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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샘(淸泉)
코핀과 스테이시의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 6부 혁명의 시대 - 18장 프랑스 혁명 2: 혁명의 도래 본문
프랑스 혁명의 기원(1788~1789년) | |
재정 개혁의 실패 루이 16세의 신분회 소집 유럽 전역에 걸친 빵 폭동 파리에서 신분회 열림 제3 신분이 스스로 국민의회 선포 테니스 코트의 선서 바스티유 함락 |
1787년 ~ 1788년 1788년 5월 1789년 봄 1789년 5월 1789년 5월 1789년 6월 1789년 7월 14일 |
프랑스 혁명 French Revolution의 장기적 원인은 무엇인가?
역사가들은 오래전에 프랑스 혁명의 원인과 결과는 계급 갈등의 관점에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해석에 따르면 계몽사상과 자신의 이기심에 고무되어 대두한 부르주아 bourgeois(자본가)계급 또는 중간계급이 귀족적 질서의 잔재를 전복시킨 것이었다.
이 해석은 19세기 철학자인 독일 카를 마르크스 Karl Marx(1818~1883)의 저작과 상당 부분 20세기 사회학에 근거를 둔 것이었다.
역사가들은 이 과감한 해석을 상당히 수정해왔다.
확실히 프랑스 혁명의 기원은 18세기 프랑스 사회에서 찾을 수 있다.
하지만 프랑스 사회는 단순히 부르주아계급과 귀족계급으로 나뉜 것은 아니었다.
프랑스는 귀족, 관직 보유자, 전문가 그리고 (숫자는 적지만) 상인과 사업가 따위를 한데 어우르는 신新엘리트 new élite 또는 사회집단이 지배하고 있었다.
프랑스 혁명을 이해하려면 이 새로운 사회집단과 루이 16세 Louis XVI(재위 1774~1792)정부에 대한 그들의 갈등을 분석할 필요가 있다.
프랑스 사회는 세 가지 신분으로 나뉘어 있었다(개인의 '신분'은 그의 지위를 나타내며 이에 따라 법적 권리, 세금 따위가 결정되었다).
제1신분은 모든 성직자로 구성되었고, 제2신분은 귀족으로 이루어졌다.
가장 수가 많은 제3신분은 부유한 법률가나 사업가에서 도시 노동자나 가난한 농민에 이르는 거의 모든 사람들을 포함했다.
규모는 작지만 막강한 집단인 프랑스의 정치적·사회적 엘리트 élite(정예) 안에서 이러한 법적 차별은 종종 인위적인 것으로 여겨졌다.
우선 사회의 더 높은 상층부에 도달하는데 있어서 귀족과 부유한 보통 사람의 사회적 경계는 분명치 않았다.
귀족의 작위를 주는 관직을 살 수 있는 사람은 귀족의 작위를 획득했다.
예를 들어 1700년에서 1789년 사이에 5만 명에 가까운 새로운 귀족이 출현했다.
귀족층은 자신의 활력을 제3신분의 부유한 사회집단에서 나오는 재능과 경제력의 끊임없는 유입에 의존했다.
혁명가인 오노레 가브리엘 리케티 Honoré Gabriel Riqueti(1749~1791), 즉 미라보 백작 Count of Mirabeau의 가문은 이러한 변화를 잘 보여준다.
16세기에 살았던 미라보의 조상들은 상인이었다.
하지만 1570년 그들 중 한 사람이 미라보 영주의 특권(귀족 작위가 수여되는 토지)을 구입했고, 다음 세기에 또 다른 조상이 후작의 작위를 사들였다.
법률가인 미라보는 자신의 할아버지가 지휘한 적이 있었던 기병대에서 장교로 근무했다.
귀족은 무관武官 귀족과 관복官服(또는 법복法服) 귀족으로 구별되었는데, 무관 귀족은 군 복무를 통해 이어진 한층 더 오래된 출중한 혈통이었고, 관복 귀족은 관직의 매입을 통해 행정직이나 사법직(따라서 관복 귀족이라고 부른다)을 얻는 사람들이었다.
미라보 가문의 사례가 보여주듯이 그러한 구별조차도 쉽게 혼동될 수 있었다.
부富 wealth는 다양한 형태를 취했다.
대다수 귀족의 부는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는 토지, 도시 재산, 매입 관직 따위에 묶여 있었다.
하지만 귀족 가문은 역사가들이 오래 생각했던 것처럼 무역이나 상업을 경멸하지 않았다.
사실 귀족은 여러 산업에 투자했으며 은행업, 선박 소유, 노예무역, 광산업, 야금업 따위와 같은 사업에 많은 돈을 투자했다.
더욱이 제3신분 가운데 매우 부유한 사람들은 안전하고 특허가 있는 재산에 투자하기를 좋아했다.
그리하여 18세기를 통해 많은 부르주아의 부는 귀족적 부의 형태로 변모했으며, 상당수의 부유한 부르주아는 귀족이 되었다.
