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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핀과 스테이시의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 6부 혁명의 시대 - 18장 프랑스 혁명 6: 나폴레옹과 프랑스 제국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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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핀과 스테이시의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 6부 혁명의 시대 - 18장 프랑스 혁명 6: 나폴레옹과 프랑스 제국

새샘 2025. 8. 16. 12:59

1812년 튀일리궁 서재에 선 나폴레옹 황제(출처-위키백과 https://ko.wikipedia.org/wiki/%EB%82%98%ED%8F%B4%EB%A0%88%EC%98%B9_%EB%B3%B4%EB%82%98%ED%8C%8C%EB%A5%B4%ED%8A%B8)

 

나폴레옹 치세(1799~1815년)
나폴레옹이 제1통령이 됨
교황과의 정교 협약
나폴레옹이 종신 통령이 됨
나폴레옹이 공화정을 폐지하고 스스로 황제에 오름
나폴레옹 법전
대륙 봉쇄
나폴레옹의 에스파냐 침공
러시아 침공
나폴레옹의 퇴위
나폴레옹의 복귀와 마지막 유배
1799년
1801년
1802
1804
1804년
1806
1808
1812년
1814년
1815년

 

 

서양사를 통틀어서 15년 동안 프랑스를 통치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Napoléon Bonaparte(1769~1821)만큼 세계의 주목을 끈 인물도 드물 것이다.

그리고 나폴레옹만큼 프랑스뿐만 아니라 서양 전체에 걸쳐서 신화로서 계속 살아 있는 인물도 찾아보기 어려우리라.

그 이유는?

대다수 유럽 보통 사람들에게 프랑스 혁명의 기억은 유럽을 황폐화시키고 유럽 정치를 격동시켰으며 한 세대 동안이나 유럽 사람들의 마음에 충격을 주었던 나폴레옹 전쟁과 관련된 사건들로 지배되었다.

정치적 혁명이자 대중 봉기로 시작된 사건은 전쟁으로 계속되었고, 결국 새로운 종류의 유럽 제국을 창조하기 위한 노력으로 종결되었다.

많은 사람들에게 그런 드라마 전체는 한 사람의 이력에서 구현된 것처럼 보였다.

1792년 전쟁의 벽두부터 프랑스의 혁명가들은 프랑스 군대를 방어와 생존의 방향을 향해 나아가게 해왔다.

모든 사람에게 혁명의 미래는 가장 위대한 장군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성공과 밀접한 관계를 맺어야 하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보였다.

 

보나파르트와 혁명의 관계는 단순하지 않았다.

그의 정권은 프랑스 혁명의 일부 정치적·사회적 변화들을 공고히 했지만 그밖의 것들은 단호히 거부했다.

그는 스스로 혁명의 아들임을 자처했지만 스스로를 샤를마뉴 Charlemagne(카롤루스 Karolus 대제)나 로마 제국 Roman Empire의 상속자로 변모시키면서 매우 상이한 정권들을 거리낌 없이 차용하기도 했다.

보나파르트의 정권은 혁명기 정치와 프랑스를 다시 만들었다.

이를 위해 그는 새로운 방식의 전투라는 멋진 사례를 제시했고, 한 세기 이상이나 유럽의 정치가와 시민에게 꿈이나 악몽으로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던 전쟁의 유산과 프랑스의 영광이라는 전설을 남겼다.

 

 

○권한 강화, 1799~1804년

 

보나파르트의 초기 경력은 혁명이 유능한 사람들의 노력에 보답했다는 주장을 보강해주었다.

코르시카 Corsica 지방 귀족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파리에서 군사학교를 다녔다.

프랑스에서 혁명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그는 연대 지휘권을 사는데 필요한 소령 계급 이상으로 진급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프랑스 혁명은 군대 직책의 매입을 폐지했고 보나파르트는 재빠리 장군이 되었다.

