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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샘(淸泉)
코핀과 스테이시의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 5부 근대 초 유럽 - 16장 17세기의 새로운 과학 4: 새 하늘, 새 땅, 그리고 세속적인 정치학: 갈릴레이 본문
코핀과 스테이시의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 5부 근대 초 유럽 - 16장 17세기의 새로운 과학 4: 새 하늘, 새 땅, 그리고 세속적인 정치학: 갈릴레이
새샘 2025. 4. 18. 11:22
케플러 Kepler(1571~1630)는 ≪우주 구조의 신비≫ 사본을 당시 베네치아 Venezia(영어: 베니스 Venice) 근처의 파도바 Padova(영어: 파두아 Padua)에서 수학과 천문학을 가르치는 갈릴레오 갈릴레이 Galileo Galilei(1564~1642)라는 수학자에게 친구를 통해 전달했다.
갈릴레이는 케플러에게 다음과 같은 감사의 답장을 보냈는데, 그 편지는 당시(1597년) 이 이탈리아인 Italian의 관점을 잘 보여주고 있다.
"저는 단지 당신 저서의 서문만 읽은 정도지만, 이것만으로도 이 책 내용의 몇 가지 개념을 얻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진리에 대한 연구에서 진실한 동료를 갖게 된 것을 자축했답니다. ······저는 몇 년 전에 코페르니쿠스 Copernicus의 가르침을 채택했고, 그의 관점은 저에게 훨씬 최근의 가설로는 확실히 설명하기 힘든 것으로 남아 있는 많은 자연 현상을 설명 가능한 것으로 만들어주었습니다. 저는 그를 지지하고 그의 반대되는 관점을 논박하는 많은 논거들을 집필해왔습니다만, 아직까지는 감히 세상에 내놓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확실히 당신 같은 사람이 더 많이 있다면 제 의견을 감히 즉시 출간하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저는 그런 일을 삼갈 것입니다."
케플러는 갈릴레이에게 "앞으로 나서 보이오!"라고 촉구하는 답장을 보냈지만, 그는 답하지 않았다.
갈릴레이는 파도바에서 자신이 믿는 것을 가르칠 수 없었다.
왜냐하면 프톨레마이오스 Ptolemaeus(영어: 톨레미 Ptolemy)의 천문학과 아리스토텔레스 Aristoteles(영어: 아리스토틀 Aristotle)의 우주론이 확정된 교과목이기 때문이다.
다른 기회들이 열리게 됨에 따라 이 야심찬 자연철학자 갈릴레이는 자신의 관점에 대해 그다지 조심스럽지 않아도 되었다.
갈릴레이는 생애 말년에 코페르니쿠스 모형을 지지하는 강력한 증거를 마련했고 새로운 물리학을 위한 기초를 놓았다.
그는 라틴어뿐만 아니라 자기 나라 말인 이탈리아어로 글을 썼던 재치 있고 설득력 있는 작가이기도 했다.
케플러는 '진리의 친구'였을 수 있지만 그의 연구는 난해하고 당황스러울 정도로 수학적이었다(코페르니쿠스의 연구도 그랬다).
이와 대조적으로 갈릴레이의 저작은 유럽 전역에 걸쳐 자연철학에서의 변화에 대한 자각을 불러일으키면서 폭넓게 번역되었고 광범위하게 읽혔다.
갈릴레이는 자연철학을 널리 보급한 인물이었는데, 그가 대중화한 것은 코페르니쿠스를 중심에 둔 과학에 대한 비非아리스토텔레스적 접근이었다.
갈릴레이는 자신 있고 토론을 좋아하는 인물이었으며, 그의 전기작가 중 한 사람이 지적했듯이 자신이 발견한 것들뿐만 아니라 자신의 주장으로도 유명했다.
그는 자신에게 반대하는 사람들을 참지 못했으며, 그의 성미는 그를 심각하면서도 궁극적으로는 답답한 논쟁에 빠지게 했다.
갈릴레이는 종교와 과학 사이의 새로운 관계를 강력히 주장했으며, 그 과정에서 당대의 가장 막강한 일부 성직자에게 도전했다.
