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웰스의 비극과 마취제 특허 분쟁

새샘 2025. 4. 22. 13:55

미국 시골의 외과의사 크로퍼드 롱 Crawford Williamson Long(1815~1878)은 에테르 ether 파티에 참가한 적이 있어서 에테르를 흡입했을 때 나타나는 환각 효과는 물론 통증이 줄어드는 것 또한 알고 있었다.

1842년 어느 날 환자가 목에 종기가 나서 그의 병원을 찾아왔다.

종기를 수술로 제거할 것을 권했지만 환자는 통증이 두려워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마침 그 환자도 에테르 파티에 대한 경험이 있었기에 롱은 에테르를 흡입하면서 수술할 것을 제안해 승낙을 받았다.

1842년 5월 30일, 롱은 에테르 마취를 해가며 종기 제거 수술을 성공적으로 마쳤다.

그 뒤로도 에테르 마취를 이용해 많은 수술을 했다고 전해지지만 아쉽게도 그런 사실을 논문으로 보고한 것은 7년이나 지난 1849년이었다.

그때는 다른 의사들이 마취제를 개발했다며 떠들썩하게 만든 지 3년이 지난 뒤였다.

 

1844년 미국 코네티컷주 State of Connecticut의 치과의사였던 호레이스 웰스 Horace Wells(1815~1848)는 사교 파티에 참석했다.

사람들은 '웃음 기체'라 불리던 아산화질소(일산화질소) nitrous oxide(N20)를 들이마시며  환각 증상을 즐겼다.

한 사람은 다쳤는데도 통증조차 못 느꼈다.

그를 지켜보던 웰스는 웃음 기체를 치과 진료에 사용하면 좋겠다는 아이디어를 얻었다.

웰스는 아산화질소를 이용해 15명의 환자에게 무통 발치拔齒(이 빼기)를 시술했다.

소문이 퍼지자 그의 치과에 환자들이 몰려들었다.

자신감을 얻은 웰스는 동료 의사 윌리엄 모턴 William Morton(1819~1868)의 도움으로 1845년 1월 마취 공개 시연을 열었다.

하지만 그날은 웰스 인생 최악의 날이 되었다.

준비한 아산화질소가 부족했던 것이다.

수술 도중 아산화질소가 떨어지면서 환자는 통증을 호소했고, 시연회장은 엉망이 되었다.

웰스는 사기꾼이라는 비난을 받으며 학계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시도하는 사업마다 실패를 거듭한 웰스는 다른 마취제인 클로로포름 chloroform(CHCl3)을 연구하다 그만 중독이 되고 말았다.

어느 날 환각 상태에서 술집 종업원에게 유독 화학물질을 끼얹은 죄로 감옥에 갇힌 웰스는 자책감에 시달리다 1848년 겨울 자살하고 말았다.

그의 나이 불과 33세였다.

 

한때 웰스의 동료였던 윌리엄 모턴은 웰스의 마취 시연회가 실패하자 아산화질소가 아닌 다른 마취제를 찾아나섰다.

하버드대학교 Harvard University 화학 교수인 찰스 잭슨 Charles Thomas Jackson(1805~1880)이 에테르의 효과와 조제법에 대한 도움을 주었다.

코로퍼드 롱이 이미 에테르를 이용해 환자를 마취하고 있었지만 이들은 그런 사실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잭슨이 모턴의 발견에 어느 정도 기여했는지 기록이 분명하지 않지만, 잭슨과 모턴은 이후 서로의 마취제 발견에 대한 공로를 주장해 특허권 분쟁의 당사자가 되었다.

모턴은 동물과 인체 실험을 거치면서 에테르의 효과에 대한 확신을 가졌고, 동료 웰스를 자살로 내몰았던 공개 시연회를 성공시키기만 하면 그는 최초의 마취제 개발 특허권을 얻어 부와 명성을 쌓을 수 있으리라 여겼다.

 

에테르 마취를 최초로 공개 시연한 모턴(1846)(출처-출처자료1)

 

1846년 10월 16일, 미국 보스턴 Boston의 매사추세츠 종합병원 Massachusetts General Hospital(MGH)에서 공개 마취 수술이 열렸다.

모턴을 떨리는 마음으로 레테온 letheon(에테르) 스펀지 sponge가 담긴 유리 기구를 환자의 입과 코에 대었다.

환자는 증기를 몇 차례 들이마시고 곧 잠이 들었다.

모턴은 집도의인 존 콜린스 워렌 John Collins Warren에게 말했다.

"준비가 다 되었습니다."

의사와 모턴, 참관한 50여 명의 전문가가 모두 숨을 죽였다.

수술이 시작되었다.

수술용 메스 mess가 환부를 가르고 이어 목 안의 종양을 제거했다.

수술이 끝날 때까지 환자는 가늘게 숨만 쉴 뿐 아무 반응이 없었다.

마법 같은 일이 벌어진 것이다.

모턴만큼 긴장하여 수술을 집도했던 워런은 역사에 길이 남을 한마디를 했다.

"여러분, 이것은 사기가 아닙니다."

그 소식은 다음 날 보스턴 신문들에 대서특필되었고, 모턴은 일약 스타 star(인기인)가 되었다.

 

마취제 특허 분쟁(출처-출처자료1)

 

모턴은 1848년 10월 28일 레테온에 대한 특허권을 인정받았다.

레테온은 모턴이 특허를 받기 위해 에테르에 향로와 색소를 넣어 만든 것이다.

그러자 모턴에게 에테르의 마취 효과를 조언했던 찰스 잭슨이 그의 특허권에 대한 비난을 하기 시작했다.

설상가상으로 모턴보다 4년 먼저 꽤 많은 환자들에게 에테를 마취 시술을 했던 시골 의사 크로퍼드 롱도 주위의 권유에 떠밀려 특허권 분쟁에 뛰어들었다.

모턴-잭슨-롱 사이에 마취제 특허권에 대한 진흙탕 싸움이 치열하게 벌어졌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미국 의회까지 나서서 장기간 심의했지만 결국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당사자들의 이해가 워낙 첨예하게 걸려 있었기 때문이다.

결론이 나지 않은 채 긴 시간이 흘러갔다.

에테르 공개 시연으로 한때 명성을 누렸던 모턴은 1868년 정신발작으로 49세에 세상을 떠났고, 아이디어 제공자였던 잭슨마저 특허권 분쟁의 스트레스를 감당하지 못하고 1880년 정신병원에서 삶을 마감했다.

시골 의사 크로퍼드 롱은 편안한 말년을 보내긴 했지만, 그 역시 큰 영예를 누리지 못하고 모교 대학에 기념 동상이 세워진 것에 만족해야 했다.

마취제 특허권은 모두에게 인정되지 않았다.

파란만장했던 마취술에 대한 특허 분쟁은 모턴이 마취 수술을 시연했던 매사추세츠 종합병원 수술실이 '에테르 돔 Ether Dome'이라는 국가 유적으로 등록되고, 10월 16일이 '세계 마취의 날 World Anaesthesia Day'(또는 '에테르의 날 Ether Day')로 지정된 것으로 쓸쓸한 결말을 맺게 되었다.

 

※출처
1. 김은중, '이토록 재밌는 의학 이야기'(반니, 2022)
2. 구글 관련 자료
 
2025. 4. 22 새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