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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이 훙산문화에 열광하는 이유

새샘 2024. 4. 23. 10:13

역사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다면 만주의 신석기시대를 대표하는 훙산(홍산紅山)문화를 들어보았을 것이다.
훙산문화는 중국 고고학계의 뜨거운 감자다.
중국이 훙산문화에 열광하는 이유는 뭘까?
1990년대 이후 중국은 다원일체론에 따라 훙산문화가 중화 문명이 북방 만주 지역으로 확장된 대표적인 증거라며 널리 홍보하고 있다.
그 이전에는 몽골과 만주를 침략한 일본의 제국주의 고고학자들이 훙산 유적을 조사했다.
최근 우리나라의 일부 전문가들은 훙산문화가 고구려와 밀접한 공통성을 지니고 있다고 주장하며 한국 고대사와 연결시키기도 한다.
 

우리에게는 훙산문화가 선사시대를 둘러싼 국가 간 역사분쟁의 대명사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훙산문화는 국가가 성립되기 전 옥기玉器 제작과 제사로 문명을 열었다는 세계사적 의의를 지니고 있다.

만주, 초원, 그리고 중국의 교차지대에서 5000년 전에 발달했던 훙산문화의 이면에 복잡하게 얽힌 현대 동아시아의 정치 상황을 알아보고, 훙산문화의 의의를 제대로 짚어보자.
 
 

○일본 제국주의의 상징이었던 훙산문화

 

츠펑시의 유원지에서 바라본 훙산 모습. 붉은 산봉우리가 뚜렷이 보인다.(사진 출처-출처자료1)

 

훙산문화는 약 5500~5000년 전 지금의 네이멍구(내몽골자치구, 내몽고자치구內蒙古自治區) 츠펑(적봉赤峰)시를 중심으로 존재했던 신석기시대 문화다.

훙산의 한자인 '紅山'과 츠펑의 한자인 '赤峰'은 모두 '붉은 산봉우리'라는 뜻이다.
사실 훙산과 츠펑은 같은 산을 다르게 표현한 것이라 볼 수 있다.
두 지명 모두 츠펑시의 동쪽을 아우르는 거대한 붉은 산맥에서 유래했다.
허허벌판의 평원 가운데에 불쑥 솟아 있는 산은 몇백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도 보일 정도다.
그러니 이 붉은 산 일대는 선사시대부터 이 지역의 중심지 역할을 했을 것이다.
그 주변에서 발견되는 다양한 시대의 유적이 이를 실증한다.
 
훙산문화가 처음 알려진 것은 일본 제국주의 시기 대륙 침략과 관련이 있다.
1920년대 광범위하게 만주 일대를 답사하던 일본 학자들이 츠펑시 일대의 훙산 유적이 있다는 것을 확인한 뒤, 1930년대에 들어 일본 관변단체 동아고고학회東亞考古學會가 본격적인 발굴을 시작했다.
동아고고학회는 의화단운동에 개입한 일본이 중국에서 받은 배상금으로 운영하던 단체로, 일본의 만주 침략에 발맞추어 그들이 새롭게 차지한 땅의 유물 조사를 담당했다.
솔직히 말이 좋아 유물 조사지 제대로 된 조사라기보다는 유물을 모으는데 급급한 엉터리였다.
 
일본의 훙산문화 조사는 우리와도 관련이 있으니, 일제강점기에 만주의 조사를 주로 도맡았던 이들이 바로 경성제국대학의 교수들이었다.
그들은 일본군과 함께 훙산 유적을 답사했고, 거기에서 출토된 토기들을 경성제국대학으로 가져왔다.
발견 당시 그들은 이 유물이 훙산문화 것인지도 전혀 몰랐다.
하긴 '훙산문화'라는 말도 아직 없던 때였다.
경성제국대학에 남겨진 유물들을 재발견한 건 1994년이었다.
당시 필자는 서울대 대학원생으로서 도서관 6층에 세 들어 있던 서울대 박물관이 독립 건물로 이사하는 일을 보조하고 있었다.
그때 일제강점기에 모아둔 유물들을 운반하다 우연히 붓글씨로 '적봉' 또는 '홍산'이라고 써놓은 붉은색의 토기 조각들을 발견했다.
이 유물들은 2009년 필자가 책임자로 참여한 서울대 박물관의 프로젝트를 통해 정식 보고하면서 그 실체가 알려졌다.
 
