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샘(淸泉)
코핀과 스테이시의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 5부 근대 초 유럽 - 17장 계몽주의 4: 제국과 계몽주의 본문
계몽주의 사상가들의 주요 저작들 | |
볼테르 ≪철학 서간≫ 몽테스키외 ≪법의 정신≫ 디드로 ≪백과전서≫ 장 자크 루소 ≪사회계약론≫ ≪에밀≫ 베카리아 ≪범죄와 형벌≫ 애덤 스미스 ≪국부론≫ 레이날 ≪두 인도에서의 유럽인의 식민지 및 통상의 철학적·정치적 역사≫ 메리 울스턴크래프트 ≪여성의 권리에 대한 옹호≫ |
1734년 1748년 1751~1772년 1762년 1762년 1764년 1776년 1770년 1792년 |
스미스 Adam Smith(1723~1790)의 ≪국부론國富論 Inquiry into the Nature and Causes of the Wealth of Nations≫(1776)은 제국의 경제학에 관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예컨대 계몽주의 철학자들과 정치가들은 이구동성으로 식민지들이 어떻게 그리고 누구를 위해 이윤을 낼 수 있는가를 물었다.
식민지 세계는 몇 가지 다른 방식으로 계몽주의적 생각에 불쑥 거대한 모습을 드러냈다.
우선 대서양 건너의 신세계는 낡은 유럽 문명의 허를 찔렀다.
바꾸어 말하면 신세계는 퇴폐적이거나 타락한 것처럼 보였던 유럽과 비교해서 종종 천부적인 인간애와 단순함이라는 이상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둘째, 유럽의 식민 활동, 특히 18세기 무렵의 노예무역은 인도주의, 개인적 권리, 자연법 등에 관한 절박한 문제들을 제기했다.
식민주의가 유럽에 어떠한 영향을 미칠 것인가가 계몽주의의 핵심 주제였다.
스미스는 ≪국부론≫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아메리카의 발견과 희망봉을 거쳐 동인도에 이르는 통로를 발견한 것은 인류 역사에서 두 가지의 가장 위대하고 가장 중요한 사건으로 기록된다. 인류에게 무엇이 이로울지 아니면 무엇이 불운할지는 이후 일어날 위대한 사건에 따라 결정되어질 것이다. 하지만 어떤 인간의 지혜도 그 결과를 예견할 수는 없다."
스미스의 이 말은 프랑스의 기욤 토마스 프랑수아 레이날 Guillaume Thomas François Raynal(1713~1796)의 말과 거의 일치했다.
레이날의 방대한 저작이자 디드로 Denis Diderot(1713~1784)의 ≪백과전서≫처럼 공동 집필된 ≪두 인도에서의 유럽인의 식민지 및 통상의 철학적·정치적 역사 Histoire philosophique et politique des relations coloniales et commerciales européennes dans les deux Indes(영어 A philosophical and political history of European colonial and commercial relations in the two Indies)≫(1770)는 계몽주의 시대에 가장 널리 읽힌 책 중의 하나였다.
이 책은 20쇄 정도를 거듭했으며, 해적판도 최소 40판이 출판되었다.
레이날은 ≪백과전서≫에서 영감을 받았으며 적어도 식민지화의 전체 역사 이상의 것을 겨냥했다.
그는 이 책에서 토착민의 관습과 문명, 자연사, 대서양 세계와 인도에서의 탐험과 통상 따위를 기술했고, 과연 식민화가 인류를 한층 더 행복하고 평화롭고 더 나아지게 만들 것인지에 대해 스미스가 품었던 것과 같은 의문을 던지면서 대차대조표를 작성하려고 노력했다.
그 질문은 전적으로 계몽주의 정신에서 나온 것이었다.
레이날이 믿었던 답은 산업과 통상이 향상과 진보를 가져다준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다른 계몽주의 작가들처럼 레이날과 공동 저자들은 타고난 순박함을 자신들의 타락한 문화에 대한 해독제로 생각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천성적인' 인류애의 사례로 생각했던 것들을 상당 부분 신세계에서 열심히 찾아냈고 이를 이상화했다.
예를 들어 그들은 유럽인이 야만적 생활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전제 정치로 인해 타락한 사회에나 백 배 정도 합당한" 말이며, 인류가 '천부의 자유'를 상실한 것을 개탄했다.
그들은 멕시코 Mexico와 페루 Peru에서 에스파냐 España, 브라질 Brazil에서 포르투갈 Portugal, 그리고 북아메리카 North America에서 영국 England이 구사한 전술을 규탄했다.
