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샘(淸泉)

코핀과 스테이시의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 6부 혁명의 시대 - 18장 프랑스 혁명 7: 재개된 전쟁과 나폴레옹의 패배(1806~1815년), 18장 결론 본문

글과 그림

코핀과 스테이시의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 6부 혁명의 시대 - 18장 프랑스 혁명 7: 재개된 전쟁과 나폴레옹의 패배(1806~1815년), 18장 결론

새샘 2025. 8. 31. 12:07

가장 강성했을 때의 나폴레옹 제국(출처-출처자료1)

 

나폴레옹 치세(1799~1815년)
나폴레옹이 제1통령이 됨
교황과의 정교 협약
나폴레옹이 종신 통령이 됨
나폴레옹이 공화정을 폐지하고 스스로 황제에 오름
나폴레옹 법전
대륙 봉쇄
나폴레옹의 에스파냐 침공
러시아 침공
나폴레옹의 퇴위
나폴레옹의 복귀와 마지막 유배
1799년
1801년
1802
1804
1804년
1806
1808
1812년
1814년
1815년


제국을 공고히 하기 위한 나폴레옹 Napoléon Bonaparte(1769~1821)의 대담한 시도, 즉 영국 상품의 대륙 유입을 금지한 정책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영국은 루이 16세 Louis XVI(재위 1774~1792)의 죽음 이래로 프랑스에서 등장한 그 어떤 혁명 정부에 대해서도 강하게 반대했다.

영국은 후한 재정적 차관과 무역을 약속하며 나폴레옹에 대항해 유럽을 단결시키기 위해 애썼다.

나폴레옹이 1806년에 수립한 대륙 봉쇄(대륙 체제) Continental system는 영국의 무역을 빈사 상태에 이르게 해 항복을 강요하고자 한 것이었다.

대륙 봉쇄는 몇 가지 이유로 실패했다.

첫 번째 이유는 전쟁 기간 내내 영국이 바다를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1807년에 시작된 영국의 대륙 해안 봉쇄는 나폴레옹의 대륙 체제에 대한 효과적인 대응이었다.

프랑스 제국은 영국의 봉쇄망을 피해 육로로 상품과 원료를 수송하지 않을 수 없었던 반면에, 영국은 남아메리카와의 무역 관계를 활발히 성사시켜나가고 있었다.

대륙 봉쇄가 실패한 두 번째 이유는 대륙 내의 관세 장벽이었다.

유럽은 관세 장벽으로 요새화한 경제 진영으로 나뉘고 대륙에서 생산된 것에만 의존하게 됨에 따라 서로 대립하게 되었다.

대륙 봉쇄 붕괴의 마지막 이유는 대륙이 영국에 비해 잃은 것이 더 많았다는 사실이다.

유럽의 항구들에서는 무역이 침체되었고 제조업 중심지에서는 실업이 늘어남에 따라 순조롭게 작동하는 유럽제국이라는 나폴레옹의 꿈에 대한 대중의 신뢰가 사라졌다.

 

대륙 봉쇄는 나폴레옹이 저지른 첫 번째 중대한 실수였다.

파리에서 통치하면서 로마 제국을 본뜬 유럽 제국을 창조하고자 한 나폴레옹의 야망은 쇠퇴의 두 번째 원인이 되었다.

그림, 조각, 가구, 의복 디자인에 반영된 나폴레옹 제국의 상징들은 의도적으로 고대 로마에서 채택한 것이었다.

이것은 색다른 것이 아니었다.

예컨대 초창기 혁명가들 특히 자코뱅파 Jacobins는 자신의 정치적 덕목의 본보기로서 로마 공화정을 상기시켰으며, 예술에서의 심상과 정치적 수사를 로마 공화정에서 끌어왔던 것이다.

그러나 나폴레옹이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전승 기념 기둥이나 아치들은 로마 황제의 과시적인 기념물을 연상시켰다.

그는 자신의 형제자매를 새로 만든 왕국의 군주로 앉혔다.

1809년 그는 황후 조세핀 Joséphine과 이혼하고 합스부르크 가문 Hause of Habsburg의 공주이자 루이 16세의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 Marie Antoinette의 조카인 마리 루이즈 Marie Louise와 결혼함으로써 왕가의 피를 이어받은 계승자로서의 지위를 확고히 하려 했다.

