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샘(淸泉)
혜원 신윤복 "월하정인도" 본문
"두 사람 속은 두 사람만 알리라"
<혜원 신윤복, 혜원전신첩 중 월하정인도月下情人圖, 조선 19세기 초반, 종이에 채색, 28.2×35.2㎝, 간송미술관, 국보 제135호>
조각달이 낮게 뜬 밤 한껏 차려 입은 남녀가 담 모퉁이에서 밀회를 한다. 무슨 일일까? 다소곳하게 쓰개치마를 둘러쓴 여인은 수줍음 반 교태 반 야릇한 정이 볼에 물들었다. 저고리 깃과 끝동의 보라색이 옥색치마 아리 진자줏빛 신발과 어울리고, 치마와 동색이나 한층 연한 쓰개치마 맵시가 곱기도 하다. 그윽한 눈길을 건네는 사내는 오른손에 초롱 들고 왼손으로 허리춤을 뒤적인다. 애틋한 정표라도 전하자는 것일까? 도포자락이 가볍게 흔들리고 긴 갓끈은 멋들어지게 어걔에 걸쳤는데 마음은 여인 곁에서 떨어지지 못하건만 발끝은 하릴없이 갈 길을 향하고 있다.
내노라하는 장안의 한량인 사내의 가죽신은 코와 뒤축에 따로 옥색을 댄 호사스런 것이다. 한편 여인은 치마를 묶어 올려 하얀 속곳이 오이씨 같은 버선 위로 드러났다. 함께 갈 수 없는 길, 그러나 마음만은 님의 품 안에 있다. 달빛이 몽롱해지면서 두 사람의 연정도 어스름하게 녹아든다. 배경이 뽀얗게 눅여져 있으니 섬세한 필선과 화사한 채색으로 그려진 두 연인이 더욱 도드라져 보인다.
신윤복은 이 정황을 풍류 넘치는 흐드러진 필치로 이렇게 적었다.
"달도 기운 야삼경 月沈沈夜三更
두 사람 속은 두 사람만 알지 兩人心事兩人知"
화제도 기막히지만 글씨 주위와 옆 건물 벽을 반쯤 여백으로 녹여낸 솜씨가 쏠쏠하다.
두 사람은 어떤 관계일까? 옛말에 '늙어 기첩을 두면 반드시 뒷문으로 들어오는 사람이 있다'고 하였다. 그림 속 주인공이 누군지 모르겠지만 화제의 시구가 들어 있는 한시를 지은 인물은 임진왜란 때 정승을 지낸 김명원이다. 김명원은 젊었을 때 사랑하던 기생이 권문세가의 첩이 되었는데, 그녀를 잊지 못하여 그 집의 담을 넘다가 주인에게 붙잡혀 크게 경을 치게 된 적이 있었다고 전한다.
화제가 들어 있는 김명원의 한시 전문을 한번 보자.
"창 밖은 야삼경 보슬비 내리는데 窓外三更細雨時
두 사람 속은 두 사람만 알리라 兩人心事兩人知
나눈 정 미흡해서 날 먼저 새려 하니 歡情未洽天將曉
나삼 자락 부여잡고 뒷기약만 묻네 更把羅衫問後期"
예나 지금이나 남녀간의 일은 갈피도 많고 두서는 없으며 반드시 은밀하게 마련이다. 혜원은 그러한 남녀간의 정을 주제로 한 그림의 명수였다. 때로는 한 장의 그림이 소설 한 편보다 더 소상하다.
혜원蕙園 신윤복申潤福(?~1813년 이후)은 화원인 신한평의 아들로, 단원 김홍도와 함께 조선시대에 쌍벽을 이룬 풍속화가다. 단원이 서민들의 일상과 애환을 진솔하면서도 해학적으로 표현했다면 혜원은 양반들의 도회풍속을, 그것도 한량과 기녀 사이의 사랑과 일탈을 은밀하면서도 에로틱하게 보여 주었다. 신윤복은 특히 그 동안 화면 속에 거의 등장하지 않았던 여성을 표현함으로써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그것은 한 시대의 금기를 향한 대담한 도전이었다. 실학의 등장, 경제유통의 활성화, 자주의식의 발달 등 사회적, 경제적, 문화적으로 근대적이고 개방적인 분위기가 형성되면서 여성의 지위가 조금씩 높아졌고 이로 말미암아 여성의 모습이 그림의 화면의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세련되고 감각적인 분위기, 과감하고 파격적인 소재 선택 등으로, 혜원은 독보적인 풍속화의 세계를 보여 주면서 조선시대의 미술문화를 한층 풍요롭게 만들었다. 또한 풍속화뿐만 아니라 남종화풍의 산수와 영모 등에서도 뛰어난 작품을 남겼다. 최근에는 혜원의 작품이 연극으로 변주되기도 하였고, 그를 소재로 한 소설과 드라마, 영화가 나오는 등 대중적인 인기도 끌고 있다.
이 글은 故 외우 오주석이 지은 <오주석이 사랑한 우리 그림>(2009, 월간미술)에 실린 글을 옮긴 것이다.
2011. 6. 15 새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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