그들은 좋은 정부는 전횡적인 권력에 대항해 견제와 균형을 필요로 한다는 몽테스키외 Montesquieu(1689~1755)의 주제를 답습했다.
그들은 신세계에서 유럽인은 거만하고 잔혹하며 전제적이 될 수 있는 실질적으로 무제한의 권력을 휘두른다고 주장했다.
아메리카 혁명(미국 혁명) American Revolution(1765~1783)이 발발하고 난 이후에 출간된 나중의 판에서는 식민지 세계에서의 착취와 국내에서의 불평들을 비교하면서 한 걸음 더 나아갔다.
예컨대 이 책의 어느 저자는 다음과 같이 단정했다.
"우리는 우리의 식민지에서 미친 듯이 행동하며, 우리 농민에게 비인간적이고 미친 짓을 한다."
18세기 급진주의자들은 지나치게 확장된 제국이 국내에 타락과 부패의 씨를 뿌린다고 거듭 경고했다.
○노예제와 대서양 세계
유럽의 식민지와 경제에 관한 논의는 불가피하게 노예제 문제를 제기했다.
설탕이 생산되는 카리브 해 Caribbean Sea의 섬들은 식민지 세계에서 가장 값진 소유지였으며 설탕 무역은 서양 경제를 주도하는 부문 중 하나였다.
대서양 노예무역은 18세기에 절정에 달했다.
유럽의 노예 상인들은 17세기 말에 최소한 100만 명 그리고 18세기에는 최소한 600만 명의 아프리카인을 신세계에 보냈다.
하지만 레이날과 디드로 같은 급진적인 사상가들조차 이 문제에 관해 언급하기를 주저했으며, 그들의 망설임은 계몽사상에서의 긴장 상태를 드러내 보여주고 있었다.
계몽주의적 사고는 개인이 논리적으로 생각할 수 있으며 스스로를 다스릴 수 있다는 전제에서 시작했다.
개인의 도덕적 자유는 계몽주의가 공정하고 안정적이며 조화로운 사회가 되는데 필수적이라고 생각한 핵심이었다.
노예제는 자연법과 천부적 자유에 도전하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몽테스키외는 민법은 족쇄를 창조해냈지만 자연법은 항상 그것을 부술 것이라고 썼다.
거의 모든 계몽 사상가들은 노예제를 은유적인 차원에서 비난했다.
"정신은 노예제의 사슬에서 벗어나기 위해 깨어 있어야 한다"라든가 "전제 정치는 국왕의 백성을 노예로 만들었다" 같은 문구는 18세기의 많은 저작을 통해 거듭되었다.
볼테르 Voltaire(1694~1778)의 영웅인 캉디드 Candide 같은 18세기 소설의 주인공이 도덕 교육의 일환으로 동정심을 배우면서 노예화된 사람들을 만나고자 하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작가들은 실제 아프리카인의 노예화와 노예노동을 지극히 조심스럽게 다루었다.
일부 계몽 사상가들은 노예제 문제를 회피했고, 일부 계몽 사상가들은 다른 방식으로 원칙과 실제를 조화시켰다.
스미스는 노예제를 비경제적인 것이라고 비난했다.
볼테르는 동시대인의 위선을 폭로하면서 만약 아프리카인이 아니라 유럽인이 노예가 된다면 이를 외면할 것인가를 물었다.
하지만 볼테르는 아프리카인이 열등한 사람이라는 자신의 믿음에 대해서는 의심을 품지 않았다.
몽테스키외(대서양 무역의 중심 항구 중 하나인 프랑스의 보르도 Bordeaux 출신)는 노예제가 주인과 노예 모두를 타락시킨다고 믿었다.
그러나 그는 모든 사회가 서로 다른 필요에 따라 노동체계의 균형을 맞추며 노예노동은 그러한 체계 중 하나라고 주장했다.
몽테스키외는 많은 계몽 사상가들처럼 결국 노예 소유주의 재산을 포함한 재산권을 옹호했다.
노예무역에 관한 ≪백과전서≫의 항목은 노예무역을 자치에 위배되는 것으로서 가능한 가장 분명한 용어로 비난했다.
1760년대에 대두한 인도주의적 노예제 반대운동도 이와 비슷한 주장을 전개했다.
하지만 노예제를 개탄하는 것에서 노예의 자유를 상상하는 것에 이르는 것은 매우 먼 여정이며 거의 아무도 굳이 가려고 하지 않는 길이라는 것이 판명되었다.