 

○구계유형론에서 다원일체론으로

 
중국 고고학계에서 훙산의 선사시대 유적을 본격적으로 조사한 사람은 량쓰융(양사영梁思永)이다.
그는 중국 근대의 대표적인 사상가이자 교육가인 량치차오(양계초梁啓超)의 아들로도 유명하다.
량치차오는 5남 4녀를 두었는데, 다들 중국 최고 인텔리로 꼽히며 근대 중국에서 맹활약했다.
그중 가장 유명한 이는 첫째 아들 량쓰청(양사성梁思成)으로 중국의 대표적인 건축가이자 건축사학자이다.
그의 부인이 중국 최초의 여성 건축학자이자 시인인 린후이인(임휘인林徽因)으로, 이 부부는 지금도 많은 중국인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한편 둘째 아들 량쓰융은 하버드대학에서 고고학을 전공했다.
그는 중국 최초로 근대 교육을 받으며 고고학을 전공한 학자로 꼽힌다.
량쓰융의 손에서 상商나라 은허殷墟와 허우강(후강後岡) 유적, 룽산(용산龍山)문화 등이 발견되었다.
그의 업적 중 잘 알려지지 않은 하나가 바로 훙산문화 조사다.
량쓰융은 미국에서 석사를 마치고 중국으로 돌아온 직후인 1930년, 26세 젊은 나이에 자신이 조사할 첫 번째 발굴지로 네이멍구 츠펑 일대를 선택했다.
만주 일대는 마적이 들끓는 지역이고, 당시에는 페스트까지 창궐해 안전을 보장받을 수 없던 상황이었음에도 량쓰융은 그 지역을 샅샅이 조사했다.
아마 자신의 박사논문 주제로 츠펑 일대의 신석기시대를 생각했던 것 같다.
 
하지만 그의 조사 이후 일본이 본격적으로 만주를 침략하면서, 량쓰융은 더 이상 훙산문화 유적을 조사할 수 없었다.
량쓰융 대신 동아고고학회 소속 고고학자들이 훙산 유적을 가로채 조사에 나섰기 때문이다.
지금도 한국과 일본의 많은 문헌에는 량쓰융의 이야기는 빠진 채 일본인들이 처음 조사한 것처럼 서술된 경우가 많다.
하지만 당시 일본 학자들은 훙산 유적을 조사할 때 몇천 년 동안 쌓인 층위를 제대로 구분하지 않고 뒤죽박죽 파헤쳐 훙산문화를 밝혀내지 못했다.
 
이간 저간의 사정 때문에 멈췄던 연구는 일본의 패망과 이어진 국공내전國共內戰(1927년 이후 중국 국민당과 중국 공산당 사이에 중국의 패권을 두고 일어난 두 차례의 내전)을 거쳐 중화인민공화국이 설립된 후에야 재개할 수 있었다.
중국 고고학자들은 량쓰융의 뜻에 따라 가장 먼저 일본의 손에 망가진 츠펑의 훙산 유적을 조사했다.
그 결과 훙산 유적에 신석기시대 문화와 청동기시대 문화가 있었음을 확인했다.
바로 훙산문화와 샤자뎬하층문화(하가점하층문화夏家店下層文化)다.
이로써 훙산문화는 중국인들에게 일본 제국주의에 유린되었던 역사를 딛고 일어난 자부심을 상징하는 유적이 되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정작 조사가 시작될 무렵 량쓰융은 이미 건강이 좋지 않은 상태였다.
결국 그의 동료인 인다(윤달尹達)가 그 연구를 마무리했고, 량쓰융은 1954년에 4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중국이 훙산문화 연구에 목을 멘 이유에는 일본 제국주의가 가로챘던 그들의 신석기시대 연구에 대한 반발, 그리고 일찍 세상을 떠난 량쓰융에 대한 아쉬움이 있었다.
 

