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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로 들어온 금속 세공 기술

새샘 2025. 6. 19. 11:32

○초원문화의 구심점, 거대 고분

 

초원草原 grassland은 지리학적 개념이다.

초원은 유라시아 Eurasia 뿐만 아니라 아메리카 America 대륙과 아프리카 Africa 대륙에도 있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초원이라고 하면 보통 유라시아의 광활한 벌판을 가장 먼저 떠올린다.

 

유라시아 초원의 규모는 만리장성에서부터 몽골 Mongolia과 러시아 Russia를 거쳐, 서쪽으로 헝가리 Hungary까지 끊이지 않고 어어질 만큼 넓다.

전 세계 초원지대 가운데서도 첫 손가락에 꼽힐 정도다.

중간에 산맥이나 바다에 가로막히지 않고 평원이 연속해서 쭉 이어지다 보니 새로운 기술이 탄생하면 타지로 전파되는 속도가 상당히 빨랐다.

이를 바탕으로 유라시아의 초원은 고대에서부터 지금까지 유럽과 아시아를 연결해주는 통로가 되었다.

 

유라시아 초원의 서기전 8~서기 3세기의 유목문화(출처-출처자료1)

 

위 지도는 유라시아 초원에서 발흥發興한(어떤 일이나 현상이 일어난) 주요 문화권을 보여준다.

가장 왼쪽 흑해 지역에서 나타난 스키타이 문명 Scythian civilization부터 우리나라와 가장 가까운 곳의 샤자덴(하가점夏家店) 상층문화上層文化 Upper Xiajiadian culture까지 청동기 문화는 유라시아 대륙을 아우르며 다양하게 발달했다.

이 문화권들이 동서양을 오가며 교류하다 보니 비슷한 형태의 청동기 유물이 공통적으로 발견되기도 했다.

 

이 초원의 문명에서 나타나는 대표적인 특징은 거대한 고분古墳 Tombs이다.

고분이 초원지대의 특징으로 자리 잡은 데는 기후와 주거 방식이 영향을 미쳤다.

 

초원에 사는 사람들은 대부분 한곳에 머무르지 않고 떠돌면서 생계를 해결하는 유목민遊牧民이었다.

초원이라고 하면 파릇파릇하게 풀이 자라나고 따뜻한 햇볕이 사시사철 내리쬐는 평화로운 장면을 떠올리기 마련이지만, 실제로 초원에서 이런 기후는 1년에 서너 달밖에 나타나지 않았다.

나머지 9개월 동안은 땅이 눈밭에 덮이고 얼어붙어 먹을 것조차 제대로 구하기 어려웠다.

 

게다가 인간은 신체 구조상 초원에서 자라는 풀을 주식으로 먹을 수 없다.

초식동물은 풀에서 영양분을 얻지만, 인간의 위는 풀의 주성분인 셀룰로스(섬유소) cellulose를 소화하지 못하고 몸 밖으로 배출시킨다.

그래서 초원의 유목민들은 그 풀을 먹는 동물인 양이나 염소를 키워서 잡아먹었다.

동물을 초원에 풀어놓고 키우면 따로 먹이를 줄 필요 없이 자유롭게 자란 동물에게서 고기와 젖과 가죽을 얻기만 하면 되었다.

그러자 농사를 지을 수 없는 지역이 거대한 삶의 터전으로 탈바꿈했다.

 

다만 이런 생활의 단점은 정착해서 안정적인 삶을 유지할 수 없고 계속해서 다른 장소로 이동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목축 동물들이 풀을 다 뜯어 먹으면 먹이가 있는 다른 지역을 찾아서 옮겨야 했으므로, 마을을 형성할 수도 없었다.

몇천 마리의 양 떼를 키우는 무리가 서너 개만 모여도 동물이 먹을 풀이 모자라다 보니 다 같이 굶주릴 수밖에 없었다.

 

이처럼 공동체의 구심점이 사라진 유목문화에서 모임 장소로써 중요한 역할을 한 곳이 고분이었다.

초원지대의 사람들은 돌아가신 조상의 무덤을 크게 만들어서 그곳에 모여 제사를 지내고 음식을 나누었다.

이것이 초원지역에서 거대한 고분이 많이 발견된 이유다.

대형 무덤들은 지름이 150여미터에 이를 만큼 엄청나게 넓었고, 안에는 나무로 마치 통나무집같은 관을 지어서 살아 있는 사람들이 돌아가신 왕이나 족장을 추모하는 장소로 사용했다.

 

세계사를 보면 이 지역뿐만 아니라 거대한 무덤을 만들어 조상을 추모하는 문화가 다수 존재했다.

