정부를 장악하기 위해 경쟁자들과의 싸움에 골몰하고 있었고, 프랑스 정부는 샤를 6세 Charles VI(재위 1380~1422)의 정신이상 증세가 심해져서 지도자 없이 표류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1415년 잉글랜드가 프랑스를 침공했을 때 헨리 5세는 프랑스 왕실의 주도권을 쥐고 있던 파벌에 소속된 군대만을 상대로 싸웠다.

부르고뉴 공작은 본국에 머물고 있었다.

마치 에드워드 3세가 크레시 전투에서 그리고 흑태자가 푸아티에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듯이, 헨리 5세는 아쟁쿠르 전투에서 부대 규모는 훨씬 더 크면서도 훈련 상태는 형편없었던 프랑스 군대를 격파했다.

1420년 헨리 5세는 루아르 Loire 강 이북의 프랑스를 대부분 정복했다.

그해 조인된 트루아 조약 Treaty of Troyes에 의해 늙고 우유부단한 샤를 6세는 헨리 5세를 프랑스 왕위를 이어받을 후계자로 인정했고, '도팽(왕위 계승자, 왕세자) Dauphin de France'으로 불리던 유일한 생존자 아들—미래의 프랑스 왕 샤를 7세 Charles Ⅶ(1422~1461)—의 왕위 계승권을 박탈했다.

 

프랑스 왕권에 대한 주장을 가스코뉴에 대한 주권 확보를 위한 협상 카드로 활용했던 에드워드 3세와는 달리, 헨리 5세는 자신이 프랑스의 정당한 왕이라고 진지하게 믿었다.

헨리 5세가 프랑스 왕국 정복에서 보여준 놀라운 성공을 잉글랜드인은 그의 프랑스 왕권 주장에 대한 신적 승인으로 받아들였고, 그로 말미암아 잉글랜드 민족주의는 최고조로 치솟았다.

그러나 헨리 5세가 프랑스에서 거둔 성공은 전쟁의 성격을 수익성 좋은 '정복 전쟁'에서 전선이 확대되고 많은 비용이 소모되는 '군사적 점령'으로 바꾸어놓았다.

그것은 궁극적으로 잉글랜드 패배의 씨앗이 되었다.

 

헨리 5세는 사망하던 1422년(8월 31일)까지 루아르 강 건너 프랑스 남부에서의 잉글랜드 지배권 확대에 열심이었다.

샤를 6세는 몇 달 뒤 사망했다(1422년 10월 21일).

헨리 6세는 부왕 사망 당시 아직 어린아이였다.

하지만 헨리 6세의 삼촌인 베드퍼드 공작 Duke of Bedford의 지휘 아래 잉글랜드 군대는 계속 남쪽으로 서서히 밀고 나아갔고, 그동안 동맹자인 부르고뉴 공작은 동북부를 지배했다.

한편 프랑스 왕세자는 프랑스 서남부 끝으로 밀려났다.

프랑스 왕권에 대한 '도팽'의 확신은 자신이 샤를 6세의 적출자가 아니라는 모친의 선언으로 인해 산산히 부서졌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잉글랜드 군대가 그를 루아르 이남의 영토에서 몰아낼 가능성이 낮다는 사실 또한 분명해졌다.

 

이 교착 상태를 깬 것은 잔 다르크 Jeanne d'Arc(1412~1431)였다.

1429년 무식한 농민의 딸인 잔 다르크는 도팽의 궁정에 나아가 천사가 그녀에게 들려준 말을 전했다.

즉, 도팽(샤를 7세)이야말로 프랑스의 정당한 왕이며 그녀가 잉글랜드 군대를 프랑스에서 몰아내야 한다고 천사가 말했다는 것이다.

샤를 7세가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는 것은 그의 처지가 얼마나 절망적이었는지를 보여준다.

그는 잔 다르크에게 군대를 제공했고 잔 다르크는 병사를 이끌고 신속하게 잉글랜드 군대의 오를레앙 Orléans 포위망을 풀었다.

일련의 승리가 뒤따랐다.

승리의 절정은 1430년이었다.