결국 계몽주의의 환경결정론, 즉 환경이 성격을 형성한다는 믿음은 노예제에 관한 모든 문제를 뒤로 미루는 흔해 빠진 방식을 제공했다.
노예제는 그 제도의 희생자들을 타락시키고 그들의 타고난 천성을 파괴하며 그들의 천부적인 자유에 대한 사랑을 분쇄했다.
이 논리에 따르면 노예화된 인간은 자유를 얻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이것이 노예무역의 폐지를 주장하면서도 노예 소유주인 미국의 토머스 제퍼슨 Thomas Jefferson(1743~1826)을 조직에 가입시키기 위해 초대한 프랑스의 자크 피에르 브리소 Jacques Pierre Brissot(1754~1793)가 이끄는 흑인우애협회 La Société des amis des Noirs(영어 The Society of the Friends of the Blacks)의 성격이었다.
극소수의 사람만이 노예제 폐지를 옹호했고, 그들도 노예해방은 점진적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노예제는 계몽사상 내의 상이한 흐름이 매우 다른 결론으로 나아간 영역 중 하나였다.
○탐험과 태평양 세계
태평양 세계도 계몽주의적 사고 속에 뚜렷하게 자리 잡았다.
태평양의 새로운 지역에 대해 체계적으로 지도를 그리는 것은 당대의 중대한 발전 중 하나였고, 대중의 상상력에 어마어마한 충격을 던져주는 것이기도 했다.
이러한 탐험은 과학적 지식을 확대하고자 하는 계몽주의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후원된 과학적 임무이기도 했다.
1767년 프랑스 정부는 중국으로 가는 신항로, 식민화하기에 적합한 새로운 땅, 정말이지 수지맞는 무역을 위한 새로운 향신료 따위를 찾기 위해 루이 앙투안 드 부갱빌 Louis Antoine de Bougainville(1729~1811)을 남태평양에 파견했다.
프랑스 정부는 그가 발견한 것들을 기록하기 위해 과학자와 화가를 딸려 보냈다.
부갱빌은 자신이 찾고자 한 것은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지만, 그의 여행 기록 중 그 무엇보다도 지상 낙원인 누벨 시테르 La Nouvelle Cythère(영어 The New Cythera)라고 부른 타히티 Tahiti에 관한 터무니없이 관능적인 묘사는 프랑스에 있는 많은 사람들의 관심과 상상력을 사로잡았다.
부갱빌의 뒤를 이어 영국의 제임스 쿡 James Cook(1728~1779) 선장은 남태평양으로 두 차례(1768~1771, 1772~1775)에 걸친 항해를 통해 감명 깊은 결과를 남겼다.
그는 뉴질랜드 New Zealand와 뉴홀랜드 New Holland 해안의 지도를 작성하고, 뉴헤브리디스 New Hebrides와 하와이 Hawaii를 유럽의 지도에 추가했으며, 남극 대륙 Antarctic Continent의 바깥 쪽 한계와 베링 해 Bering Sea 및 북극해 Arctic Ocean의 해안 지대를 탐험했다.
쿡과 부갱빌이 데리고 간 화가와 과학자들은 유럽의 식물학, 동물학, 지질학의 범위를 크게 확장시켰다.
뉴질랜드에 거주하는 폴리네시아계 민족 Polynesian people인 마오리 족 Maori에 대한 시드니 파킨슨 Sydney Parkinson(1745~1771)의 놀라운 초상화 같은 그림은 대중의 눈길을 끌었다.
그들이 극복한 위험과 마주친 사람들에 대한 설명도 마찬가지였다.
남태평양 South Pacific의 섬 주민들과 의사소통을 하고자 하는 그릇된 시도는 아마도 그들을 유럽으로 데려가고자 한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었겠지만 1779년 1월 말 하와이에서 쿡과 네 명의 영국 해병대원의 소름끼치는 죽음으로 막을 내렸다.
하지만 이 사건은 확실히 유럽의 독자들이 그의 탐험에 매료되는데 기여하기도 했다.
유럽의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항해에 대한 여행기를 탐독했다.
쿡과 부갱빌이 태평양 섬 주민들을 유럽의 대도시에 데리고 왔을 때 그들은 엄청난 군중을 불러 모았다.
영국 화가 조슈아 레이놀즈 Joshua Reynolds(1723~1792)는 태평양 섬 주민들의 초상화를 그렸다.
●과학적 임무의 영향력
계몽 사상가들은 과학적 임무에 관한 보고서들을 자유롭게 이용했다.