그 다음에야 그는 프랑스의 혁명을 위해 기꺼이 내주었던 자기 자신의 재능으로 인해 일약 무명에서 떠오른 인물이 되었다.

더욱이 그의 성격은 계몽주의 시대에 걸맞은 것처럼 보였고, 초기 찬미자들은 그의 광범위한 재능과 역사, 법, 수학 따위를 포함한 지적 관심에 주목했다.

그는 사상을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그는 끊임없이 읽고 썼는데, 이런 일은 심지어 그가 전투를 치를 때에도 계속되었다.

지도자로서의 보나파르트의 능력은 놀라운 것이었다.

그는 재정적·법적·군사적 계획을 착상하고 그것의 모든 세부사항을 철저히 파악했다.

그는 쉼 없이 일했고 잠도 거의 자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프랑스의 예정된 구원자라고 믿었다.

이런 확신은 그를 카리스마적charismatic(대중을 심복시켜 따르게 하는 뛰어난 능력이나 자질이 있는) 지도자로 만들기도 했지만 결국 그를 파멸로 이끌었다.

 

보나파르트는 자신의 통치 기간인 첫 5년 동안에 재빨리 개인적 권력을 통합했다.

그는 1799년 정부를 전복시킨 뒤 '제1통령 prmier consul'의 칭호를 얻고 공화정의 이름으로 통치했다.

새 헌법은 백인 남성의 보통선거권을 확립했고 양원제 입법부를 세웠다.

하지만 선거는 간접선거였고 입법부의 권력은 상당히 억제되었다.

"정부라고요?"

어느 관찰자는 이렇게 말했다.

"보나파르트가 있지요."

보나파르트는 이후 권위주의자들이 흔히 사용할 장치, 즉 일반 투표로 직접 찬반을 묻는 국민투표를 제도화했다.

이것은 국가의 수장이 자신에게 반대할지도 모를 정치가나 입법부를 회피히게 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지방 관리들이 투표함을 함부로 바꿀 수 있도록 해주었다.

1802년 해외에서의 승리로 의기양양해진 그는 입법부에게 자신을 종신 통령으로 선포해줄 것을 요구했다.

상원이 그것을 거부하자 보나파르트의 행정재판소가 개입해 그에게 종신 통령 칭호를 부여했고 국민투표로 이를 비준했다.

그의 정권은 시종일관 국민에게 자문을 구하는 외양을 띠었지만, 보나파르트 정권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권력의 집중화였다.

 

그러한 권력은 프랑스를 재조직하는 데에서 왔고, 이 점에서 보나파르트의 업적은 비범하면서도 지속적인 것이었다.

보나파르트 정권은 특권의 폐지를 확약했고 그럼으로써 '능력에 따른 출세'를 약속했다.

그는 행정 부서들을 중앙집권화해 몇 년 동안 프랑스에서 성취된 적이 없는 질서정연하고 대체로 공정한 조세제도를 만들었다.

보나파르트 정권은 군사적 모험에 자금을 충당하기 위해 자신이 정복했던 지역들의 자원에 크게 의존했지만, 좀 더 효율적인 징세와 재정 관리는 혁명 정부를 무능하게 만들었던 악성 인플레이션을 멈추는데 도움을 주었다.

앞서 본 것처럼 이전의 혁명 정부들은 프랑스의 행정을 재조직했는데, 여기에는 예전의 봉건 영지를 그에 딸린 별개의 정부, 법전, 특권, 관습 따위와 함께 폐지하고 통일된 정부 부서 체계를 세우는 것이 포함되었다.

보나파르트는 그런 작업을 중앙집권화에 강조점을 두면서 한층 더 밀고나갔다.

그는 선출직 관리와 지방자치정부를 중앙에서 임명한 도지사와 부도지사로 대체했다.

도지사는 그 어떤 선출직 대표보다도 훨씬 더 많은 권력을 행사했다.

