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샘(淸泉)
읍루, 너무 늦게 발견한 동해의 역사 본문

○동해안의 강력한 사냥꾼
<최종병기 활>이란 영화의 주인공 중 한 명으로 등장하는 쥬신타는 여진족女眞族 출신의 청나라 장수다.
천만 관객을 동원한 <신과 함께>라는 영화에도 여진족이 등장한다.
주인공 중 한 명인 해원맥은 전생에 변방에서 장수로 활약하다가 여진족의 아이들을 데려다 키우게 된다.
이 두 영화에는 모두 변방의 오랑캐라고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지역, 함경도 일대가 배경으로 나오며 그 지역에 살았던 여진족이 등장한다.
여진족의 선조는 환동해의 북쪽 지역에 살았던 읍루挹婁 민족이다.
읍루는 발해에 복속되어 있던 말갈족靺鞨族이 세운 나라로 사냥을 업으로 삼아 생활을 영위했다.
원래는 고구려에 속해 있었지만, 고구려가 멸망하면서부터는 발해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이곳은 처음에는 읍루로 불리다가 나중에는 말갈로 호칭이 바뀌었다.
후기에는 여진족으로 불리게 되었는데 이 무렵에는 세력을 키워 조선의 국경과도 맞닿게 되었다.
옛날에는 지금처럼 국경이 명확하지 않아서 같은 지역에서도 여러 부족들이 섞여 사는 일이 흔했고, 편하게 산과 들을 오가며 사냥을 하거나 농사를 짓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읍루인들 역시 어느 때는 한반도의 역사에 편입되었다가 어느 때는 외부인이 되기도 하면서 독특한 흐름을 보이게 되었다.
여진족은 얼핏 생각하는 것처럼 미개한 종족이 아니었다.
여진족은 오랫동안 명맥을 유지하며 문화를 발전시키면서 중국을 두 번이나 지배하기도 했다.
첫 번째는 12세기에 요나라를 쳐서 정복하고 금나라를 세웠는데, 이때 한반도를 차지하던 고려도 금나라에 조공을 바치게 되었다.
두 번째는 16세기 말에서 17세기 초에 명나라와 조선의 힘이 약해진 틈을 타 전쟁을 일으키고 청나라를 세웠다.
당시 조선을 공격했던 전쟁이 그 유명한 병자호란이다.
바로 그 대국을 건설했던 여진족 사람들의 발자취가 두만강 유역 건너편 환동해 지역을 따라서 발달해 있었다.
북방 지역은 산이 많고 날씨가 매우 추웠으므로 서쪽이나 한반도에서는 생산되지 않지만, 황금만큼 귀하게 취급하는 물품이 많았다.
예를 들면 삵, 스라소니, 담비, 족제비의 모피가 그것이었다.
앞서 올린 글들에서 설명한 것처럼 모피는 부르는 게 값일 정도로 엄청난 사치품이었다.
신라시대뿐 아니라 시간이 흘러 고려시대, 조선시대에도 황실과 상류층을 중심으로 크게 사랑받았다.
따라서 이들은 추운 데서 억지로 농사를 짓기보다 자기들에게 유리한 명품을 공급하며 경제를 발달시켰다.
○읍루인들의 생활 환경
그렇다면 이들은 척박한 환경을 어떻게 극복하고 살아 남았을까?
읍루인들에 대한 기록을 살펴보자.
"그들은 땅속에 깊게 굴을 파고 산다. 집은 깊으면 깊을수록 좋다."
마치 현대인들이 면적이 넓은 집을 선호하듯 읍루인들은 깊이가 깊을수록 더 좋은 집이라고 판단했다.
또한 과거의 일반적인 주거 구조와는 달리 화장실을 집 안에 두었다는 점도 이들만의 독특한 주거 문화였다.
이들의 또 다른 특이한 풍습 중 하나는 온몸에 돼지기름을 바르는 것이었다.
복장 문화에서는 바지의 가랑이 부분이 트여 있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한다.
위에 설명한 풍습들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먼저 화장실을 안에 두는 것은 미개해서가 아니라 살기 위해 어쩔 수 없는 문화였다.
이 지역을 겨울에 영하 40~50도까지 내려갈 정도로 매서운 추위가 찾아왔다.
그러다 보니 밖에서 볼일을 보기 위해 맨살을 드러내면 금세 동상에 걸릴 정도였다.
볼일을 보는 사소한 행위도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추위를 막기 위해 주거 구조에도 특별한 장치가 고안되었다.
집 위에는 지붕을 얹고 흙과 나뭇가지를 덮어 보온이 되도록 한 것이다.
읍루인들은 대부분의 시간을 집에서 보내다가 어쩔 수 없이 나갈 일이 있을 때만 연기 구멍을 통해 겨우 드나들었다.
그러다 보니 외부인들이 시각에서 이들의 거주지는 냄새가 심하고 위생적으로 좋지 않았다.