그러나 지나치게 확대된 제국은 강력한 위치에서 취약한 위치로 급락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쓰라린 패배에 대한 반성이 나폴레옹의 적들에엑 효과를 미치기 시작했다.

그들은 전쟁을 치르기 위한 자국의 접근 방식을 바꾸었던 것이다.

1806년 프로이센 Preußen/Preussen(영어 Prussia) 군대가 독일 예나 Jena에서 프랑스 군대에 참패를 당하고 물러서자 프로이센 청년 장교단 세대는 잘 훈련된 용병들보다는 지휘관들을 위한 엄격하고 실질적인 훈련과 애국적인 프로이센 시민으로 구성된 진짜 국민군을 요구함으로써 자국의 군대와 국가를 개혁했다.

 

무적 나폴레옹이라는 신화는 프랑스의 군사력과 국운을 한층 더 큰 위험에 처하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나폴레옹을 곤경에 빠뜨리기도 했다.

1809년 오스트리아 바그람 Wagram in Austria에서 수적으로 우세한 러시아군 Russian military과 오스트리아의 포병은, 프랑스가 승리하는 바람에 잊히기는 했지만 프랑스군에게 끔찍한 손실을 안겨주었다.

프랑스의 동맹국과 지지자들은 1805년 에스파냐  España 남서쪽 해안에 있는 트라팔가르 곶 Cape Trafalgar 해안에서 벌어진 트라팔가르 해전 Battle of Trafalgar에서 영국 제독 호레이쇼 넬슨이 거둔 승리를 나폴레옹의 야망이 일시적으로 저지된 사태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무시해버렸다.

그러나 트라팔가르 해전은 지중해에서의 프랑스 해군력을 붕괴시켰고, 동맹국으로 똑같은 패배의 고통을 겪었던 에스파냐와 프랑스 사이를 나쁘게 만들었다.

또한 나폴레옹은 카리브 해 Caribbean Sea에서 점점 늘어나는 손실을 차단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나폴레옹이 파멸한 결정적인 계기는 1808년 에스파냐를 침공한 데에서 비롯되었다.

이 침략은 궁극적으로 영국의 강력한 우방으로 남아 있던 포르투갈 Portugal 정복을 겨냥한 것이었다.

나폴레옹은 에스퍄냐 왕을 폐위시키고 자신의 동생을 왕위에 앉힌 다음 유럽 다른 지역에서 실시했던 것과 비슷한 개혁 조치들을 시행했다.

에스파냐 군주정에 대한 나폴레옹의 타격은 대서양 전역에 걸친 식민지에 대한 에스파냐의 지배권을 약화시켰고 에스파냐 왕권은 결코 그 지배권을 완전히 회복하지 못했다.

그러나 에스파냐에서 나폴레옹은 자신의 사명을 궁극적으로 좌절시킬 두 가지 요인을 고려하지 못했다.

하나는 아서 웰즐리 Arthur Wellesley(1769~1852, 나중에 웰링턴 공 Duke of Wellington이 됨) 휘하의 영국군이며, 다른 하나는 에스파냐인의 단호한 저항이었다.

에스파냐인은 특히 교회의 일에 나폴레옹이 간섭하는 것을 싫어했다.

반도 전쟁 Peninsular War이라고도 부르는 에스파냐에서의 충돌은 장기간 격렬하게 지속되었다.

프랑스군보다 소규모인 영국군은 야전에서 프랑스군의 정밀 조준 포격에 대해 압도적인 양의 포격을 집중시키고 프랑스의 요새 도시들을 포위하는 방법을 익혔다.

에스파냐인들은 재빨리 게릴라 guerrilla(이 말은 '전쟁'을 뜻하는 스페인어 '게라 Guerra'에 '적은'을 뜻하는 스페인어 접미사 '일라 illa'가 합쳐진 것) 전투(유격전遊擊戰)를 통해 프랑스 군인, 보급품, 사기 따위를 서서히 파괴하기 시작했다.

에스파냐 게릴라와 민간인에 대한 프랑스군의 고문과 처형은 에스파냐 화가 프란시스코 고야 Francisco José de Goya(1746~1828)가 구역질날 정도로 정확하게 묘사한 판화와 회화가 불후의 명작으로 남았다.