예컨대 그들은 통계를 수집하고 경제와 인구에 관해 보고하는 일에서 교육, 도로, 공공사업에 이르기까지 모든 일을 감독했다.

50년 뒤 나폴레옹 조카의 제2 제정 치하에서 파리 도지사는 오늘날까지 나폴레옹 시대의 특징을 지니고 있는 프랑스 수도의 대규모 재건을 지휘했다.

 프랑스는 직함이 아니라 (비록 엘리트층이 지배적이기는 했지만) 능력에 따라 공무원을 뽑았다.

상이한 부서들이 조정된 (그리고 위로부터 감독을 받는) 한층 더 통합된 행정과 한층 더 전문적인 관료제 그리고 (전쟁이 필요로 하는 것들이 비록 이 체제에 긴장을 자아냈지만)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과세와 더불어 나폴레옹의 국가는 부르봉 절대주의에서 근대 국가로의 이행을 보여주었다.

 

 

○법, 교육 그리고 새로운 엘리트

 

근대 국가 건설에 대한 나폴레옹의 가장 중요한 기여와 그가 정복한 지역에 전파한 것 중 하나는 1804년 새로운 법전을 공표한 것이었다.

각각의 혁명 정권은 법을 근대화하는 힘든 과업에 착수했지만, 각자에게 부여된 시간을 다 써버리고 말았다.

나폴레옹은 일이 지체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고 스스로 자신의 사상을 밀어붙이고 모임의 절반을 감독하면서 이 계획에 전념했다.

'나폴레옹 법전'—새로운 민법전—에는 그의 철학과 야심의 흔적이 담겼다.

이 법전에 그는 1789년 이래로 헌법상의 모든 변화를 꿰뚫는 두 가지 원칙, 즉 통일성과 개인주의를 반영했다.

나폴레옹 법전은 하나의 통일된 법을 창출하면서 예전에 프랑스의 지방들을 지배했던 서로 다르면서도 모순적인 복잡다단한 법적 전통을 일소했다.

이 법전은 귀족과 성직자의 특권뿐만 아니라 수공업 길드, 자치도시 따위의 특별한 권리를 포함한 모든 봉건적 특권을 확실히 폐지했다.

이 법전은 또한 계약 일반, 임대차 계약, 주식회사 따위의 입안을 포함하는 재산권의 행사에 관한 조건을 정했다.

나폴레옹이 개인적으로 발전시킨 가족에 관한 조항은 부권父權의 중요성과 여성과 어린이의 종속성을 주장했다.

1793년 혁명기 중 가장 급진적 시기 동안에 남성과 여성은 '혼인관계에서 동등한' 것으로 선언된 적이 있었지만, 나폴레옹 법전은 남편의 '선천적 우위'를 지지했다.

결혼한 여성은 재산을 팔 수도 사업을 운영할 수도 없었고, 남편의 허락 없이는 직업을 가질 수도 없었다.

아버지는 자녀들의 재정적인 일을 관리하고 그들의 결혼에 동의하며, (예전부터의 징계권에 따라) 정당한 논거를 제시하지 않고도 자녀들을 6개월까지 투옥할 수 있는 유일한 권리를 가졌다.

이혼은 합법적인 상태로 남아 있었으나 동등한 조건 아래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예컨대 남편은 간통을 근거로 이혼 소송을 제기할 수 있었지만 부인은 자신의 남편이 '첩'을 집으로 들일 때에만 소송을 제기할 수 있었다.

보통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이 법전이 사생아에 대한 친부 확인 소송을 금지했다는 것이다.

 

나폴레옹 법전은 상법, 민법 및 소송 절차, 범죄, 형벌 따위를 다루는 7개 법전으로 확대되었다.

민법전처럼 형법전도 시민을 법 앞에 평등하게 대하며 자의적인 체포와 구금을 금하면서 혁명의 일부 성과들을 통합했다.

