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샘(淸泉)
또 다른 역사의 반쪽 환동해를 찾아서 본문
○환동해란 어디일까?

동해東海 East Sea는 우리나라 동쪽에 위치한 바다로 러시아 Russia와 일본, 대한민국 영토로 둘러싸인 해역이다.
높은 산과 맞닿은 깊고 푸른 바다, 곧게 이어진 해안선, 강릉과 경포대 같은 관광지가 대표적인 이미지 image(심상心象/心像)이며, 외교적으로는 일본과의 분쟁 지역이라고 인식되기도 한다.
한반도의 서쪽 지역과는 달리 동해는 좁은 평야 바로 뒤쪽에 태백산맥이 가로막고 있는데, 그러다 보니 이 지역에서만 잡히는 생선이나 산에서 채취한 산나물의 특산품이 되었다.
동해안의 독특한 지리 환경은 태곳적부터 내려왔으므로 여기에서 살던 사람들도 한반도의 다른 지역과는 다소 차별화된 방식으로 살아남았다.
동해안 지역에는 널따란 평야가 거의 없다.
기껏해야 두만강 유역과 함흥 일대에 간신히 농사만 지을 만한 좁은 평야가 있을 뿐이다.
그러니 농사만으로 식량을 확보하기 어려운 데다 날씨 또한 무척 추워서 논에 쌀을 재배하기가 쉽지 않다.
이런 지리환경은 동해안을 따라 함경남북도로 이어진다.
이곳에서는 선사시대부터 쌀 대신 잡곡을 농사지었고, 험준한 지형을 이용한 사냥과 채집이 발달했다.
태백산맥이 끝나는 지점에는 장백산맥이 위치해 한반도와 만주지역을 가른다.
북쪽으로는 연해주沿海州(프리모리예 Primorye 지방)의 시호테알린산맥 Sikhote-Alin Mountains이 또 하나의 경계를 이룬다.
바다에서는 동해를 끼고 적도 근방에서 올라오는 쿠로시오 난류 Kuroshio Current의 지류인 쓰시마 난류 Tsushima Current와 베링해협 Bering Strait을 따라 흘러들어오는 리만 한류 Liman Current의 지류인 북한 한류가 교차한다.
이 모든 지역을 아우르는 이름이 바로 환동해다.

환동해環東海 East Sea Rim Border는 정확히 말하자면 위 지도에서 표시된 것처럼 한반도의 동쪽, 일본의 서쪽, 중국의 동북부, 러시아의 극동이 감싸고 있는 동해 권역을 통틀어 이르는 말이다.
흔히 북방이라고 하면 고조선이나 만주 초원을 생각하기 마련이지만, 백두대간의 동쪽에서 연해주까지 남북으로 길게 이어지는 동해안 일대 역시 우리가 잊어버린 우리 역사의 반쪽인 셈이다.
이 지역에서 떠오르는 나라가 있는가?
북한과 대한민국의 동해안을 따라서 이어지는 지역에는 어떤 국가가 자리했을까?
역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고대에 이 지역이 우리 땅이었을 것이라고 짐작만 할 뿐, 실제로 이곳에서 어떤 문화가 탄생했으며 어떤 사람들이 살았는지는 잘 모른다.
이 지역은 험준한 산과 깊은 바다라는 지형적인 제약으로 오래전부터 접근이 쉽지 않았다.
연해주를 따라 이어진 시호테알린산맥은 시베리아 호랑이가 자주 출몰해 인간이 살기는 매우 어려웠다.
이 산맥은 한반도로 이어져 북한의 개마고원을 따라 태백산맥, 그리고 동해안 끝까지 걸쳐있다.
환동해 지역은 한반도에서 평원이 넓게 펼쳐진 서쪽 지역과는 달리 왼쪽은 험준한 산으로 오른쪽은 바다로 가로막혀 있기 때문에 서해안이나 남해안 지역과는 아주 다른 독자적인 경제·문화를 형성하게 되었다.
이곳에는 여러 국가가 세워졌는데 부여의 동남쪽, 두만강까지는 '옥저沃沮'가, 더 북쪽에는 '읍루挹婁'라는 나라의 사람들이 살았다.
