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샘(淸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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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물로 하나씩 건져 올린 환동해의 생활

새샘 2025. 8. 21. 11:18

○작지만 강했던 국가 옥저의 생활

 

옥저沃沮는 역사 교과서에도 자주 등장하는 고대 부족국가다.

부여에서 갈라져 나와 서기전 2세기에 탄생한 것으로 보고 있으며, 읍루보다는 약간 남쪽인 지금의 함흥과 원산 지역을 따라 위치해 있었다.

정치 체제는 왕이 없는 지방분권적인 형태로, 각각이 읍락을 지배하는 족장이 있었다.

옥저인들이 살았던 지역은 읍루에 비하면 험준한 산이 적고 비옥한 평야도 있었다.

기후는 대체로 추웠지만, 봄과 여름에는 강가에서 농사를 지을 정도로 온화한 날씨가 나타나기도 했다.

 

옥저인들이 쓰는 언어가 고구려와 비슷하다고 해서 고구려에 복속되어 있었던 게 아니냐는 추측도 있지만, 고구려로 완전히 편입되지는 않은 채 개별적으로 독립된 국가로 인정받았다.

어쩌면 이들이 고구려에 완전히 복속되기 전에는 제법 큰 세력을 갖추고 있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백두산에서 발견된 중국의 창(출처-출처자료1)

 

위의 사진을 보자.

이 창은 중국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백두산 부근에서 발견되었다.

오른쪽 그림을 보면 창의 끝부분에 조나라(서기전 403~서기전 228, 진晉나라에서 분리되어 나온 나라로서 전국시대의 전국칠웅戰國七雄의 하나)의 서명 같은 것이 남아 있다.

이 표시는 진시황에게 대항했던 조나라의 재상 인상여藺相如의 것이다.

그는 '흠이 없는 구슬'('완벽完璧'이란 말의 어원)이라는 별명을 가질 정도로 뛰어난 인물이었다.

혜문왕惠文王(재위 서기전 298~서기전 266) 시기에 당시 제일의 보배로 여겨진 '화씨의 옥(화씨지벽和氏之璧)'을 진나라에 빼앗길 뻔했을 때, 사신으로 가서 그 요구를 슬기롭게 거절한 일화로도 유명하다.

 

그런데 옥저로 가는 길인 백두산에서 인상여의 창이 발견되었다.

지금으로부터 약 2,400여 년 전 가장 촉망받았던 외교 사절단의 기념품이 뜬금없이 산 한가운데서 나온 것이다.

옥저는 고구려에 고급스러운 물건을 자주 진상했다.

동해안에서 나오던 해산물, 약초, 모피 따위가 그것이었다.

이들은 고구려뿐만 아니라 중국과도 무역하며 인상여의 창과 같은 귀중한 물건을 받아왔을 것이다.

자신들의 지리적 환경에서 다른 나라와 교역하거나 외교하기에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고, 그것으로 큰 이득을 취했다.

인상여의 창은 옥저의 외교력을 잘 보여주는 상징적인 유물인 셈이다.

 

 

○옥저의 발명품인 온돌

 

바이칼 호수 근처에서 발견된 온돌 시설(출처-출처자료1)

 

옥저인들의 또 다른 발명품은 온돌이다.

바닥에 불을 때 방을 데우는 난방 방식은 옥저인들만의 고유한 생각은 아니었다.

로마 Roma(영어 Rome), 알래스카 Alaska, 중국을 비롯한 전 세계에 이와 비슷한 난방 기구가 존재했다.

다만 옥저의 방식이 이 나라들과 차별되는 점은 모든 면에 불을 때는 것이 아니라 부뚜막을 이용해 한곳에서 열을 가하고 그 열기가 방바닥을 한 바퀴 돌아 굴뚝으로 나온다는 점이다.

옥저는 온돌을 서기전 4세기에 발명했다.

 

다만 이 방식은 구들장이 깨지거나 흠이 나면 그 틈으로 불연소 가스인 일산화탄소가 새어 나와 목숨이 위험해질 수 있었다.

온돌은 건축 기술로서는 상당히 정교함이 필요한 고난도 기술이었던 셈이다.

