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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0년 만에 풀린 초조대장경의 신비

새샘 2026. 6. 18. 15:41

초조대장경 인쇄본(출처-출처자료1)

 

허준: 2024년 7월이죠. 800년 신비(미스터리 mystery)가 마침내 풀렸다며 언론에서 대대적으로 다룬 적이 있습니다.

 

대구 팔공산 자락의 천년고찰 부인사符仁寺/夫人寺 옛터에서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의 대장경인 고려 시대의 '초조대장경初雕大藏經(고려 현종 때에 간행된 고려 대장경의 초간본)' 봉안 증거가 나왔다고요.

 

그동안 '초조대장경'을 봉안한 곳이 부인사가 아닐 수 있다는 논란이 많았는데, 1989년부터 시작된 발굴 조사에서 논란에 마침표를 찍을 실물 증거가 마침내 발견된 것이죠.

 

 

정요근: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이라고 잘 아시죠? 정식 명칭은 '합천 해인사 대장경판 陜川 海印寺 大藏經板'으로 국보로 지정되어 있거니와 2007년에는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된 바로 그 유물 말이에요. 고려 시대인 1236년부터 15년 동안에 걸쳐 간행되었으며, 그 전에는 '초조대장경'이 존재했습니다.

 

'초조대장경'은 고려 최초이자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로 1011년부터 1087년까지 장장 70년이 넘는 기간에 걸쳐 만들었죠. 10세기 초 요나라가 중국의 북쪽을 차지하고 10세기 말부터 고려를 침입하기 시작하는데요, 993년의 제1차 고려-거란 전쟁, 1010년의 제2차 고려-거란 전쟁, 1018년의 제3차 고려-거란 전쟁으로 이어집니다. '초조대장경'은 제2차 고려-거란 전쟁 끝자락에서 제작되기 시작했는데요, 부처의 힘으로 거란의 침입을 막고자 부처의 가르침을 목판에 옮긴 것이었습니다.

 

'초조대장경'은 거란이 침입해 나주로 피난 갔던 현종이 부처의 힘을 빌어 거란을 물리치고자 맹세하면서 판각이 시작되었죠. 완성된 대장경은 대구 팔공산의 부인사에 보관되었다가 1232년 몽골군의 침략으로 소실되었어요. 그래서 1236년에 다시 '팔만대장경'을 만들기 시작했던 겁니다.

 

바로 그 팔만대장경 제작에 관한 주요 기록이 고려 시대를 대표하는 문장가인 이규보李奎報(1169~1241)의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 권25 <대장각판군신기고문大藏刻板君臣祈告文>을 보면 잘 나와 있죠. 그에 따르면, "몽골군이 지나는 곳마다 불상과 불전이 모두 불에 타 부인사에 소장된 대장경 판본도 남지 않았다"라고 기록되어 있는데요. 그런데 이규보가 쓴 부인사의 한자는 '부호 부符'인 반면 기존에 출토된 관련 유물에 새겨진 한자는 '지아비 부夫'였기에 논란이 계속되었습니다.

 

그러다가 2024년 7월의 발굴로 세상에 나온 '명문銘文기와(글이 새겨진 기와)'에 '부호 부符' '어질 인仁' '사찰 사寺'의 세 글자가 선명하게 보인 거죠. 이규보가 기록한 부인사符印寺의 한자와 정확하게 일치했어요. 그렇게 800년의 신비가 풀렸다는 것입니다.

 

 

강인욱: 유물 유적을 발굴해 보면요, 한자로 기록되어 있는 것들의 경우 다양한 판版(버전 version)이 있습니다. 우리는 한자가 아닌 한국말을 쓰지 않습니까. 그러면 한국말을 한자로 옮기는 과정에서 획을 약간 다르게 하기도 하죠. 같은 뜻인데 음이 같으면 더 좋은 뜻으로 바꾸기도 하고요. 그런 경우는 비일비재했습니다. 이번 '초조대장경'도 그런 경우 가운데 하나인 것 같습니다.

