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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나일본부, 일본이 만들어낸 모순된 역사

새샘 2024. 5. 5. 17:34

최근 삼국 중심의 역사 때문에 소외되었던 신비의 나라 가야伽倻/伽耶/加耶대한 관심이 뜨겁다.

가야 역사는 우리에게 생소하지만, 가야의 유물은 동시대의 삼국 못지않게 풍부하다.

그럼에도 우리가 가야를 낯설게 느끼는 배경에는 20세기 초부터 가야를 일본 침략의 합리화 도구로 사용했던 식민지 역사 연구가 있다.

가야의 의미를 부풀려 강조하는 경향은 일본 학계에서 시작되었다.

이런 분위기가 일본이 주장하는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 논쟁이 일조한 것도 사실이다.

원래 임나任那는 가야의 별칭이다.

일제는 ≪일본서기日本書紀≫에 가공되어 기록된 임나일본부를 들어, 모든 가야는 곧 일본의 식민지였다고 왜곡했다.

그리고 일제강점기 내내 일본의 한국 지배를 합리화하기 위해 임나일본부를 이용했다.

지금도 일본에서는 표현만 약간 바뀌었을 뿐 여전히 임나일본부의 망령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한국 역사에서 4세기 초부터 7세기 중엽까지를 '삼국시대'라고 부른다.

명칭이 상징하듯 우리 학계는 가야의 의미를 축소하고 신라의 일부로 생각하는 경향이 강했다.

[※그래서 일부 학자들은 '삼국시대'라는 이름 대신 '열국列國시대'라는 이름을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가야에 관한 자료가 한국보다 일본에 더 많은 탓에 한국인 연구자도 적은 편이다.

우리나라 삼국시대의 변방이었던 가야를 실증하는 수많은 유물이 발견되고 세상에 알려지는 것은 학자로서 무척 반가운 일이다.

하지만 그전에 가야가 우리 역사에서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던 이유를 먼저 짚고 넘어가는 것이 순서일 터이다.

우리 역사에서 가야를 간과했던 까닭은 무엇일까.

 

 

○조선총독부는 왜 가야에 집착했을까

 

쇼군將軍(일본 도쿠가와 막부德川幕府의 우두머리)이 각 지방 세력에게 영지를 나누어주고 각자 통치하던 바쿠후(막부幕府) 체제는 19세기 말 일본의 메이지유신(명치유明治維新)으로 종말을 맞았다.

이와 함께 일본에서는 서양의 식민지 개념을 본떠 한반도를 식민지로 만들기 위한 정한론征韓論이 대두했다,

일본열도 안에서 1000년 가까이 바쿠후 체제로 살던 그들이 갑자기 바다 건너 한국을 식민지로 만들려니 표면적인 명분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래서 꺼내 든 것이 ≪일본서기≫에 기록된 임나일본부다.

일본이 한반도 남부에는 일본의 식민지인 임나일본부가 존재했고, 한반도 북부에는 중국의 식민지인 낙랑樂浪이 존재했다는 것을 근거로, 한반도는 태생부터 중국과 일본의 식민지였다는 주장을 펼친 것이다.

 

1922년 김해 봉황동 유적의 조개더미(패총)를 조사하는 일본인들. 여기서 출토된 토기들을 곡해해 임나일본부가 실재했다는 증거로 삼았다.(사진 출처-출처자료1)

 

일본 학자들은 한반도 남부 지역에서 그들의 명분을 입증할 자료를 찾기 위해 전력을 다했다.

가장 먼저 성공한 사람은 도쿄제국대학을 갓 졸업한 조선사 연구자 이마니시 류(금서룡今西龍)였다.

그는 일제강점 이전이던 1907년 경상남도 김해의 봉황대 언덕에 있는 김패 패총(김해 봉황동 유적)을 발견했다.

패총貝塚(조개더미/조개무지/조개무덤)에서는 한국의 삼국시대에 해당하는 일본의 야요이시대(미생시대生時代/生時代) 후기부터 고훈시대(고분시대古墳時代)까지인 약 3~7세기에 사용했던 토기와 비슷한 것들이 함께 출토되었다.

김해는 현해탄을 두고 일본을 바라보는 지역이니 교역은 자연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일본 학자들은 이것을 곧바로 ≪일본서기≫에 기록된 임나일본부가 실제 존재했음을 증명한다고 단정했고, 이후 30여년 동안 수많은 일본 학자들이 김해 패총을 조사했다.

 

일제의 고고학자들은 자신들의 조사를 한국 침략을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로 적극 활용했다.

1909년 일제의 고적조사를 담당한 야쓰이 세이이치(곡정제일谷井齊一)은 그해 조사가 끝난 뒤 개최된 강연회에서 다음과 같이 자신의 발언을 마무리했다.

"진구황후(신공황후神功皇后)에 의해 신라와 백제, 임나는 우리(=일본)를 종주국으로 섬기게 되었다. 그 후 남한南韓은 우리의 손을 떠났지만, 1200년이 지나 드디어 한반도 전체가 우리의 보호국이 되었다."