실제로 약 200년 전쯤 러시아 선원들이 북극해를 탐험하다가 시베리아 원주민의 집을 방문한 적이 있는데, 그때 집 안에 빽빽하게 걸려 있는 훈제 연어를 보고 깜짝 놀랐다고 한다.
검은 황금이라고 불리는 모피도 집 안에서 말리다 보니, 악취가 심해서 처음에는 견딜 수 없을 정도였다고 전해진다.
완성된 모피는 화려함을 자랑하지만, 이를 만드는 과정은 청결함과는 상당히 거리가 멀다.
화장실에 모은 소변은 옷을 빨거나 가죽을 무두질할 때 사용했다.
대변을 어떻게 사용했는지에 대해 기록은 남아 있지 않지만 아마도 돼지 같은 동물을 키울 때 사용했을 것으로 추측한다.
이 지역 사람들이 돼지고기를 즐겨 먹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데, 혹독한 날씨 탓에 바깥에서는 키울 수 없었으므로 아마 집 안에서 키우면서 사람 분변을 활용했을 것이다.
돼지는 추운 지역에서 많이 키웠다.
비계의 활용도가 높아 돼지기름을 연고로 만들어 살갗이 트지 않도록 바르기도 하도, 콜라겐이 많은 돼지 껍질을 섭취해 피부에 지방층을 만들기도 했다.
또한 러시아의 전통 요리 가운데 살로 salo라는 것이 있는데, 이를 그대로 번역하면 '돼지비계'란 뜻으로 굽지 않은 생 비계를 빵 위에 얹어 소금으로 간하고 먹는 간단한 음식이다.
이런 고열량 음식을 먹으면 몸에 열이 나면서 추위를 이겨낼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들의 독특한 복장인 밑이 트인 바지는 혹한에서 볼일을 보기 위한 장치다.
바지를 내리고 맨살을 노출하면 동상에 걸릴 위험이 컸으므로 속바지를 입은 채로 볼일을 볼 수 있도록 고안된 디자인이다.
화장실이 집 안에 있었지만 피치 못할 때는 밖으로 나가야 하는 경우도 생겼으므로 여러 방식으로 추위에 적응하게 되었다.
이들의 풍습은 북쪽으로 뻗어나가 지금도 알래스카의 캄차카 지역에 남아 있다.
18세기 이후 여전히 과거의 모습대로 살아가는 소수민족들을 연구한 결과, 추위를 이겨내는 데 탁월한 적응력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정한 기후나 환경에 적응해서 산다는 것은 그 환경을 모르는 상태에서 섣불리 판단해서는 안 되는 문제다.
오히려 이들은 누구보다 오랫동안 추위를 견디며 결국 자연환경에 적응해 자신들만의 문화를 만들어냈다.
읍루인들은 결코 미개한 민족이 아니었으며 다른 나라를 정복할 정도로 진취적이고 기개가 강했다.
○극동 아시아의 오랜 조상인 읍루의 상징성
이들이 미개하지 않았다는 것은 러시아 연구자들에 의해 처음으로 증명되었다.
러시아에서는 이미 200년 전부터 한반도의 역사에 관심을 갖고 문헌 번역을 비롯한 다양한 방식으로 오랫동안 연구를 이어왔다.
그러다가 1953년에 한국전쟁이 끝난 뒤 다시 이 지역을 조사하게 되었는데, 다양한 유물과 유적이 발견되면서 이 땅의 주인이 원래 읍루인과 옥저인이었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
특히 러시아 고고학연구소 소장이자 새로운 아시아 인류인 데니소바인 Denisovan을 발굴해서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고고학자가 있다.
그는 박사 논문에서 읍루인들의 문화에 대한 주제를 다루었다.
읍루는 변방의 문화가 아니라 한국과 러시아의 고고학에 몇십 년째 신선한 화두를 던지고 있는 아주 중요한 유적이다.

이들은 위 사진에서 보이는 것과 같은 정령을 집에 모셔놓고 종교 생활을 영위하기도 했다.
사람이 죽으면 땅속에 묻지 않고 수목장을 치렀는데, 현대의 수목장처럼 재만 넣어서 나무 아래에 묻는 것이 아니라 길게 관을 만들어 그 안에 유골을 넣은 다음 나무 위에 올려놓았다.
옥저인들은 누군가가 죽으면 커다란 관을 놓고 그 앞에 망자의 인형을 가져다 두었다.
마치 영정 사진처럼 관과 인형을 모셔두는 것이다.
이것은 '세벤'이라고 해서 돌아가신 분들을 기리는 조형물이었다.
위 사진에서 비행기처럼 생긴 토우土偶(흙으로 만든 사람이나 동물의 상)는 날개가 달린 곰이나 호랑이를 형상화한 것으로 돌아가신 조상을 저승으로 데려다주는 역할을 한다고 믿었다.