우리나라의 신라시대에도 돌로 쌓은 무덤이 있었고, 유럽에도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큰 고분 안에는 황금이 다량으로 묻힌 경우가 많았다.

 

 

○황금 유물이 여러 유적에서 발견된 까닭

 

카자흐스탄 이식 고분에서 발굴된 2,400년 전 황금 유물 컬러 사진(출처-출처자료1)

 

카자흐스탄 이식 고분에서 발견된 2,400년 전 황금 유물과 발견 당시의 모습(출처-출처자료1)

 

황금은 초원에서 말을 타던 사람들이 가볍게 착용하기 좋은 비싼 귀금속이었다.

덩어리로 된 금괴는 무게가 많이 나가지만, 황금을 얇게 펴서 장신구를 만들거나 몸에 붙이면 가벼우면서 부를 과시하기에도 좋았다.

주로 사용된 장식품은 위 사진과 같은 것들이었다.

이 장식품들을 옷이나 마구에 붙이고 온몸을 황금으로 반짝반짝 빛나게 한 것이다.

 

당시 유목민들에게 자신의 부를 과시할 만한 소재는 황금밖에 없었다.

정착하지 않으니 집을 으리으리하게 지을 수도, 값비싼 물건을 잔뜩 사서 들고 다닐 수도 없었다.

오로지 황금을 얇게 펴 장신구로 쓰는 것만이 재력을 뽐낼 수 있는 전부였다.

주군은 자신을 따르는 전사에게 황금을 하사했다.

훈장처럼 온몸을 덮은 황금은 그 사람의 무덤까지 따라갔다.

 

위 사진에서 오른쪽 아래에 있는 갑옷은 카자흐스탄 Kazakhstan의 이식 Issyk 유적에서 발견된 유물이다.

이 갑옷의 주인은 갑옷에 황금을 붙여 온 몸을 치장했다.

죽었을 당시 추정 나이는 10대 후반으로 상당히 어렸음에도 황금으로 장식한 화려한 옷을 입고 있었다는 것은 전공을 많이 올린 전사였다는 것을 말해준다.

 

유목 전사들이 부장품으로 황금을 많이 사용한 데는 당시의 평균 수명도 한몫했다.

초원에서 활동한 전사들은 맹렬한 전쟁을 반복해서 치르다 보니 평균 수명이 20대 중후반으로 매우 짧았다.

지금으로 따지먄 삶의 절정기에 접어들 무렵 죽음을 맞는 것이다.

그 때문에 귀족들은 아이를 낳으면 곧바로 그들의 무덤 자리를 준비했다.

이들에게 무덤이란 우리가 연금에 가입하는 것과 같은 유일한 노후 대비책이었다.

 

그리고 평생 전쟁하며 모은 황금으로 무덤을 장식했는데, 여러 문양 가운데서도 특히 동물 그림을 많이 활용했다.

특히 기세가 좋은 표범이나 호랑이 또는 상상의 동물인 그리핀 griffin(머리·앞발·날개는 독수리이고 몸통·뒷발은 사자인 상상의 동물)이나 사슴 따위의 역동적인 동물들이 그들의 주요 관심사였다.

이처럼 예사롭지 않은 무덤을 만들면서 초원 지역의 황금 가공 기술은 전 세계에서 손꼽힐 만큼 발전했다.

그 기술은 동과 서로 뻗어나갔다.

 

이처럼 카자흐스탄과 실크로드(비단길) Silkroad에 살며 황금 문명을 이루었던 유목민들을 '사카(사카인, 사카족) Saka'라고 부른다.

이들은 서기전 4세기 때 서쪽으로 밀려나 중국 북방으로 들어왔다.

이 시기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복잡한 사건들이 일어난 혼란한 시대였다.

연나라 장수 진개는 고조선을 공략해 땅 절반을 빼앗았고, 중국에서는 만리장성을 쌓기 시작했다.

한나라의 북쪽에 자리 잡은 흉노족도 이때부터 발흥했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들로 한반도에 황금을 다루는 기술, 금관을 제작하는 기술이 어떻게 유입되었는지가 서서히 드러났다.

 

사카인들은 북쪽으로는 현재의 알타이 Altai 지역까지 이동했고, 일부는 만리장성을 따라 중국 북방을 거쳐 이후 한반도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나머지 무리는 히말라야 산맥 Himalayas을 따라서 중국 남쪽으로 내려갔다.

멀게는 미얀마 Myanmar북쪽까지도 이 초원인들의 흔적이 남아 있다.