중국 고고학의 최고 권위자로 추앙받는 쑤빙치 교수. 훙산문화를 중국 문명의 기원이라고 주장했다.(사진 출처-출처자료1)

 
중국 독립의 상징이었던 훙산문화는 1960~70년대 문화혁명과 1980~90년대의 개혁개방을 거치면서 중국 민족주의의 상징으로 거듭났다.
훙산 유적이 중국 최고의 유적으로 자리매김하는 데는 베이징대학 교수인 쑤빙치(소병기苏秉琦)의 역할이 절대적이었다.
사실 그의 역할만 제대로 알아도 훙산문화에 대한 중국인들의 의중을 파악하기에 어려움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66년부터 1976년까지 중국 문화혁명 기간은 지식인들의 암흑기였다.
어떠한 정규교육도 불가능했고, 수많은 유적들이 홍위병에 의해 파괴되었다.
쑤빙치는 문화혁명이 끝나고 복권된 1970년대 중반 각 지방의 문화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공동으로 발전해나갔다는 구계유형론區系類型論을 내세웠다.
중원뿐 아니라 만주, 신장, 광둥성 등 중국 변두리 지역의 고대문화도 중요하니 골고루 연구를 하자는 뜻이었다.
중국은 하나의 문화가 아니라 다원적이라는 점을 강조한 그의 주장은 문화혁명 이후 초토화된 학계에서 폭넓은 지지를 받았다.
 
훙산문화가 다시 관심을 끌게 된 것도 바로 중국의 변방도 연구하자는 쑤빙치의 뜻을 이어받은 그의 제자들이 중원 지역이 아닌 츠펑 일대의 변방 지역을 조사하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하지만 1980년대 이후 개혁개방을 앞세운 중국의 정책과 함께 훙산문화는 그 의미가 변질되었다.
각 지역에 다양한 문화가 존재한다는 구계유형론은 한족 중심의 중국 문명을 강조하는 다원일체론多元一體論으로 바뀌었다.
다원일체론은 마치 여러 지류의 물길이 하나의 큰 강으로 합쳐지듯 현재 중국 영토 안에 있는 모든 문명이 중화 문명이라고 하는 큰 문화로 이어진다고 본다.
다원일체론이 겨냥하는 지역은 주로 티베트, 신장, 몽골, 만주와 같이 최근에 중국의 영토에 편입된 곳들이다.
이 주장에는 변방의 여러 문화가 결국 중화 문명의 일부라는 논리를 뒷받침하려는 정치적인 의도가 깔려 있는 셈이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만주 일대에서 중원의 유물과 흡사한 옥기와 채색무늬토기가 다수 출토된 훙산문화가 다시 주목을 받은 건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현대 중국 고고학의 대표적인 학자인 궈다순(곽대순郭大順)은 이 흐름을 이어받아 1995년 요하문명론遼河文明論을 제기했다.
그리고 때마침 랴오허강(요하) 일대에서 새로운 훙산문화가 발견되었다.
보통 랴오닝(요령遙寧) 지역은 랴오허강을 기준으로 서쪽은 랴오시(요서遼西), 동쪽은 랴오둥(요동遼東)이라고 부른다(엄밀히 말자면 그 기준은 랴오허강 근처에 있는 이우뤼산(의무여산醫巫閭山)이지만 대체로 랴오허강을 경계로 생각한다).
하지만 요하문명론에서 주로 언급하는 지역은 랴오허강에서도 가장 서쪽 지류에 속하는 네이멍구 동남부의 츠펑시 일대다.
츠펑시 일대는 전통적으로 만주에 포함되기는 해도 베이징(북경北京)에서 직선거리 340킬로미터로 변방보다는 중국의 중심에 더 가깝다.
또한 중원과 초원 지역 문화가 교차하는 지역으로, 랴오허강으로 상징되는 만주 지역 전체를 대표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중국 학계는 훙산문화의 채색무늬토기와 옥기에 주목해 만주 지역이 중원문화로 흘러가는 다원일체론을 증명한다고 보았다.
중국에서 본다면 북방의 다른 지역으로 이어지는 연결고리인 츠펑의 훙산문화야말로 다원일체론을 선전할 좋은 계기였을 것이다.
굳이 '요하'라는 지역명을 사용해 '요하문명론'이라 이름 붙인 것도 중원과의 관련성이 높은 훙산문화를 만주 지역 전체를 대표하는 상징으로 내세우려는 의도였는지도 모르겠다.
 