부르주아계급의 부유한 사람들은 스스로를 별도의 계급으로 보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을 육체노동을 하던 보통 사람들과 다르고 종종 반대된다고 생각했지만 자신들이 빈번히 열망하던 귀족계급의 가치와 동일시했다.
그런데도 중요한 사회적 긴장들이 있었다.
그 수가 늘어나고 있었던 그다지 부유하지 못한 법률가들은 자신의 직업에서 특전이 부여된 소수의 특권적 지위를 시샘했다.
18세기에 걸쳐 관직 매매의 가격은 올라갔다.
이는 귀족계급에 진입하는 방도의 구입을 한결 어렵게 만들었으며, 제3신분의 평범한 구성원과 무역과 상업을 통해 매우 부유해진 사람들 사이에 긴장을 조성했다.
부유한 사람들은 대체로 사회적 지위의 사다리를 올라가는 것이 허용된 유일한 집단이었다.
부유하지 못한 귀족은 부유한 벼락부자의 성공에 대해 분개했다.
이들 벼락부자의 수입은 귀족이 누릴 수 없었던 엄청난 규모의 사치 생활을 누릴 수 있도록 해주었던 것이다.
요약하면 엘리트와 중간계급 속으로 몇 개의 단층선이 빠르게 퍼졌던 것이다.
그렇지만 모든 사회집단은 자신의 이해관계에 기여하고 있지 않던 정부와 경제를 공격하는데 힘을 합칠 수 있었다.
계몽주의는 여론을 바꾸어 놓았다.
사상이 프랑스 혁명의 원인은 아니었지만, 사상은 불만을 명확하게 해주는 데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로크 Locke, 볼테르 Voltaire, 몽테스키외 Montesquieu의 정치이론은 불만에 찬 귀족과 중간계급의 구성원 모두에게 호소력을 지녔다.
볼테르는 귀족의 특권을 공격했기 때문에 인기가 있었다.
로크와 몽테스키외는 사유재산권과 제한주권에 대한 옹호로 광범위한 지지를 획득했다.
몽테스키외의 사상은 프랑스의 막강한 법원, 즉 고등법원을 지배했던 귀족 법률가와 관직 보유자들에게 호소력을 지녔다.
그들은 몽테스키외의 견제와 균형의 이론을 국왕 정부의 전제정치를 견제해줄 정부기관뿐만 아니라 고등법원에 대한 옹호로 이해했다.
갈등이 일어났을 때 귀족 지도자들은 국왕과 휘하 장관들이 위협했던 국가 정치공동체의 옹호자를 자처했다.
변화를 위한 운동은 또한 경제 개혁가들로부터도 커다란 지지를 받았다.
프랑스에서 '중농주의자'로 불렸던 사람들은 정부에게 과세제도를 단순화하고 경제를 중상주의적 규제에서 자유롭게 할 것을 촉구했다.
예를 들면 그들은 정부에게 빵 값을 저렴하게 유지하기 위해 부과되어왔던 곡물 가격에 대한 통제를 없애라고 주장했다.
그들은 이런 정책들이 시장의 자연스런 작동을 저해한다고 주장했다.
시골에서 농민은 영주·교회·국가에 대한 각종 의무에 시달렸다.
십일조 또는 교회에 바쳐야 하는 생산물에 부과된 세금, 방앗간이나 포도 압착기 같은 영주의 시설물 이용에 따른 요금, 영주에 대한 세금, 그리고 경작자가 바뀔 때마다 내야 하는 세금 따위가 농민의 의무였다.
더욱이 정부가 부과하는 직접세와 간접세 가운데 부당한 몫을 농민이 부담해야 했다.
그중에서 가장 부담이 컸던 것은 소금세였다(소금 생산은 국가가 독점했다. 각 개인은 정부로부터 1년에 최소한 약 3.2킬로그램의 소금을 사야 했는데, 그 결과 소금은 실제 가치보다 50배 또는 60배 이상의 가격으로 판매되는 상품이 되었다).
농민의 불만을 한층 격화시킨 것은 공공 도로 유지를 위한 부역(강제노역, corvée)과 귀족의 수렵권이었다.
이 가운데 귀족 수렵권은 여러 세기 동안 오로지 귀족에게만 부여된 것으로 다른 신분과 구별해주는 상징으로 간주되었다.
혁명적 관점에서 보면 사회적·경제적 상황은 악화되었다.
18세기의 상당 기간 동안 전반적인 물가는 상승했다.
이는 투자를 위한 자본을 마련해줌으로써 프랑스 경제가 팽창하도록 해주었지만, 농민과 도시 수공원자와 노동자에게는 역경을 안겨주었다.
그들의 곤경은 1780년대 말 흉작으로 말미암아 빵 값이 급격하게 치솟아 올랐을 때 한층 더 악화되었다.
1788년 각 가정은 수입의 50퍼센트 이상을 식품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빵 구입에 지출해야 했다.
다음 해에는 그 수치가 80퍼센트까지 상승했다.