하지만 이 법전은 혁명가들이 폐지했던 존속 살인자에 대한 낙인찍기와 손 절단 같은 잔인한 조처를 부활시켰다.

나폴레옹 시대의 법제도는 구체제의 법보다는 한층 평등주의적이었으나 적잖이 권위적이었다.

 

나폴레옹은 또한 교육제도를 개선했다.

그는 주요 도시에 공무원과 군 장교를 훈련시키기 위해 리세 lycées(고등학교)를 설립하고 파리에 교사를 양성하기 위한 학교를 설립하도록 명령했다.

이와 더불어 나폴레옹은 군사학교와 기술학교를 국가 관리 체제 아래 두었으며 교육제도 전반을 감독할 국립대학을 창설했다.

그가 새로운 사관학교를 세운 것은 놀랄 일이 아니었다.

그는 수준 높은 고등 교육기관—(엔지니어를 위한) 폴리테크닉 polytechnique과 (교사를 위한) 노르말 normal—을 만들기 위해 견고한 재정 체계를 재조직하고 확립했다.

시험 성적에 따라 입학이 허용된 이들 학교에서 프랑스의 기술, 교육, 정치 분야의 엘리트들이 배출될 예정이었다.

대부분의 개혁처럼 교육 개혁 역시 혁명기에 도입된 개혁을 보강한 것이었으며, 특권을 폐지하고 '능력에 따른 출세'가  가능하도록 만든 것이었다.

나폴레옹은 또한 계몽사상으로 태동한 사회과학과 물리학을 신봉했다.

그는 미술, 과학, 인문학, 언어(유명한 아카데미 프랑세즈 Académie française) 네 분야의 아카데미로 나뉜 프랑스 학사원(Institute of France)을 후원했다.

이들 아카데미는 절대주의 시대에 만들어졌지만 나폴레옹에 의해 조직화되고 새로운 토대를 갖추었다.

이들 아카데미가 오늘날까지 유지되어오는 중앙집중화, 실력 위주, 그리고 국가에 봉사하는 특징들은 나폴레옹 치하에서 만들어졌다.

 

이러한 변화를 통해 과연 누가 혜택을 보았는가?

보나파르트의 다른 새로운 기관들처럼 이 새로운 학교는 신흥 엘리트층의 권력을 확실히 하는데 기여했다.

신흥 엘리트층은 사업가, 은행가, 상인을 포함했지만 일차적으로는 여전히 막강한 지주들로 구성되었다.

고등학교 특별 연구비의 절반은 군 장교와 고위 공무원의 자제들에게 주어졌다.

최종적으로 보나파르트의 개혁 대부분이 그렇듯이 교육에서의 변화는 제국의 강화를 목적으로 한 것이었다.

"교사 집단을 만드는 목적은 정치적·도적적 여론을 지도하는 수단을 갖기 위한 것이다."

나폴레옹은 이렇게 솔직히 말했다.

 

보나파르트의 초기 조처들은 야심찬 것이었다.

그런 조처에 대한 지지를 획득하기 위해 그는 과거 정치 경력은 불문하고 자기편을 만들었다.

그는 온갖 정치적 유형의 망명자들이 귀국하는 것을 허용했다.

그의 동료 통령 두 명 중 한 사람은 공포 정치 시대에 국왕 처형에 관여한 인물이었으며, 또 다른 한 사람은 앙시앵레짐 Ancien Régime(구체제, 영어 Old Regime)의 관료였다.

나폴레옹의 치안장관은 극단적인 급진 공화파였고, 외무장관은 기회주의적 귀족 샤를 탈레랑 Charles-Maurice de Talleyrand-Périgord이었다.

이러한 정치적 화해 작업 중 가장 놀라운 행동은 1801년 교황과 보나파르트가 맺은 정교협약政敎協約(콩고르다툼 Concordatum)이었다.