한 곳에서는 나폴레옹이 직접 군대를 지휘했지만 일시적인 승리밖에 거둘 수 없었다.

이 에스파냐 전쟁은 나폴레옹도 패퇴할 수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보여주었으며, 이후 다른 곳에서의 저항을 고취시켰다.

 

나폴레옹 몰락의 두 번째이자 가장 극적인 단계는 러시아 Russia와의 관계 악화와 함께 시작었다.

농업국이었던 러시아는 대륙 봉쇄의 여파로 잉여농산물을 영국의 제조품과 교환할 수 없게 되자 심각한 경제적 위기를 겪게 되었다.

결국 러시아의 알렉산드르 1세 Alexander I of Russia(재위 1801~1825)는 영국과 무역을 다시 시작했으며 파리로부터의 항의를 무시하거나 회피해버렸다.

1811년에 이르러 나폴레옹은 대륙 봉쇄를 향한 이 같은 무시를 더 이상 묵인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리하여 나폴레옹은 1812년 봄 60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러시아를 침공했다.

'위대한 군대(그랑드 아르메 Grande Armée)'의 병사들 중 단지 3분의 1만 프랑스군이었고 나머지 대부분은 폴란드인이나 독일인 그리고 프랑스의 피보호국 출신 병사와 모험가들이었다.

그것은 전제적인 러시아 차르 Tsar(Czar, Tzar)를 응징하기 위해 유럽 전역에 걸쳐 동원된 군대로서 나폴레옹 제국의 원정 가운데 최대 규모였다.

이 침공은 재앙으로 끝났다.

러시아 군대는 직접 맞서는 대신에 프랑스 군대를 러시아 내륙 깊숙이 유인했다.

나폴레옹이 러시아의 옛 수도 모스크바(영어 Moscow)에 도달하기 직전에 러시아군은 프랑스군을 보로디노 Borodino라는 마을의 협소한 거리에서 피비린내 나면서도 외관상 무의미한 전투에 끌어들였다.

그곳에서 양쪽 모두는 병력과 물자의 막대한 손실을 겪었지만, 본국에서 너무 멀리 와 있던 프랑스군의 손실이 더 컸다.

보로디노 전투 이후 러시아는 나폴레옹이 모스크바를 점령하도록 그냥 내버려두었다.

그러나 나폴레옹이 모스크바에 입성한 날 밤 러시아 파르티잔 partisan(적의 배후에서 통신·교통 시설을 파괴하거나 무기나 물자를 탈취하고 인명을 살상하는 비정규군)이 도시에 불을 질렀다.

그 결과 프랑스 군대가 머무를 만한 곳은 검게 그을인 크렘린 궁전 Kremlin and Red Square의 벽 외에는 거의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차르가 결국에는 항복하리라는 기대를 안고 나폴레옹은 폐허 속에서 한 달 이상을 버텼다.

하지만 그는 마침내 10월 19일 본국 귀환을 명령했다.

그런데 이 한 달 이상의 지체 기간이 치명적인 실수였다.

나폴레옹이 국경에 도착하기 한참 전에 러시아의 무시무시한 겨울이 그의 군대를 덮쳤다.

불어난 강물, 산더미처럼 쌓인 눈, 바닥을 알 수 없는 진흙탕 때문에 행군은 거의 정지 상태에 빠졌다.

살을 에는 추위와 질병, 굶주림에 더해 코사크 기병 Cossack cavalry들의 기습이 기진맥진한 군대를 유린했다.

매일 아침 이 비참한 생존자들은 전날 밤 모닥불 주위에서 원을 이루며 쓰러진 시체를 두고 떠났다.

기온은 영하 33도까지 떨어졌다.

12월 13일, 한때 자랑스러웠던 '위대한 군대'의 극히 일부인 몇천 명의 부상병들이 국경을 넘어 독일로 들어왔다.

나폴레옹의 러시아 침공에서 거의 30만 명의 병사들과 그 수를 알 길 없는 수많은 러시아인이 목숨을 잃었다.

 

러시아에서의 퇴각 이후 반나폴레옹 세력들은 새로운 희망을 품게 되었다.

프랑스 황제를 무찌를 수 있다는 신념으로 뭉친 프로이센, 러시아, 오스트리아, 스웨덴 Sweden, 영국 United Kingdom(UK)이 공격을 재개했다.