이후 다원일체론에 포함되는 지역은 계속 늘어나고 있다.
양쯔강(양자강揚子江: 장강長江의 영어 표기로 원래는 장강 하류 일대를 가리키는 이름이다가 강 전체 이름이 되었음) 유역의 량주문화(양저良渚문화)에서도 옥기가 발견되면서 다원일체론에 추가되었고, 2010년대 이후에는 백두산 일대도 '장백산문화론'이라 불리며 중국의 문명 재편 과정에 포함되었다.
중국의 이런 역사 만들기는 훙산문화의 재발견에서 출발했다 해도 크게 틀리지 않다.
아이러니하게도 일본의 제국주의에 대항하기 위해 촉발된 훙산문화에 대한 중국인의 관심이 지금은 반대로 중국의 팽창주의적 역사관을 여는 단초가 된 셈이다.
 
 

○고대에서 현대로 이어진 중국의 훙산문화 사랑

 

량다이촌에서 발견된 옥저룡(왼쪽)과 옥저룡을 모티브로 만든 후허하오터 지하철 손잡이(오른쪽)(사진 출처-출처자료1)

 
훙산문화가 중국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결정적인 계기는 그곳에서 출토된 옥기였다.
전통적으로 중원문화에서 사용된 여러 옥기들과 아주 비슷했기 때문이다.
옥기는 뉴허량(우하량牛河梁) 유적은 물론 여러 훙산문화의 신전과 무덤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대표적인 유물이다.
특히 C자형으로 굽어진 형태의 용 모양 옥기는 주둥이가 뭉툭해서 마치 돼지코를 연상케 해 '돼지모양 용'이란 뜻의 옥저룡玉猪龍이라고 불린다.
옥저룡의 모습이 마치 태아와 비슷해 부활하는 생명력을 상징하기도 한다.
중국인들의 훙산문화 사랑은 정말 대단하다.
중국을 대표하는 화샤(화하華夏)은행의 로고는 옥저룡을 모티브로 한 것이다.
2020년 2월 중국 네이멍자치구의 구도인 후허하오터(호화호특呼和浩特)에 개통된 지하철의 손잡이 역시 옥저룡 모양이다.
 
5000년 전 훙산문화의 옥기가 어쩌다 지금까지 이어지는 중국인의 옥기 사랑과 이어졌을까.
그 실마리가 얼마 전 발굴되었다.
중원의 산시(섬서陝西)성 한청(한성韓城)시에 위치한 춘추시대 초기의 대형 무덤인 량다이(양대梁帶)촌 무덤 유적이다.
그중에 특히 제27호라고 명명된 무덤에서 순장한 말과 마차를 묻은 차마갱車馬坑, 수많은 양의 청동기와 옥기가 출토되었다.
그리고 '예공이 만들었다'는 뜻의 '예공작芮公作'이라는 글씨가 새겨진 청동기도 나왔다.
학자들은 이 청동기를 통해 무덤의 주인공이 당시 이 지역에서 번성했던 제후국인 예국國의 왕인 예환공芮桓公임을 밝혀냈다.
역사서로만 전해지던 나라인 예국의 실체가 실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한편 예환공의 무덤 근처에는 그의 부인들 것으로 보이는 무덤도 있었다.
그중 하나인 제26호 무덤에서 청동기 23점과 귀부인을 치장한 옥기 500여점이 출토되었다.
옥기들 가운데는 예환공 시절보다 2000년이나 앞선 시기인 훙산문화의 옥저룡도 있었다.
더 신기한 것은 훙산문화의 옥기뿐 아니라 양쯔강 유역의 량주문화 옥기도 발견되었다는 사실이다.
이 무덤의 주인공이 몇천 년 전의 옥기를 다양하게 모아서 자신의 곁에 두고 사용했다는 뜻이다.
훙산문화와 량주문화는 중국 신석기시대를 대표하는 양대 산맥으로, 북쪽에 훙산문화가 있다면 남쪽은 량주문화가 있다고들 한다.
그러니 훙산문화와 량주문화의 옥기가 둘 다 출토되었다는 점에서 제26호 무덤의 주인공이 모아놓은 옥기 컬렉션은 상상을 초월하는 시공간을 포함하고 있는 셈이다.
이 정도의 시간차는 비유하자면 구한말의 무덤을 발굴했더니 고조선의 비파형동검이 나온 격이다.
 
