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샘(淸泉)
이중섭 "길 떠나는 가족" 본문
"함께여서 참 행복한, 가족의 힘"
가족은 보이지 않는 울타리다.
이 울타리는 우리가 편히 쉴 수 있는 쉼터가 되어준다.
그런데 우리는 일에 매여 가족과 보내는 시간을 소홀이 한다.
'저녁이 있는 삶'도 따지고 보면 '가족과 함께하는 삶'의 다른 표현이다.
가족끼리 공유하는 시간이 부족하면, 부모 자식과의 관계에도 금이 간다.
부모는 자식을 돌봐야 할 책임과 의무가 있다.
부모의 무관심은 자식을 겉돌게 한다.
같은 공간에 있어도 공통의 화젯거리가 없다.
서로 데면데면해서 핸드폰만 들여다본다.
사랑이 있는 가족은 다르다.
어려운 일이 닥쳐도 가족애로 헤쳐 간다.
서로가 서로에게 힘이 된다.
가족 간의 사랑은 소리 없이 강하다.
2016년, 탄생 100주년을 맞이하는 대향大鄕 이중섭李仲燮(1916~1956)도 끈끈한 가족애를 그림으로 보여준다.
수많은 작품이 아내와 두 아들을 향한 사랑과 그리움을 표현한 것이지만, 그중에서도 관심을 모으는 작품이 <길 떠나는 가족>이다.
화가의 가족이 따스한 남쪽으로 가고 있는 행복한 모습을 그렸다.
자꾸만 그림에 눈이 가고 마음이 따사로워진다.
가족애가 가득하기 때문이다.
이중섭은 일제강점기와 6·25전쟁이라는 격동기를 파란만장하게 살았다.
상처투성이의 삶은 예술로 승화되었다.
그의 작품은 전쟁과 생이별, 가난, 고독이 뒤엉킨 삶의 진창에서 핀 꽃이었다.
1916년 평안남도 평원에서 태어난 이중섭은 유복한 유년 시절을 보냈다.
1937년 도쿄 문화학원 유학 중에 후배인 야마모토 마사코(산본방자山本方子, 한국 이름 이남덕李南德)(1921~2022)를 만나 결혼한다.
행복은 오래 가지 못했다.
1950년 6·25전쟁이 터지고, 이중섭은 부인과 두 아들을 데리고 월남한다.
부산과 제주도 등지에서 보낸 피란생활은 힘겨웠다.
전쟁과 그로 인한 가난은 작품 활동도, 가족의 행복도 지켜줄 수 없었다.
마침내 이중섭은 1952년 7월 무렵 아내와 두 아들을 일본의 처가로 보낸다.
홀로 남겨진 그는 여러 지역을 떠돌며,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그림으로 달랬다.
이산가족이 된 고통의 시간은 이중섭의 몸과 마음을 병들게 했다.
궁핍은 화가의 꿈을 절망으로 몰아갔다.
돈이 없어서 미술 재료를 살 수 없었다.
궁여지책으로 담뱃갑 내부 포장지인 은종이(은지銀紙)에 그림을 그렸다.
못으로 형상을 새기고, 그 위에 물감을 발라서 닦아냈다.
그러면 형상이 연필 선처럼 구체화되었다.
고려자기에 문양을 새긴 '상감기법象嵌技法(금속이나 도자기, 목재 따위의 표면에 여러 가지 무늬를 새겨서 그 속에 같은 모양의 금, 은, 보석, 뼈, 자개 따위를 박아 넣는 공예 기법)'을 회화적으로 응용한 것이다.
이중섭의 상징이 된 은지화銀紙畵는 그렇게 탄생했다.
"바다는 개구장이 아이들의 아버지
꿈꾸는 아이들의 꿈의 아버지
그 바다 오늘은
아이들을 위해 물새 띄워 보내고
저도 함께 가슴 열어
일렁이는 숨결로 놀아주느니
아이들은 결코 바다의 마음 알지 못하고
바다가 그리움에 야위어가는 것을
또한 알지 못하지만
아버지여 아버지여
슬픔으로 몸을 망친
푸르기만 한 아버지여"
시인 이성부李盛夫(1942~2012)가 이중섭의 작품을 염두에 두고 쓴 시 <꿈의 아버지>다.
여기서 '바다'는 제주의 바다다.
이중섭은 제주도 서귀포에서 1년 남짓 가족과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아이들과 바다에서 게나 물고기를 잡고, 복사나무 아래서 노니는 낙원을 꿈꿨다.
가족에 둘러싸여 그림을 그리는가 하면, 아이들을 모델로 많은 작품을 남겼다.
다시 <길 떠나는 가족>을 본다.
영락없는 이중섭 가족의 초상이다.
한복을 입은 이중섭이 '쾌지나 칭칭나네'를 부르며 소달구지를 끌고, 수레에 탄 아들과 부인은 연신 흥에 겨우 춤을 춘다.
천진하게 생긴 소의 걸음걸이도 가볍다.
하늘에는 구름이 둥실 떠 있고 꽃잎은 팡파르를 울리며 떠나는 분위기를 흥겹게 한다.
그가 원했던 가장 행복한 순간의 표현이다.
현재 같은 방식으로, 엽서 그림 1장과 유화 작품 2점이 남아 있다.
누구나 살면서 마주치는 행복한 순간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손안에 넘치는 행복도 보지 못한 채, 미래의 행복을 찾아서 앞만 보고 달린다.
그런 우리에게 <길 떠나는 가족>은 거울이 된다.
행복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가족과 함께하는, 지금 이 순간에 있음을 가슴 뭉클하게 일깨운다.
이들 작품은 처자식을 일본으로 보내고 혼자 지낼 때 제작했다.
앞의 작품은 가족과 헤어진 지 2년 정도 지난 1954년에 그렸고, 뒤의 작품은 정확한 제작연도가 알려져 있지 않다.
두 작품 모두 가족을 향한 그리움과 행복의 갈망이 처연하도록 아름답다.
가족보다 소중한 건 없다.
이중섭이 마지막 순간까지, 그렇게 그리워했던 가족이 우리 곁에 있다.
※출처
1. 김남희 지음, '옛 그림에 기대다', 2019. 계명대학교 출판부
2. 구글 관련 자료
2025. 6. 3 새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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