그해 잔 다르크는 샤를 7세를 프랑스 왕국의 전통적인 대관식 장소인 랭스의 노트르담 성당 Cathédrale Notre-Dame de Reims에 데려갔고 그는 그곳에서 프랑스 왕으로 즉위했다.

그러나 승리를 거두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골칫거리였다.

그녀는 귀족을 지휘하는 농민이자, 남성을 이끄는 여성이었고, 신의 위임을 받았다고 주장하는 평민이었던 것이다.

몇 달 뒤 부르고뉴인 Burgundian이 그녀를 전장에서 포로로 잡아 잉글랜드 군대에 넘겼을 때 샤를 7세는 그녀를 구하기 위해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마녀로 고발되고 이단으로 심문당한 잔 다르크는 1431년 루앙 Rouen의 시장 광장에서 화형에 처해졌다.

 

그러나 잔 다르크에 의해 사기가 높아진 프랑스군은 공세를 계속 유지했다.

1435년 부르고뉴 공작이 잉글랜드와의 동맹에서 발을 뺐다.

이어서 잉글랜드 왕 헨리 6세가 무능을 드러내기 시작했고, 곧이어 정신이상임이 밝혀지자 1440년대에 프랑스 군대는 일련의 승리를 거두었으며, 마침내 1453년 보르도Bordeaux를 함락함으로써 백년전쟁을 종식시켰다.

잉글랜드 왕들은 16세기에 들어서도 전쟁을 재개하겠다고 위협을 가했으며, 잉글랜드와 프랑스 두 나라의 적대감은 1815년 나폴레옹이 패배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그러나 1453년 이후 프랑스 영토에 대한 잉글랜드의 지배권은 칼레 항이 국한되었고 그마저도 1558년에 잃고 말았다.

 

백년전쟁은 프랑스 왕국이 직면한 도전 가운데 가장 위태로운 것이었다.

프랑스 왕국의 분열—1350년대와 1360년대에 시작했고 1415년과 1435년 재발했다—은 국왕과 귀족 사이, 그리고 파리와 변경 지역인 부르고뉴 Bourgogne, 브르타뉴 Bretagne, 가스코뉴 Gascony 사이의 결속력이 얼마나 취약한지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그러나 프랑스 왕국은 놀라운 회복력을 보여주었고 궁극적으로 전쟁은 왕의 프랑스 지배권을 강화시켜주었다.

전쟁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 발루아 왕가의 왕들은 새로운 국세를 부과했는데, 그것은 1789년까지 프랑스 왕실 재정의 대들보가 되었다.

새로이 유입된 세입으로 발루아 왕가는 상비군을 창설 및 유지할 수 있었는데, 상비군의 규모와 정교함, 그리고 장비의 성능(가장 중요한 대포를 포함해서) 면에서 왕에게 대립각을 세운 귀족(또는 지역)의 군대를 압도했다.

 

인간적인 매력을 찾아보기 힘든 인물이긴 했지만, 샤를 7세는 백년전쟁에서 승리를 거둠으로써 그대 초기 프랑스를 안정된 기반 위에 올려놓았다.

1453년 이후 프랑스 국왕의 권력은 급속히 커졌다.

1477년 샤를 7세의 아들인 루이 11세 Louis XI(재위 1461~1483)는 부르고뉴의 마지막 공작이 전장에서 스위스인 Swiss의 손에 쓰러진 뒤 부르고뉴 공국을 흡수했다.

1485년 프랑스 왕 루이 12세 Louis XII(재위 1498~1515)는 잉글랜드 왕 리처드 3세 Richard III(재위 1483~1485)—그가 브르타뉴와 맺은 동맹은 잉글랜드와 프랑스 사이의 전쟁 재발을 위협했다—의 몰락을 도왔다.

몇 년 뒤 루이 12세가 결혼을 통해 브르타뉴를 얻어냄으로써 프랑스 왕실은 프랑스 국경 안에 남아 있던 최후의 독립 공국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했다.

 

백년전쟁은 잉글랜드 왕국에도 극적인 영향을 미쳤다.

에드워드 3세와 헨리 5세 치세처럼 잉글랜드 군대가 프랑스에서 성공을 거두었을 경우, 잉글랜드 왕들은 엄청난 인기를 누렸고 국가는 약탈과 몸값으로 얻은 이익 때문에 번영을 누렸다.

