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샘(淸泉)

코핀과 스테이시의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 4부 중세에서 근대로 - 10장 중세 말기(1300~1500년) 6: 교회의 시련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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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핀과 스테이시의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 4부 중세에서 근대로 - 10장 중세 말기(1300~1500년) 6: 교회의 시련

새샘 2024. 5. 1. 17:41

1378~1417년의 교회의 대분열(사진 출처: 출처자료1)

 

가톨릭교회의 입장에서 중세 말기는 힘든 시련의 나날이었다.

여느 대토지 소유자들과 마찬가지로 수도원은 흑사병이 초래한 경제적 변화로 어려움을 겪었다.

주교들도 세속 귀족계급처럼 협상가격차鋏狀價格差 price scissors(농산물 가격지수와 공산품 가격지수의 간격이 마치 가위의 양날을 벌린 듯한 형태로 나타나는 것)에 직면했다.

그러나 중세 말기에 교황청만큼 심각한 시련을 겪은 교회 조직은 찾아볼 수 없었다.

교황은 거의 70년 동안이나 로마에서 추방되어 있었고 그 후 40년에 걸쳐 교황 분열이 있었다.

그러고 나서 교회의 교회 지배권을 축소하려는 개혁가들의 지루한 싸움이 이어졌다.

 

 

○중세 말기 교황과 공의회주의

 

프랑스의 필리프 4세 Philippe IV(재위 1285~1314)에게 교황 보니파키우스 8세 Bonifacius VIII(재위 1294~1303)가 굴욕적인 죽음을 당한 이후 중세 말기의 교황권은 장기간의 위기 국면에 돌입했다.

4년 동안 로마에서 추방된 채 유랑하던 교황은 1309년부터 1378년까지 아비뇽 Avignon—프랑스 서남부 국경 부근의 작은 교황령지 —에 머물렀는데, 이 시기를 아비뇽 유수幽囚 Avignon Papacy라고 부른다(유수란 '유배되어 갇히다'란 뜻으로 서기전 6세기 유다 왕국이 신바빌로니아에게 멸망당하고 유대왕과 유대인들이 바빌론에 억류되어 약 60년 동안 포로 생활을 했던 바빌론 유수 Babylonian captivity에 빗대어 붙인 이름이다).

아비뇽에서 교황은 이탈리아의 교황령 국가 회복에 소요될 자금 확보를 위해 대대적이고 효율적인 관료제를 구축했다

 

맨 처음 아비뇽에 정착했을 때만 해도 교황들은 그곳에 계속 머물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곧 아비뇽이 로마에 비해 많은 이점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비뇽은 14세기 유럽의 세력 중심에 가까웠고, 로마와 교황령 국가의 소란스러운 지방 정치에서 멀리 벗어나 있었으며, 독일 황제들의 공격으로부터 안전했다.

아비뇽 시대에 선출된 교황들은 모두 남부 프랑스 출신이었다.

그들이 임명한 추기경들도 대부분 마찬가지였다.

그들에게 아비뇽은 고향과도 같은 느낌이었다.

교황청 관료정치의 규모가 커지자 아비뇽을 떠나기가 더욱 어려워졌다.

프랑스 왕의 요구도 무시할 수 없었다.

프랑스 왕은 아비뇽 교황의 주요 세속 후원자였다.

프랑스 왕은 교황을 프랑스 국경 부근에 두고 싶어 했다.

그곳에서 그는 필요할 때마다 교황을 겁박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비뇽이 갖는 이점에도 불구하고 교황들은 로마로 복귀하겠다는 희망을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이를 위해 교황들은 먼저 중부 이탈리아의 교황령 국가에 대한 군사적 지배권을 되찾아야만 했다.

이런 노력에는 몇십 년이 소요되었다.

전쟁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아비뇽 교황들은 프랑스, 잉글랜드, 독일, 에스파냐 교회에 새로운 세금과 의무를 부과했다.

교황 법정의 재판도 교황의 금고에 많은 수입을 가져다주었다.

당시에 더 큰 논란이 되었던 것은, 아비뇽 교황들이 교회 직책에 공석이 생길 경우 교황이 직접 주교와 사제를 임명할 권리를 갖는다는 주장까지 했다는 점이다.

그러한 임명(교황 서임이라 불렀다)이 반드시 부패한 것은 아니었다.

교황은 지방 성직자의 지방 교회 관료 선임권을 묵살했지만, 교황이 임명한 사람 가운데는 뛰어난 능력의 소유자가 많았다.

그러나 매번 임명이 있을 때마다 그 대가로 교황에게 거액의 수수료가 건네졌고, 비판자들은 이 수수료를 성직 매매(교회 직책을 돈 주고 사는 행위)에 해당한다고 선언했다.

 

이런저런 조치를 통해 아비뇽 교황들은 교회에 대한 행정적 지배권을 강화했다.

그러나 이 때문에 교황은 신도들의 사랑을 잃었다.

성직자와 평신도 모두가 교황의 탐욕스런 금전 요구에 넌덜머리를 냈고, 교황청의 끝 간 데 없는 사치에 관한 소문이 무성했다.

