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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동자 안견 "몽유도원도" 본문

글과 그림

현동자 안견 "몽유도원도"

새샘 2009. 12. 26. 17:02

꿈길을 따라서 그린 그림인 조선 최고의 걸작 산수화

<안견,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 1447년, 두루말이 비단에 수묵담채, 38.7×106.5㎝, 일본 덴리[천리天理]대학교 도서관, 일본중요문화재>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는 세종의 셋째 아들 안평대군 이용李瑢(1418~1453)이 어느 여름날 밤 복숭아나무 숲 즉 도원을 노닐었던 꿈 이야기를 당시 최고의 화원 현동자玄洞子 안견安堅(1400?~1479?)이 1447년에 그린 그림이다.

 

<몽유도원도>는 그림 자체의 우수성과 더불어, 당시 조선 최고의 천하명필 안평대군이 직접 쓴 그림의 제목, 화가이름, 그리고 그림 소재가 되었던 자신의 꿈 내용인 제기題記인 <몽유도원기>가 이어져 있으며, 이 다음에 집현전을 중심으로 당시 한 시대를 주름잡았던 명사 21명(박팽년, 성삼문, 신숙주, 박연, 김종서, 서거정, 정인지 등)의 육필로 이 그림을 기리는 찬시讚詩와 찬문讚文이 있기 때문에 더욱 그 가치가 높이 평가되고 있다. 이것 뿐만이 아니다. 그림이 그려진 지 3년 후 안평대군은 <몽유도원도>를 펼쳐보면서 옛 감회에 젖어 '제시題詩'까지 지어 덧붙였다. 이처럼 한 점의 그림 작품 속에 한 시대의 문화가 모두 녹아 있는 예는 동서고금을 통해 보더라도 그 예를 찾아 보기 어려운 귀한 작품인 것이다.

 

<몽유도원도>한 편의 장대한 서사시다. 작품의 기본축은 오른쪽 위에서 왼쪽 아래로 가로지르는 호쾌한 대각선이다. 그리고 보조축으로 오른쪽 아래에서 왼쪽 위를 향해 점차 상승하는 대각선이 교차된다. 마치 교향곡에서 서로 다른 두 주제가 겹쳐져 화려장엄하고 내밀한 음상音象을 짜 보이듯이, 두 대각선은 서로 얼키고설켜 복잡다단한 산수의 경관을 내비침으로써 무릉도원에 접근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웠는지를 실감나게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두루말이를 여는 순간 우리는 대뜸 펼쳐진 황홀한 무릉도원의 전경에 압도된다. 마치 궁중아악 수재천의 시작을 알리는 박 소리가 그치자, 모든 악사들이 일제히 강박 합주로 장엄한 첫음을 울리는 것처럼, 안개 자욱한 무릉도원은 꿈결 같은 향기를 온 누리에 퍼뜨리며 화평한 기운으로 떠오르는 것이다. 빨간 복사꽃잎의 꽃술에는 금가루가 반짝이고, 병풍처럼 사방을 둘러싼 기괴한 봉우리들은 각광을 받아 얼비친다. 아래가 밝고 위가 어두운 봉우리 봉우리는 신비롭기가 그지없으니 분명 현실 세계가 아닌 신선의 경계이다. 봉우리의 윤곽선들은 마치 전류가 흐르는 듯 굵었다가는 가늘어지며 이따금씩 바르르 떨리면서 껶여 나간다.

 

이런 도원경은 과연 성정이 맑고 고요한 사람만이 꿈속에서나마 드나들 수 있을지 모른다. 그렇지만 이러한 도원경을 여실히 그려낸 사람 또한 보통 사람이겠는가? 안견은 화면 상부에 고드름처럼 매달린 기암으로 환상을 극하는 절경의 분위기를 내고, 몸이 하늘에 떠서 내려다본 듯이 도원 전체를 폭 넓게 조망하고 있다. 깎아지른 절벽과 드넓은 도원의 동시 묘사는 과연 천재에게나 가능한 경지리라. 오른쪽 위에는 아담한 집이 세 채 보이고 한중간에는 빈 배가 물가에서 출렁인다. 그러나 사람은 아무도 보이지 않고 자욱한 안개 속에서 화사한 복사꽃이 오히려 너무 고와 서러울 지경이다. 이 적막하고 아득한 경지를 보노라면, 안견은 '지극히 아름다운 것은 그 궁극에서 비애감으로 이어진다'는 진리를 익히 알고 있었음이 틀림없다.