많은 독일 제후국들의 시민은 특히 이 전쟁을 해방전쟁으로 보았고, 실제로 대부분의 전투는 독일에서 치러졌다.

이 전쟁은 1813년 10월 절정에 달했다.

이후 '연합국의 전투 Battle of Nations'로 알려지게 될 라이프치히 Leipzig 근처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연합군은 프랑스에게 철저한 패배를 안겨주었으며, 저지대 지방과 이탈리아 Italia(영어 Italy)에서도 중요한 승리를 거두었다.

1814년 초 연합군이 라인 강 Rhine River을 건너 프랑스로 진격해 들어갔다.

전투 경험이 없는 젊은 병사들을 이끌고 악전고투하던 나폴레옹은 파리로 퇴각했으며, 대규모 침략군의 공세로 계속 수세에 몰렸지만 프랑스인들을 독려하며 저항을 멈추지 않았다.

1814년 3월 31일 러시아의 알렉산드르 1세와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 Friedrich Wilhelm III(재위 1797~1840)는 승리를 거두고 파리에 입성했다.

나폴레옹은 무조건적으로 퇴위되었으며, 이탈리아 해안에서 멀리 떨어진 엘바 섬 Elba Island으로 추방되었다.

 

나폴레옹은 채 1년도 지나지 않은 1815년 다시 프랑스 땅에 발을 들여놓았다.

나폴레옹을 퇴위시킨 뒤 연합국은 루이 16세의 동생을 루이 18세 Louis XVIII(재위 1815~1824)로 즉위시킴으로써 부르봉 왕가 House of Bourbon를 복고시켰다.

루이 18세는 행정적인 면에서 능력을 발휘했음에도 불구하고 나폴레옹의 퇴위로 인한 공백을 메울 수 없었다.

이전 황제가 엘바 섬에서 탈출해 다시 무대의 전면에 섰을 때 프랑스인이 다시 그의 편에 선 것은 전혀 놀랄 일이 아니었다.

나폴레옹이 파리에 도착할 즈음 그에 대한 지지는 루이 18세가 해외로 망명해야 할 정도로 막강한 것이었다.

프랑스와 평화조약을 체결하기 위해 오스트리아 빈 Wien(영어 Vienna)에 모인 연합국은 나폴레옹의 복귀 소식에 경악을 금하지 못했다.

그들은 서둘러 군대를 조직하여 저지대 지방에서 전개된 프랑스 황제 특유의 대담한 공격에 맞섰다.

1815년 6월 15일에서 18일까지 사흘 동안 피비린내 나게 치러진 벨기에 Belgium의 워털루 전투 Battle of Waterloo에서 나폴레옹은 자신의 가장 완고한 적국 두 나라인 영국과 프로이센 군대에게 저지당했고 결국 최종적인 패배를 당하고야 말았다.

연합국은 이번에는 지체 없이 자신들의 죄수를 남대서양의 외딴 섬 세인트헬레나 Saint Helena로 배에 실어 보냈다.

한때 막강한 황제였으나 이제는 추방객 보나파르트가 된 나폴레옹은 1821년 사망할 때까지 회고록을 쓰면서 쓸쓸히 살아갔다.

 

 

○자유, 정치, 그리고 노예제: 아이티 혁명

 

대서양 건너의 프랑스 식민지들에서 혁명은 광범위한 결과를 남기면서 상이한 과정을 겪었다.

카리브 해의 섬들인 과들루프 Guadeloupe, 마르티니크 Martinique, 생 도밍그 Saint-Domingue는 설탕 무역으로 18세기 프랑스 경제에서 중심 역할을 담당했다.

이곳의 농장주 엘리트층은 파리에 막강한 영향력을 갖고 있었다.

프랑스 국민공회 National Convention(미국 의회처럼) 식민지들에서의 노예제 문제에 대해 논의하기를 삼갔다.

국민공회는 노예 소유주의 재산권을 침해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수지맞는 설탕 섬들이 영국이나 에스파냐의 경쟁자들에 비해 손해를 보게 되면 불만을 느낀 노예소유주들이 프랑스로부터의 독립을 운운하지 않을까를 염려했기 때문이었다(카리브 해의 섬들에 대한 유럽 열강 사이의 경쟁은 격심했다. 따라서 이 섬들의 임자가 바뀔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었다).