옥저인들이 사용했던 또 하나의 영적인 상징으로 '옹곤 Ongon'이라는 것이 있다.
옹곤은 우리말로 하면 장승으로, 돌아가신 분들을 한곳에 모시는 공동묘지에 설치해 망자를 기리는 물건이었다.
옥저나 읍루 사람들이 땅을 파서 묘지를 만들지 않은 이유는 단순하다.
이 지역은 겨울이 되면 땅마저 단단하게 얼어붙어 관을 매장할 만큼 깊게 팔 수가 없었다.
무덤을 만들고 꾸미는 풍습은 각 문화가 처한 환경과 연결되어 있다.
예컨대, 무더운 기후의 적도 인근 국가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하루를 넘기지 않고 땅속에 묻는다.
사체가 단 몇 시간 만에 심하게 부패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겨울이 길어서 땅을 쉽게 팔 수 없는 경우라면 어떨까?
몇 개월 동안 시신을 어딘가에 보관해두었다가 무덤을 파야 한다.
그러려면 시신을 장기간 보관할 만한 안치소가 필요하다.
그래서 영혼이 깃들었다고 믿는 숲의 한 구역에 조상들의 시신을 임시로 모셔두는 것이다.
이와 비슷한 풍습은 미국 신대륙의 원주민 문화에도 남아 있다.
인디언들은 나무로 만든 침상 위에 시신을 안치하고 그 주변에 영혼이 머문다고 믿는다.
세월이 지나서 그 침상이 썩어 유골이 땅에 떨어지면 그 영혼이 비로소 자신들 곁을 떠나서 하늘로 올라갔다고 여긴다고 한다.
'수목장'의 일종이라고 볼 수 있는 이런 풍습은 옥저인과 읍루인들 사이에서도 널러 퍼져 있었다.
따라서 그들의 유적에서 무덤은 매우 적게 발견되었다.

그리고 읍루와 옥저의 먼 후예로 현재 이 지역에 남아 있는 말갈의 후예인 나나이족(나내족那乃族) Nanai은 여전히 과거의 풍습을 지키며 몇천 년 동안의 역사를 증명하고 있다.
나나이족은 농사를 짓지 않고 살았다.
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바로 위에 있는 사진과 함께 살펴보자.
위 사진의 옷은 놀랍게도 연어의 껍질이라는 독특한 재료로 만들어졌다.
사진을 확대해보면 껍질과 비늘이 잘 남아 있는 것이 보인다.
이 지역에서는 8~9월에 강을 따라 거슬러 올라오는 몇천, 몇만 마리의 연어를 원 없이 잡을 수 있었다.
연어는 알을 채취하고 염장해 저장식품으로 보관하거나 훈제해서 말리기도 하고, 껍데기는 벗겨서 옷을 만드는 따위의 다양한 방식으로 사용했다.

이 지역에는 사냥감이 워낙 많아서 농사를 지을 필요가 없었다.
게다가 근처 숲에서 자라는 키가 큰 자작나무를 가공해 방패나 생활용품 같은 온갖 물건도 만들어낼 수 있었다.
이 지역 사람들은 굳이 애 쓰지 않아도 지천에 널려 있는 자연 자원으로 풍족한 생활을 누렸다.
게다가 바다표범, 소금, 다시마 같은 읍루 지역 특산물은 내륙에서는 구하기가 어려워 아주 귀하게 대접받았다.
비슷한 지역에 살았던 옥저인들이 이런 물건을 고구려에 공물로 바쳤다는 기록이 있을 만큼 이곳은 기후가 추운 것을 제외하면 자원이 풍부해 생활을 영위하는 데 큰 어려움이 없었을 것이다.
흔히 우리가 미개인이라고 치부하는 사람들은 지금도 전 세계에 많이 살고 있다.
대표적으로 북극해에 살던 이누이트 Inuit(에스키모 Eskimo)나 그와 이웃한 축치인 Chukchi들이 있다.
추운 곳에서 살면서 그들만의 강점을 더욱 강화했다.
필자는 이것을 '적응 잠재력'이라고 표현한다.
이렇게 추위에 최적화된 사람들은 만약 기후가 한랭화된다면 가장 잘 적응해 유일하게 살아남아 자손을 퍼뜨릴 수 있을 것이다.
읍루의 후예인 말갈족과 그 후의 여진족은 강한 생활력을 무기 삼아 중원으로 진출해 금나라와 청나라라는 세계사에 한 획을 그은 대국을 건설했다.
험난한 지역에서 그들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주변국에 오랑캐라고 무시당하는 동안 극한 환경에 적응하면서 내실을 갈고 닦은 그들의 강한 면모 덕분이 아니었을까!
※출처
1. 강인욱 지음, 우리의 기원-단일하든 다채롭든, 21세기 북스,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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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8. 9 새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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