그의 발견은 그를 당대의 가장 유명한 과학적 인물로 만들어주었지만, 자신의 신념에 대한 확신과 논쟁을 좋아하는 그의 취향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 및 가톨릭교회의 권위와 충돌하게 만들었다.
갈릴레이는 망원경 telescope의 발견으로 유명해졌다.
1609년 그는 매우 멀리 있는 대상을 크게 보여줄 수 있는 작은 망원경을 만든 홀란드 Holland 출신 렌즈 lens 연마사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흥분한 갈릴레이는 재빨리 자신의 망원경을 고안해냈고, 그것의 작동을 확인하기 위해 처음에는 지상의 사물을 들여다보다가 결정적으로 밤하늘을 관측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그것은 그의 직업이 되었다.
갈릴레이는 달을 관찰하면서 산맥이나 평야 등 지구와 닮은 풍경들을 발견했다.
그의 관측은 천체가 지구와 닮았다는 것을 암시했다.
이러한 관점은 지구와는 본질적으로나 필연적으로 다른 천상의 불변하는 완벽한 천구로서의 하늘이라는 개념과는 차이가 있었다.
그는 목성木星 Jupiter 궤도를 선회하는 달을 보았는데, 이는 지구가 모든 궤도의 중심이 아니라는 증거였다.
그는 태양의 흑점黑點 sunspot을 보았다.
갈릴레이는 자신이 관측한 결과를 처음에는 ≪별의 사자使者 Sidereus nuncius(영어: Starry messenger)≫(1610)라는 제목으로, 1613년에는 ≪태양 흑점에 관한 편지 Letters on Sunspots≫로 출간했다.
목성의 달에 관한 놀라운 보고를 담고 있는 ≪별의 사자≫는 많은 사람들이 읽게 할 목적으로 분량은 적었지만 두드러진 책이었다.
이 책의 속표지는 책의 내용이 "위대하고 비범하며 놀라운 장관들을 모든 사람 특히 철학자와 천문학자의 생각에 펼쳐줄 것이다"라고 선언했다.
하지만 ≪별의 사자≫는 갈릴레이의 코페르니쿠스주의에 대한 암시만 줄 뿐이었는데, 그는 ≪태양 흑점에 관한 편지≫에서 그것을 공개적으로 선언했다.
17세기의 과학자들은 막강하면서도 부유한 후원자를 필요로 했다.
파도바의 수학 교수였던 갈릴레이는 (케플러에게 보내는 편지에 썼듯이) 대학 당국자들의 권력에 분노하고 있었다.
왕과 제후들의 궁정은 유혹적인 대안을 제공했다.
권력과 부의 중심이자 후원자를 자처하는 왕과 제후들은 대학보다는 교회의 통제에 그다지 종속되어 있지 않았다.
토스카나의 메디치 가문 the Medici family of Toscana(영어: 투스카니 Tuscany)은 다른 가문들처럼 많은 예술가와 지식인들로 주위를 에워쌈으로써 가문의 명성을 빛나게 했을 뿐 아니라 권세를 보강했다(15세기에 메디치 가문은 미켈란젤로 Michelangelo의 후원자였다).
파도바의 대학보다 메디치가의 궁정에서 더 자유롭게 될 것이라고 설득당한 갈릴레이는 메디치가의 가정교사가 되어 성공적으로 그 가문을 빛내주었다.
그는 ≪별의 사자≫를 그들에게 전해주었다.
그는 새로 발견한 목성의 달들을 '메디치가의 별들'이라고 이름 붙였다.
갈릴레이는 이에 대한 보답으로 토스카나 대공大公인 코시모 데 메디치 Cosimo de' Medici(1389~1464)의 최고 수학자이자 철학자라는 칭호를 받았다.
이제 그는 이탈리아의 권력과 후원 체계(네트워크 network)에 제대로 자리 잡은 갈릴레이는 천문학에 관한 자신의 연구와 행성 체계에 관한 코페르니쿠스의 태양 중심 모형이 옳다는 신념을 추구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러한 추구는 위험천만한 행동이었다.
왜냐하면 그의 주장이 가톨릭교회의 반감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이다.