부뚜막을 제작할 때 조금이라도 각도가 안 맞거나 기온이나 습도의 영향으로 모양이 틀어지면 연기가 역류할 수 있었다.

바닥난방 기술이 열효율에 효과적이지만 전 세계로 퍼져나가지 못한 이유다.

 

그런데 놀라운 점은 위 사진에 보이는 온돌이 옥저가 아닌 흉노인들이 살던 지역에서 발견되었다는 것이다.

발견 장소는 러시아 바이칼 호수 Lake Baikal in Russia 부근이었다.

그들은 성터를 닦고 생필품과 무기를 생산하기 위한 공장을 건설했다.

물건을 대량 생산하기 위해서는 나라 밖에서 기술자를 스카우트 scout(골라오기)해야 했는데 러시아 바이칼 호수 부근은 너무 추웠기 때문에 타국의 기술자들을 데려오면서 이곳에 그들이 살 집에 온돌을 만든 것이다.

요즘으로 따지만 뉴타운 New Town을 건설한 셈이다.

 

하지만 온돌은 흉노에서 오래가지 못했다.

온돌에 또 다른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무를 태워 난방하는 이 방식에는 당연히 어마어마한 양의 땔감이 필요했다.

옥저는 산맥을 따라 울창한 숲이 조성된 지역이었으므로 풍부한 산림자원이 있었다.

그러나 흉노는 낮은 풀이 주로 자라는 초원 지역을 기반으로 하는 국가였기 때문에 나무가 상당히 귀했다.

온돌은 흉노 시기에 쓰이다가 그들이 멸망하고 난 뒤 서서히 사라졌고, 1,000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다시 쓰이기 되었다.

 

이렇게 온돌이 우리의 역사 속에 다시 한번 등장하는 데에는 발해의 후손들이 있었다.

발해가 멸망하고 요나라가 들어서자 발해인들은 몽골 지역에 포로로 끌려갔다.

그때 전파된 온돌은 변형된 형태로 카자흐스탄 비단길(실크로드) Silk Road in Kazakhstan 지역에서 광범위하게 발견된다.

그래서 카자흐스탄 학자들도 이것이 옥저에서 직접 온 것이 아니라 흉노를 거쳐 중앙아시아로 왔을 것으로 추측했다.

한국도 조선시대 후기에는 인구가 늘고 온돌 수요가 늘어나면서 산에 나무가 부족해지는 현상이 발생했다.

그러면서 차츰 다른 방식의 난방이 등장하게 되었다.

 

 

○두만강 유역의 침술과 샤먼

 

산둥 양성산에서 발견된 편작행의도(출처-출처자료1)

 

태초의 의사는 샤먼(주술사呪術師) shaman이었다.
샤먼은 제의의 일부로 의료 행위를 시연했다.

중국 산둥(산동山东/山東) 양성산에서 출토된 편작행의도扁鵲行醫圖라는 유물(바로 위 사진)을 보자.

 

유물 안에 새처럼 생긴 사람이 침을 놓는 것 같은 모습이 새겨져 있다.

이것이 중국에서 최초로 침을 놓은 의료행위였다고 말하는 학자도 있다.

고대에는 마음을 푸는 것과 몸을 고치는 행위가 따로따로 분리되어 있지 않았다.

즉, 샤먼에게 점괘를 받아 마음을 놓는 것과 몸을 맡겨 치료하는 행위가 함께 이루어지면서 침술로 발전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그리고 두만강 유역에도 이러한 독자적인 침술이 있었다는 것을 얼마 전 필자와 연구팀이 밝혀냈다.

 

1993년 봄, 필자는 최몽룡 교수의 연구실에서 조교를 하며 당시 최 교수가 회장으로 있던 한국상고사학회의 일도 거들고 있었다.

어느 날, 최 교수가 다급한 목소리로 연구실을 찾아왔다.

교수의 두 손에는 종이뭉치 보따리가 들려 있었다.

평소의 진중한 모습과 달리 교수의 얼굴은 약간 상기된 듯했다.

보따리에는 손을 대면 곧 부스러질 듯한 오래된 원고와 수많은 사진이 담겨 있었다.