 

한국에서 활동하던 일본 고고학자들의 속마음을 이만큼 잘 드러내는 구절은 없을 것 같다.

그의 강연록은 한일합방 직전에 ≪가라모미지(한홍엽韓紅葉)≫라는 제목의 대중서로 출간되어 일본인들 사이에서 널리 읽혔다.

일본 학계에서는 당시 일본 고고학자들은 선한 의도롤 가지고 연구했다는 주장을 반복한다.

하지만 생각해보라.

그들은 조선총독부 소속으로 조선총독부 예산으로 움직이던 사람들이다.

일본 제국주의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조선총독부는 역사를 끌어와 그들의 지배논리를 설명하고 선전하려 했다.

1915년에 개관한 조선총독부 박물관(국립중앙박물관의 전신)에서 주요 전시를 '임나와 낙랑'으로 삼았던 데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1931년 현지 조선인을 앞세워 가야 고분(창녕 제117호분)을 파헤치는 모습. 일제는 가야의 역사를 끌어와 식민지배의 정당화에 이용했다.(사진 출처-출처자료1)

 

조선총독부의 전방위적인 한국 고대사 정책은 인류학에게까지 손길이 미쳤다.

당시 서양 제국주의의 영향을 받은 일본 인류학자들은 한국인의 형질을 조사해 북조선계와 남조선계로 나누었다.

이를 바탕으로 일본인들은 천손天孫의 단일민족이지만 한국의 중국과 일본의 영향으로 이루어진 혼종混種이라 결론 내렸다.

최근까지도 한국인의 생김새를 설명할 때 북방계와 남방계라는 용어를 쓰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이는 일제 이후 관습적으로 쓰이는 용어일 뿐 형질인류학계에서 공식적으로 인정한 것은 아니다.

 

왜 일제는 한국에 대한 제국주의 욕망을 특별히 가야에 투사했을까.

이는 가야가 일본과 인접한 지역이라는 지리적 특징도 있지만, 한국에 가야에 대한 문헌 기록이 너무나 적게 남아 있는 이유가 크다.

가야는 점진적으로 신라와 통합되었기 때문에 한국 자료에는 제대로 남아 있지 않다.

중국의 문헌에도 삼한에 대한 기록은 있지만 '가야'라는 나라는 등장하지 않는다.

유독 ≪일본서기≫에서만 가야를 자세하고 서술하고 있다.

≪일본서기≫는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서로 공인되고 있지만, 자기 나라를 찬양하기 위해 한국과 관련된 많은 부분을 왜곡하거나 과장했다.

다시 말해, ≪일본서기≫는 가야에 대한 기록은 많지만 가야의 역사를 그대로 담은 역사서는 아니다.

게다가 외국 학자들이 난해한 ≪일본서기≫를 제대로 해석하기란 쉽지 않다.

메이지유신 이후 정한론이 대두되면서 가야는 이래저래 일본 침략의 상징으로 이용되기 좋은 조건이었던 셈이다.

지금도 한국사를 연구하는 일본 사학자 중 한국의 삼국시대, 그중에서도 특히 가야를 연구하는 사람이 많은 이유도 이러한 연구 경향이 이어진 탓이다!

 

 

○임나일본부에서 기마민족설로

 

가야는 영토 확장 정책 대신 교역 네트워크를 강화함으로써 작지만 강한 나라들이 연맹으로 남았다.

일제강점기 일본 학자들은 각자의 소국을 유지하며 연맹을 했던 가야에 강대국 이미지를 덧씌우고자 했다.

임나일본부설에 큰 영향을 미쳤던 도쿄대학 쓰다 소키치(진전좌우길津田左右吉) 교수는 ≪임나강역고任那疆域考≫에서 가야에 임나일본부가 있었다는 점을 언어로 증명하려고 했다.

그리고 그의 뒤를 이은 스에마쓰 야스카즈(말송보화末松保和)는 임나가 전라도 일대까지 널리 확산되어서 한반도 남부 전체를 지배했다는 '한반도 남부 경영론'으로 확대했다.

한반도 남부는 일본의 식민지가 되면서 문명으로 개화했다는 주장을 했으니 가야를 거대한 나라로 보는 것이 일본의 식민지 경영에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일제강점기에 시작된 가야에 대한 왜곡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기마민족설騎馬民族說로 이어졌다.

도쿄대학 명예교수이자 고고학자 에가미 나미오(강상파부江上波夫)는 기마민족설을 제기하며, 4세기에 쑹화강(송화강松花江) 중류의 기마민족이 한반도를 거쳐서 일본열도를 정복했다고 설명한다.

이 설에 따르면 북방의 유목전사가 세운 일본의 야먀토(대화大和) 국가는 동아시아를 뒤흔드는 강력한 군사력을 지녔고, 따라서 한반도 남부를 정복할 수 있는 국력을 지니고 있었다는 논리로 이어진다.

기마민족설은 변형된 임나일본부설인 셈이다.