이 협약은 프랑스와 가톨릭교회의 10년 이상에 걸친 적대감을 종식시키는 것이었다.

이러한 일은 반가톨릭적 혁명가들에게 충격을 주었지만 일관된 실용주의자 나폴레옹은 이러한 화해가 국내의 화합과 국제적 안정을 가져다줄 것이라고 믿었다.

협약에 따라 교황은 프랑스의 주교를 해임하고 프랑스의 성직자들을 징계할 권한을 얻었다.

그에 대한 보답으로 바티칸 Vatican은 혁명으로 인해 몰수된 교회 재산 문제를 거론하지 않기로 했다.

따라서 그 재산은 새로운 중간계급의 농촌 및 도시 소유자들의 수중에 남게 되었다.

이 협약은 혁명으로 확립된 종교의 자유라는 원칙을 철회하지 않았지만, 이 때문에 나폴레옹은 미래의 프랑스가 신을 저버린 국가가 되지 않을까 염려하던 보수주의자들의 지지를 획득했다.

 

그러한 정치적 균형 정책은 보나파르트의 인기를 전반적으로 높여주었다.

이런 정책들은 초기의 군사적 승리(1801년 오스트리아 및 1802년 영국과의 화평)와 결합해 그의 개인적 야심에 대한 어떠한 반대도 잠재웠다.

그는 마르티니크 Martinique 출신의 크리올 Creole(신대륙 발견 뒤 아메리카 대륙에서 태어난 에스파냐인과 프랑스인의 자손을 일컫는 말)이자 혁명기의 영향력 있는 인사의 정부였던 조세핀 드 보아르네 Joséphine de Beauharnais(1763~1814)와 결혼했다.

조세핀은 코르시카 출신의 군인 정치가에게 정통성을 주었으며 그의 경력 초기에 혁명가 엘리트층에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하지만 보나파르트나 그의 야심찬 부인은 동등자 중에서 최고가 되는 것에 만족하지 않았다.

1804년 12월 보나파르트는 마침내 공화주의의 어떤한 흔적도 내던져버렸다.

그는 파리의 노트르담 성당에서 중세 왕권과 부르봉 Bourbon 절대주의의 영화를 불러일으키는 의식을 통해 스스로 나폴레옹 1세 Napoléon I 황제(재위 1804~1814, 1815)의 관을 썼다.

나폴레옹은 근대 국가를 창조하기 위해 많은 것을 했지만 자신이 과거에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선포하는 것도 망설이지 않았다.

 

 

○프랑스에서처럼 유럽에서도: 나폴레옹의 제국

 

유럽의 여러 나라들은 경외의 마음으로 또는 두려움으로 그러나 모두 놀라움으로 나폴레옹 현상을 바라보았다.

오스트리아 Austria, 프로이센 Preußen/Preussen(영어 Prussia), 영국 UK(United Kingdom)이 주도하는 유럽 열강의 연합은 유럽의 안정이 유지되기를 바라면서 1792년부터 1795년까지 프랑스와 싸웠다.

첫 번째 연합은 프랑스 군대에게 패배하고 재정 고갈로 말미암아 혼란 속에 붕괴되었다.

영국의 간절한 요청으로 두 번째 연합이 1798년에 부활했지만 첫 번째 연합보다 더 나을 것이 없었다.

이집트 Egypt에서 나폴레옹의 군대가 와해되었지만 유럽에서 거둔 프랑스의 승리는 이 연합을 분열시켰다.

러시아 Russia와 오스트리아는 1801년에 이 싸움에서 물러났고 타협을 모르는 영국도 다음 해 휴전했다.

 

그러한 평화는 단 1년 동안만 지속되었다.

1805년 러시아,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스웨덴 Sweden은 프랑스를 봉쇄하려는 영국의 시도에 가담했다.

하지만 그들의 노력은 아무런 성과가 없었다.

