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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핀과 스테이시의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 4부 중세에서 근대로 - 10장 중세 말기(1300~1500년) 5: 키예프 루스족과 모스크바 대공국의 흥기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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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핀과 스테이시의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 4부 중세에서 근대로 - 10장 중세 말기(1300~1500년) 5: 키예프 루스족과 모스크바 대공국의 흥기

새샘 2024. 4. 18. 17:40

1505년까지 모스크바 러시아의 팽창(사진 출처-출처자료1)

 

14세기와 15세기는 장차 동유럽의 지배 세력이 될 러시아 Russia가 등장한 시기이기도 했다.

그러나 러시아는 서유럽의 국민적 군주국가와는 매우 다르게 발전했다.

에스파냐, 프랑스, 독일 등과 달리 러시아는 1500년 무렵에 이르러 유라시아 최대의 다민족 제국으로 향하는 결정적 발걸음을 내디뎠다.

 

이런 발전이 불가피했던 것은 아니다.

중세 말기의 몇몇 상황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지 않았더라면, 서유럽의 국민적 군주국가들과 나란히, 하나 또는 여러 개의 동유럽 슬라브 Slav(슬라브어 언어를 쓰는 인도유럽인 민족) 국가들이 발달했을 것이다.

제8장에서 보았듯이, 스웨덴의 바이킹 Viking(루스족  Rus으로 알려져 있다)은 지금의 우크라이나 Ukraine에서 키예프 공국Principality of Kiev(공국公國이란 공작 작위를 가진 군주가 다스리는 나라)을 건설하는데 핵심 역할을 했다.

10·11세기의 키예프는 서유럽 및 비잔티움 Byzantium과 외교적·상업적 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나 1200년 이후 수많은 역사적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 러시아는 서유럽에서 분리되었다.

 

첫 번째 요인은 동부의 슬라브 국가들 대부분이 몽골에게 정복당했다는 점이다.

칭기즈칸 Činggis Qan(영어  Genghis Khan)의 손자 바투 Batu의 지휘를 받은 몽골인은 러시아를 통과해 서쪽으로 진군하면서 어찌나 잔인한 파괴를 일삼았는지, 한 동시대인의 말에 따르면 "죽은 자를 위해 울어줄 눈을 가진 사람이 한 명도 없을 정도"였다.

1240년 몽골인은 키예프 Kiev를 유린했고, 2년 뒤 볼가 강 Volga 하류에 킵챠크한국汗國  Kipchak Khanate―황금군단 Golden Horde) 또는 금장한국金帳汗國이라고도 한다―을 건설했는데, 이 국가는 그 후 150년 동안 러시아 대부분의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장악했다.

13세기에 몽골은 인구 조사를 하고 직접 행정관을 임명했으며, 토착 귀족들에게 몽골을 방문할 것―귀족의 영지 지배에 대한 칸 Khan(한)(튀르크, 몽골, 만주의 군주)의 허락을 얻기 위해―을 요구하면서 러시아를 직접 지배했다.

그러나 1300년 무렵부터 몽골은 노선을 바꾸었다.

러시아를 직접 지배하는 대신 다양한 토착 슬라브 국가의 존재를 인정하고, 그들에게 복종과 정례적인 조공 납부를 요구한 것이다.

 

 

○모스크바 공국의 흥기

 

키예프는 몽골 침략 이전에 누렸던 지배적 지위를 그 후 결코 되찾지 못했다.

궁극적으로 몽골을 물리치고 러시아 상당 부분을 통일한 토착 세력은 모스크바 대공국大公國 Grand Duchy of Moscow(1283~1547)이었다.

모스크바는 14세기 초 몽골 한국汗國의 조공 징수 중심지 역할을 하면서 세력이 커졌다.

모스크바가 몽골과 동맹을 맺었다고 해서 반드시 몽골의 공격으로부터 보호를 보장받은 것은 아니었다.

이 도시는 몽골 침공 시기에 파괴된 적이 있었고, 1382년에 또 한 번 파괴되었다.

그러나 이런 좌절에도 불구하고 모스크바는 몽골의 지원으로 블라디미르 Vladimir 대공국 영지를 흡수하고, 점차 동북 러시아를 지배하는 정치 세력이 될 수 있었다.

 

모스크바는 또한 볼가 강 하류에 위치한 몽골 세력 근거지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는 지리적 이점을 누렸다.

멀리 떨어져 있었던 덕분에 모스크바는 몽골 한국의 귀중한 동맹국이 되었고, 모스크바 대공大公(공국의 군주를 이르는 호칭)은 몽골의 간섭으로부터 자유를 확보한 가운데 세력을 강화할 수 있었다.