한국에서도 막연하게 가야의 기마민족설을 주장하기도 하는데, 이 주장이 나온 실제 배경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가야 대성동 고분 모습. 이 고분에서 북방계 유물이 다수 출토되었다.(사진 출처-출처자료1)

 

'가야'하면 흔히 철이 떠오른다.

가야는 철을 사방과 거래하면서 동아시아 교역의 중심으로 설 수 있었다.

그리고 가야의 무덤에서 쇠로 만든 갑옷(판갑板甲)은 물론 화려한 말갖춤(마구馬具)이 발견되니 군사강국이라는 생각이 들 수 있다.

하지만 실제 기마문화로 강국을 이루어 북방 유라시아를 호령한 흉노나 선비족과 비교하면 상황이 사뭇 다르다.

정작 북방 유목국가에는 쇠갑옷이 없었으며, 말갖춤도 가야처럼 화려하기는커녕 오히려 단순하다.

게다가 가야가 있었던 지역은 험난한 산과 강으로 둘러싸여 있어 말이 달릴 만한 평원도 없다.

가야에서 발견되는 쇠갑옷과 말갖춤은 정복에 사용된 것이 아니라 지배자의 권위를 높이기 위한 도구였을 가능성이 더 크다.

 

가야 세력은 지리산 자락을 따라서 전라도 일대로 퍼졌다.

이를 지도에 표시하면 가야의 영토가 아주 넓어진 것처럼 보여 가야를 거대 국가로 판단한 소지를 제공한다.

하지만 가야로 새롭게 편입된 남원이나 장수 같은 지역은 사람들이 쉽게 접근하기 어려운 산악지대다.

그러니 가야로 편입된 전라도 지역은 거대한 정복사업의 결과라기보다는 토착민들이 주축이 되어 가야 연맹에 참여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지리산 자락에 있는 이 지역의 가야 무덤에서는 가야 물건뿐 아니라 백제 왕족들이 가장 아끼던 귀중품들도 나왔다.

가야에 편입은 되었지만 독자적으로 백제와도 밀접한 사신 관계를 맺었다는 뜻이다.

가야를 연구하고 새롭게 조망한다고 해서 곧 가야가 강력한 나라였음을 증명해야 하는 건 아니다.

역사 기록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가야를 폄하하는 것도 문제지만, 구체적인 비판이 결여된 채 거대한 나라로 보려는 것은 자칫 일제의 논리로 빠질 수 있으니 또한 주의해야 한다.

 

 

○새로운 가야사 연구를 위하여

 

일제의 임나일본부설이 초래한 또 다른 피해는 우리 역사 안에서 가야가 소외되어버리는 계기가 되었다는 데에 있다.

가야가 일본의 식민지 정당화에 이용되어왔고, 가야와 관련한 많은 역사 기록을 일본에 의존할 수밖에 없으니 일제가 만든 프레임을 벗어난 다양한 시각의 연구가 어려웠다.

 

최근 오랜만에 가야에 대한 관심이 많아지며 과거 가야 연구의 어려움에서 벗어날 기회를 잡았다.

식민지 시대의 가야 연구에 대한 냉철한 비판을 통해 우리 안에 남은 일제 잔재를 없애야 한다.

아울러 세계사의 보편성에 근거해 가야의 특성을 평가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그런 점에서 가야를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시키려는 움직임은 그간 베일에 감추어져 있던 가야를 알리는 가장 좋은 수단이 될 수 있다.

하지만 막연하게 가야의 고분이 크고 유물이 풍부하다는 이유만으로는 부족하다.

금관가야와 대가야를 비롯해 각 가야들이 연맹의 크기에 비해 고분의 규모가 크고 유물이 풍부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세계적으로 보면 가야보다 더 눈에 띄는 유적과 유물들이 너무나 많다.

동북아시아만 해도 북방 유라시아나 중원에는 가야의 것보다 규모도 훨씬 크고 황금 유물이 대량으로 발견되는 고분들이 셀 수 없이 많다.

가야의 소중함은 무덤의 크기나 유물의 숫자가 아니라 그들만의 특별한 삶에 있다.

가야는 세계사적으로도 무척 독특한 나라다.

나라들이 서로 정복하여 통일되지는 않았지만, 그들은 경제적으로 번영을 누렸고 웬만한 나라 못지않은 거대한 고분도 만들었다.

가야가 있었던 경상도 일대에는 유독 고대의 언어 흔적과 각 지역의 사투리가 잘 남아 있다.

그 기원을 가야에서부터 시작한 오랜 전통으로 보는 언어학자들이  많다.

 

작지만 부유했으며 사방과 교역하며 자신만의 문화를 꽃피웠던 가야의 진면목을 되살리기 위해서는 먼저 가야가 지난 세월 어떻게 왜곡되어왔고, 그에 대한 우리의 대응은 어땠는지 돌아보는 데서 시작해야 한다.

성급하게 짧은 기간에 가야에 대한 역사적 사실을 바꾸려하기보다는 지난 세기를 돌아보며 가야가 우리 역사 안에서 소외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알아내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  

 

※출처
1. 강인욱 지음, 테라 인코그니타, (주)창비,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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