읍루는 교과서에도 거의 등장하지 않는 숨겨진 지역으로, 역사에 웬만큼 관심이 있는 사람에게도 생소한 국가다.
이는 우리가 환동해 지역을 잘 모르고 있다는 증거지만, 고대에도 읍루는 지역적인 제약으로 상당히 소외돼 있었다.
그렇다면 지리적 관점에서 이 지역을 깊게 살펴보자.
선사시대의 생활을 가늠할 수 있는 대표적인 유적으로는 조개무지(패총貝塚)가 있지만, 한반도의 동북 지역에서는 조개무지가 발견되지 않는다.
두만강 일대에 일부가 있을 뿐이다.
이곳은 해안선이 잘 발달되어 있지 않고 수심이 깊어 조개류가 적기 때문이다.
어족자원 역시 타지역과 달리 연어와 같은 회유성 어류가 주를 이룬다.
봄여름에 걸쳐 바다에서 살을 찌운 연어는 초가을이 되면 강을 거슬러 동해안 일대로 올라온다.
동해 지역은 전통적으로 늦여름과 가을에 밀려오는 연어 떼가 주요한 생계 수단이었다.
연어는 훌륭한 식량자원이었을 뿐 아니라 기름 및 껍데기를 활용한 월동 준비물로도 쓰였다.
환동해는 지리적으로 한반도나 만주와도 구분된 상태로 고립되었다.
아무르강 Amur River(중국에서는 헤이룽강/흑룡강黑龙江/黑龍江) 하류에서 연해주에 이르는 지역의 시호테알린산맥, 장백산맥 및 현재의 평안남북도와 함경도를 가르는 낭림산맥과 태백산맥으로 이어지는 험준한 산악지형이 고도로 발달했기 때문이었다.
해안선에 가깝게 산악지형이 발달하고 평야가 발달되지 않은 탓에 최근까지도 화전민이 남아 있을 정도였다.
다른 국가와 교류할 때 동해안을 따라서 남북으로는 오가기 그나마 수월했지만, 동서로는 움직이기 어려웠다.
그러다 보니 고대 삼국시대가 강원도에서 함경남북도와 연해주에 이르는 동해안 일대까지 널리 퍼지기는 어려웠다.
연해주와 두만강 유역은 고구려가 '책성柵城'이라는 성을 만들고 관할 지역으로 삼았으나 정작 고구려 계통의 유물이 거의 발견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 현지 주민들이 자치적으로 살았을 확률이 높다.
연해주-함경북도 지역이 국가에 편입된 것은 발해가 이 지역으로 세력을 확장할 때였다.
그전까지는 옥저, 읍루, 동예 따위의 세력이 각 지역을 점령하고 독자적으로 살았다.
강원도 지역은 백제, 고구려, 신라가 순차적으로 세력을 확장했지만, 그 영향이 크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 지역은 근대에 이르기까지 교통의 요충지였다.

바로 위 사진을 살펴보자.
이 사진은 중국에서 북한을 바라보는 방향으로 두만강 유역을 찍은 것이다.
사진 가운데를 가로지르는 다리는 북한에서 러시아로 넘어가는 철로이며 왼쪽에 보이는 건물은 중국 쪽 초소다.
이 사진 한 장에는 중국과 북한, 러시아가 모두 담겨 있다.
철교에서 시작해 동해까지 이어지는 거리는 약 17킬로미터다.
사진의 좁은 지역은 중국이 차지하지 못해 땅을 치고 후회하는 곳이다.
1860년, 중국은 베이징 조약을 체결하면서 이 땅을 러시아에 넘겼다.
이후로 중국은 남쪽으로는 북한, 오른쪽으로는 러시아에 막혀서 태평양으로 나갈 수 없게 되었다.
결국 중국은 태평양으로 나가기 위해 서해안을 거쳐 대마도 해협을 지나 돌아가는 길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반면 한국은 중국에 가로막히지 않고 유라시아 지역으로 직접 통하는 통로를 얻게 되었다.