그러나 리처드 2세와 헨리 6세 치세처럼 잉글랜드가 수세에 몰렸을 경우, 국외에서의 패배는 본국에서 왕의 인기를 실추시켰다.

1307년부터 1485년 사이에 잉글랜드를 지배한 9명의 왕 가운데 5명이 신민에 의해 폐위 또는 살해되었다.

 

잉글랜드 특유의 국왕 살해 경향(그것은 전 유럽의 화젯거리였다)은 잉글랜드가 지닌 독특한 정치 제도의 결과였다.

앞서 보았듯이, 잉글랜드는 유럽에서 가장 빈틈없이 통치되던 왕국이었지만 그 정치 체제의 힘은, 의회를 통해 국왕 정책에 대한 대중의 지지를 이끌어내고, 다른 한편으로 웨일스 Wales, 스코틀랜드 Scotland, 프랑스에서의 성공적인 전쟁 수행을 통해 귀족계급의 지지를 확보하는 왕의 능력에 의존하고 있었다.

이것은 대단히 정교한 일이라서 무능하거나 전제적인 왕은 결코 제대로 수행할 수 없었다.

왕권을 성공적으로 행사하지 못한 잉글랜드의 군주는 유럽 다른 나라보다 왕의 지위가 훨씬 더 불안정해졌는데, 이는 잉글랜드 국가 자체의 권력구조 때문이었다.

프랑스의 귀족계급은 샤를 6세의 정신이상 증세를 참아낼 수 있었다.

샤를 6세의 정부는 귖고을 위협할 만큼 강력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잉글랜드의 귀족계급은 국왕 헨리 6세의 무능한 왕권이 지속되는 것을 용납할 여유가 없었다.

 

그리하여 헨리 6세 정부를 상대로 한 귀족의 반란이 일어났는데, 이 반란은 대립하던 두 파벌의 문장—국왕 헨리가 속한 랭커스터 가문의 붉은 장미와 헨리의 사촌이자 경쟁자인 요크 공작 Duke of York의 흰 장미— 때문에 (19세기 월터 스코트 Walter Scott에 의해) 장미전쟁 Wars of the Roses이라고 불렸다.

6년 동안의 투쟁 끝에 1461년 마침내 요크 공작 에드워드 4세 Edward IV(재위 1461~1483)가 헨리 6세를 몰아내는데 성공했고, 그 후 1483년 죽을 때까지 성공적으로 통치했다.

그러나 에드워드 4세의 동생인 리처드 Richard가 에드워드 4세의 어린 아들들에게서 왕권을 탈취하자 잉글랜드의 정치적 안정은 다시 한번 무너졌다.

1485년 리처드 3세는 보즈워스 평야 전투 Battle of Bosworth Field에서 랭커스터 가문의 왕위 주장자인 헨리 튜더 Henry Tudor에게 패배하고 살해되었다.

헨리 튜더는 국왕 에드워드 4세의 살아남은 유일한 혈육인 요크의 엘리자베스와 결혼함으로써 랭커스터 가와 요크 가 사이의 반목을 해소했다.

헨리 7세 Henry VII(재위 1483~1509)로서 즉위한 헨리 튜더는 왕권에 대한 잠재적 경쟁자를 조직적으로 제거했다.

그는 고비용의 대외 전쟁을 회피했고 과세 요구를 거의 하지 않았으며, 왕실 토지를 신중하게 경영함으로써 재정 이익을 도모했고 귀족계급에 대한 엄격한 지배권을 행사했다(그러나 전반적으로 환영받았다).

1509년 헨리 7세가 죽었을 때 새로운 튜더 왕조 Tudor dynasty의 왕권은 확고하게 수립되었고 잉글랜드 왕의 권력은 온전히 회복되었다.

 

전쟁과 반란으로 야기된 소용돌이에도 불구하고 중세 말기 잉글랜드의 정치 상황은 본질적으로 안정된 것이었다.

지방의 제도는 계속해서 기능을 유지했다.

의회는 왕, 귀족계급, 지방 사회를 결합시키는 접착제로서의 중요성이 점점 더 커졌다.