 

바로 경성제국대학에서 고고학을 강의했던 후지타 료사쿠(등전양책藤田亮策) 교수가 일본이 패망한 뒤 서을을 떠나면서 집에 두고 간 자료들이었다.

때마침 후지타의 빈 집에 서강대에서 교편을 잡던 어떤 교수가 살게 되었고, 그 자료를 오랫동안 보관하고 있다가 우연히 최몽룡 교수의 손에 넘어간 것이다.

그 자료는 필자가 정리를 도맡아 그로부터 16년이 지나 간행되었다.

필자는 약 30년 전 처음 흑백 사진에서 보았던 수많은 뼈로 만든 침이 계속 지워지지 않았다.

 

이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는 약 70년 전인 일제강점기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당시 옌벤(연변延边/延邊)은 만주국에 속해 있었는데, 일본이 만주를 침략하고 군사기지화하면서 격납고를 만들기 위해 땅을 파다가 몇십 기의 돌무덤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 고분군을 후지타 교수가 조사하기 시작했는데, 이곳이 바로 소영자小營子 유적이다.

 

 

소영자 유적에서 발견된 뼈바늘들(출처-출처자료1)

 

소영자 유적에서는 뼈바늘이 무수히 출토되었다(바로 위 사진).

보통 바늘이 발견되면 무덤의 주인을 옷이나 가죽을 다루던 사람이라고 추측하지만, 이 정도로 많은 뼈바늘이 발견된 것은 단지 직업 때문이라고 하기에는 미심쩍은 부분이 있었다.

게다가 시신 앞쪽에는 보통 가장 귀중한 물건을 두기 마련인데, 이곳에 바늘을 두었다는 것도 궁금증을 자아냈다.

또 하나, 이 바늘에는 구멍이 없었다.

적어도 무언가를 만들기 위해 실을 꿰는 도구는 아니라는 뜻이다.

 

그리고 만약에 옷을 만드는데 쓰는 바늘이었다면 재봉에 쓰이는 다른 유물이 더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바늘 외에는 아무것도 발견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무덤의 주인은 남자였다.

무덤 크기나 껴묻거리 따위로 미루어 당시 이 지역의 유지였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그런 사람과 반짇고리(바느질 도구를 담는 그릇)를 함께 넣었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이치에 맞지 않았다.

 

일본의 만주침략에 발맞추어 급하게 이 유적을 조사한 후지타는 제대로 마무리도 하지 않고 패망후 일본으로 가버렸다.

그 이후에 필자가 이 유물들을 정리하며 자세히 살펴보게 된 것이다.

고고학에서는 자체를 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유물의 발견 과정, 유물 주변 상태, 유물이 놓인 위치를 비롯한 여러 가지 맥락에 따라 유추하는 것도 필요하다.

마치 범죄 현장을 수사하는 경찰관처럼 사소한 부분도 놓치지 말고 세세하게 봐야 한다.

대부분의 정보는 현장에 있다.

 

바로 위 사진이 현장에서 발견된 바늘들이다.

실제로 보면 두께가 이쑤시개보다 얇을 정도로 상당히 가늘다.

더 재미있는 사실은 바늘의 크기가 제각각 다르다는 것이다.

 

 

(위)소영자 유적에서 발견된 돌, (아래)중국에서 발견된 폄석(출처-출처자료1)

 

이 바늘을 연구한 내용은 2009년에 책으로 정리해 발행되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이 유물의 용도에 대한 확실한 결론은 내리지 못했다.

결정적인 증거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우연히 한의학의 역사를 연구하는 교수와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던 그때 한 가지를 유심히 살펴보게 되었는데, 무덤에서 함께 발견된 자갈이었다.

 

바늘이 발견될 때, 바구니 안에는 자갈이 함께 들어 있었다(바로 위 사진에서 위쪽).

이 돌들은 모두 반질반질하다는 특징이 있었다.

이 돌이 발견 지역에서 나지 않는 광물이라는 것으로 미루어 다른 지역에서 돌을 가져와 둥글게 마모시킨 다음 특별한 용도로 사용했다고 추측해볼 수 있다.