한국이 중국을 거치지 않고 유라시아로 나아가는 철도를 만들자는 계획을 구상할 수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고작 17킬로미터밖에 되지 않는 지역 때문에 각국의 이해관계가 이렇게 복잡해졌다는 사실이 놀랍지 않은가?
한반도 끝자락 두만강 유역은 태평양이라는 광활한 세계와 맞닿기 위한 병목과 같은 역할을 하는 핵심지임에도 아직 이곳에 대해 밝혀진 것은 많지 않다.
다만 과거에도 지금과 마찬가지로 교통의 요지로 여겨지지 않았을까 추측할 뿐이다.
이처럼 중요한 지정학적 가치를 가진 이곳에는 어떤 역사가 있을까?
다시 앞에 있는 '환동해 지역의 위치' 사진을 살펴보자.
동해안을 따라 솟아오른 산맥이 육지 쪽을 막고 있다 보니 서쪽으로 진출하기는 쉽지 않았다.
몇천 년 전뿐 아니라 불과 몇십 년 전까지도 대관령이나 미시령을 넘어갈 때는 꼬불꼬불한 산길을 따라 높은 산을 올라야만 바다로 나갈 수 있었다.
그러다 보니 산맥은 지역을 나누는 자연적 경계가 되었다.
한반도에서 함경도와 강원도, 경상도로 이어지는 긴 구역은 중국과 가장 먼 곳이기 때문에 중국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는 독자적인 문화가 발전하게 되었다.
○환동해와 시베리아의 연결고리, 암각화

지금껏 알려지지 않았던 환동해의 역사는 최근 고고학 연구로 속속 드러나고 있다.
환동해 지역은 역사책에서 배운 지식만으로는 제대로 알 수 없다.
고고학 자료로 이들의 독특한 삶의 방식을 이해할 때에야 비로소 역사의 공백이 메워진다.
이런 내용은 역사 기록에는 남아 있지 않다.
고고학 유적과 유물을 연구해 유추한 것이다.
이것이 한반도의 뿌리를 찾아가는 여정에 하나의 열쇠가 되어준다.
그중에서도 선사시대의 대표적인 유적은 울주 반구대와 천전리 암각화다.
이것은 울산의 동해안 해안가에서 발견되었다.
우리나라는 물론 만주나 일본에서도 이 정도로 거대한 암각화는 발견된 적이 없었다.
세계적으로 유일무이한 이 암각화는 환동해라는 독특한 자연환경에서 등장했다.
둘 중 먼저 발견된 것은 천전리 암각화였다.
1970년 12월 25일에 불교 유적을 조사하던 동국대학교 연구팀이 이 암각화를 발견했다.
그리고 그다음 해 1971년 12월 25일, 같은 연구팀은 마을 주민들에게서 또 다른 바위에서 호랑이 그림을 찾아냈다는 제보를 받았다.
선사시대 예술을 대표하는 울주 반구대 암각화가 발견된 순간이다.
두 번에 걸친 크리스마스의 기적으로 한국의 선사시대 연구는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암각화는 초원을 대표하는 선사시대 예술이다.
알타이 초원, 중앙아시아, 내몽고와 같은 초원 지역에서는 바위에 사슴, 전사 따위를 빽빽이 새긴 암각화가 여럿 발견되었지만, 만주와 한반도로 내려오면서 암각화는 거짓말같이 사라졌다.
고인돌 바위 그림이 발견된 적은 있지만, 초원 지역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크기도 작고 수도 적었다.
그런 점에서 반구대 암각화는 전 세계 암각화 연구자들에게 큰 수수께끼(미스터리 mystery)를 남겼다.
초원에서 몇천 킬로미터나 떨어진 바닷가에서 이토록 거대한 암각화가 나올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반구대 암각화에는 초원 지역 암각화에는 없는 독특한 특징이 있다.
생동감 있는 포경 묘사가 그것이다.
북쪽의 캄차카반도 Kamchatka Peninsula에서 시작해 울산까지 이어지는 지역에는 고래잡이를 생업으로 하는 사람이 많았다.