 

작품의 가운데 부분은 안평대군이 도원을 찾아가면서 보았던 기괴한 산수의 기암절벽과 물굽이다. 가운데에 험한 물굽이와 어두컴컴한 골짜기를 두고 서로 마주보는 높은 봉우리들은 그 형태가 천변만화한다. 또 그 위태롭게 중첩된 봉우리는 살짝 건드리기라도 하면 곧 와르르 무너질 듯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부분은 전체적으로 정삼각형의 단단한 구도를 이루고 있다. 어느 한 구석 빈틈을 허용하지 않는 화가의 용의주도함이다. 특히 오른편 한중간에는 두 단으로 쏟아져 내리는 환상적인 폭포 물줄기가 보여 고요한 중에 맑게 듣는 물소리가 들릴 듯하며, 그 아래로 벌써 도원의 꽃나무가 일부 보여 선경이 가까움을 말해주고 있다.

 

삼각형의 좌변을 이루는 왼편 봉우리는 화면 전체를 통하여 가장 진한 먹색을 띠고 있다. 오른편 무릉도원의 이상향과 그 왼편의 현실 세계를 가르는 관문이기 때문일 것이다. 봉우리 한중간에는 빛이 새어 비춰보이는 작은 굴이 있다. 여기서부터 산허리를 따라 난 좁다란 길은 S자처럼 굽이쳐 내려오며 하변에 이르러서 현실경으로 연결된다. 봉우리는 형태 자체가 매우 기이한데 정상에는 괴물의 혹인 양 작은 돌기마저 솟아 있어 으스스한 느낌마저 준다. 속인의 범접을 거부하는 신선 경계의 관문다운 조형이라 하겠다. 이 봉우리가 까마득하게 치켜다본 형태로 그려져 있는 것은 그 아래길에 서서 아득하게 올려다보았던 안평대군의 시각 경험을 반영한다.

 

이제 우리는 안평대군의 꿈속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황홀한 무릉도원에서 시작하여, 험절하기 짝이 없는 기암절벽을 넘고 깊은 골짝을 건너, 드디어 평탄하게 내다보이는 현실경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그런데 이 마지막 현실경이 평범한 것은 이해할 수 있다손 치더라도 그 먹색까지 <몽유도원도> 전체에서 가장 흐린 점은 이상하다. 현실경이 더 진하지 않고 꿈속의 경관이 오히려 분명하다. 꿈속에 보았던 황홀한 인상이 너무나 강했던 때문일까? 현실경은 아직 채 꿈이 깨지 않은 듯 거꾸로 초점을 잃고 부옇게 흐려졌다. 그렇다! 안평대군의 눈앞에는 아직도 무릉도원의 절경이 어른거리고 있다. 특히 현실경의 오른편 위쪽 하늘에 아득하게 떠 있는 저 음영뿐인 산은 작품 우하에서 좌상으로 이어지는 대각선 상에 떠 있으니, 분명 아련한 도원의 마지막 잔상임을 말해준다.

 

<몽유도원도>에는 사람이 일체 보이지 않는다. 도연명의 '도화원기'에 의하면 도원은 분명 사람이 사는 곳이다. 어찌된 일일까? 이것은 이 작품이 꿈속에서 무릉도원을 발견했던 과정을 그린 것, 즉 꿈의 일부분을 그린 것이 아니라, 황홀한 도원을 익히 보고 도취되었다가 험한 산수를 거쳐 다시 현실경으로 돌아오려는 순간, 즉 꿈이 막 깨려는 순간의 인상을 그린 것이기 때문이다. 안평대군은 이제 현실경이 얼비치는 꿈 밖으로 거의 나왔다. 그러므로 작품 속에는 인적이 없으며, 다시 돌아갈 수 없는 무릉도원에 대한 애뜻한 정한만이 쓸쓸한 기운으로 남아 작품 전체에 감돌고 있는 것이리라.

