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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샘(淸泉)
코핀과 스테이시의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 5부 근대 초 유럽 - 16장 17세기의 새로운 과학 5: 새로운 철학을 위한 방법: 베이컨과 데카르트 본문
코핀과 스테이시의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 5부 근대 초 유럽 - 16장 17세기의 새로운 과학 5: 새로운 철학을 위한 방법: 베이컨과 데카르트
새샘 2025. 4. 24. 14:54과학혁명의 주요 인물들 | |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 티코 브라헤 프랜시스 베이컨 갈릴레오 갈릴레이 요하네스 케플러 윌리엄 하비 르네 데카르트 블레즈 파스칼 로버트 보일 크리스티안 하위헌스 바뤼흐 스피노자 로버트 훅 아이작 뉴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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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과학의 실천이 프로테스탄트교(개신교) Protestantism 북서 유럽에 집중되게 되자 새로운 사상가들은 실천과 증거의 표준을 구분하기 시작했다.
프랜시스 베이컨 Francis Bacon(1561~1626)과 르네 데카르트 René Descartes(1596~1650)는 특히 이러한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들은 근대 과학을 지배하게 될 방법이나 규칙을 마련했다.
베이컨은 대략 케플러 Kepler와 갈릴레이 Galilei 그리고 셰익스피어 Shakespeare와 같은 시대를 살았고, 데카르트는 이들보다 약간 젊었다.
베이컨과 데카르트는 자신의 시대가 놀라운 발견의 가능성이 열려 있는 중대한 변화의 시대라고 믿었다.
두 사람은 지식이 유럽인을 고대의 권위를 넘어서 근대로 이끌 수 있을 것이라고 믿게 만들었다.
두 사람은 철학이 당대의 학문을 망라하도록 계통을 세우는 일에 착수했다.
"아는 것이 힘이다 (셴치아 포텐치아 에스트 scientia potentia est)(영어 Knowledge is power)".
베이컨의 이 말은, 17세기의 변화하는 전망과 인간 사고의 가능성에 대한 새로운 확신을 한마디로 표현한 것이었다.
베이컨은 법률가로서 훈련을 받았고 제임스 1세 James I(재위 1603~1625) 치세에 잠시 동안 대법관으로서 의회에서 봉직하기도 했다.
그의 지속적인 관심은 가정·방법·실습이 자연철학과 지식의 진보를 이끌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고대인의 권위가 근대 사상가의 의욕을 상실케 하면 안되었다.
기존 이론에 따르는 것은 혁신을 저해하거나 이해를 방해할 수 있었다.
"더 나은 계획에 입각해 모든 것을 새롭게 하고 타당한 기초 위에 세워진 과학, 예술, 그리고 인간의 모든 지식의 전면적인 재건을 시작하고자 하는 데는 ······ 오로지 한 가지 과정만이 남았다."
지식의 추구는 추상적으로 사고하고 결론으로 비약하는 것이 아니라 관찰하고 실험하며 사상을 확인하거나 요점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말이다.
베이컨은 만약 사상가들이 "의구심을 품고 시작한다면 확실성에 도달하게 될 것"이라고 썼다.
따라서 베이컨은 철학적 논의에서부터 과학적 조사를 점진적으로 분리시킨 인물로 간주된다.
베이컨은 지식에 대한 일반적인 결론을 도출하기 위해 구체적 관찰로부터 증거를 수집하는 귀납적 접근을 주장했다.
베이컨의 관점에서 보면 많은 철학자들의 오류는 가설적인 최초의 원리에서 시작하는 것에 있다.
예를 들어 우주에 대한 전통적 관점은 제1운동자와 완벽한 원형 운동이라는 원리에 의존했다.
하지만 귀납적 방법은 우선 자료를 축적하고(예컨대 브라헤가 그랬듯이) 그러고 나서 세심한 재검토와 실험을 통해 적합한 결론을 도출하는 것이었다.