암각화가 동해안 지역에서만 발견되었다는 것도 이런 독자적인 문화의 한 가지 특징일 것이다.
반구대의 그림에는 주목할 만한 요소가 있다.
암각화 윗 부분에 새긴 조각배다.
반구대의 고래는 몇 차례 기록영화(다큐멘터리 documentary)로 제작되어 여러 방송에서 다뤄졌지만, 이 조각배는 거의 주목받지 못했다.
처음에는 그저 포경선이라고 생각했던 배 주변에는 고래가 아닌 육지 동물들이 그려져 있다.
이와 비슷한 예는 알타이 Altai의 칼박타쉬 Kalbak-tash나 카자흐스탄 Kazakhstan, 하카시야 Khakassia 따위에도 나타나는데 배와 사람이 한 덩어리로 표현되어 마치 태양의 빛무리를 보는 듯하다.
러시아의 암각화 전문가인 블라디미르 쿠바레프 Vladímir Kuvarev 교수는 이 그림이 태양과 관련된 천문학적 기호이며, 서기전 4000년에서 서기전 3000년 사이에 고대 이집트 Egypt의 태양신화가 시베리아 Siberia로 들어온 증거라고 보았다.
이 그림은 서쪽으로는 스칸디나비아반도 Scandinavian Peninsula에서 동쪽으로는 아무르강, 북쪽으로는 베링해 Bering Sea의 추코트카 Chukotka까지 곳곳에서 나타나는데, 반구대를 포함하면 남쪽 경계는 울산이 되는 셈이다.

그렇다면 들짐승 사냥과 고래잡이 장면이 함께 등장하는 전 세계에 유례없는 반구대 암각화는 누가 새긴 것일까?
반구대에 표현된 사람 가운데 무릎을 굽히고 두 손을 얼굴로 감싸고 있는 인물이 있다(위 사진에서 아래 오른쪽 확대된 사람 사진).
흔히 '춤추는 사람'이라 불리는 이 인물상은 알타이와 남부 시베리아의 스키타이 Scythia 시대 암각화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그 밖에도 몸에 점이 박힌 표범이나 뿔이 달린 사슴, 활로 짐승을 사냥하는 사냥꾼처럼 초원 지역 암각화와 반구대 암각화에는 우연의 일치라고 보기에는 어려울 만큼 비슷한 요소가 많다.
그렇다고 반구대 암각화를 남긴 이들이 초원에서 왔다고 결론 내리기에는 고래나 호랑이, 곰, 족제비, 토끼 따위의 초원 암각화에는 없는 요소도 상당히 많이 등장한다.
게다가 이웃한 천전리 암각화에는 사실적인 묘사 없이 기하학적인 모형(패턴 pattern)만 표현되어 있다는 점도 수수께끼다.
반구대 암각화에는 사람의 얼굴을 독특하게 삼각형으로 표현했다.
이 얼굴은 환동해를 따라 극동지역에서 흔하게 보이는 형태다.
환동해 지역은 후기 구석기시대 이래로 동해안을 연접하고 백두대간으로 자연적인 경계를 이루어 독특한 문화가 형성되어 왔다.
특히 초기 철기시대에는 옥저와 읍루 세력이 이 지역을 양분하며 자신들만의 독자적인 문화를 형성했다.
당시 문명과 사회상, 문화를 유물로 보며 하나씩 유추해보자.

위 사진에서 1번 유물은 중국 옌지(연길延吉)의 소영자小營子 유적에서 발견된 사람 얼굴을 새겨 넣은 비녀다.
예전 국사 교과서에는 이 사진이 자주 실렸을 정도로 매우 유명한 유물이다.
4번 유물은 그보다 더 북쪽인 사할린 Sakhalin 앞바다로 이어지는 헤이룽강 즉 아무르강에서 발견된 여신상이다.
소위 '아무르의 비너스 Venus of Amur'라고도 불린다.
위의 두 지역과 2번과 3번의 울주 반구대 암각화 인물을 포함한 지역에서 발견된 사람들은 눈이 작고 옆으로 길게 퍼져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또한 코가 낮고 입술도 작아서 전통적인 아시아인과 흡사하다.