다큐멘터리 documentary <차마고도 茶馬古道 Ancient tea route 또는 Southern Silkroad>의 여정은 바로 이 사카족이 거쳐 간 길을 더듬어본 것이다.

 

청동기와 마찬가지로 황금 기물을 만드는 데도 기술자가 필요했다.

단, 황금을 가공할 때는 거푸집을 사용하지 않았다.

금을 청동처럼 녹여서 붓다가 흐르거나 빠지면 손해가 막심했으므로 거푸집을 사용하는 대신 얇게 펴서 하나씩 두들기고 붙이면서 세공한다.

황금 세공 기술에는 기술 집약적인 방법이 사용되었으므로 넓은 공간 역시 불필요했다.

 

 

국보 제89호 평양 석암리 금제 띠고리 복제품(출처-출처자료1)

 

그 시대의 유물에서는 이러한 기술자들의 세심함을 엿볼 수 있다.

바로 위 사진은 국보 제89호인 평양 석암리 금제 띠고리로 낙랑시대에 만들어진 것이다.

가운데 새긴 용 문양은 금으로 구슬을 만들어 하나씩 이어 붙여 표현했다.

금으로 정교한 장식품을 만드는 누금세공鏤金細工이라는 공예법으로, 얇은 금판에 열을 가해 작은 구슬을 만드는 기술이다.

현대 금세공 기술로는 따라 할 수 없을뿐더러 만들 수 있다고 하더라도 비용이 어마어마하게 들어가므로 이 유물의 가치는 측정이 불가능하다.

 

 

동아시아 일대에서 발굴된 2,000년 전 흉노의 기술로 만들어진 황금 허리띠(출처-출처자료1)

 

그렇다면 이러한 유물을 만든 기술자들은 어디에서 왔을까?

바로 위 사진을 보자.

평양 석암리 금제 띠고리와 비슷하게 생긴 이 유물들을 발견된 장소가 모두 다르다.

윗줄은 실크로드 지역인 중국 신장성(신강성新疆省), 가운뎃줄은 평양, 아랫줄은 중국 다롄(대련大连/大連)애서 각각 발견되었다.

이것은 서로 모양을 베낀 것이 아니라 2,000년 전에 금속 기술자들이 중국과 한반도 일대로 확산되었다는 증거다.

 

이렇게 기술이 옮겨가는 것은 현대의 명품이 전 세계적으로 유명세를 떨치는 현상과 비슷하다.

예를 들어, 모두가 선망하는 해외 상표商標(브랜드 brand)의 차가 있다고 가정해보자.

이 상표를 한국에 첫 출시出市(론칭 launching)할 때는 서울에서 가장 부유한 지역에 지점을 열어 판매를 시작할 것이다.

그러다 많은 사람에게 인기를 끌면 지방 대도시에도 새로운 지점을 내게 된다.

그렇게 작은 지방 구석구석까지도 소문이 퍼져나가면서 점차 유행으로 자리잡고, 그 상표를 만드는 기술자도 지점을 따라 이동할 것이다.

같은 방식으로 유라시아의 황금 예술 역시 사람들에게 열렬한 환호를 받으며 순식간에 동쪽 끝 지역인 한반도에까지 퍼졌다.

 

그렇다면 금은 어디에서 가져온 것일까?

요즘처럼 금광에서 캐낸 것일까?

2,000년 전에는 금광에서 캐낸 금이 많지 않았다.

대부분은 다른 무덤에 있는 금을 훔쳐 녹여서 사용하거나 사금을 채취했다.

금은 비중이 높아서 물살이 빨라질 때 멀리 움직이지 못하고 강바닥에 깔린다.

이를 이용해 강에서 물을 떠 가장 무거운 금만 남기는 방식으로 금을 채취했는데, 최근까지도 이 방법으로 한 명이 1년에 약 50그램 정도의 금을 캤다고 한다.

 

하지만 금이라는 금속은 예나 지금이나 구하기 어려웠고 가치가 높았으므로 아주 세심하게 다뤄졌다.

따라서 금관이 등장하기까지는 다른 나라의 발전된 문명이 신라로 유입되고, 기술이 발달하는 과정을 거쳤기에 훨씬 더 오랜 시간이 걸렸다.

또한 금은 신라가 중앙집권 국가로 발전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금이 어떻게 단순히 장신구 이상의 가치를 뛰어넘어 사회와 국가를 아우르는 상징물이 되었는지는 다음 글에서 이어진다.

 

※출처

1. 강인욱 지음, 우리의 기원-단일하든 다채롭든, 21세기 북스, 2022.

2. 구글 관련 자료

 

2025. 6. 19 새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