가장 중요한 것은 잉글랜드 국가의 권력 자체에 대해서는 근본적 도전이 없었다는 사실이다.

귀족에 의해서건 농민에 의해서건 반란이 일어나면 반란자들은 항상 중앙 권력의 장악을 시도했지만 중앙 권력 자체를 말살하여 하지는 않았다.

백년전쟁에서 잉글랜드가 궁극적으로 패배했지만, 이 전쟁은 민족 정체성과 국가 권력의 일치—잉글랜드 특유의 일치를 강화시켰다.

14·15세기의 비등하는 반反프랑스 감정은 민족어인 영어의 승리를 가져왔고, 잉글랜드가 신에 의해 선택된 국가라고 하는 애국적 비전을 강화시켜주었다.

대륙의 영토를 잃은 잉글랜드는 1485년 이후 섬나라가 되어 바다를 방어 제일선으로 간주하게 되었다.

이 또한 결과적으로 유리한 것으로 판명되었다.

16·17세기의 잉글랜드는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Christopher Columbus의 아메리카 America 발견에 의해 활짝 열린 신세계—해외 무역과 식민주의—를 유리하게 활용할 수 있었다.

 

 

○독일과 이탈리아

 

다른 지역에서는 중세 말기에 치러진 전쟁의 결과가 한결같이 파괴적으로 나타났다.

독일 Germany에서는 지방을 지배하는 제후들 사이의 무력 충돌, 그리고 이들 제후와 독일 황제 사이의 무력 충돌이 교전 당사자 모두를 심각하게 약화시켰다.

주기적으로 강력한 황제가 등장해 유럽 무대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그러나 큰 흐름은 독일의 중앙 권력이 지속적으로 붕괴되는 방향으로, 즉 제후들은 영지를 후계자들에게 분할 상속하고 자유도시와 지방 귀족은 제후들의 지배를 벗어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1350년과 1450년 사이에 독일의 여러 지역에서 무정부 상태가 확산되었다.

그러나 독일 동부에 위치한 바이에른 Bayern, 오스트리아 Austria, 브란덴부르크 Brandenburg 등지의 지배자들은 농민을 농노로 종속시키려는 지방 귀족의 노력을 지원함으로써, 그리고 프로이센 Preußen(영어 Prussia)과 리투아니아 Lithuania 사이의 변경 지역에서 새로운 영토를 정복하고 식민화함으로써 권력을 강화했다.

이 지배자들이 중세 말기에 축적한 재산 덕분에,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Habsburg 지배자와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 Brandenburg-Preußen의 호엔촐레른 Hohenzollern 지배자가 근대 초기 독일의 주도 세력이 될 수 있었다.

 

북부와 중부 이탈리아 Italia(영어 Italy)에서도 14세기 후반 끊임없는 충돌이 있었다.

교황들이 1309년부터 1377년까지 프랑스 아비뇽 Avignon에 거주하면서 교황령 국가에 대한 지배권은 무너졌다.

이탈리아 반도 북부에서는 도시국가들 사이에 전쟁이 일어났고, 그것은 흑사병에 뒤이어 빈발한 도시 반란으로 인해 더욱 복잡한 양상을 띠었다.

그러나 1400년 무렵에 이르러 베네치아 Venezia(영어 Venice), 밀라노 Milano, 피렌체 Firenze(영어 Florence) 등은 그들 나름의 독자적 정부 형태를 안정화시키는데 성공했다.

베네치아는 이제 상인 과두 세력의 지배를 받았다.

밀라노는 독재자 가문의 지배를 받았다.

그리고 피렌체는 특히 1434년 이후 메디치 Medici 금융 가문 같은 몇몇 부유한 가문의 영향력에 휘둘리기는 했지만 하나의 공화국으로서 다스려졌다.

국내 문제를 해결한 이들 세 도시국가는 영토를 팽창하기 시작했다.

1454년에 이르러 베네치아, 밀라노, 피렌체는 북부 이탈리아의 제노바 Genova(영어 Genoa)를 제외한 거의 모든 도시를 종속시켰다.

제노바는 번영하고 독립적이었지만 새로운 땅을 늘리지는 못했다.

한편 교황은 이제 로마로 돌아와 중부 이탈리아에 대한 지배권을 재천명했다.