또한 흉작으로 제조 상품에 대한 수요도 감소했고 줄어드는 시장은 연쇄적으로 실업을 야기했다.
많은 농민들이 일을 구하기 위해 농촌을 떠나 도시로 갔지만, 오히려 도시가 농촌보다 더 심각한 실업 상태에 처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뿐이었다.
사료에 따르면 1787년과 1789년 사이에 대부분의 프랑스 도시 지역에서 실업률은 50퍼센트를 웃돌고 있었다.
○실패와 개혁
비효율적인 세금제도는 프랑스의 재정 상태를 한층 더 약화시켰다.
세제는 사회적 신분에 따라 달랐을 뿐만 아니라 지역에 따라서 달랐는데, 일부 지역은 다른 지역보다 더 높은 세금을 내야 했다.
특별한 사정과 세금 면제는 세금 징수관의 임무를 한층 더 어렵게 만들었다.
루이 14세 Louis XIV(재위 1643~1715) 치하에서 발생된 부채로 이미 과도한 짐을 지고 있던 프랑스 재정은 아메리카 혁명(미국 독립 혁명 American Revolution)에 따른 지출 증가로 거의 파산 상태에 이르렀다.
1780년대에 대략 400만 리브르 livre(1795년까지 사용된 프랑스 통화 단위)의 국채를 감당하느라 국가 예산의 50퍼센트를 지출했다.
경제 문제는 프랑스 행정구조의 취약성, 궁극적으로는 프랑스의 절대군주 루이 16세의 책임을 반영했다.
'계몽적인' 방식으로 자국민에게 기여하기를 열망한 루이 16세는 빈민의 운명을 향상시키고 고문을 폐지하고 세금 부담을 좀 더 부유한 계급에게 지우기를 바랐다.
하지만 루이 16세는 이러한 개혁을 실천에 옮길 수 있는 능력이 없었다.
개혁을 향한 선의의 시도는 궁극적으로 자신의 권위를 손상시켰다.
그는 철학자이자 중농주의자이며 전직 지방 행정관인 안느-로베르-자크 튀르고 Anne Robert Jacques Turgot(1727~1781)와 자크 네케르 Jacques Necker(1732~1804) 같은 개혁가들을 재무장관으로 임명했지만, 궁정 내부의 전통주의적 파당 사이에서 반대만 불러일으켰다.
그는 오스트리아 Austria의 마리아 테레지아 Maria Theresia 여왕(재위 1740~1780)의 딸로서 젊지만 의지가 강한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 Marie Antoinette d'Autriche(재위 1774~1792)에게 그녀의 친구들을 마음대로 관직에 임명할 수 있도록 허용해주었다.
그 결과 베르사유 Versailles에서는 끊임없는 음모와 빈번한 합종연횡이 일어났다.
중앙 정부와 지방 고등법원 사이의 말다툼도 개혁을 지체시켰다.
앞서 언급했듯이 고등법원들은 루이 15세 Louis XV(재위 1715~1774) 치세 초기에 독립을 거듭 주장해왔다.
18세기 내내 고등법원들은 자신들이 '헌법적인 constitutional' 권리 또는 특권이라고 부르기 시작한 것을 고집할 정돌로 크게 성장했다.
루이 16세가 비용이 많이 들었던 7년 전쟁 이후에 국민과 마찬가지로 귀족도 새로운 세금을 내야 한다고 압력을 가했을 때, 고등법원들은 주요 국세를 면제받을 수 있는 귀족의 권리를 성공적으로 지켜냈다.
이 문제는 1770년대 중반 루이 16세의 재무장관 튀르고 Anne Robert Jacques Turgot(재임 1774~1776)가 법정 비용을 삭감함으로써 부채를 줄이고 노동 부역을 지주에 대한 소액의 세금으로 대체하고 제조업을 자극하기 위해 특정 길드 gulid에 대한 제한을 폐지할 것을 제안했을 때 재연되었다.
파리 고등법원은 튀르고가 예로부터 내려오는 특전과 특권 그리고 자신의 예전 모습마저 짓밟아 뭉개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그러한 혁신에 대해 확도부동하게 반대했다.
결국 그 계획은 루이 16세가 튀르고에 대한 지지를 철회했기 때문에 실패하고 말았다.
고등법원들이 특권을 잃지 않으려고 몹시 신경을 썼을지라도 군주의 결의가 확고했다면 그들은 그의 개혁을 무한정 막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루이 16세는 결의가 굳은 군주가 아니었다.
1788년 나약한 군주 루이 16세는 혼란한 재정 상황과 심각한 사회적 긴장과 더불어 절대주의 프랑스를 정치적 재앙의 위기로 내몰았다.
※출처
1. 주디스 코핀 Judith G. Coffin·로버트 스테이시 Robert C. Stacey 지음, 손세호 옮김,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하): 근대 유럽에서 지구화에 이르기까지, Western Civilizations 16th ed., 소나무,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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