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샘(淸泉)
능호관 이인상 '와운' 본문
"소용돌이 먹구름"

그 친구를 만난 것은 대학 신입생도 한창 지난 2학기 가을이었다.
교양 과목인 국어시간에 필자가 발표한 시조에 대하여 말을 걸어온 것이다.
우리의 첫 만남이었다.
당시 필자는 소심하여 우리 학과에 누가 있는지도 몰랐다.
세월이 흐른 지금, 그 친구는 든든한 바람막이 병풍처럼 곁에 있다.
인생에서 친구는 재산이다.
사람은 교우관계에 따라서 삶의 방향이 좌우되기도 한다.
중국 북송대의 시인 동파東坡 소식蘇軾(1037~1101)은 친구 문동文同(1018~1079)이 세상을 뜬 지 14년 뒤, 한 편의 시를 남겼다.
"대나무는 차되 빼어나고
나무는 수척하되 오래 되었고
바위는 거칠되 문채文彩/文采(무늬)가 있구나
이야말로 세 가지 이로운 벗이 된다.
찬연粲然하여(산뜻하고 조촐하여) 접할 만하고 아득하여 가둘 수 없음이여
내가 이사람을 생각하니
아, 다시 볼 수 있으려나?"
문동은 시를 벗 삼고 대나무를 가슴에 새긴 수양이 깊은 문인화가였다.
그런 친구를 생각하며 소식은 "내가 이 사람을 생각하니 아, 다시 볼 수 있으려?"하고 그리워한다.
친구는 추억과 그리움의 존재다.
조선시대 후기 능호관凌壺觀 이인상李麟祥(1710~1760)도 친구와 교류하며 작품세계를 넓힌 화가다.
그가 '소용돌이 치는 구름'을 그린 <와운渦雲>에는 친구에게 남긴 제시題詩가 있다.
"깊은 산 비가 내리는 여름날 (악일하우중 嶽日夏雨中)
그대를 처음 찾았는데 (초임자 初臨子)
종이가 비에 젖어 먹물을 해칠까 두려웠다오 (외지패묵패 畏紙霈墨敗)
떠오르는 게 있어 시를 짓고 (의업행시 意業行詩)
술 취해 글을 쓰니 털구름과 같고 (취후작자여모운 醉後作字如毛雲)
정말로 해골 같은 그림이라 한번 웃는다오 (정루차폭야일소 正䫫此幅也一笑)
원령(이인상의 자) 쓰다 (원령서 元靈書)"
친구는 멀리 떨어져 있어도 언제나 같은 곳을 바라보게 한다.
말하지 않아도 눈빛만 보면 안다.
그런 친구가 있다는 것이 행복하다.
2010년 가을이 무르익던 날, 아주 오랜만에 서울서 그 친구를 만났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이인상 탄생 300주년을 맞이하여 <능호관 이인상, 소나무에 뜻을 담다>전(2010. 9. 14~12.5)이 개최되었기 때문이다.
평소 이인상 작품을 흠모해왔기에, 그의 작품이 궁금했다.
역시 이인상의 작품은 신선했다.
작가의 작품은 삶과 무관하지 않다.
평생 독서를 생활화한 그는 친구들과 시문을 나누며 풍류를 즐겼다.
친구들과의 추억은 이인상에게 그림 창작의 동력이 되었다.
친구에게 바친 그림들은 추억과 그리움을 담아 간결한 필획과 고졸古拙한(기교는 없으나 예스럽고 소박한 멋이 있는) 농담濃淡(진함과 묽음)으로 표현되었다.
이인상은 세종의 7대손 명문인 전주 이씨 이경여李敬輿의 현손玄孫(고손자高孫子: 손자의 손자)이었지만 증조부가 서얼이라서 그는 '반토막 양반'이었다.
그럼에도 고조부 이경여가 노론에서 알아주는 선비였던 탓에 이인상은 일류 문인들과 교류할 수 있었다.
비록 서얼이라는 신분의 제약이 있었지만, 학식을 겸비한 문인으로서의 자존심을 가슴에 품고 문기와 격조어린 그림을 그렸다.
<와운>은 이인상의 삶을 실감나게 보여준다.
화면 가득 소용돌이 먹구름이 응어리져 있어, 그림인지 낙서인지 구분이 쉽사리 안 된다.
인생에 꽃길만 주어지지 않듯이 그림도 아름다움만 추구하는 것은 아니다.
익숙하지 않은 스타일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볼수록 가슴에 안기는 그림이다.
이인상은 서예에 조예가 깊었고, 소나무, 국화, 산수화를 비롯한 다양한 종류의 작품을 남겼다.
그중에도 소나무를 많이 그렸다.
소나무는 지조와 절개의 상징물로서 화가들이 즐겨 사용하는 소재였다.
그의 작품은 서툰 듯하지만 그 속에서 우러나는 묘한 아름다움이 있다.
친구를 보면 그 사람이 보인다고 했다.
소식에게 문동은 정신적 지기였고, 이인상 역시 궁핍한 생활을 돌봐준 친구들이 있어 학문과 그림에 전념할 수 있었다.
조선시대 후기에 기라성 같은 화가들이 화려한 기교를 구사하거나 진경화풍을 꽃피울 때, 이인상은 담백하고 격조 있는 문인화풍을 밝혔다.
양반이었지만 신분제약을 받으며 떳떳하게 어깨를 펼칠 수 없는 그에게 친구는 든든한 등불이었다.
※출처
1. 김남희 지음, '옛 그림에 기대다', 2019. 계명대학교 출판부
2. https://blog.naver.com/kalsanja/220893837187(제시)
3. 구글 관련 자료
2025. 8. 7 새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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