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샘(淸泉)
북산 김수철 "하경산수도" 본문
물풀에 핀 꽃이 좋아 돌아갈 수 없네
<김수철, 하경산수도夏景山水圖, 종이에 수묵담채, 114×46.5㎝, 삼성미술관 리움>
무더위 끝에 몰아친 시원한 장대비로 산과 물이 세수하고 말쑥한 얼굴을 내비친다. 띠끌 한점 없다. 저 맑은 하늘과 드넓은 호수가 두 눈 가득이 다가온다. 그림 속 조각배와 강가의 작은 집을 바라본다. 깨끗하고 밋밋하고 슴슴하다. 눈길이 스치는 곳마다 맺히거나 잡히는 곳이 없어 시선은 하릴없이 화면 바탕을 투과해야 할 판이다. 화가는 가늘고 고르고 옅은 선을 그냥 죽죽 그었다. 까탈스런 데라고는 하나도 없이 그저 팔 뻗어 나가는 대로 무심한 듯 그어댔다. 담청빛 먼 산을 본다. 산뜻하게 각이 진 모습, 청량한 시골의 여름 맛이 가슴 속 묵은 때를 씻어 준다.
이 그림의 제시題詩는 다음과 같다.
"몇 번이나 낚시가 물려 돌아갈까 생각했지만 幾回倦釣思歸去
이번에 또 물풀에 핀 꽃이 좋아 한 해를 더 머물겠네 又爲蘋花住一年"
참 세상에 이런 핑계가 있다. 서재 창틈으로 엿보이는 글 읽은 선배가 이따금 시골생활을 무료하게 여겼다는 것이다. 그래서 올해는 대처로 돌아갈까 생각을 했지만 이번에 그만 물풀에 핀 꽃에 마음을 뺏겻단다. 이게 턱없는 소리라는 걸 누가 모르겠는가? 건너편 갈대숲이 강바람에 나부끼는 소리며, 집을 둘러싼 교목이 드리우는 넉넉한 그늘, 그리고 아침 저녁 아련하게 들리는 뱃노래 가락에 속병이 단단히 든 인물이 아니란 말인가?
예로부터 이런 병을 천석고황泉石膏肓이라 하였다. 명치 속 깊숙이 자연 사랑하는 정이 스며들어 고질이 된 것이다. 병자는 욕심없는 것이 증세로 고요하고 텅 빈 것을 좋아한다. 우리 옛그림에서 중요한 것은 가공하지 않은 백면白面이다. 선인들은 특히 크고 위대한 사물, 즉 하늘과 물을 여백으로 남겨 두었다. <하경산수도> 역시 오른쪽 반이 거의 다 비어 있지만 그것은 조금도 허전한 느낌을 주지 않는다. 오히려 왼편의 산과 집, 나무 등의 경물을 의지삼아 텅 빈 하늘과 망망한 물을 그윽히 바라보는 데에 그림 보는 맛의 진국이 있다.
시점은 다양하다. 위로 수려한 주산을 올려다보는가 하면 아래로 키 큰 나무 사이 작은 집을 다정히 내려다본다. 먼 산을 보는 시선은 평평하고 가없이 멀다. 하지만 모든 사물은 형상을 곡진하게 묘사하기보다 심상을 따라 대담하게 변형하고 단순화시켰다. 채색은 가벼운 갈색과 산뜻한 청색이 깔끔한 대조를 이루는데, 뱃사공과 서재의 탁자만 얄밉게 약간 홍색을 입혔다. 담담한 나머지 자칫 무미해지지 않도록 나뭇잎을 호초엽胡椒葉(산초나무잎모양: 까맣게 표시된 나뭇잎), 어자엽魚子葉(물고기비늘모양잎: 둥글고 표시된 나뭇잎) 등으로 다양하게 표현했고 농담도 운치있게 조정해 썼다. 그 농담과 성글고 촘촘한 소밀의 효과는 먼 산의 수목을 흩은 점으로 표현한 태점에서도 반복되고 있다.
북산北山 김수철金秀哲(19세기)은 출생과 사망 연대가 정확하게 확인되지 않고 있지만 19세기에 활동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산수와 화훼를 잘 그린 화가였다. 거친 듯하면서도 간략한 점과 선을 잘 구사했으며, 여백을 많이 주는 대담한 생략과 간결한 구도, 연하면서도 투명한 색조의 담채를 즐겨 구사했다. 전체적인 분위기에서 보면 이전시대까지의 산수화풍과는 적잖이 다르다. 이 때문에 북산을 이색화풍의 화가로 부르기도 하도, 근대적 분위기의 감각적인 그림을 탄생시켰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이처럼 새롭고 감각적인 작품들이었기에 일본인들이 무척 좋아했다고 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많은 조선시대 화가들과는 달리 1970년대 들어 뒤늦게 조명받기 시작했다.
이 글은 故 외우 오주석이 지은 <오주석이 사랑한 우리 그림>(2009, 월간미술)에 실린 글을 옮긴 것이다.
2011. 6. 10 새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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