베이컨은 지식이란 반복될 수 있고 검증될 수 있는 실험을 수행해는 연구자들의 협동적인 노력을 통해 가장 잘 판단된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이렇게 획득된 지식은 예측 가능하고 천문학에서 선박 건조에 이르는 광범위한 노력에 기여하면서 철학자와 장인 모두에게 유용한 것이 된다.
과학과 진보에 대한 베이컨의 통찰력은 두 가지 모습으로 생생하게 나타난다.
첫 번째 이미지는 우리에게 좀 더 친숙한 것으로서 베이컨의 ≪대부흥 Instauratio Magna(영어 Great Restoration)≫(1620)의 속표지에 나온다.
이것은 이전에는 서양의 한계였던 지브롤터 해협 Strait of Gibraltar을 건너 앞으로 다가올 미지의 위대한 일을 추구하며 항해하는 당찬 선박 그림이다.
두 번째는 베이컨의 유토피아적 Utopian 저작 ≪뉴아틀란티스 New Atlantis≫(1626)의 말미에 나오는 상상적인 발견의 공장, 즉 '솔로몬의 집 Salomon's House'에 대한 그의 묘사이다.
그 공장 안에서 실험을 조사하고 감독하는 '조사관 sifter'은 결론 도출과 실제적인 응용으로 발전시킬 역할을 맡은 선임연구자에게 발견된 것들을 넘겨준다.
데카르트는 프랑스인 French이었지만 전 생애에 걸쳐 유럽 전역에서 살았다.
그는 지적으로도 활동적이어서 기하학, 우주론, 광학뿐만 아니라 잠시 동안 소의 시체를 해부하면서 생리학까지 연구했다.
그는 1633년 갈릴레이의 유죄 판결에 대해 들었을 때 물리학에 관한 (코페르니쿠스적인) 책을 쓰고 있었다.
갈릴레이에 대한 판결은 그에게 '세계에 대한 판단을 표현하는 것'의 위험성을 강하게 심어주었다.
데카르트는 ≪방법서설方法序說 Discours de la méthode(영어 Discourse on the Method)≫(1637)로 가장 잘 알려져 있지만, 그는 이 책을 광학, 기하학, 기상학에 관한 세 편의 논문에 대한 서문으로 시작했다.
이 책은 데카르트가 자신의 전통적인 교육에서 맞닥뜨린 '이상하고 믿을 수 없는' 이론들에 대한 실망을 개인적으로 낱낱이 열거한 것이다.
그가 서술했듯이 이에 대한 그의 첫 번째 대응은 그가 이제까지 알아왔거나 가르침을 받아온 모든 것에 대해 체계적으로 의심하는 것이었다.
그는 기존의 가설에다 지식 체계를 구축하는 것보다 석판을 떼어내는 것이 더 낫다고 믿었다.
그의 제1법칙은 "명약관화明若觀火(불을 보듯 분명하고 뻔함)하게 인식되지 않는 것은 결코 그 어느 것도 진리로 받아들이지 말아야 한다"였다.
그는 자신의 출발점으로서 인간의 사고능력을 꼽았다.
이것은 그의 유명하면서도 수수께끼 같은 말, 즉 나중에 라틴어로는 "코기토 에르고 쑴 cogito ergo sum", 영어로는 "I think therefore I am(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로 번역된 프랑스어 "쥐 팡세, 동 쥐 쉬 Je pense, donc je suis"로 요약되었다.
데카르트의 '의심'은 (오늘날의 기준으로) 생각하기에 개인이 존재하고 이성이 존재하며 신이 존재한다는 자신감과 진리로 이끌었다.
왜냐하면 당시 데카르트에게 의심이란 하나의 책략 또는 그가 회의주의를 극복하기 위해 지적인 서양장기 게임에서 사용했던 장기 말이었다.
의심할 바 없는 확실성이야말로 그가 추종자들에 물려준 철학의 핵심이었다.
데카르트는 베이컨처럼 '지식을 향한 신선한 출발'이나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이해하기 위한 법칙을 탐구했다.