울주에서부터 옌지와 아무르까지는 비행기로도 한두 시간 이상 가야 하는 먼 지역이다.
그런데도 그들은 생김새에서 공통점을 갖고 있다.
아마도 남북으로 언어나 민족성 면에서 이어져 있지 않았을까 추측할 만한 대목이다.
이들은 실제로 고아시아족으로 묶이는데, 아시아에 빙하기 때부터 살고 있었던 사람들로 산맥으로 가로막힌 동해안 지역의 전통을 오랫동안 잘 지켜왔다.

이처럼 환동해 지역의 인면상人面像의 일반적인 특징은 러시아 학자 알렉세이 오클라드니코프 Alexey Okladnikov가 이야기한 것처럼 현재 이 지역의 소수민족인 나나이족의 예술품 및 형질적 특성과 닮았다.
바로 위 사진에 있는 극동지역의 사카치-알리안 Sakachi–Alyan 인면상과는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
이렇게 몇천 년 동안을 잇는 이 지역의 유물들은 랴오둥(요동辽东/遼東)에서 쑹화강(송화강松花江) 일대의 인면상과 구분된다.
이러한 특징은 민족학 및 역사언어학에서 분류되는 퉁구스 Tungus(예맥濊貊)와 고아시아 계통의 차이로 볼 수 있다.
○북극해와 한반도의 고래사냥꾼

반구대에 나타난 고래잡이 그림으로 과거 환동해 지역의 역사를 더 세밀하게 살펴보자.
반구대 암각화를 가리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고래잡이 암각화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아시아에서만 해도 1965년에 러시아 추코트카반도 끝 페그티멜 Pegtymel 유역에서 고래사냥 암각화가 발견된 적이 있다.
이 암각화에는 버섯 모양의 모자를 쓴 사람들이 배를 타고 고래사냥을 하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구 소련의 고고학자 니콜라이 디코프 Nikolai Dykov는 추코트카 근방을 몇년 동안 조사한 끝에 1971년에 종합보고서를 간행했다.
그 결과는 놀라웠다.
추코트카 지역 암각화에 사용된 표현 기법 중 상당수가 알타이 지역의 그림에서도 비슷하게 나타났기 때문이다.
북극해 끝자락에 난데없이 등장한 고래 사냥꾼이 스키타이 계통이라는 놀라운 발견은 소련 고고학계의 큰 화제가 되었다.
페그티멜 암각화에는 순록도 많이 묘사되어 있는데, 북극해의 고래 사냥꾼들은 순록을 키워 생계를 꾸렸다.
울산과 추코트카처럼 지리적으로 동떨어진 두 지역에서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내용을 담은 암각화가 등장한다는 것은 고고학계에 매우 흥미로운 주제였다.
다만 초원 지역과 고래사냥의 관계는 아직 찾지 못했다.
수많은 의문이 꼬리를 물지만 분명한 사실은 암각화로 고래잡이를 새긴 것이 비단 한국만의 현상은 아니라는 점이다.
추코트카 페그티멜 암각화는 비교 연구의 중요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단적인 예다.
암각화 연구에서는 정확한 연대를 파악하는 것이 가장 어렵지만, 보통은 돌을 파내는 기법이나 도구 따위로 대략적인 연대를 가늠한다.
선사시대에는 돌로, 중세 이후에는 단단한 쇠로 날카롭게 파냈다고 파악하는 것이다.
그다음 방법으로는 암각화에 표현된 동물이나 무기 따위를 근처에서 발굴된 유물과 비교하는 것이다.
알타이에서는 암각화에 새겨진 무사의 동검이나 도끼를 실제 고분에서 발굴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대부분의 암각화는 오랜 시기에 걸쳐 그림이 덧붙으며 완성되므로 정확한 연대를 특정하기가 쉽지 않다.
반구대 암각화 역시 몇 번에 걸쳐 그림이 추가된 흔적이 남아 있어 제작 연대에 개한 의견이 분분하다.
혹자는 신석기시대에 만들어졌다고 하는 반면, 또 다른 연구자는 청동기시대의 것이라고 주장한다.