한편 남부의 나폴리 왕국 Regno di Napoli(영어 Kingdom of Naples)은 지방의 만성적인 전쟁과 지속적인 실정에도 불구하고 다른 이탈리아 세력을 도전을 받지 않고 계속해서 지배권을 유지했다.

 

1454년의 조약은 이들 '5대 강국(베네치아, 밀라노, 피렌체, 제노바, 나폴리)' 사이에 40년에 걸친 평화를 가져다주었다.

이 평화는 '세력균형 외교' 형식으로 유지되었는데, 5개국은 동맹을 수시로 이러저리 변경함으로써 각국이 더 이상 팽창하지 못하도록 견제했다.

그러나 1494년 프랑스의 대대적인 이탈리아 침공은 이탈리아 각국 사이의 외교적·군사적 균형을 무너뜨렸고, 그 과정에서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은 15세기를 거치는 동안 알프스 Alps 이북에서 세력을 키운 막강한 국민적 군주국가 프랑스의 적수가 될 수 없음을 드러내고 말았다.

그러나 프랑스의 이탈리아 반도 장악 기간은 짧았다.

프랑스의 이탈리아 침략에서 궁극적으로 이득을 본 것은 에스파냐 España였다.

아라곤 Aragón(영어 Aragon)과 카스티야 Castilla(영어 Castile)두 왕국의 통합으로 새롭게 통일된 에스파냐 왕국이 등장한 것이다.

 

 

○에스파냐의 등장

 

에스파냐 España(영어 Spain)는 중세 말기에 그야말로 쉴 새 없는 투쟁에 휘말렸다.

에스파냐의 양대 강국인 카스티야와 아라곤 사이의 전쟁은 양쪽을 모두 쇠약하게 만들었다.

카스티야는 14세기의 비참한 내전에 휩싸였다가, 뒤이어 15세기 중반에는 무력한 왕권과 경제적 어려움의 시대를 맞았다.

카스티야의 귀족 가문들은 왕의 권력이 허약해진 틈을 타 영지에서 농민에 대한 지배권을 강화했고, 왕에게서 더 큰 독립성을 얻어냈다.

1450년 이후, 귀족 가문들 사이의 싸움으로 왕국이 분열되자 귀족 파벌들은 카스티야 궁정의 지배권을 놓고 투쟁을 벌였다.

 

아라곤 왕은 권력을 좀 더 잘 유지했다.

왕실은 카탈루냐 Catalunya 상인과의 동맹에서 이익을 얻었다(카날루냐 상인은 지중해 세계 전역에서 상업적 영향력을 확대하느라 분주했다).

그러나 1458년 이후 아라곤 역시 왕위 계승 다툼으로 촉발된 내전에 휘말리게 되었는데, 이 내전에는 프랑스와 카스티야가 개입했다.

그러나 1469년 아라곤 왕 후안 2세 Juan II는 아들 페르난도 2세  Fernando II를 아라곤의 확고한 왕위 계승권자로 세웠다.

그해 페르난도 2세는 카스티야의 상속녀인 이사벨 Isabel과 결혼했고, 둘의 결합은 궁극적으로 통일 에스파냐 왕국 건설의 초석이 되었다.

 

1474년 이사벨은 카스티야 왕위에 올랐고, 1479년 페르난도 2세는 부친이 사망하면서 아라곤 왕으로 즉위했다.

아라곤과 카스티야는 1714년까지 분리된 왕국으로 통치되었고, 오늘날에도 과거의 두 왕국 사이에는 긴장이 흐르고 있다.

그러나 페르난도와 이사벨의 결혼은 두 왕국 사이의 전쟁을 종식시켰고, 1479년 이후 '가톨릭 군주들 Catholic Monarchs'—페르난도와 이사벨에게 붙여진 별칭—은 통일된 정책을 출발시킬 수 있었다.

그 후 국왕 세입은 엄청나게 늘어났다.

이 새로운 세입은 상당 부분 에스파냐의 군사력 강화에 사용되었고, 에스파냐는 1500년에 이르러 유럽 최강국이 되었다.

이 군사력은 맨 먼저 그라나다 Granada 정복에 사용되었다.