나폴레옹의 군사적 우위는 차례로 3개 대륙 동맹 국가 모두를 패배시켰다.

나폴레옹은 군대의 이동, 재편성, 그리고 자신의 유리함을 놓치지 않는 방식을 통해 전장에서 시의적절하고 훌륭하게 지휘하는 공격의 대가였다.

그는 유럽의 전쟁을 변모시킨 군대를 이끌었다.

나폴레옹의 군대는 애초에 혁명기 민병대로 동원되었으나, 점차 전쟁 수행에 경제력을 쏟아 부은 국가로부터 충분하게 보급을 받는 충성스럽고 훈련된 징집 군대로 변모했으며 대개 능력에 기초해 진급한 장군들이 지휘했다.

나폴레옹의 치명적 제6감에 따라 지휘를 받는 이 신형 군대는 적들에게 결정적인 패배를 안겨주었다.

1805년 12월 아우스터리츠 전투 Battle of Austerlitz는 오스트리아와 러시아 연합군에 대한 프랑스의 승리였고, 황제 나폴레옹에게 명백히 대적할 자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상징이 되었다.

1807년 프리틀란트 Battle of Friedland에서 러시아군에 대항한 나폴레옹의 연이은 승리는 그의 명성을 드높여주었다.

 

이러한 승리를 통해 나폴레옹은 새로운 제국과 피지배 국가들을 만들었다.

이 제국은 남동쪽으로 로마와 교황령, 토스카나 Toscana, 오스트리아의 달마티아 Dalmatia 영토(지금의 크로아티아 Croatia 해안선)를 포함했다.

동쪽으로 나폴레옹의 통치는 라인 동맹 Confederation of the Rhine이라고 알려진 독일 국가 연합과 폴란드 Poland의 일부로 확장되었다.

이들 신생 국가들은 유럽 다른 지역에 있는 애국자들에게 프랑스가 가져다준 독립이라는 선물로 보였으나, 실제로 이 나라들은 재개된 오스트리아의 팽창에 대항한 프랑스의 군사적 완충지 역할을 했다.

이 제국은 이탈리아 Italia, 나폴리 Napoli, 에스파냐 España, 홀란드 Holland의 동맹 왕국들로 에워싸였고, 왕위는 나폴레옹의 형제들, 처남, 신뢰하는 장군들이 차지했다.

 

나폴레옹의 제국은 프랑스 혁명이 실질적 결과들, 즉 중앙집권화된 강력한 국가와 특권에 기반한 구체제의 종식을 유럽의 문 앞에 가져다주었으며, 이미 프랑스를 변화시켰던 제국의 원리들이 적용되었다.

소송 절차, 법전, 국가의 관행에 대한 철저한 조사를 뜻하는 행정 근대화는 도입된 변화들 가운데서 가장 강력한 특징이었다.

이 제국은 공무원과 사법부에 새로운 직위를 만들고 새로운 사람들을 모집하는 따위의 정부 공직(능력에 따른 출세)이라는 용어를 바꾸어놓았다.

이 제국은 귀족들이 장교단을 독점하는 관행에 종지부를 찍게 만들었다.

정부의 새 부서들은 엔지니어, 지도제작자, 측량사, 법률 자문 따위를 고용했다.

공공사업과 교육은 재조직되었다.

제국 외부에 있는 지사들은 프랑스에서처럼 도로, 교량, 제방(홀란드에서), 병원, 감옥 따위를 건설했다.

또한 이들은 대학을 재조직하고 실험실을 지었다.

제국과 위성 왕국 일부에서 관세가 없어졌고 봉건적 부과금이 폐지되었으며, 새로운 징세 구역이 형성되어 이 신생 국가를 지탱하기 위한 많은 새로운 세금이 징수되었다.

 

자유와 법의 영역에서 나폴레옹의 통치는 봉건 법정과 교회 법정을 없애고 단일한 법체계를 창조했다.