 

그림을 그린 3년 후 안평대군이 짓고 직접 글을 써서 덧붙인 제시를 한번 살펴보자.

"이 세상 어느 곳이 꿈에 본 도원인가           세간하처몽도원世間何處夢桃源

 시골사람 옷차림이 아직도 눈에 선하구나     야복산관상완연野服山冠尙宛然

 그림으로 두고 보니 참으로 좋을씨고          착화간래정호사着畵看來定好事

 자부컨대 천 년을 넘어 전해지리라            자다천재의상전自多千載擬相傳

 옛꿈후 3년 지난 해 정월 어느 밤에            후삼년정월일야後三年正月一夜

 치지재에서 다시 펴보고 지었다. 청지.        재치지재인피열유작 청지 在致知齋因披閱有作 淸之"

 

2009년 기준으로 <몽유도원도>는 그려진 지 562년이 되었다. 제시에 있는 안평대군의 희망대로 <몽유도원도>는 천년을 넘어 전해지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몽유도원도>에는 우리 옛그림의 삼원법고원법(高遠法: 깎아지른 높은 산을 아래서 위로 치켜다본 시각), 심원법(深遠法: 엇비슷한 높이에서 뒷산을 깊게 비껴본 시각), 평원법(平遠法: 높은 곳에서 아래쪽을 폭 넓게 조망한 시각)의 다양한 시각이 한 화면 속에 무리 없이 소화되고 있다. 얼핏 생각하기에 다양한 시각이 뒤섞여 있으니 작품 전체가 매우 이상하게 보임직한데 오히려 옛 산수화를 보면 마음이 평온하기 그지없다. 그것은 서양의 투시 원근법상의 논리로부터 슬그머니 도망쳐 나온, 수없이 많은 자잘한 여백들이 경물과 경물 사이를 매개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작품을 보고 있노라면 보는 이의 시선은 그려진 대상의 제각각의 형상을 따라 끊임없이 이곳에서 저곳으로 따돌아 옮아다니게 된다. 이를테면 깎아 세운 절벽은 아래쪽에서 쳐다보는 느낌을 주고, 넓은 평원은 자신이 그림 속의 높은 곳에 올라서 있다는 느낌을 갖게 한다. 작품 속의 산수가 실제의 자연이 그렇듯이 여기저기 발걸음을 옮겨놓을 수 있는 살아 있는 공간이 되는 것이다.

 

피카소가 서양 입체파의 선구자로서 사물을 보는 보는 자유롭고도 상상력 넘치는 시각을 이용해서 복합적인 화면을 구성함으로써 서양 회화사에 새로운 경지를 열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러나 피카소의 작품은 종종 형상을 너무나 무리하게 왜곡시켜 보는 이에게서 대상의 객관성을 배제하고 주관 속의 일그러진 인상만을 보여준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이렇게 본다면 진정한 입체파의 모범은 오히려 우리의 옛 산수 그림이 아닌가싶다.

 

안견安堅(1400?~1479?)은 세종대에 주로 활동하고 세조연간까지 생존했던 것으로 추측되는 세종당시 화단의 제1인자로 활약하던 화원이다. 벼슬은 정4품에까지 올랐다. 1442년 안평대군 초상을 비롯하여 많은 그림을 그렸으며, 특히 산수화는 당시 필적할 사람이 없었다고 전한다. 특히 안평대군의 후원으로 옛 그림들을 많이 보면서 여러 대가들의 좋은 점을 취하고 절충해 자신만의 화풍을 이룩하여 조선초기 대표적인 화파인 안견파를 형성시켰으며, 그 후 조선 중기 화가들에게까지 지속적인 영향력을 발휘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현재까지 전해지는 그림으로 이 <몽유도원도>만이 확실한 진작眞作으로 알려져 있으며, 그 밖의 안견의 작품으로 알려진 것은 모두 전칭작으로서 진작이란 확실한 증거는 없다.

 

이 글은 고 외우 오주석 선생이 지은 <옛그림 읽기의 즐거움>(1999, 솔출판사)에 실린 글을 발췌 정리한 것이다.

 

2009. 12. 26 새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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