에스파냐에 남은 마지막 무슬림 공국 그라나다는 1492년에 함락되었다.

그로부터 10년 뒤 에스파냐 군대는 이탈리아에 진입해 마침내 이탈리아 전부를 에스파냐 보호령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이 군대는 에스파냐 안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즉, 에스파냐 군대는 카스티야와 아라곤의 다루기 힘든 귀족에게 명예로운 일자리와 왕실에 대한 봉사의 기회를 제공하는 한편, '가톨릭 군주들'의 세력 증대를 바라보며 반란의 유혹을 느낄 가능성이 있는 귀족들을 압도해버린 것이다.

 

그라나다 정복은 신흥 왕국 에스파냐의 역사적 전환점이었다.

카스티야와 아라곤은 여러 세기에 걸쳐 이슬람 에스파냐의 레콩키스타 Reconquista—재정복 또는 국토 회복 운동—에 참가함으로써 국가를 형성했다.

1492년의 승리는 십자군에 헌신하는 나라인 카스티야의 독특한 국가 정체성을 확인해주는 쾌거였다.

하지만 그라나다 정복 몇 달 뒤, 이사벨 여왕이 대서양을 서쪽으로 가로질러 인도에 도달하겠노라고 약속한 제노바 출신 모험가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에게 선박 세 척을 허락하지 않았더라면 카스티야의 세계 선교 비전은 공염불로 그치고 말았을 것이다.

물론 콜럼버스는 실패했다.

그러나 새로운 두 대륙(중앙아메리카와 남아메리카)에 상륙함으로써 콜럼버스는 카스티야의 십자군 전통을 신세계로 확대시켰고, 그 영향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1492년은 에스파냐에서 유대인 공동체가 완전히 추방된 해이기도 했다.

그것은 그리스도교 유럽에서 일어난 유대인 추방 역사의 절정이었다.

유대인 추방은 13세기 말 남부 이탈리아와 잉글랜드에서 시작되어, 1306년에는 프랑스에서 유대인 추방이 행해졌고, 14세기와 15세기에는 라인란트 Rheinland의 도시들에서 일련의 유대인 추방이 있었다.

그러나 에스파냐의 유대인 추방은 추방된 유대인의 숫자(최소 10만 명이지만, 아마도 20만 명에 달할 것이다) 때문에, 그리고 에스파냐 유대인이 이베리아 Iberia 반도에 1,000년 동안 정착하면서 발달시킨 문화적 유산 때문에 한층 도드라져 보인다.

 

역사가들은 페르난도와 이사벨이 왜 유대인 추방을 명했는지를 놓고 토론을 벌인다.

1391~1420년에 몇만 명의 에스파냐 유대인이 가톨릭교로 개종했다.

많은 사람이 강요에 떼밀려 개종했지만, 일부는 진지한 종교적 확신 때문에 개종했다.

1450년까지만 해도 이 개종자들—콘베르소 conversos—이 에스파냐 그리스도교 사회에 성공적으로 동화할 수 있을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1450년 이후 콘베르소들은 차별적인 입법의 표적이 되었고, 겉으로는 개종했지만 실제로는 은밀한 유대교도로 남아 있다는 의심을 받게 되었다.

콘베르소들을 온전한 그리스도교도로 만들기 위해, '가톨릭 군주들'은 에스파냐 내의 유대인 공동체에서 스며나오는 '나쁜 영향력'을 뿌리 뽑을 필요가 있다고 작정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와 같은 실제적인 고려 말고도, 페르난도와 이사벨은 자신들이 지배한 새로운 통일 국가에 새롭고 분명한 그리스도교적 정체성을 부여하려는 욕망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통일 국가 에스파냐는 1492년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에스파냐 통일 국가의 창출은 실로 몇백 년이 걸린 사업이었고 그것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갈리시아 Galicia, 나발 Naval, 발렌시아 Valencia, 바스크 Basque, 무르시아 Murcia는 말할 것도 없고) 카스티야, 아라곤, 카탈루냐의 대립적인 지역 정체성을 뛰어넘는 공통의 정체성이 에스파냐에는 오래전부터 절실하게 필요했다.