나폴레옹 법전은 종종 도입되었으나, 항상 그런 것은 아니었고 전반적으로 그런 것도 아니었다(이탈리아 남부에서 가톨릭교회에 반하는 조처들은 너무도 논쟁적인 것으로 생각되었다).

개혁은 많은 불평등과 법적 특권을 제거했다.

폴란드의 바르샤바 공국公國(또는 바르샤바 공작령) Duchy of Warsaw은 농노제를 종식시켰으나 아무런 토지 개혁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전의 농노들은 곤궁한 소작농이 되었다.

대부분의 지역에서 이 제국은 개신교도(프로테스탄트) Protestant와 유대인 Jews/Jewish에게 인권을 부여해주었다.

로마에서 프랑스 정복군은 유대인 게토 ghetto(소수 인종이나 소수 민족, 또는 소수 종교집단이 거주하는 도시 안의 한 구역)의 문을 열고 유대인을 징집했다.

일부 지역에서 가톨릭 수도원과 수녀원이 보유했던 토지가 해체되어 대부분 부유한 매입자들에게 팔렸다.

프랑스에서처럼 제국에서 그리고 혁명 기간처럼 나폴레옹 치하에서 혜택을 본 사람들은 엘리트층이었다.

이미 상승 국면에 있는 이들 엘리트층은 기회를 이용할 수 있는 자원을 지닌 사람들과 집단이었다.

 

정부 차원의 통치는 (남성을 위한) 법적 평등과 한층 강력해진 국가 권위의 결합을 모색했다.

프랑스와 지방 정부 당국은 새로운 선거구를 만들고 선거권을 확대했으며 헌법을 제정했지만, 새로이 선출된 대의 기구들이 협조하지 않으면 해산시켰다.

완전히 채택된 헌법은 거의 없었으며 정치적 자유도 종종 덧없는 것이었다.

나폴레옹 정권은 혁명 원리들이 정권의 적법성을 고착시켜준다고 생각했지만, 권위만 이 정권을 인도해주는 불빛으로 남았다.

정부의 모든 지시는 파리에서 내려왔으며, 따라서 이는 나폴레옹에게서 내려온 것이었다.

 

프랑스에서와 마찬가지로 프랑스 제국에서도 나폴레옹은 마침내 자신의 특징인 열정을 보여주었다.

그가 첫 번째로 보여준 열정은 유용한 지식을 축적하고자 하는 계몽주의적 열정이었다.

그의 제국은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통계를 수집했는데, 그 이유는 한 국가를 제대로 통치하려면 인구를 포함한 국가의 자원을 아는 것이 중요했기 때문이었다.

그러한 정신은 1798년 보나파르트의 범상치 않은 이집트 원정에서 분명히 나타난 적이 있었다.

그는 군대와 함께 몇백 명의 학자와 예술가를 데리고 가서 카이로 Cairo에 이집트학 연구소를 세운 뒤 이집트의 체계적인 자원 목록(이집트의 지질, 강, 광물, 고대 유물, 동물의 생활)을 만들고 상上 이집트에 대한 고고학적 탐험을 수행하기 위해 연구자들을 파견했다.

그곳에서 그들은 피라미드 pyramid의 밑그림을 그리고 나중에 로제타스톤 Rosetta stone으로 판명된 것을 발굴했다(20장 참조).

나폴레옹이 보여준 두 번째 열정은 자신과 과거 제국들의 영광을 연결하는 것이었다.

그는 후대에 자신의 이미지를 (글자 그대로) 공고히 하는데 시간과 힘을 쏟아 부었다.

로마에 있는 콘스탄티누스 황제 Constantinus the Great의 개선문 Arco di Costantino(영어 Arch of Constantine)을 모방해 설계한 개선문 Arc de Triomphe(영어 Triumphal Arch)이 가장 좋은 본보기다.