국민공회의 프랑스인들은 상당수의 부유한 재산 (그리고 노예) 소유자들이 포함된 집단인 자유 유색인의 권리 문제고 고려해야 했다.

 

생 도밍그에는 상이한 사회계급으로 구성된 약 4만 명의 백인, 3만 명의 자유 유색인 그리고 대부분 서아프리카에서 수입된 50만 명의 노예가 있었다.

1790년 생 도밍그의 자유 유색인은 자신들이 사업가이며 많은 경우에 유럽인을 조상으로 둔 사람들임을 강조하면서 국민공회에 대표를 보낼 수 있는가를 물어보기 위해 파리에 대표를 파견했다.

하지만 국민공회는 이를 거부했다.

국민공회가 생 도밍그의 자유 유색인의 대표 자격을 거부한 일은 생 도밍그에서 자유 유색인의 반란을 촉발시켰다.

프랑스 식민지 당국은 이 운동을 신속하면서도 잔인하게 진압했다.

식민지 당국자들은 파리 파견 대표의 일원이자 반란 지도자 중 한 사람인 뱅상 오제 Vincent Ogé(1755?~1791)를 체포해 공개적으로 처형하고 그의 동조자들을 역살轢殺(차바퀴로 깔아 죽임)하거나 참수斬首(목을 벰)했다.

로베스피에Maximilien Robespierre(1758~1794)를 비롯한 파리에 있는 급진 국민공회 의원들은 이에 격분했지만 국민공회의 정책을 바꿀 수 있는 일은 거의 할 수 없었다.

1791년 8월 역사상 가장 규모가 큰 노예 반란이 생 도밍그에서 일어났다.

이 반란이 혁명기의 선동에 얼마나 많은 영향을 받았는지 불분명하지만, 당대의 많은 반란들처럼 이 반란도 자체의 근원들을 갖고 있었다.

영국과 에스파냐는 자신들이 반란을 분쇄하고 생 도밍그 섬을 차지할 것을 확신하며 침공했다.

1792년 봄 유럽과 전쟁을 치르며 붕괴 직전에 있던 프랑스 정부는 자유 유색인에게 프랑스 시민권을 부여함으로써 생 도밍그에서 자기편을 확보하고자 급히 움직였다.

몇 달 뒤 (1792년 8월 혁명 이후) 새로운 프랑스 공화국은 섬을 지키라는 훈령을 받은 사절단을 군대와 더불어 생 도밍그에 급파했다.

그들은 생 도밍그에서 한 패거리의 상이한 세력들, 즉 에스파냐와 영국군, 반항적인 생 도밍그 농장주들 그리고 반란중인 노예들에 직면했다.

이런 맥락에서 생 도밍그에 파견된 사절단은 노예제에 대한 자신들의 방침을 다시 생각했다.

1793년 사절단은 프랑스 편에 가담하는 노예들에게는 자유를 약속했다.

1년 뒤 파리의 국민공회는 생 도밍그에서 본질적으로는 노예 반란을 통해 이미 달성된 것을 모든 식민지로 확대했다.

 

해방과 전쟁은 새로운 지도자들을 크게 부상시켰다.

그 지도자들 가운데 주요 인물은 노예였던 투생 브레다 Toussaint Bréda(1743~1803)—나중에 그는 '길을 열어준 사람'을 뜻하는 투생 루베르튀르Toussaint Louverture로 이름을 바꾸었다였다.

투생과 그의 병사들은 프랑스군과 연합하여 5년 동안에 걸쳐 프랑스인 농장주들, 영국인(1798년), 에스파냐인(1801년)과 싸워 승리를 거두었다.

투생은 또한 혁명의 정치가로서 흑백 혼혈의 물라토 mulatto와 이전의 노예로 구성된 군대들에 있는 경쟁 상대인 장군들의 세력을 무너뜨렸다.

1801년 투생은 프랑스에 충성을 다짐했지만 생 도밍그 문제에 관한 프랑스의 어떤 간섭 권한도 거부하는 내용의 헌법을 제정했다.

이 헌법은 노예제를 폐지하고 군대를 재조직하고 그리스도교를 국교로 확립(이는 그리스도교와 다양한 서아프리카 및 중앙아프리카 전통들이 혼합된 부두교 Voodoo에 대한 거부였다)했으며 투생을 종신 통치자로 만들었다.