예국 사람들이 살기 전 적어도 2000년 전에 만들어진 신석기시대의 옥기가 도대체 어떻게 예국시대까지 사용될 수 있었을까.
옥기는 몇천 년이 지나도 처음 만들었을 때의 색이나 품질이 거의 변하지 않는다.
그러니 잘만 보존하면 몇백 년을 두고 교류, 증여, 구입 등으로 이어지면서 계속 사용할 수 있었을 것이다.
다만 무덤에서 물건을 꺼내 자신의 몸을 치장하는 것은 사실 흔한 풍습은 아니다.
옛 무덤에서 나오는 물건은 대개 안 좋은 기운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일반적이기 때문이다.
종합해보면 예환공의 부인 중 한 명이 샤먼일 가능성이 크다.
이런저런 신령한 물건을 몸에 지니는 사람들은 주로 점을 치는 샤면들이기 때문이다.
 
제26호 무덤이 있는 산시성 한청시에서 훙산 유적, 량주 유적까지는 각각 1000킬로미터 정도 떨어져 있다.
그렇다면 춘추시대에 명품 옥기들이 사방에서 유통되었을 가능성도 생각해볼 수 있다.
훙산문화와 같은 명품 옥기 제작 기술이 대대손손 전해졌고, 당시의 사람들도 그런 옥기를 만들어 썼던 것은 아닐까.

중국에서 훙산문화를 중화 문명의 기원 중 하나로 보는 주요한 근거가 바로 훙산문화의 옥기에 있다.

훙산문화의 옥기와 비슷한 유물이 중국에서 많이 발견되는 이유가 아마도 훙산문화의 옥기를 적극적으로 수집하던 전통이 춘추시대부터 존재했기 때문인 것 같다.
신령한 힘을 지닌 부적과 같은 용도로 사용되던 전통이 최근까지도 이어진 것이다.
 
 

○민족주의와 글로벌 역사관 사이의 훙산문화

 
40년 전 훙산문화가 처음 발견되었을 때 중국의 학계와 사회는 열광했다.
그 이유는 몇천 년 동안 중국에서 널리 쓰인 옥과 비슷한 너무나 '중국적인' 유물이 동북 지역에서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뒤집어보면, 다원일체론에서 중원 지역과 변방의 관계를 증명하는 것은 옥기가 유일하다.
그 이유를 달리 생각해볼 수도 있지 않을까?

동북 지역에서 옥기가 발견되는 현상은 청동기보다 옥기를 더 좋아하던 동아시아 전역의 특징과 관련이 있다.

게다가 옥광산은 신장 지역의 허톈(화전和田), 그리고 랴오닝성의 슈옌(수암岫岩) 등 몇 군데에 한정되어 있다.
그러니 옥을 채굴하고 가공하는 사람들은 마치 중세의 석공들처럼 먼 거리를 이동하며 활동했고, 옥기 제작 기술과 전통이 중원 일대에 널리 확산되었을 것이다.
 