나폴레옹은 또한 로마의 옛터들을 복원하고 마드리드 Madrid의 프라도 궁전 Royal Palace of El Pardo을 박물관으로 만들었으며, 그라나다 Granada의 알람브라 궁전 Alhambra Palace을 개수해 보존할 것을 명했다.,

 

이런 것들이 나폴레옹의 유산과 자신에 대한 그의 비전이었다.

그러면 사람들은 그를 어떻게 보았는가?

유럽은 한 가지 반응만을 보여주지 않았다.

몇몇 나라와 사회집단은 열정적으로 협력했고, 일부는 협상했으며 일부는 저항했다.

군사적 영웅으로서의 나폴레옹의 이미지는 군사적 영예를 높이 사는 문화에서 자라난 엘리트 출신의 청년들에게 영감을 불어넣어준 반면, 이와는 대조적으로 에스파냐와 가톨릭 농민들은 애초부터 그와 싸웠다.

이전에 제후들이 통치하던 수많은 소규모 공국들, 예를 들면 독일의 잡동사니 국가들과 나폴리의 억압적인 왕국에서 한층 더 효율적이면서도 부패 정도가 덜한 행정, 실행 가능한 세금 구조, 관습적인 특권의 종식을 가져다준 개혁 따위는 대다수 지방민으로부터 환영을 받았다.

하지만 나폴레옹의 존재는 여러 가지가 뒤섞인 축복이었다.

예속 국가들은 제국의 군사력 유지에 과중하게 기여했다.

프랑스는 세금을 부과하고 인력을 징집했으며 예속 국가들에게 점령군의 지원의 요구했다.

이탈리아에서는 이 정책을 '자유와 징발'이라고 불렀다.

특히 이탈리아인, 독일인, 네덜란드인은 경제적 비용과 징집된 사람들의 숫자에서 개혁을 위해 커다란 대가를 치렀다.

보통 사람의 관점에서 보면 지방 영주와 사제가 프랑스의 세금 징수원과 군 징집국으로 대체된 것이었다.

 

전쟁과 제국의 요구 사항들은 서서히 그리고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유럽 대륙 전역에 걸쳐서 나폴레옹에 대한 혁명가들, 이전의 계몽 사상가들, 자유주의자들의 지지를 잃게 만들었다.

독일 작곡가 루트비히 반 베토벤 Ludwig van Beethoven은 본래 자신의 교향곡 3번 <영웅 Erocia>을 나폴레옹에게 헌정하려고 계획했다.

유럽의 수많은 이상주의자들처럼 베토벤도 처음에는 보나파르트가 유럽 대륙 전역에 자유를 가져다줄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1804년 나폴레옹이 제국을 건설하고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오르자 베토벤은 신속하고 비통하게 결정을 바꾸었다.

베토벤은 보나파르트에 대한 헌정을 취소하고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이제 그도 역시 인간의 모든 권리를 짓밟고 자신의 야망에만 빠지게 될 것이다."

 

하지만 베토벤의 이 말은 마지막 평결이 아니었다.

그것은 나폴레오의 적들도 '벼락 황제'를 장차 다가올 특히 국가의 재편과 관련된 거센 물결의 상징으로 믿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의 행정가들은 나폴레옹과 싸우고 있었음에도 그의 개혁과 닮은 조치들, 즉 승진과 모집 방식의 변화, 관료제의 개조, 관할 구역의 재설정, 일부 특권의 폐지 따위를 제도화하기 시작했다.

나폴레옹 제국 치하에서 성인이 된 많은 사람들은 좋든 싫든 간에 그의 제국이 근대적이라고 믿었다.

 

※출처

1. 주디스 코핀 Judith G. Coffin·로버트 스테이시 Robert C. Stacey 지음, 손세호 옮김,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하): 근대 유럽에서 지구화에 이르기까지, Western Civilizations 16th ed., 소나무, 2014.

2. 구글 관련 자료

 

2025. 8. 16 새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