사실 아비뇽 교황의 대부분은 도덕적으로 정직했고 개인적으로 절제할 줄 아는 인물이었다.

그들이 거둬들인 돈은 대부분 중부 이탈리아에서 전쟁 비용으로 충당되었다.

그러나 유독 교황 클레멘스 6세 Clemens VI(재위 1342~1352)는 돈만 받으면 어떤 영적 은사라도 공공연히 베풀었고, 정치적 상황이 허락하기만 하면 어떤 바보일지라도 주교로 임명할 수 있다고 자랑을 늘어놓았다.

그는 자신의 간통 행위가 의상의 처방에 따른 것이었다고 주장하면서 끊임없는 성적 방종에 대한 변명을 늘어놓았다.

그의 추기경들도 호화롭고 방종한 생활을 일삼았다.

그들은 외국에서 수입한 조류를 즐겨 먹었고 정교하게 조각된 분수에서 내뿜는 최고급 포도주를 받아 마셨다.

 

1367년 교황 우르바누스 5세 Urbanus V(재위 1362~1370)가 로마에 복귀하려고 했지만 프랑스 왕 샤를 5세 Charles V(재위 1364~1380)의 군대에 의해 봉쇄당했다.

그러나 1377년 교황 그레고리우스 11세 Gregorius XI(재위 1371~1378)는 교황청을 로마로 복귀시키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이듬해 그가 사망하자 재앙이 밀어닥쳤다.

신임 교황으로 프랑스인이 선출될 경우 아비뇽으로 다시 돌아갈 것이라고 두려워한 로마인들이, 추기경들(그들은 대부분 남부 프랑스 출신이었다)에게 새 교황으로 로마인을 선출할 것을 요구하면서 폭동을 일으켰다.

목숨의 위협을 느낀 추기경들은 즉각 로마인의 요구에 따라 이탈리아인을 교황에 선출했고 그는 우르바누스 6세 Urbanus VI(재위 1378~1389)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우르바누스 6세는 교황이 되자마자 피해망상적인 경향을 드러내며 추기경들과 다투기 시작했다.

다시 한 번 목숨의 위협을 느낀 추기경들은 로마에서 도망쳤고, 우르바누스 6세의 선출을 무효라고 선언했다.

그리고 프랑스인 추기경을 새 교황('대립 교황'이라 부른다)으로 선출했는데, 그는 클레멘스 7세 Clemens VII라는 이름을 얻었다.

그러고 나서 클레멘스 7세와 추기경들은 군대와 함께 로마로 행군했다.

하지만 우르바누스 6세를 로마에서 쫓아내지는 못했다.

그러자 우르바누스 6세는 전원 이탈리아인으로 이루어진 새로운 추기경단을 임명했고, 대립 교황 클레멘스 7세와 그의 추기경들은 아비뇽으로 철수했다.

 

그 결과 교회의 대분열 Great Schism이 일어났다.

거의 40년(1378~1417) 동안 교회는 처음에는 두 명, 나중에는 세 명의 대립 교황들에 의해 지배되었고, 각 교황은 자신이 성 베드로의 정당한 계승자라고 주장했다.

유럽의 종교적 충성심은 백년전쟁으로 초래된 정치적 균열을 따라 갈라졌다.

프랑스, 스코틀랜드, 카스티야, 아라곤, 나폴리는 아비뇽 교황을 인정했으나, 잉글랜드, 독일, 북부 이탈리아, 스칸디나비아, 보헤미아, 폴란드, 헝가리는 로마 교황을 인정했다.

이 당혹스러운 사태를 수습할 뾰족한 방안도 없었다.

양쪽 교황은 같은 파당 소속의 추기경들에 의해 선출되었고, 두 교황 중 하나가 죽을 때마다 지지자들은 재빨리 후계자를 선출했다.

그 결과 대분열의 기간은 길어졌다.

마침내 두 진영의 일부 추기경들이 1409년 이탈리아 피사 Pisa에서 만나 공의회公議會 Council를 열었다.
그곳에서 그들은 두 교황을 모두 폐위하고 새로운 교황을 지명했다.

그러나 이탈리아 교황도 프랑스 교황도 공의회의 결정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리하여 1409년 이후에는 두 명이 아닌 세 명의 교황 주창자들이 서로를 파문하게 되었다.

 

대분열은 1417년 콘스탄츠 공의 Council of Constance에서 종식되었다.

이 공의회는 중세 최대의 교회 회의였다.

공의회는 잉글랜드의 헨리 5세와 독일의 지기스문트 황제 등 유럽 여러 군주에게서 강력한 지원을 받았고, 모든 교황 주창자들을 물러나게 한 다음 이탈리아인 교황 마르티누스 5세 Martinus V(재위 1417~1431)를 새롭게 지명했다.

그러나 이 작업에 3년이란 긴 시일이 걸렸고, 따라서 공의회는 교회의 종교생활 개혁이라는 더 큰 목표는 이룰 수 없었다.

그 임무는 미래의 공의회에 넘겨졌다.