그러나 모스크바의 동떨어진 위치에도 불구하고, 대공국은 몽골 지배 아래 있던 기간 동안에도 발트해 Baltic Sea 및 흑해 Black Sea 지역과의 상업적 접촉은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모스크바가 서유럽으로부터 멀어진 것은 몽골 지배 아래 놓여 있었기 때문은 아니었다.

모스크바와 서유럽 사이가 멀어진 것은 1204년 이후 모스크바가 속한 정교正敎 Orthodox Church 그리스도교 세계와 유럽의 라틴 Latin 그리스도교 세계 사이에 끓어올랐던 엄청난 종교적 적대감 때문이었다.

그리스도교의 거대한 두 흐름 사이의 적대감은 깊은 뿌리를 갖고 있었지만, 그 적대감이 노골적으로 표출된 계기는 제4차 십자군 원정에서 열린 라틴 그리스도교 측이 정교 세계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플 Constantinople 을 함락한 사건이었다.
하지만 14·15세기에 각별히 모스크바로 하여금 서유럽 그리스도교에 대해 종교적 증오심을 갖도록 자극한 두 사건이 있었다.

그것은 폴란드 가톨릭 왕국의 세력 증대와 1453년 오스만 튀르크 Ottoman Türk에 의한 콘스탄티노플 함락이었다.

 

 

○폴란드와의 대립

 

중세 전성기 동안 폴란드 Poland는 독일의 침공에 수세를 면치 못했던 이류 국가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14세기에 들어 폴란드의 상황은 극적으로 역전되었다.

그 이유는 부분적으로 독일의 세력이 약화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1386년 폴란드를 통치하던 여왕 야드비가 Jadwiga와 리투아니아 Lithuania 대공 야길로 Jagiello가 결혼함으로써 폴란드의 영토가 두 배 이상 커졌고, 새로이 통합된 왕국이 팽창주의 국가로 변신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리투아니아 대공국은 1386년 이전에도 이미 발트해에서 벨라루스 Belarus, 우크라이나에 이르는 광대한 영토를 개척한 바 있었다.

팽창주의적 기세는 폴란드와의 통합 이후 더욱 강화되었다.

1410년 타넨베르크 전투 Battle of Tannenberg에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군은 독일의 튜턴 기사단 Teutonic Order―인접한 프로이센 Preussen(영어 Prussia)을 지배하고 있었다―에게 경이적인 패배를 안겨주었다.

그런 다음 폴란드-리투아니아는 동쪽으로 러시아를 향해 국경을 확장했다.

리투아니아 귀족의 상당수는 정교 그리스도교도였지만, 리투아니아의 국교는 로마 가톨릭이었다.

그 점은 폴란드 왕국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므로 15세기 말 모스크바가 폴란드와 리투아니아를 상대로 공세를 취했을 때, 그들의 군사적 공격은 민족적 충성심은 물론 종교적 충성심에도 호소력을 가졌다.

장기간에 걸친 전쟁이 이어지면서, 모스크바 공국은 폴란드-리투아니아에 대한 적대감뿐만 아니라 라틴 그리스도교 전반에 대한 적대감도 키워나갔다.

모스크바 공국의 입장에서 볼 때 라틴 그리스도교는 폴란드-리투아니아를 대표하는 종교였기 때문이다.

 

 

○모스크바와 비잔티움

 

모스크바와 라틴 그리스도교 유럽의 분열은 튀르크의 1453년 콘스탄티노플 함락에 이르기까지 일어났던 여러 사건들로 말미암아 더욱 가속화되었다.

비잔티움과 루스족의 관계는 10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 무렵 비잔티움 선교사들은 키예프 슬라브족을 정교 그리스도교로 개종시켰다.

그 후 러시아 교회는 스스로를 정교의 수호자이자 콘스탄티노플의 특별한 동맹자라고 생각하게 되었고, 모스크바 교회 역시 그런 입장에 서 있었다.

그러나 1438년 콘스탄티노플 정교회 당국은 교황의 권위에 복종하기로 하고 라틴 그리스도교회와의 통합을 단행했다.

포위된 콘스탄티노플 성문을 두드려대고 있던 튀르크인에 맞서 싸우던 비잔티움을 서유럽이 군사적으로 지원해주리라고 기대했기 때문이다.

러시아 교회는 이것을 정교 신앙에 대한 배신으로 간주하고, 비잔티움의 로마에 대한 종교적 굴복을 따르지 않았다.