하지만 베이컨과는 달리 논리적으로 한 가지 확실성에서 또 다른 확실성으로 진행하는 '연역적 추론'을 강조했다.
그는 ≪방법서설≫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우리가 그렇지 않은 것을 진리라고 받아들이는 것을 피하는 한에서 그리고 또 다른 것으로부터 한 가지 것을 연역해내는 올바른 질서를 항상 유지하는 한에서는 종내 너무 심오해서 도달하지 못하거나 너무 잘 숨어서 발견하지 못할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데카르트에게 수학적 사고는 최고 수준의 이성을 표현하는 것이었는데, 그의 연구는 과학적 추론의 모형으로서 수학의 권위에 크게 기여했다.
데카르트는 각별히 베이컨과 갈릴레이가 공유한 세계관이자 17세기 과학 사상을 지배하게 된 '기계론 mechanism'에 대해 강력한 성명을 발표했다.
기계론이란 명칭이 암시하듯이 기계론적 철학은 자연을 하나의 기계로 생각할 것을 제안했다.
기계론은 인간의 행위와 자연의 작용을 구별하는 전통적인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과 자연이 신의 창조물로서 필연적으로 상이하면서도 한층 더 상위의 질서에 속한다는 관점을 거부했다.
17세기 초의 발견과 저작들에서 대두되고 있던 우주에 대한 새로운 그림에서 모든 질료質料 material(형상을 갖춤으로써 비로소 일정한 것으로 되는 재료)는 동일한 물질로 만들어졌으며 모든 행성의 운동은 동일한 법칙을 따르는 것처럼 보였다.
데카르트는 인체를 포함한 모든 것을 기계론적으로 설명하고자 했다.
그가 단호하게 언급한 것처럼 "장인이 만든 기계와 자연이 홀로 조직한 다양한 물체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
자연은 규칙적이고 예측 가능한 법칙에 따라 작동하기에 인간 이성으로도 이해하기 쉬웠다.
이러한 데카르트의 기계론적 믿음은 17세기의 많은 과학적 실험과 논쟁을 이끌었을 뿐만 아니라 영감을 주었다.
○방법의 힘과 호기심의 영향력: 17세기의 실험가들
베이컨과 데카르트 이후 거의 한 세기 동안 영국의 자연철학자 대부분은 베이컨 추종자였고, 프랑스 France, 홀란드 Holland 및 북유럽 도처에 있는 그들 동료 대부분은 데카르트 학파 Cartesian school(데카르트의 추종자)였다.
영국의 베이컨 추종자들은 당시에는 논쟁과 토론거리가 될 수 있는 결과들을 내놓으면서 상이한 여러 분야에서 실험을 수행하는데 집중한 반면 데카르트 추종자들은 수학과 논리학 쪽으로 방향을 돌렸다.
데카르트 자신은 분석기하학을 개척했다.
블레즈 파스칼 Blaise Pascal(1623~1662)은 확률 이론을 연구하고 자신의 지적 재능을 신학으로 돌리기 전에 계산기를 발명했다.
홀란드 출신의 데카르트 학파 사상가인 크리스티안 하위헌스 Christiaan Huygens(1629~1695)는 충격과 궤도 운동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실험과 수학을 결합시켰다.
네덜란드 Netherlands의 데카르트 추종자인 바뤼흐 스피노자 Baruch Spinoza(1632~1677)는 기하학을 윤리학에 응용했고 우주가 신과 자연이라는 단일한 실체로 구성되었다는 것을 입증함으로써 데카르트를 넘어섰다고 믿었다.
영국인의 실험은 다른 경로를 추구했다.
영국인들은 연금술사의 도구, 즉 실험실을 새로운 용도로 이용하면서 실질적인 연구에서 출발했다.
그들은 또한 상이한 종류의 결론을 찾고자 했다.
예컨대 그들은 연역적 진리에 대한 절대적 진술보다는 증거에 토대를 둔 경험적 법칙이나 잠정적인 일반화를 추구했다.
