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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병의 씨앗이 있음을 밝힌 프라카스토로

새샘 2024. 4. 17. 18:31
프라카스트로와 그가 발표한 서사시 '시필리스 또는 프랑스병'의 첫 쪽(사진 출처-http://www.bosa.co.kr/news/articleView.html?idxno=2139157)

 
동로마가 멸망하면서 그곳에 있던 학자들이 주로 옮겨온 곳은 상대적으로 정치와 종교로부터 독립되어 있던 이탈리아 북부의 상업도시였다.
뛰어난 학자들이 모여들자 그곳으로 다른 학자들과 학생들도 몰려들었다.
이렇게 지식의 파도(?)가 이탈리아 파도바 대학 Università degli studi di Padova(UNIPD)으로 밀려들었다.
근대 해부학의 문을 열었던 벨기에 출신 베살리우스 Andreas Vesalius(1514~1564)가 교수로 있었던 곳도 바로 파도바 대학이었다.
베살리우스가 파도바 대학에서 의대 교수가 되기 약 30년 전, 대학 의학부에 두 명의 의대생이 있었다.
그중 하나가 코페르니쿠스 Nicolaus Copernicus(1473~1543)였다.
그가 지동설을 주장한 책 ≪천체의 회전에 관하여≫가 베살리우스의 저서  ≪파브리카≫(진짜 제목은 ≪인체의 구조에 대하여 De humani corporis fabrica≫)와 같은 해인 1543년 발간되었다.
코페르니쿠스는 의학을 공부하다 천문학으로 전공을 바꾼 경우인데, 다른 한 명의 의대생은 천문학을 공부하다 계속 떠오르는 질병에 대한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 의학 공부를 시작한 경우였다.
그의 이름은 지롤라모 프라카스토로 Girolamo Fracastoro(1476~1553)였다.
 
프라카스토로를 사로잡은 질병은 흑사병 Black Death(또는 Black plague)(페스트 pest)이었다.
중세 후기 유럽 인구의 절반 가까이를 몰살시킨 흑사병은 대유행 이후에도 끊임없이 발생해 사람들을 위협했는데, 흑사병의 두 가지 특징이 그의 관심을 끌었다.
하나는 같은 장소에서 여러 명이 동시에 감염된다는 것과, 다른 하나는 사람에게서 사람으로 옮겨진다는 것이었다.
몸 안에 있는 체액들의 균형이 파괴되어 질병이 생긴다고 주장했던 4체액설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현상들이었다.
 
그러던 차에 새로운 질병이 유행했다.
1492년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Christopher Columbus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하고 유럽으로 돌아온 뒤 스페인에 전염병이 돌기 시작했다.
콜럼버스의 선원 중 하나가 아메리카 대륙의 원주민과 성적 접촉을 하고 돌아온 것이 화근이었다.
흑사병처럼 치명적이지는 않았지만 귀족, 평민, 성직자 할 것 없이 전염되었다.
환자들은 온몸에 피부궤양이 생기고 병이 신경까지 파고들어 마지막에는 치매 환자처럼 변하기도 했다.
1493년 프랑스가 스페인 용병과 함께 이탈리아 나폴리 왕국과 전투를 벌이면서 이탈리아에도 환자가 생기기 시작했다.
이탈리아인들은 이 병을 '프랑스병'이라 불렀고, 프랑스에서는 '나폴리병'으로 부르면서 서로 책임을 떠넘겼다.
프라카스토로는 명칭이 통일되지 않은 '프랑스병 또는 나폴리병'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고대 그리스 신화에 시필리우스 Syphilius라는 목동이 등장한다.
시필리우스는 태양의 신 아폴론 Apollōn에게 죄를 지어 팔다리가 부러지고 뼈와 치아가 몸 밖으로 드러나면서 썩는 형벌을 받게 되었다.

프라카스토로는 그 목동이 받은 형벌과 유행병의 증상이 비슷하다고 생각하고 1530년 자신의 연구 결과를 시필리우스 신화와 엮어 ≪시필리스 또는 프랑스병 Syphilis sive Morbi Gallici(Syphilis or the French Disease)≫이라는 제목의 서사시를 발표했다.

그 후 그 유행병은 '시필리스'로 불리게 되었고, 우리는 '매독梅毒'이라 부른다.
'매화꽃의 독'이라는 의미로서 매독 초기에 나타나는 피부궤양의 모양이 매화 모양과 비슷해 그런 이름이 붙었다.
 

매독이란 병을 최초로 명명했던 프라카스토로의 본격적인 의학 이론이 등장한 것은 그의 두 번째 책 ≪전염과 전염병에 대하여 De Contagione et Contagiosis Morbis(On Contagion and Contagious Diseases)≫(1546)부터다.

이 책에서 그는 눈에 보이지 않는 '질병의 씨앗 seminaria morbid(seedbed disease)' 또는 '전염의 씨앗 seminaria contagiosum(seedbed contagion)'이 있음을 언급했다.
그리고 한 단계 더 나아가 이 질병의 씨앗이 다른 사람에게 옮겨가는 세 가지 경로까지 설명하고 있다.
첫째, 사람에게서 사람으로의 직접 전파, 둘째로 다른 매개물에 붙어 있다가 옮겨지는 간접 전파, 마지막으로 공기를 통한 전파가 그것이다.
또한 프라카스토로는 질병의 씨앗이 각각 달라 질병을 일으키는 능력도 서로 차이가 있으며, 다양한 유행병의 원인이 된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그것을 일찍 파괴하는 것이 질병 치료에 중요하다는 주장을 했다.
 
프라카스토로의 선구적인 생각은 100년이 지난 1657년 네델란드 과학자 레벤후크 Antonie van Leeuwenhoek가 자신의 현미경으로 미생물을 발견하고, 그 후 다시 200년이 지난 1876년 독일 의사 코흐 Koch가 미생물과 질병이 인과관계에 있음을 선언한 '코흐의 가설 Kochls postulates'에서 질병과 그 원인이 되는 미생물 사이의 관계를 밝히는 '코흐의 4원칙'을 발표하면서 사실로 증명되었다.

프라카스토로는 오로지 자신의 상상과 논리적 생각만으로 현대 미생물학의 기초가 되는 사실들을 추론해냈다.

프라카스토로는 질병의 원인에 대해 다시금 '본체론적 질병관'을 꺼내들었다.
체액의 불균형 때문이 아닌 질병의 씨앗이라는 실체에 의해 질병이 발생한다는 관점이다.
그가 말한 질병의 씨앗이 바로 '병원체 pathogen 또는 germ'이다.

프라카스토로는 후배들이 걸어가야 할 의학 탐구의 길에 이정표를 세워주었고, 그의 이론은 300여 년이라는 긴 시간이 지난 후 생겨날 미생물학의 주춧돌이 되었다.

 
※출처
1. 김은중, '이토록 재밌는 의학 이야기'(반니, 2022)
2. 구글 관련 자료

 
2024. 4. 17 새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