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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아재 조영석 "설중방우도" "목기 깍기" "이 잡는 노승"

새샘 2024. 4. 25. 12:26

<산수화 속 인물은 명백히 조선의 선비로다>

 

조영석, 설중방우도, 17세기 중엽, 종이에 담채, 115x57cm, 개인( (사진 출처-출처자료1)

 

 

관아재觀我齋 조영석趙榮祏(1686~1761)은 영조 시대 대표적인 문인화가다.

그가 조선 후기 회화사에 남긴 업적은 겸재 정선에 필적할 만하여, 겸재가 진경산수화라는 조선적인 산수화를 창출했다면 관아재는 조선적인 인물화를 개척했다고 평할 수 있다.

그럼에도 관아재의 명성이 그동안 널리 알려지지 않았던 것은 그의 행적과 명작들이 근래에 와서야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설중방우도雪中訪友圖>, <이 잡는 노승> 등 관아재의 명작들이 속속 소개되고, 손으로 직접 쓴 육필肉筆(정필正筆) 문집인 ≪관아재고觀我齋稿와 스케치북인사재첩麝臍帖이 발굴되면서 이제는 회화사상 확고부동한 위치를 갖게 되었다.

 

관아재는 특히 인물화에서 뛰어난 기량을 보여주어 이름이 높았고 이에 대한 자부심도 컸다.

심재沈鋅의 ≪송천필담松泉筆譚≫은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관아재는 (풍)속화와 인물화에 뛰어났는데, 항상 겸재에게 말하기를 "만약 만리 강산을 그리게 하여 일필휘지로 필력이 웅혼하고 기세가 흐르는 듯하는 데서는 내가 그대에게 미치지 못하겠지만, 터럭 하나 머리카락 하나[일호일발一豪一髮]까지 핍진逼眞하고(실물과 아주 비슷하고) 정교하게 그리는 데서는 그대가 반드시 조금은 내게 양보해야 할 것입니다."

 

관아재가 인물을 잘 그린 것은 형님 조영복趙榮福이 제천으로 유배되었을 때 찾아가 위로드리며 그린 <조영복 초상>에서 여실히 볼 수 있다.

이 초상화로 인해 관아재는 세조 어진과 숙종 어진 모사에 참여하라는 영조의 명을 받았다.

이에 관아재는 자신이 비록 그림을 즐기고는 있지만 어진을 그리는 것은 도화서 화원의 일이라며 거부하였다.

자신이 비록 현감 벼슬의 미관말직에 있지만 환쟁이가 할 일을 선비의 신분으로 맡는다면 어떻게 사대부 사회에서 '이빨을 나란히 할 수 있겠냐'고 했다.

이후 관아재는 한동안 그림을 끊었다고 한다.

 

관아재는 스케치 14점을 모아 엮은 화첩을 ≪사제첩≫이라 했다.

'사향노루의 배꼽'을 뜻하는 '사제麝臍'는 향기가 그윽하여 암수의 사랑이 이어지는 계기가 되기도 하지만 사냥꾼에게 잡히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는 얘기에서 연유한 제목이다.

≪사제첩≫의 표지에는 자필로 "남에게 보이지 말라. 범하는 자는 내 자손이 아니다(물시인勿示仁 범자犯者 비오자손非吾子孫)"이라는 엄중한 경고문의 쓰여 있다.

 

그러나 그의 그림에 대한 생각과 사랑은 아주 확고했다.

그는 <대책을 묻노라>라는 글에서 그림의 사회적 효용에 대하여 세세히 논했으며, <만록漫錄>이라는 글에서는 "나는 어려서부터 그림 그리는 것을 매우 좋아하였다"고 토로하기도 했다.

어진 제작을 거부한 이후 한동안 그림을 끊었을 때 형님의 친구인 조정만이 그림 족자를 그려달라고 하자 세 차례나 거부하다가 끝내 그려주고는 "나는 좋은 그림이 이루어질 때면 온갖 근심이 사라집니다"라고 실토했다.

 

관아재는 정확한 사생을 중시했다.

그의 사위인 홍계능洪啓能은 관아재의 행장行狀(죽은 사람이 평생 살아온 일을 적은 글)을 쓰면서 "그림을 보고 베끼는 것은 잘못이며 대상을 직접 대하고 그려야만 살아 있는 그림이 된다"는 관아재의 말을 전하고 이를 '즉물사진卽物寫眞'이라고 했다.

 

조영석, (왼)사제첩 표지, (오른)목기 깎기(사제첩 중), 17세기 중엽, 종이에 담채, 28.0x20.7cm, 개인(사진 출처-출처자료1)

 

실제로 관아재는 대상에 대한 정확한 사생이 그림의 생명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사제첩≫에는 <바느질>, <우유 짜기>, <목기 깎기>, <작두질>, <마구간>, <젖 먹는 송아지>, <새참>, <닭과 병아리>, <두꺼비와 산나리> 등을 수묵으로 속사速寫(빨리 베껴 그림)하거나 버드나무 숯으로 사생했으며, 칼로 지우는 등 고치면서 여러 가지로 시도했다.