그것은 페르난도와 이사벨이 자신들의 호칭을 '가톨릭 군주들 los Reyes Católicos(영어 the Catholic kings)'이라고 붙인 데서도 분명히 드러난다.

중세 말기 유럽의 다른 군주들이 그랬던 것처럼 페르난도와 이사벨은 명료하고 배타적인 그리스도교적 정체성을 확립하고, 그 새로운 정체성을 왕권에 결합시킴으로써 떠오르는 에스파냐 국민국가를 강화하고자 했을 것이다.

그와 같은 확고한 종교적 정체성을 가진 그리스도교 국가에서 유대인이나 무슬림은 설 자리를 찾을 수 없었다.

 

 

○국민적 군주국가의 성장

 

중세 말기의 프랑스,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포르투갈 Portugal(영어 Portuguese), 에스파냐에는 1300년에 비해 한층 강력한 국가가 등장했다.

전쟁과 흑사병이 유럽의 정치 지형을 재구성하는데 많은 영향력을 미치기는 했지만, 중세 전성기에 형성된 기본적인 정치 형태는 상당 부분 그대로 남았다.

독일과 이탈리아는 1300년에 정치적으로 분열되어 있었고 1500년에도 분열된 채 남아있었다.

중세 전성기의 가장 강력한 군주국이었던 잉글랜드와 프랑스는 1500년에도 강력한 국가였지만, 바야흐로 아라곤과 카스티야의 통합 왕국이 포르투갈 왕국과 더불어 두 나라의 강력한 경쟁 세력으로 떠오르고 있었다.

시칠리아 Sicilia(영어 Sicily)의 위상은 근본적인 변화를 겪었다.

중세 전성기 지배자들의 강압에 의해 경제적으로 고갈된 시칠리아는 중세 말기에 메마르고 가난한 땅이 되었고 그 상태는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이런 연속성의 배후에는 중세 말기의 가장 주목할 만한 정치적 발전인 국민국가의 세력 증대가 가로놓여 있었다.

1500년에 이르러 이베리아, 잉글랜드, 프랑스, 스코틀랜드의 왕들은 한결같이 국민적 정체성을 확고히 하고, 그 정체성의 중심에 왕을 위치시키려고 노력했다.

이와 같은 민족주의와 왕권의 융합은 중세 말기의 산물이었다.

민족주의와 왕권의 결합은 전쟁의 불길 속에서 형성되었고, 문화적 비중이 커진 각국어에 의해 추진력을 얻었다.

국민적 정체성과 왕권의 결합은 급기야 1500년에 이르러 '국민적 군주국가'라고 하는 새로운 형태의 정치 조직을 만들어냈다.

그것은 카롤링거 제국 Carolingian Empire 전성기 이래 유럽에서 등장한 다른 어떤 정치 조직보다 강력했다.

 

새로이 등장한 국민적 군주국가가 제국이나 도시국가 같은 과거의 정치 조직에 대해 갖는 비교 우위는 이탈리아에서 가장 분명히 볼 수 있다.

1494년까지 이탈리아의 도시국가들은 통치가 잘되고 강력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프랑스와 에스파냐 군대가 이탈리아 반도를 침공했을 때 이탈리아의 정치 질서는 마치 카드로 만든 집처럼 무너지고 말았다.

독일도 몇 세대 뒤에 똑같은 운명을 맞이했다.

독일은 17세기 말까지 서로 대립하는 프랑스와 에스파냐 군대의 전쟁터로 남게 되었던 것이다.

 

새로운 국민적 군주국가가 무조건적인 축복이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이들 국가는 한층 강력해졌지만 그와 동시에 중세 말기 유럽의 유대인(과 무슬림) 추방에서 보듯이 중세 전성기 국가보다 한층 불관용적이고 배타적이었다.

그러나 좋든 나쁘든 이들 새로운 강력한 국민적 군주국가는 앞으로 500년 동안 유럽과 그 바깥 세계를 지배하게 된다.

 

※출처
1. 주디스 코핀 Judith G. Coffin·로버트 스테이시 Robert C. Stacey 지음, 박상익 옮김,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상): 문명의 기원에서 종교개혁까지, Western Civilizations 16th ed., 소나무,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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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4. 9 새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