 

교황 마르티누스 5세의 선출은 유럽의 종교적 통일성을 회복시켰다.

그러나 그것은 장차 교회가 어떻게 다스려져야 하는가를 둘러싼 투쟁을 종식시키지는 못했다.

대분열을 종식시키기 위해 콘스탄츠 공의회는 교회 내 최고권이 교황이 아니라 공의회에 있다고 선포했다.

콘스탄트 공의회는 또한 앞으로 공의회가 소집되어 교회의 통치와 개혁을 감독해야 한다고 명령했다.

 

공의회의 법령은 교황 군주국가 전통에 대한 혁명적 도전이었다.

마르티누스 5세와 그 후계자들이 이 법령을 무효화하려고 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1423년 이탈리아 시에나 Siena에서 공의회가 열리자 마르티누스 5세는 참석한 대표자들을 즉시 되돌아가도록 했다.

콘스탄츠 공의회는 공의회가 열려야 한다고 정하기는 했지만, 얼마나 오래 지속되어야 하는지는 정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1431년 차기 공의회가 스위스 바젤 Basel에서 열리자마자 구성원들은 교황이 공의회를 해산할 수 없도록 하는 규정을 만들었다.

그 뒤 기나긴 권력 투쟁이 이어졌다.

교황과 공의회주의자는 유럽의 왕과 제후의 지지를 얻기 위해 서로 경쟁했다.

결국 1449년 바젤 공의회 Council of Basel는 참담한 실패를 끝난 채 해산되었다.

이로써 교회 내에 공의회 정부를 설치하려던 급진적 시도는 끝났고, 공의회가 '머리(예수 그리스도)와 지체(교회)의' 종교생활을 전면적으로 개혁하리라 기대했던 사람들의 희망은 산산조각 나고 말았다.

 

 

○국가 교회의 성장

 

공의회주의자에 대한 교황권의 승리는 값비싼 대가를 치르고 얻어진 것이었다.

공의회주의자에 맞서 유럽의 왕과 제후의 지지를 얻기 위해 교황은 '협약'이라고 하는 일련의 조약을 맺었다.

그것은 왕과 제후들 영토 안에 있는 교회에 대해서는 그들의 권한을 폭넓게 허용하는 것이었다.

그 결과 교황은 실질적인 교회 지배권을 왕과 제후에게 양보하는 대가로, 교회에 대한 이론적인 지상권至上權(더할 나위 없이 으뜸가는 권리)을 확보했다.

이런 협약 조건 아래 왕들은 과거 교황에게 흘러갔던 지역 교회 세입을 상당 부분 취득하게 되었다.

그들은 왕국 안에 있는 교회 직책에 원하는 후보를 지명할 수 있는 새로운 권력도 얻었다.

 

교황의 지역 교회에 대한 권한이 사라지고 교황의 영적 위신이 추락하자 왕과 제후의 지위가 부각되었다.

심지어 성직자들마저 신민의 종교적·도덕적 생활의 개혁과 관련해 왕과 제후에게 기대를 걸 정도였다.

많은 세속 지배자는 그와 같은 기대에 적극적으로 부응하여, 추문을 일으킨 수도원을 폐쇄하고 이단을 억압했으며, 마녀로 기소된 여성을 처벌하고 매춘을 규제하는가 하면, 하층민이 귀족의 옷을 입지 못하도록 조치했다.

이런저런 조치를 통해 지배바들은 도덕과 종교의 수호자로 자처하면서 동시에 영토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했다.

그 결과 국가 지배자들과 그들이 통치하는 국가 교회 사이에는 긴밀한 유대관계가 형성되었다.

 

수입의 많은 부분을 양보한 15세기 말의 교황들은 과거의 교황들에 비해 중부 이탈리아 영토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졌다.

그러나 교황령 국가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교황들은 이탈리아의 여느 세속 군주와 다를 바 없는 방식으로 지배해야 했다.

그들은 군대를 통솔하고 다른 군주와의 동맹을 위해 술책을 쓰는가 하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적을 음해했다.

세속적 견지에서 볼 때 교황들의 노력은 결코 실패로 끝나지 않았다.

1520년에 이르러 교황령 국가는 이탈이아에서 통치가 잘 되고 부유한 공국 중 하나였다.

그러나 교황들이 구사한 술책은 신앙적인 면에서는 교황의 평판을 끌어올리는데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했고, 종교의 철저한 개혁을 요구하는 성직자와 평신도의 기대에도 전혀 부응하지 못했다.

1500년에 이르러 많은 사람이 교황이 교회 안에서 영적·종교적 개혁 세력이 될 수 없다는 사실에 환멸을 느꼈다.

연기가 모락모락 나는 이 부싯깃은, 바야흐르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을 통해 전 유럽을 휩쓰는 대화재로 번지게 되었다.

 

※출처
1. 주디스 코핀 Judith G. Coffin·로버트 스테이시 Robert C. Stacey 지음, 박상익 옮김,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상): 문명의 기원에서 종교개혁까지, Western Civilizations 16th ed., 소나무,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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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5. 1 새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