 

 

합천 해인사 대장경판(출처-출처자료1)

 

정요근: '초조대장경'도 대단하지만 '팔만대장경'이 정말 대단한 게, 대장경이 제작된 1236년부터 1251년까지의 시기는 몽골 Mongolia의 침략이 계속 이어져 고려가 몽골의 공격을 피해 수도를 개경에서 강화도로 옮겼을 때예요. 그 전에 '초조대장경'은 소실되었으니, 부처의 힘을 빌려 난국을 타개하고자 다시 대장경 제조 작업에 착수한 겁니다.

 

'팔만대장경'은 1251년에 완성되었는데, 당시에는 몽골군의 침략으로 고려의 피해가 극심했어요. 1254년을 예로 들면, 한 해 동안 몽골에 포로로 끌려간 사람만 20만 명이 넘었고 사망자는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고 하죠. 만큼 나라가 유지되기 힘든 상황 속에서도 '팔만대장경'을 제작한 겁니다.

 

'팔만대장경'의 경판 수는 자그마치 81,258장이고 모두 쌓아올리면 3천 미터가 넘는다고 하죠. 글자 수는 5천만 자에 이른다고 하고요. 5천만 자가 어느 정도냐면 조선 왕조 500년의 역사를 기록한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의 전체 글자 수와 비슷합니다.

 

저는 솔직히 쉽게 이해되지 않습니다. 일종의 정신 승리를 위해 엄청난 공력을 들여 그 어마어마한 '팔만대장경'을 만들었다는 게 말이죠. 어떻게 보면, 몽골 제국은 망했어도 고려는 살아남았지 않습니까. '팔만대장경'의 힘이 작용했던 걸까요? '팔만대장경'을 만들 만큼 생존과 승리에의 간절함이 실제에 투영되어 발현된 결과일까요?

 

무엇보다도 장기간에 걸친 전쟁의 극한 상황 속에서 인간이 이토록 어마어마한 결과물을 도출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의의가 있다고 생각해요.

 

 

허준: 그렇다면 '대장경'이라는 게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만들어진 건가요? '팔만대장경'의 경우 현존하는 세계 최초의 대장경이라고 알고 있는데 말이요.

 

 

정요근: 대장경이라는 게 불교 경전의 총칭입니다. 중국 송나라 태조가 발원해 971년부터 983년까지 새긴 '개보칙판대장경開寶勅版大藏經'이 세계 최초의 목판 대장경으로 '초조대장경' 제작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쳤죠. 그런데 송나라가 대장경을 만든 걸 보고 요나라가 따라 만듭니다. 거란의 요나라와 송나라는 서로 경쟁국(라이벌 rival)이었으니까요. 그리고 다시 금나라가 만들고 고려가 '팔만대장경'을 만듭니다. 갱신更新(업데이트 update), 새 단장(리뉴얼 renewal)을 거듭한 거죠. 이후 대장경은 원나라, 명나라, 청나라에서 계속 만들었어요. 심지어 일본에 만들었고요.

 

우리나라 역사에선 '팔만대장경'이 최종판이었습니다. 고려 시대 이후 불교보다 유교가 중요시되었으니 더 이상 대장경을 만들기 위해 나라의 힘을 쏟지 않았어요.

 

물론 조선 전기인 1457년 세조는 직접 친필 교지를 내려, '팔만대장경'이 모셔진 해인사의 잡역을 없애도록 명했어요. 그리고 '팔만대장경' 50벌을 찍어내는 대규모 사업을 펼쳐 대장경의 내용이 널리 알려질 수 있도록 했죠.

 

 

박현도: 저도 수업할 때 '팔만대장경'을 가르칩니다만, 한국 문화 역사에서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게 바로 '한글'과 '팔만대장경'이에요. 팔만대장경을 영어로 'Tripitaka Koreana'라고 하죠. 정녕 위대한 유산이자 전 세계 어딜 둘러봐도 찾을 수 없는 최고의 유산입니다.

 

※출처
1. 박현도, 곽민수, 강인욱, 정요근, 허준 지음, 역사를 보다 2(믹스커피, 2025)
2. 구글 관련 자료
 
2026. 6. 18 새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