그 시대 수많은 실험과학자 중에는 물리학자인 윌리엄 하비 William Harvey(1578~1657), 화학자인 로버트 보일 Robert Boyle(1627~1691), 발명가이자 실험가인 로버트 훅 Robert Hooke(1635~1703) 등이 있었다.
하비의 기여는 지대했다.
그는혈액이 동맥, 심장, 정맥을 거쳐 순환한다는 사실을 관찰하고 설명했다.
이를 위해 그는 기꺼이 살아 있는 동물을 해부하고(생체 해부)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실험하고자 했다.
보일은 실험을 수행하면서 온도가 일정할 때 가스의 양은 그것에 가해지는 압력에 비례해서 줄어든다는 법칙(보일의 법칙)을 확립했다.
훅은 실험가의 도구 상자에 현미경을 도입했다.
복합현미경은 17세기 초 홀란드에서 발명된 적이 있었다.
그러나 훅과 여러 사람들이 1660년대 식물의 세포 구조를 연구하기 위해 현미경을 이용함으로써 그것이 지닌 잠재력을 보여주고 나서야 널리 이용되었다.
이전의 망원경처럼 현미경도 기대하지 않았던 물질 현상의 차원을 드러내 보여주었다.
아주 평범한 사물들도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면 매우 작은 부분들이 완벽하게 연결되어 있는 세밀한 구조를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많은 사람들은 향상된 실험 기구가 세상의 더 많은 복잡한 사물을 밝혀줄 것이라고 믿게 되었다.
현미경은 또한 많은 사람들이 신의 존재에 대한 새로운 증거라고 생각한 것을 제공해주었다.
현미경으로 보았을 때 살아 있는 유기체가 정밀한 구조를 이루고 있는 방식은 신의 존재뿐만 아니라 신의 지혜를 입증하고자 하는 목적에 부합했다.
기계론적 철학은 신을 배제하지는 않았지만 사실상 신의 현존을 확신시키기 위해 이용될 수 있었다.
만약 우주가 시계라면 결국 시계공이 있어야 했다.
훅은 우둔한 사람들만이 현미경을 통해서 본 것을 신의 창조물이 아닌 '우연의 산물'로 믿을 것이라고 선언했다.
○과학, 사회, 국가
14장에서 언급했던 17세기의 국가 건설은 확실히 과학의 비약에 일조했다.
20년에 걸친 혁명과 내전을 거쳐 1660년 영국의 군주정은 회복되었다.
새로 즉위한 찰스 2세 Charles II(재위 1660~1685)는 일군의 자연철학자와 수학자에게 자연에 대한 지식을 향상시키고 자연철학자들이 실험과 협동 작업에 전념할 수 있는 런던왕립학회 Royal Society of London 건립에 관한 국왕의 특허장을 수여했다.
특히 왕립협회의 창설자인 보일은 이 학회가 지적인 목적뿐만 아니라 정치적 목적에도 기여할 것이라고 믿었다.
왕립학회는 회원들이 일정한 양식에 따른 연구를 수행하고 결과를 기록하고 그 결과들을 다른 회원들과 공유하는 집단적 연구라는 베이컨의 목적을 추구했다.
왕립학회 회원들은 번갈아가며 방법들을 연구하고 실험을 재현하고 그 결과를 평가하도록 했다.
이런 계획은 영국의 자연철학자들에게 공통적인 목적의식과 추론된 '사실의 문제'에 대한 신사적인 동의에 이르는 체계를 제공했다.
또한 체계적인 과학적 연구를 내전에 흔적을 남겼던 정치와 종교의 위험스럼 언어로부터 분리시킴으로써 왕립학회는 영국인의 지적 생활에 질서의식과 합의를 회복시키는데 도움이 되었다.
왕립학회 학회지인 ≪철학적 보고서 Philosophical Transactions≫를 유럽 전역의 전문 학자와 실험가들이 읽었고, 이와 비슷한 학회들이 곳곳에서 등장했다.