이것은 혁명기에서 의외의 순간이었다.

왜냐하면 권위주의적 사회를 형성시켰을 뿐만 아니라 혁명 사상의 보편적 잠재력이라는 전혀 예기치 못한 상징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투생의 업적은 그가 존경했고 경력이 놀라울 정도로 그와 같았던 다른 프랑스 장국, 즉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와 그를 충돌하게 만들었다.

생 도밍그는 신세계에서 확장된 제국이라는 보나파르트의 전망, 즉 구체제 아래서 프랑스가 잃어버렸던 북아메리카의 영토를 되찾게 해주고 미시시피 Missisisppi, 프랑스령 루이지애나 French Louisiana, 카리브 해의 설탕 및 노예 식민지들의 수지 맞는 결합에서 주축으로서 프랑스 제국의 중심에 서 있었다.

1802년 1월 보나파르트는 그 섬을 통제하기 위해 2만 명의 군대를 급파했다.

프랑스와 의논하기 위해 도착했을 때 붙잡힌 투생은 엄중한 감시를 받으며 프랑스 동부에 있는 감옥에 투옥되었고 그곳에서 1803년에 생을 마감했다.

하지만 국민공회가 노예제를 폐지한 곳에서 노예제를 부활시킨다는 보나파르트의 칙령으로 생 도밍그에서는 불에 기름을 부은 듯 전투가 계속되었다.

이 전쟁은 프랑스에게는 악몽으로 비화했다.

황열병이 휩쓸어 나폴레옹 휘하의 최고위 장군 중 한 사람이었던 처남을 포함해 수많은 프랑스군을 죽음에 이르게 했다.

1803년 12월 무렵 프랑스군은 붕괴되었다.

나폴레옹은 아메리카 제국에 대한 자신의 전망을 축소하고 루이지애나 영토를 뒤에 미국 3대 대통령이 된 토머스 제퍼슨 Thomas Jefferson(1743~1826)에게 팔았다.

나폴레옹은 이에 대해 자신의 부관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내가 포기한한 것의 가치를 잘 안다.······나는 가장 크게 후회하면서 그것을 포기한다."

생 도밍그에서 이전의 노예로 구성된 군대의 장군인 장-자크 데살린 Jean-Jacques Dessalines(1758~1806)은 1804년 아이티 Haiti의 독립을 선언했다.

 

아이티 혁명 Haitian Revolution(1791~1804)은 중대한 국면에서 이례적인 것으로 남았다.

이 혁명은 역사상 유일하게 성공한 노예 혁명이자 19세기에 일어난 혁명 가운데 그 어느 것보다도 급진적이었다.

이 혁명은 프랑스 혁명의 해방사상과 계몽주의가 비유럽인과 노예화된 사람들에게도 적용될 수도 있다는 것, 즉 유럽의 주민은 묵살하려고 했지만 북아메리카와 남아메리카의 농장주 엘리트층에게 치명적 타격을 주었던 동기를 보여주었다.

아이티 혁명은 나중에 영국 식민지에서 일어난 반란들과 결합되어 1838년 영국이 노예제를 종식시키기로 결정하는데 기여했고, 미국 USA 남부에서 브라질 Brazil에 이르는 19세기 노예 사회에 그림자를 드리웠다.

결국 나폴레옹 시대에 벌어진 일련의 삽화적 사건은 대서양 전역에 걸쳐 광범위한 영향을 끼쳤는데, 그것은 북아메리카에서는 루이지애나 매입, 카리브 해에서는 아이티 혁명, 라틴아메리카 Latin America(스페인어, 포르투갈어 등 라틴계 언어를 사용하는 아메리카 대륙의 국가들을 지칭하며, 멕시코를 포함한 중미, 남미, 카리브해 일부 지역이 이에 속한다)에서는 에스파냐와 포르투갈 식민 제국의 약화로 나타났다.

 

 

◎18장 결론

 

프랑스에서 일어난 떠들썩한 사건들은 18세기 말 광범위한 유형의 민주적 격변의 한 부분을 형성했다.

프랑스 혁명은 당대의 혁명 가운데서 가장 폭력적이고 오래 지속되었으며 논쟁적이었다.

그러나 혁명의 역동성은 어디서나 상당히 동일했다.