다만 반구대에 표현된 초원 지역 요소들은 대체로 서기전 10~서기전 6세기에 만들어졌다는 것이 정설이다.
이 시기 한반도는 논농사를 시작하고, 비파형 동검을 제작한 청동기시대였다.
그 당시 울산 지역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복잡하게 얽혀 살았다.
지난 10여 년 동안 이 부근에서 조사된 청동기 집터만 3,000여 곳에 육박한다.
지금도 울산 인근에서는 유적지가 드러나면 거의 빠짐없이 청동기시대 주거지가 발견되어 남한 유적 가운데서는 독보적으로 인구밀도가 높다.
그중에서도 울산식 주거지의 연대는 서기전 8~서기전 5세기 정도로 암각화에 새겨진 초원 요소의 연대와 대체로 맞아떨어진다.
그렇다면 반구대 암각화는 거주하기 좋은 환경을 찾기 위해 환동해를 따라 남하한 북방 초원 사람들이 만들었을 가능성이 크다.
보통 암각화는 의례를 지내던 성소에 제작하므로, 주변에서 다른 유적이나 유물이 함께 발견되는 경우가 흔하다.
앞으로 물속에 잠긴 반구대와 그 주변의 정밀조사가 진행된다면 아직 해결되지 않은 여러 의문이 풀릴지도 모르겠다.
또 초원과 반구대 사이의 공간적 차이를 메우는 또 다른 유적의 발견도 기대해볼 만하다.
사냥을 주업으로 했던 주민들이 북쪽에서 남쪽으로 이동했다면 백두대간을 타고 내려왔을 것이므로 동해안을 따라 새로운 암각화 자료가 나오기를 기대해본다.
○환동해 지역의 사라진 역사, 옥저와 읍루
21세기로 들어서면서 중국 중심의 역사 해석 문제가 갈수록 심해지고 있다.
한국에서는 동북공정이라는 단일 문제로 나타났지만, 실제로는 전 동북아시아의 역사 인식과 직결돼 문제가 매우 심각하다.
중국이 역사 왜곡으로 얻으려는 결과는 전 세계 학자들에게 '동북아시아=중국'이라는 인식을 은연중에 심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독자적으로 존재했던 환동해의 한국 고대 문화를 증명하면 중국 중심의 역사관을 탈피할 수 있으며, 새로운 시각에서 동북아시아를 바라보는 단초를 제공하게 된다.
남한의 역사는 한반도로만 한정되지 않는다.
고구려, 발해, 부여, 옥저, 읍루와 같이 수많은 국가가 북한 및 만주 일대와 함께 묶여 있다.
우리 역사 최초의 국가였던 고조선이 성장하고, 멸망하는 과정에서 한반도와 만주 일대는 다양한 집단과 국가로 분리되었다.
남한과 달리 북방의 여러 민족은 이름만 알려져 있을 뿐 아직까지도 제대로 실체를 파악하는 연구조차 거의 진행되지 않았다.
그 잊힌 역사 가운데 옥저와 읍루가 있다.
고구려와 부여에서 갈라져 나온 옥저, 발해의 기층을 이루었던 말갈은 한국의 고고학과 고대사의 일부분임에도 거의 다루어지지 않았다.
옥저와 읍루 같은 북방민족들의 역사는 '변방'으로 치부되었고, 한국사 연구에서도 매우 소외되었다.
하지만 고고학 자료가 여럿 발굴되면서 북방 지역의 여러 집단에 대한 새로운 사실들이 밝혀졌다.
옥저와 읍루의 고고학 자료는 러시아, 중국, 북한과 같이 우리가 쉽게 가볼 수 없는 지역에서 주로 발견되었다.
잊힌 나라인 옥저와 읍루를 다시 보는 것은 단순히 과거의 한 쪽(페이지 page)을 여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그곳은 통일 이후 우리의 역사를 새롭게 닦기 위한 기반이기도 하다.
함경도와 강원도는 한반도의 척추에 해당하는 백두대간을 따라 북한을 거쳐 북방 유라시아와 이어지는 환동해 지역 교류의 중심이었다.