급기야 콘스탄티노플이 서유럽 측의 아무런 도움도 얻지 못한 채 튀르크에 함락되고 말자, 모스크바 교회는 튀르크인의 승리를 콘스탄티노플의 종교적 불신에 대한 신의 징벌로 간주했다.

1453년 이후 모스크바 공국은 자국이 신에 의해 비잔티움의 계승자로 선택되었다고 선포했다.

그들은 그 과정에서 열광적인 반가톨릭 이데올로기를 채택했는데, 그들의 반가톨릭 성향은 폴란드-리투아니아의 군사적 위협 때문에 더욱 강화되었다.

모스크바 지배자는 '차르 tsar'―'카이사르 Caesar'를 뜻하는 러시아어―의 호칭을 취했고 러시아인은 모스크바를 '제2의 예루살렘'이자 '제3의 로마'라고 선언했다.

한 러시아인은 이렇게 말했다.

"두 개의 로마는 멸망했고, 세 번째 로마는 아직 건재하며, 네 번째 로마는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이반 대제의 치세(1462~1505)

 

비잔티움에서 이어받은 선민選民 이데올로기(하나님이 거룩한 백성으로 택한 민족이라는 관념)는 후대의 러시아 제국주의 성장에도 영향을 미쳤고, 모스크바 공국(그리고 후대의 러시아) 지배자들이 신성한 지위를 주장한 근거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사태 진전의 이면에 모스크바 대공의 착실한 세력 강화가 있었다는 사실을 놓쳐서는 안 된다.

14세기 말 모스크바는 몽골로부터 실질적인 독립을 이룩했는데, 그 무렵 몽골 지배자 '절름발이 티무르 Timur-i Lang(영어 Tamerlane)'는 황금군단의 몽골한국을 분쇄했다.

그러나 모스크바를 진정한 제국 세력으로 변화시킨 인물은 모스크바 대공 이반 3세 Ivan III이반 대제 Ivan the Great(재위 1462~1505)였다.

자신을 '백색 차르 White Tsar'이자 몽골 황금군단의 합법적인 계승자라고 선언한 이반은 1468년과 1485년 사이에 일련의 정복 전쟁에 돌입, 모스크바와 폴란드-리투아니아 국경 사이에 있던 독립적 러시아 공국들을 하나씩 병합했다.

1492년과 1501년에 리투아니아를 침공한 후 이반 3세는 벨라루스와 우크라이나 일부 지역을 장악하는데 성공했다.

러시아와 폴란드-리투아니아 사이의 전쟁은 그 후로도 몇백 년 동안 지속되었다.

하지만 이반 3세가 사망한 1505년, 모스크바는 유럽 무대에서 강국으로 인정받았다.

 

이반 3세 치세에 모스크바는 신속히 전제주의와 제국주의 길로 나아갔다.

1452년 이반 3세는 비잔티움의 마지막 황제의 조카와 결혼함으로써, 비잔티움 황제의 정통 계승자라는 그의 주장에 대한 근거를 마련했다.

그는 나중에 로마의 쌍두의 독수리를 제국의 기장記章/紀章으로 채택했다.

이반3세는 황제의 위엄을 과시하기 위해 모스크바에 장엄한 이탈리아 르네상스 양식의 요새화된 궁전인 크렘린 Kremlin을 축조했다.

이반 3세는 차르로서 모스크바뿐만 아니라 모든 러시아인의 절대적 지배자요, 잠재적으로 벨라루스인과 우크라이나인의 지배자이기도 하다는 것을 천명했다.

 

이반 3세가 죽은 뒤 러시아의 팽창주의는 주로 남쪽과 동쪽―황금군단을 계승한 소국들―을 겨냥했다.

그러나 17세기 중반부터 모스크바의 우크라이나와 벨라루스에 대한 압박이 급격히 강화되었고, 그 흐름은 표트르 대제(영어 Peter the Great)가 18세기 초에 창출한 거대한 러시아 제국으로 이어졌다.

표트르 대제는 이반 3세로부터 직접적인 영향을 받지는 않았다.

그러나 표트르 대제는 러시아인을 다양한 비非러시아인과 통합시켜 유럽 최대 제국을 건설하고자 했던 자신의 포부를 정당화하기 위해 이반 3세가 구축한 토대를 십분 활용했다.

그러므로 중세 말기는 서유럽 각국에 중요한 시기였던 것처럼 러시아의 정치적 발전에도 결정적인 시기였다.

 

※출처
1. 주디스 코핀 Judith G. Coffin·로버트 스테이시 Robert C. Stacey 지음, 박상익 옮김,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상): 문명의 기원에서 종교개혁까지, Western Civilizations 16th ed., 소나무,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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