프랑스 과학아카데미 Académie des sciences(영어 Academy of Sciences)는 1666년 창립되었는데, 이 학회 역시 17세기 부르봉 절대 왕정의 국가 건설과 관련되었다(15장 참조).
왕립학회들은 집단적 사업으로서 자연철학에 전념했고, 국가(또는 군주)가 과학을 후원하는 구조와 중요하지만 불확실한 소규모 귀족의 후원이나 종교적(그리고 보수적이고 아리스토텔레스적인) 대학들에 대한 대안을 제공했다.
과학 학회들은 정당한 연구란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가에 대한 대략적인 동의에 도달했다.
학회들은 발견한 것들에 대해서 그 결과를 최초로 출간한 사람의 공으로 돌리는 근대적인 과학적 관행을 확립했다.
데카르트 학파, 베이컨 학파, 전통적인 아리스토텔레스 학파 사이의 철학적 차이가 간격을 메우기 매우 힘들 정도로 남아 있었지만, 이들 학회는 정보와 이론이 국경을 가로질러 매우 쉽게 교환될 수 있도록 했다.
과학은 하나의 학문으로서 형성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자연철학은 공식적으로 신사들의 연구 분야였다.
영국의 왕립학회나 프랑스의 과학아카데미 그 어느 학회에서도 여성 회원을 허용하지 않았다.
비록 여성이 정식 교육을 거의 받지 못했다 하더라도 일부 여성은 학식 있는 남성들과 교제함으로써 스스로를 교육시킬 수 있었다.
예를 들어 영국 귀족 가문의 여성 마가렛 캐번디시 Margaret Cavendish(1623~1673)는 주로 자신의 가정에서 자신에게 필요한 정보를 조금씩 수집하기 시작했다.
개인 주거지에 세워진 천체 관측소는 그곳에 사는 일부 여성들에게 일을 돕는 과정에서 발전하고 있는 천문학 분야에 종사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주었다.
실제로 1650~1710년 독일의 천문학자 가운데 14퍼센트가 여성이었고, 그중 가장 유명한 여성은 마리아 빙켈만 Maria Winkelmann(1670~1720)이었다.
빙켈만은 혜성을 발견했고 베를린 과학아카데미의 제출할 역법을 준비하기도 했지만 학회의 회원 가입은 거부되었다.
이 학회의 회장인 고트프리트 라이프니츠 Gottfried Wilhelm Leibniz(1646~1716)는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그녀의 남편이 살아 있는 동안에 이미 우리 학회는 그 역법이 여성이 준비한 것이라는 이유로 놀림을 당했다. 만약 그녀가 그러한 능력을 계속 보유하고 있다면 입이 떡 하니 크게 더 벌어질 것이다."
독일의 마리아 시빌라 메리안 Maria Sibylla Merian(1647~1717)은 곤충학 분야에서 관찰에 입각한 연구에 종사했다.
메리안은 두 딸과 함께 네덜란드의 식민지 수리남 Suriname에서 수집한 이국적인 곤충을 팔아 생계를 유지했다.
그녀는 식민지의 무더운 기후와 말라리아(학질) malaria와 싸우며 자신의 가장 중요한 과학 저서인 ≪수리남 곤충의 변태≫를 출간했다.
그녀는 이 책에서 60개의 세밀한 그림을 사용하며 수리남 곤충의 생애 주기를 상세하게 서술했다.
메리안의 이 저서는 당대에 널리 읽혔으며, 러시아 Russia의 표트르 1세 Peter I(또는 표트르 대제 Peter the Great)(재위 1682~1725)는 서재에 메리안의 초상화와 저작들을 자랑스레 전시하기도 했다.
※출처
1. 주디스 코핀 Judith G. Coffin·로버트 스테이시 Robert C. Stacey 지음, 손세호 옮김,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하): 근대 유럽에서 지구화에 이르기까지, Western Civilizations 16th ed., 소나무,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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