청동기시대 이래로 이곳은 한국과 유라시아를 잇는 고대 문화의 핵심 통로였다.
이 통로(루트 route)는 바로 유라시아 철도가 이어지는 길이기도 했다.
함경남북도를 거쳐서 러시아의 국경도시 하산 Khasan을 거쳐 우수리강 Ussuri River(아무르강의 지류)과 아무르강을 따라 이어지는 유라시아 철도는 바로 옥저, 읍루가 존재했던 지역을 지나간다.
현재 러시아의 극동 지역이다.
이곳이 오래전부터 한국사의 일부였다는 사실은 옥저와 읍루가 증명한다.
따라서 그곳의 이야기는 21세기에 끊어진 남한과 대륙이 2,000년 전부터 교류했다는 증거로서 의미가 있다.
환동해 지역을 대표하는 거대 국가인 발해는 갑자기 등장한 것이 아니었다.
발해 이전부터 이 지역에 살던 사람들이 기반을 닦아두었기에 발해도 등장할 수 있었다.
최근 한국과 동아시아의 역사 갈등은 쉽게 봉합되지 않고 계속 이어지고 있다.
우리는 한국의 독자적인 역사를 강조하고, 중국은 자국 중심으로 동아시아 곳곳을 재해석한다.
국제적으로 한국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지금, 잠깐만 시간을 들여 생각해보자.
과연 우리는 우리의 역사를 제대로 알고 있는가?
그렇지 않다.
고대사 연구는 백제와 신라에 집중되어 있다.
최근 고구려나 발해 관련 전공자들도 많이 늘었지만, 여전히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하물며 옥저나 읍루, 부여와 같은 북방민족의 역사는 더 말할 것도 없다.
환동해의 옥저와 읍루가 우리 역사에서 소외된 이유는 우리도 부지불식간에 중국 중심의 역사 인식에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동아시아의 모든 선진 문화를 한나라와 낙랑군으로 대표되는 중국 역사의 연장선으로 보는 중화적인 관점에서 환동해 지역과 강원도는 변방일 수밖에 없었다.
우리의 역사에서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는 국가와 옥저와 읍루뿐만이 아니다.
북방의 한대 지역에서 부여와 같은 거대한 성터와 집단을 이루었던 두막루豆莫婁, 함경남도의 동예東濊, 700년 넘게 거대 국가로 성장했지만 여전히 미지의 나라인 부여扶餘, 그리고 강원도에 존재했던 예맥濊貊과 말갈靺鞨도 여기에 포함된다.
소외된 민족과 나라가 유독 북방에 모여 있는 이유는 그동안 한국사에 존재했던 남한 위주의 역사관에 그 원인이 있다.
더 깊게는 분단이라는 현대사의 아픔, 그리고 러시아와 중국이라고 하는 거대 국가의 장벽도 큰 이유였다.
그렇기에 옥저와 읍루를 다시 보는 것은 단순히 과거의 역사를 복원하는 것을 넘어 우리의 역사를 거시적으로 관조함으로써 주변국과의 역사 갈등에서 벗어나 새로운 차원을 여는 첫 단추가 될 것이다.
이 책을 준비하는 지금 전 세계는 코로나의 광풍으로 몇 년 동안 크게 흔들린 사회를 재정비하고 다시 나아갈 준비를 하고 있다.
하지만 쉽게 갈 수 있었던 연해주와 연변으로 가는 길은 여전히 묶여 있다.
언젠가는 다시 우리의 역사를 찾아 북방 지역을 갈 수 있는 날이 열릴 것이다.
다시 남북한 철도가 연결되고 두만강을 따라 유라시아로 갈 날이 올 것이다.
유라시아 열차는 통일된 남북을 지나 옥저와 읍루가 머물렀던 땅을 밝게 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옥저와 읍루는 단순히 고대의 잊힌 역사가 아니라 지금 우리가 유라시아로 가는 길목의 살아 있는 역사이기도 하다.
※출처
1. 강인욱 지음, 우리의 기원-단일하든 다채롭든, 21세기 북스,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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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8. 1 새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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