 

그러나 화가로서 관아재의 뛰어난 점은 사생에 머물지 않고 그것을 한 폭의 인물화로 승화시켰다는 점이다.

<절구질하는 여인>, <장기 두기>, <말 징박기>, <어부도>, <쉬어가는 노승> 등 그의 유작들은 한결같이 정확한 사생에 기초한 운치 있는 인물화들이다.

 

조영석, 이 잡는 노승, 17세기 중엽, 종이에 담채, 24.0x17.5cm, 개인(사진 출처-출처자료1)

 

그중 <이 잡는 노승>은 관아재 인물화의 압권이다.

나무 아래서 옷을 들추며 이를 잡는 노승을 그린 것으로 얼굴, 눈매, 옷주름, 손끝 하나하나가 정확하고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가만히 살펴보면 이를 잡는 것이 아니라 이를 옷에서 털어내고 있다.

곧 죽어도 스님을 살생을 하지 않는다는 식이다.

관아재는 스님의 그런 허허스런 모습을 그리고는 스스로 다음과 같은 화제를 달았다.

 

"이를 잡으며 당대의 세상일을 얘기하고, 태연히 말하며 웃던 사람은 진晉나라 왕장군이었다. 지금 우거진 회화나무 아래서 흰 가사를 풀어 헤치고 이를 잡는 사람은 어쩌면 선가삼매禪家三昧(선도仙道를 닦는 사람이  잡념을 떠나서 오직 하나의 대상에만 정신을 집중함)의 경지에 들어 염주알을 세는 것과 같지 않겠는가."

 

설중방우도 세부(사진 출처-출처자료1)

 

그동안 우리는 잘 몰랐지만 관아재 그림에 대한 당대의 평가 또한 직업화가다운 사생력에 문인화가다운 격조가 어우러졌다는 것이다.

이규상李奎象은 ≪일몽고一夢稿≫의 <화주록畵廚綠>(화가편)에서 관아재를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대개 화가는 두 파로 나눌 수 있는데, 하나는 세속에서 원법院法이라 일컫는 것으로 곧 나라에 이바지하는 화원의 화법이다. 또 하나는 유법儒法으로 신운神韻(고상하고 신비스러운 운치)을 위주로 하는 선비의 그림이다. ······ 원법의 폐단은 정신의 드러남이 없어 진흙으로 빚어놓은 것처럼 경직되었다는 점이며, 유화儒畵의 폐단은 까마귀나 흑돼지처럼 모호하고 거칠다는 점이다.

 

그런데 조영석의 그림은 원법을 갖고 유법의 정채精彩(정묘하고 아름다운 빛깔)를 제대로 펴내고 있고, 식견과 의견도 갖추고 있어 하나의 물건, 하나의 형상 할 것 없이 모두 천지자연의 조화에 어울리니 우리나라의 그림은······ 조영석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크게 독립된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관아재 인물화의 이런 면모는 그의 노년의 명작 <설중방우도>가 확연히 보여준다.

눈 내린 어느 날, 그윽한 곳에 은거하며 독서로 나날을 보내고 있는 한 선비의 집에 한 친구가 동자에게 고삐를 쥐게 하고 소를 타고 찾아왔다.

이에 두 선비는 서재에 마주 앉아 고담준론高談峻論(고담준언高談峻言: 뜻이 높고 바르며 엄숙하고 날카로운 말)을 펼치고 있다.

 

집주인은 학창의鶴氅衣(소매가 넓고 뒤 솔기가 갈라진 흰옷의 가를 검은 천으로 넓게 댄 웃옷)를 입고 있고 방문객은 두건을 쓰고 있는데 모두 의젓이 정좌하고 있다.

이에 반해 동자들은 대문 앞에서 반가움을 표시하고 있어 대조를 이룬다.

마른 나뭇가지엔 눈꽃이 피었고 솔잎은 푸름을 발하고 있다.

 

이 그림의 표현에서 압권은 선비의 모습이다.

책이 그득한 방 안에 마 주앉은 두 인물이 조선의 선비임을 한눈에 알 수 있다.

이제까지 조선시대 산수화에 나타나는 인물들은 대개 중국 화본에서 제시한 인물 묘사법을 벗어나지 못하여 그저 막연히 선비, 신선, 나그네를 묘사한 것에 지나지 않았는데 마침내 조선의 선비 모습이 명확하게 나타난 것이다.

훗날 <설중방우도>의 이 장면을 그대로 방작한 고송유수관도인古松流水館道人 이인문李寅文의 그림이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순례자는 말한다.

관아재는 겸재의 금강산 그림을 평하면서 "조선 300년 역사 속에서 조선적인 산수화는 겸재로부터 비롯되었다고 말해야 한다"라고 하였는데, 나는 이 말을 관아재 조영석에게 그대로 되돌려주고 싶다.

 

 "조선 300년 역사 속에서 조선적인 인물화는 관아재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해야 한다."

 

※출처
1. 유홍준 지음, '명작 순례 - 옛 그림과 글씨를 보는 눈', (주)눌와, 2013
2. 구글 관련 자료
 
2024. 4. 25 새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