모든 성직자가 갈릴레이의 연구에 반대한 것은 아니었다.
사실 당대의 위대한 예수회 천문학자들은 갈릴레이의 망원경을 통한 발견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그들은 그러한 발견이 브라헤 Brahe의 체계와 매우 완전하게 어울리며 지구를 우주의 중심 위치에서 옮겨놓을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갈릴레이는 정치적 상황, 지적 경쟁자들, 코페르니쿠스주의에 치우친 갈릴레이의 열정적인 친구들, 갈릴레이 자신의 논쟁에 대한 열의 등으로 인해 스스로 어려움에 처하게 되었다.
1614년 야심차고 거리낌 없이 말하기를 좋아하는 한 도미니크회 Dominican 수도사는 갈릴레이의 사상이 성경의 가르침에 벗어난 위험스러운 것이라고 비난했다.
다른 철학자와 성직자들도 갈릴레이의 후원자인 메디치 가문에 그 궁정 수학자가 이단을 가르치고 있는 것 아닌가를 묻기 시작했다.
코페르니쿠스주의에 반대하는 수군거림에 불안해진 갈릴레이는 자신을 방어하기 위한 일련의 편지를 썼다.
이 편지들은 자연철학과 종교의 관계에 역점을 둔 것이었다.
이 편지들 중 1615년 후원자인 코시모의 어머니 대공녀大公女 크리스티나 Maria Cristina에게 보낸 것이 가장 유명하다.
갈릴레이는 누구나 진지한 코페르니쿠스주의자와 신실한 가톨릭교도가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교회가 성서를 가르치고 영혼을 구원하는 신성한 일을 해왔다고 언급했다.
물리적 세계의 작동에 대한 설명은 관찰과 수학에 토대를 둔 자연철학자가 더 잘 할 수 있도록 맡겨진 일이었다.
성경은 어려운 책으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성서의 복잡다단함을 자연철학의 새로운 결론과 조화시키는 것은 교회 신학자들의 역할이었다.
하지만 자연과학에 대한 논쟁에서 교회가 어느 편을 드는 것은 불필요하기도 하고 위험부담도 크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은 교회의 영적 권위와 신뢰성에 누를 끼치게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갈릴레이는 자연철학자와 신학자를 진리 탐구의 동반자이긴 하지만 매우 상이한 역할을 하는 동반자로 묘사했다.
눈부신 수사학적 기교가 발휘되어야 할 순간에 그는 자신의 주장을 지지하는 다음과 같은 바로니우스 추기경 Cardinal Baronius의 말을 인용했다.
성서의 목적은 "우리에게 하늘나라에 가는 방법을 가르쳐주어야지 하늘나라가 운행하는 방법을 가르쳐주는 것은 아니다."
갈릴레이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코페르니쿠스주의와 갈릴레이 양쪽에 대해 반대하는 쪽으로 나아갔다.
1616년 종교재판소는 지구가 움직이고 태양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은 "철학적으로 어리석고 터무니없으며 공식적으로 이단적이다"라는 명제를 결정했다.
코페르니쿠스의 ≪천체의 회전에 관해≫를 금서목록에 두는 칙령이 공포되었으며, 갈릴레이는 코페르니쿠스주의를 가르치지 말도록 경고를 받았다.
갈릴레이는 잠시 동안 경고 받은 대로 행했다.
그러나 자신의 피렌체 Firenze(영어: 플로렌스 Florence) 친구이자 숭배자인 마페오 바르베리니 Maffeo Barberni가 1623년 우르바누스 8세 Urbanus VIII(재위 1623~1644)로 교황에 선출되자 갈릴레이는 코페르니쿠스주의를 향한 문이 (최소한 반쯤) 열렸다고 믿었다.
그는 자신의 가장 유명한 저작 중 하나이자 1632년에 출간된 ≪두 가지 주요 세계 체제에 관한 대화편 Dialogo dei due massimi sistemi del mondo(영어: Dialogue of the two greatest systems of the world)≫의 초고를 썼다.