인간 본성과 사회의 기원에 대한 이해 그리고 환경이 성격과 문화에 끼친 영향의 연구에 전념했던 계몽 사상가들에게 새로운 사람들과 문화에 대한 이야기는 즉각적인 흥미를 불러일으켰다.
부갱빌의 이야기를 탐독했던 수많은 열렬한 독자 중 한 사람인 디드로는 1772년 그 이야기들의 문화적 중요성에 대한 자신의 성찰인 ≪부갱빌의 항해에 대한 보충 Supplément au Voyage de Bougainville(영어 Supplement to the Journey to Bougainville)≫을 출간했다.
디드로에게 타히티인 Tahitian은 고유한 인간 존재이며 신세계의 주민과는 달리 유럽의 영향으로부터 사실상 벗어나 있었다.
디드로는 타히티인들이 성욕을 억제하지도 않고 종교적 교리로부터도 자유로운 자연 상태의 인간성을 대표한다고 믿었다.
그들의 순박함은 지나치게 문명화된 유럽인이 위선과 완고함에 젖어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태평양의 원주민을 고대 그리스 및 로마 Ancient Greece and Rome의 문명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예를 들어 그들은 타히티 여성을 보면서 로마의 사랑의 여신 비너스 Venus를 연상했다.
이 모든 관점은 태평양의 원주민 문화보다 유럽과 유럽인의 유토피아 Utopia(이상향理想鄕)에 대해 더 많은 것으로 말해주었다.
계몽 사상가들은 다른 사람들을 유럽인의 원시적 모습과는 다른 그 어떤 것으로 보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아챘다.
하지만 이러한 관점조차도 이전 시대의 생각으로부터의 변화를 나타냈다.
이전 시대에 유럽인은 세계를 그리스도교 세계와 이교도 세계로 나누어진 것으로 이해했다.
요약하면, 18세기 동안 서양의 정체성에 대한 종교적 이해는 한층 더 세속적인 개념에 길을 터주고 있었다.
당대에 중요한 과학 탐험가 중 한 사람은 독일 과학자 알렉산더 폰 훔볼트 Alexander von Humboldt (1769~1859)였다.
훔볼트는 아메리카 대륙의 문명과 자연 자원을 평가하겠다는 목적을 갖고 에스퍄냐령 아메리카에서 5년(1799~1804)을 지냈다.
그는 당시 유럽이 제공할 수 있었던 가장 발전된 과학 기구를 준비해갔다.
1814~1819년 훔볼트는 쿡과 부갱빌의 그림이 풍부한 보고서와 상당히 비슷한 여러 권으로 된 인상적인 ≪여행에 대한 개인적 이야기 Personal Narratives of Travels≫를 썼다.
이 작업은 그를 파산지경에 이르게 했고, 그는 재정 지원을 얻어내고자 프로이센 궁정 the Prussian Palace에 가기도 했다.
훔볼트의 탐사 보고는 계몽주의와 19세기 과학 사이에 중요한 연결부를 제공했다.
훔볼트는 우호적인 계몽주의적 풍조 속에서 기후와 물리적 환경이 어떤 특정 지역에서 어떤 형태의 삶이 살아남을 것인가를 결정한다는 것으로 보여주고자 했다.
이들 탐사 보고는 19세기의 진화적 변화에 대한 논의로 이어졌다.
찰스 다윈 Charles Darwin(1809~1882)은 훔볼트를 "현존했던 가장 위대한 과학자"라고 언급했으며, 이 독일인 과학자의 저술은 다윈이 에콰도르 연안의 갈라파고스 제도 Galapagos Islands off the coast of Ecuador로 항해하는 데 영감을 주었다.
유럽인은 여러 가지 이유로 외부로 눈길을 돌렸고 매우 상이한 결론에 도달했다.
일부 계몽 사상가들과 통치자들에게 해외로부터의 과학 보고서는 문명와 인간 본성에 관한 광범위한 탐구에 딱 들어맞았다.
이러한 탐구는 때로는 자이비판을 불러일으켰으며 때로는 단순히 유럽인의 우월감을 강화시켜 주었다.
18세기 말에 일어난 여러 혁명은 이러한 계몽주의적 논의에 종지부를 찍었다.
그러나 계몽주의적 주제는 새로운 제국들이 건설되고 세계에서 서양의 위치가 재평가되는 19세기에 다시 등장했다.
※출처
1. 주디스 코핀 Judith G. Coffin·로버트 스테이시 Robert C. Stacey 지음, 손세호 옮김,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하): 근대 유럽에서 지구화에 이르기까지, Western Civilizations 16th ed., 소나무,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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