최근 훙산문화에서 발견되는 토기나 골각기骨角器(동물의 뼈, 뿔, 이빨 등으로 만든 도구)가 바이칼과 몽골 일대의 영향을 받았음이 밝혀지고 있다.
밑바닥이 평평하고 두드려서 만든 토기, 날카로운 석기를 뼈에 끼워 쓰는 도구 등은 바이칼 지역에서 유행하던 것이다.
너무나 당연한 결과이기도 한 게, 훙산문화의 북쪽은 몽골 초원을 따라 바이칼 지역과 이어진다.
이 지역은 훙산문화뿐 아니라 그 이후의 유목문화가 유입되는 통로였다.
 
훙산문화는 세계사적으로도 큰 의의가 있다.
훙산문화가 발달한 5500년 전은 세계 문명의 역사에서 중요한 시점이다.
당시 온대 지역인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인더스에서는 문명이 발달했고 초원 지역도 유목문화가 태동했기 때문이다.
 
훙산문화로 대표되는 동아시아 지역의 사람들은 청동기 대신 옥기를 만들고 거대한 제단과 무덤을 만들었다.
그들의 옥기와 비슷한 형태가 남쪽으로는 양쯔강 유역, 북쪽으로는 알래스카까지 발견되어 선사시대 문명교류에 새로운 시사점을 주고 있다.

비록 훙산문화는 청동기를 사용하지 않았지만 옥기와 제사를 기반으로 한, 세계 다른 지역과는 구분되는 동아시아만의 문명이 발달했음을 보여준다.

그러한 세계사의 중심에 있어야 할 훙산문화가 현대 제국주의와 국가의 이해에 희생양이 되고 있으니 너무나 안타깝지 않은가.
중국은 자신들의 영토를 합리화하기 위해 중화제일주의를 내세워 수많은 소수민족을 한족 중심으로 재편하고자 한다.
중국이 현대의 국가 통치에 훙산문화를 이용함으로써 훙산문화의 문명사적 의의를 크게 훼손하고 있다.
 
타이완의 역사가 쑨릉지(손융기孫隆基)는 훙산문화를 중국 문명의 기원이라고 한 중국의 주장을 두고 '민족주의와 글로벌 역사관 사이에서 길을 잃은 대표적인 중국 문명 연구'라고 비판했다.
너무나 적절한 표현이다.
그렇다고 훙산문화를 한국의 것이라고 주장하다면 이는 중국의 길 잃은 논리에 면죄부를 주는 것과 다름없다.
한국과 중국을 둘러싼 역사 갈등의 핵심이 모든 동아시아 문명의 기원을 중국으로 보려는 데 있는 것은 맞는다.
하지만 이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이 훙산문화를 중국의 역사가 아닌 한국의 역사라고 우기는 것이 될 수는 없다.

5000년 전 신석기시대를 두고 21세기의 한국이나 중국과 같은 국적을 논하는 것은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더욱이 훙산문화는 비슷한 시기 한반도 일대의 문화와는 차이가 아주 크다.
물론 한반도에도 훙산문화와 비슷한 돌무지무덤(적석총積石冢)이나 곡옥曲玉(곱구슬, 곱은옥玉: 옥을 반달 모양으로 다듬어 끈에 꿰어서 장식으로 쓰던 구슬)이 존재한다.
하지만 적석총은 지역과 시간의 차이가 크고, 곡옥은 훙산문화의 다채다양한 옥기와는 거의 관련성이 없다.
 
훙산문화는 일본 제국주의의 만주 침략, 그리고 그에 따른 중국의 건국과 민족주의 발흥의 와중에 등장했다.
1980년대 이후 중국의 역사인식은 훙산문화에 근거한 다원일체론 → 고구려를 둘러싼 동북공정 유라시아를 향한 일대일로一帶一路로 팽창되어 왔다.

이러한 역사분쟁의 시작점에 있는 훙산문화를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현대 국가의 틀이라는 거품을 없애고 훙산문화의 세계사적 의의를 밝히는 것에서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출처
1. 강인욱 지음, 테라 인코그니타, (주)창비,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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