이 ≪대화편≫은 그가 심플리키오 Simplicio(숙맥 또는 바보)라고 이름 붙인 인물로 대표되는 낡은 프톨레마이오스 체계의 지지자와 새로운 천문학의 옹호자 사이의 가정적으로 설정된 논쟁을 담고 있었다.
이 논쟁을 통해 갈릴레이는 코페르니쿠스주의자를 최대한 옹호했다.
하지만 그는 논쟁의 말미에 종교재판소의 칙령을 만족시키기 위해 코페르니쿠스주의자를 심플리키오에게 항복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1633년 종교재판소는 ≪대화편≫의 판매를 금지하고 갈릴레이에게 재판정에 설 것을 명했다.
갈릴레이의 경멸에 성나고 고단하게 이어지는 30년 전쟁에서 교회 보수주의자들의 지원이 필요했던 교황 우르바누스 8세는 친구의 보호를 거부했다.
비밀 재판의 평결은 유럽을 깜짝 놀라게 했다.
갈릴레이는 당대의 가장 유명한 과학계 인사였고 유럽의 위대한 지적 중심인물 중 하나였던 것이다.
하지만 종교재판소는 갈릴레이에게 코페르니쿠스주의적 입장을 참회하도록 강요했고 연구를 계속하거나 심지어 코페르니쿠스의 사상을 논하는 것도 금지하면서 종신 가택연금에 처했다.
얼마 뒤에 회자되기 시작한 아야기에 따르면, 가택연금을 당하기 위해 법정을 떠나면서 갈릴레이는 땅을 내려다보고 발로 짓밟으며 대담하게 다음과 같이 중얼거렸다고 한다.
"그래도 지구는 돈다."
그러나 종교재판소는 갈릴레이의 연구를 단념시킬 수 없었다.
그는 초기에 연구했던 운동의 이론을 다듬었다.
그는 사물의 운동은 외부의 힘이 그것을 변화시킬 때까지 동일하게 유지된다는 것을 주장하는 초창기 관성 이론을 내놓았으며, 서로 다른 무게를 지닌 사물이 거의 동일한 속도와 균일한 가속도로 떨어진다는 것을 계산해냈다.
갈릴레이는 사물의 운동은 규칙적인 수학적 법칙을 따른다고 주장했다.
지구상에서 사물의 운동을 지배하는 (실험으로 관찰될 수 있는) 동일한 법칙은 하늘에서도 관찰될 수 있었다.
이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원리에 대한 직접적인 반박이자 우주의 태양 중심 모형에 입각한 물리학을 향한 중요한 단계였다.
≪새로운 두 과학에 관한 수학적 증명 Discorsi e Dimostrazioni Matematiche, intorno a due nuove scenze(영어: Discourses and Mathematical Demonstrations, on two new sciences)≫(1638)이라는 제목의 이 연구는 이탈리아 Italia 밖으로 몰래 유출되어 프로테스탄트가 지배하는 홀란드에서 출간되었다.
갈릴레이는 비록 결론적이지는 않더라도 코페르니쿠스적인 우주론에 대한 강력한 증거를 마련했다.
그는 또한 천체 운행의 보편적 법칙을 제안하기 위해 발견, 관측, 실험, 수학 등을 결합시켰다.
하지만 그의 유산 가운데에는 분명히 그가 피하기를 바랐던 종교와 과학 사이의 불화가 있었다.
갈릴레이는 코페르니쿠스주의와 자연철학은 전반적으로 신학적 진리, 종교적 믿음이나 교회의 권위를 뒤엎을 필요가 없다고 믿었다.
그러나 그의 재판은 반대로 자연철학과 교회의 권위가 공존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갈릴레이의 재판으로 남부 유럽에서 코페르니쿠스주의적 주장들은 침묵했고 교회의 지도력은 보수 반동으로 후퇴하고 말았다.
따라서 갈릴레이가 옹호한 새로운 철학은 북서 유럽에서 번성하게 되었다.
※출처
1. 주디스 코핀 Judith G. Coffin·로버트 스테이시 Robert C. Stacey 지음, 손세호 옮김,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하): 근대 유럽에서 지구화에 이르기까지, Western Civilizations 16th ed., 소나무,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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