 

실제로 이 돌은 불에 구워서 뜸을 떠 아픈 곳을 치료하는데 사용한 것이다.

중국에도 이와 같은 용도로 쓰인 돌이 있다.

약 2,400년 전의 무덤에서 중국의 침 세트와 굽는 용도의 돌이 함께 나온 사례도 있었다(바로 위 사진에서 아래쪽).

이를 전문용어로 '폄석砭石'이라고 한다.

중국에서 발견된 돌과 소영자의 무덤에서 발견된 돌은 위 사진에서 보는 것처럼 그 모습이 거의 비슷하다.

이로써 두만강 유역에서 발견된 바늘은 침이라고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이것은 중국보다 약 600년 정도 앞선 것이었다.

중국에서는 전국시대(서기전 476~서기전 221) 때 처음으로 침이 등장하지만, 환동해 지역에서 발견된 침은 그보다 훨씬 이전의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당시 이러한 침술이 이곳을 넘어 다른 지역으로까지 퍼져나갔다는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어쩌다 두만강 유역은 중국보다 빠르게 독자적으로 침술을 발전시킬 수 있었을까?

 

환동해 지역의 지리적 환경은 독특했다.

그리고 그 독특한 환경만큼이나 그들만의 풍토병도 있었을 것이다.

날씨, 기후, 지역의 악조건이 건강에 심각한 영향을 미쳤다.

추위를 막기 위해 몸에 돼지기름을 바르고 모피를 가공해 사시사철 두꺼운 가죽옷을 입었으며 화장실을 집 안에 두었다.

그러다 보니 위생이 악화돼 피부 종기가 나거나 다른 병이 생기기 쉬웠다.

그럴 때 가장 유효한 의료행위는 고름을 터뜨려 치료하는 것이었다.

혹독한 추위를 견디다 보니 늘 몸이 아팠고, 그 결과 일찌감치 침과 같은 고급 의학 기술이 발달한 것이다.

 

읍루인들은 침 이외에도 독특한 약재를 많이 사용했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아편의 원료로 쓰이는 양귀비 열매.

2004년 러시아와 한국이 공동발굴 작업을 하던 중 온돌 안에 묻혀 있던 토기로 만든 솥 안과 근처의 부뚜막에서 곡물을 발견했다.

러시아 연구소에서 그 성분을 분석한 결과 이 열매는 양귀비로 밝혀졌다.

그때까지 양귀비는 당나라 시기에 서쪽에서 중국으로 건너왔다는 것이 학계의 정설이었으나, 이 솥에서 양귀비가 발견됨으로써 당나라 이전에도 사용했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양귀비는 마약의 재료가 아니었다.

모든 양귀비 종에 환각 성분이 있는 것은 아니며, 어떤 종류는 기름을 짜서 다양한 용도로 쓰기도 한다.

또한 양귀비 기름에는 진통 효과가 있으므로 당시 추위와 각종 피부병에 시달리던 환동해 지역 사람들에게는 귀한 약재로 쓰였을 가능성이 크다.

한국에서도 양귀비가 지금처럼 법으로 규제되지 않던 시기에는 즙을 내서 배앓이약으로 먹거나 바르는 진통제로 사용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렇듯 모든 민족은 날씨와 기후에 적응해 발전하면서 살아간다.

그리고 그 과정에는 현대인들은 생각지 못한 조상들의 지혜가 정말 많이 사용되었다.

역사책에는 잘 등장하지 않는 옥저와 읍루의 생활은 고고학 연구를 통해 하나씩 건져야 하는 아주 귀한 기록이다.

 

환동해 지역은 산맥으로 가로막혀 외진 미개한 종족들의 땅이 아니었다.

척박한 땅에서도 자신들만의 문화를 길러내고 끈질기게 살아남은 사람들의 빛나는 문명이었다.

바로 이렇게 숨겨진 역사를 밝히는 일은 한반도의 기원을 구석구석 찾아 나가는데 중요한 하나의 단서가 되어줄 것이다.

 

※출처
1. 강인욱 지음, 우리의 기원-단일하든 다채롭든, 21세기 북스,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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