프랑스 혁명에서 나타난 가장 중요한 발전 중 하나는 대중운동의 등장이었다.

대중운동에는 이전에는 정치에서 배제되었던 인민을 대표하는 정치 단체들, 보통 사람이 읽었고 그들에게 낭독되었던 신문들, 상퀼로트Sans-culotte(프랑스 혁명의 추진력이 된 사회 계층으로 주로 수공업자, 장인, 소상인, 근로자 등 무산 시민을 가리킴)를 대변하는 정치 지도자들이 포함되었다.

다른 혁명들처럼 프랑스 혁명에서도 대중운동은 한층 더 급진적이고 민주적인 조치를 취하라는 압력을 가하면서 초기의 온건한 혁명 지도부에 도전했다.

그리고 다른 혁명들처럼 프랑스에서의 대중운동은 패배했고 준準군사적 인물에 의해 권위가 다시 확립되었다.

자유, 평등, 박애라는 혁명 사상은 특별하게 프랑스적인 것은 아니었다.

그 사상의 뿌리는 18세기의 사회구조와 계몽주의적 사상과 문화에 있었다.

하지만 프랑스 군대는 문자 그대로 많은 유럽인의 문앞에 그것들을 가져다주었다.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시대의 한층 더 광범위한 영향력은 무엇인가?

그것은 부분적으로는 자유, 평등, 국가라는 세 가지 핵심 개념으로 요약된다.

자유는 개인적 권리와 책임 그리고 좀 더 특별하게는 전횡적인 권력으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했다.

앞서 보았듯이 혁명가들에게 평등이란 유럽 남성 사이에서 신분의 법적 구분을 폐지하는 것을 뜻했다.

그들이 평등 개념은 제한적인 것이었지만 평등은 19세기에 강력한 동원력이 되었다.

프랑스 혁명의 가장 중요한 유산은 '국민국가'라는 새로운 용어일 수도 있다.

국민국가는 정치적인 개념이었다.

한 국가는 국왕의 백성이 아니라 시민으로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예컨대 국민국가는 법으로 통치되고 시민을 법 앞에서 평등하게 대우한다.

주권은 왕조나 역사적인 봉토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시민의 국가에 있다는 것이다.

이 새로운 형태의 국가는 시민 군대가 자신이 새로 획득한 자유에 대항한 공격을 물리칠 때 적법성을 획득한다.

예컨대 '무장한 시민들'의 승리는 신화와 역사 속에서 계속 살아남았고 당대의 가장 강력한 이미지를 마련해주었다.

전쟁이 계속됨에 따라 군사적 국민국가는 자신의 정치적 사촌인 시민의 빛을 잃게 만들었다.

나폴레옹 시대 동안 이런 변화는 결정적인 것이 되었다.

즉, 자유롭게 제휴한 시민의 새로운 정치기구는 중앙집권화된 국가와 그 군대, 프랑스의 황제가 된 가장 위대한 장군 그리고 전시 프랑스의 필요에 대한 개인적 헌신으로 정의되는 시민권 따위에서 가장 강력하게 구체화되었다.

 

프랑스인은 자신의 권리를 해외에 전파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그 원리 중 일부는 혁명적이었지만 다른 것은 제국적이었다.

독일과 이탈리아의 공국들에서 외국인 황제와 그가 보낸 환영받지 못하는 대리인들의 지배는 반대를 불러일으켰고 자신의 국가적 정체성을 주조하도록 도왔다.

 

프랑스 혁명의 시대가 끝났을 때 자유, 평등, 국민성의 개념은 이제 더 이상 단순히 사상이 아니었다.

이 개념들은 새로운 공동체와 제도 속에서 모양을 갖추어나가고 있었다.

자유, 평등, 국민성 개념은 나라들 사이에서 새로운 동맹을 창조하고 있었다.

이 개념들은 또한 19세기를 형성하게 될 논쟁, 불만, 갈등을 불러일으키면서 유럽과 세계의 상당 지역을 양극화시켰다.

 

※출처

1. 주디스 코핀 Judith G. Coffin·로버트 스테이시 Robert C. Stacey 지음, 손세호 옮김,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하): 근대 유럽에서 지구화에 이르기까지, Western Civilizations 16th ed., 소나무, 2014.

2. 구글 관련 자료

 

2025. 8. 31 새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