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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의 이상한 밀지 "때를 보아 투항하라"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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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의 이상한 밀지 "때를 보아 투항하라"

새샘 2015. 9. 8. 22:42

광해군 초상(사진 출처-https://kimkitty15.tistory.com/14)

 

임진왜란의 광풍이 휩쓴 지 얼마 지나지 않은 1619년, 후금과  전쟁 중이던 명나라는 조선군 파병을 요청했다. 

"임진왜란 때 구원해준 망극한 은혜가 있으니 나라가 망할지언정 보내지 않을 수 없습니다."-광해군일기

 

여진족을 통일한 후금後金중원의 오랜 강자 명明! 1618년 이 두 나라가 맞부딪친 아무도 예측할 수 없는 전쟁의 승패에서, 조선은 동북아시아 패권을 장악한 명나라를 거스릴 수도, 엄청난 군사력을 앞세운 후금과 적이 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왕세자 시절, 임진왜란으로 인해 처참히 짓밟히는 백성들의 삶과 무너지는 나라의 참상을 온몸으로 체험했던 광해군은 외국어에 능통한 통역관 강홍립을 총사령관으로 임명한다. 그리고 은밀히 내린 밀명,

"명나라 장수의 말을 그대로 따르지 말고 오직 패하지 않을 방도를 구하는 데 힘쓰라"-광해군일기

 

임금이 전쟁터로 떠나는 총사령관에게 보낸 밀지에서 임금은 이기라고 하지 않았고 투항하라고 했던 것.

명군과 함께 싸우다 적에게 포위된 조선군은 후금의 강화 요청에 순순히 항복하면서 총사령관 강홍립은 후금에게 조선의 입장을 밝혔다.

"조선은 후금에 대한 원한이 없고 지금 출병한 것은 부득이해서다."-자암집

 

명이냐 후금이냐, 명분이냐 실리냐, 그 간극을 유연하게 조절했던 광해군의 외교정책!

광해군의 뜻을 확인한 후금은 조선 침략을 유보했다.

 

하지만 1623년 인조반정으로 광해군 폐위와 함께 그의 외교정책도 폐기된다.

그리고 1636년 후금이 세운 청나라의 조선 침략으로 조선은 삼전도에서 굴욕적인 항복의식을 치러야 했다.

 

<오늘날 새롭게 조명되고 있는 광해군>

 

광해군과 연산군은 우리 역사에서 패악한 군주로 기억되는 인물들이다. 이들이 '조'나 '종'으로 끝나지 않고 '군'으로 마침표를 찍은 것도 그런 이유였다. 그런데 역사는 과연 이들에게 공정했던 것일까?

 

TV사극의 단골 레퍼토리였던 조선 제15대 임금 광해군光海君. 그는 삶 자체가 드라마틱했다. 서자로 태어나 설움 속에 살았던 유년시절도 그렇거니와 생각지도 않던 왕세자가 되었지만 궁보다 전쟁터를 돌며 지낸 것이나, 우여곡절 끝에 왕이 되어서도 불안 속에서 살아야 했던 것이 그렇다.

 

오랫동안 난폭한 폭군, 판단이 흐린 혼군으로 평가됐던 광해군은 400년이 지난 오늘날 주요한 화두가 되었다. 2012년 국내에서 천만 관객 몰이를 한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로 그는 뛰어난 중립외교를 떨친 명군으로 새롭게 조명되고 있다. 혼군과 명군, 이 극명하게 대비되는 평가는 어디에서 비롯된 걸까? 그가 오늘날 새롭게 평가 받는 배경은 무엇일까?

 

광해군은 선조와 후궁인 공빈 김씨 사이에서 태어난 둘째 아들이었다. 왕비가 낳은 적자가 아닌 후궁이 낳은 서자였고, 장남이 아닌 차남이었다. 더욱이 어머니는 두 살 때 세상을 떠났고 아버지는 광해군에게 무관심했다. 그렇게 찬밥 신세나 다름없던 그가 1608년 왕의 자리에 올랐다. 기적이나 다름없었다.

 

광해군의 운명을 바꿔놓은 것은 임진왜란이었다. 1592년 4월 중순, 20만 명의 일본군이 부산 앞바다에 물밀듯이 밀려왔다. 열흘 쯤 지나자 왜군은 부산에서 충주까지 파죽지세로 밀고 올라왔고, 적이 곧 들이닥칠 것이란 소문에 조정은 공황상태에 빠졌다. 다른 방책이 없었던 선조는 신하들의 건의를 받아들여 의주로 몸을 피하기로 결정했다.

 

만일의 상황에 대비해 왕위를 이을 세자도 책봉해놔야 했다. 왕비인 의인왕후와의 사이에서 아들이 없던 선조는 부랴부랴 후궁들의 아들 가운데 가장 영특하다고 여겨왔던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했다. 포악스러워 왕실의 골칫거리였던 장자 임해군을 세자로 앉히기엔 너무 부담이 컸기 때문이다.

 

열일곱 살의 나이에 엉겁결에 왕세자가 된 광해군에게 성대한 의식은 없었다. 곧바로 피난 보따리를 싼 왕세자는 전장으로 나섰다. 선조는 세자인 광해군에게 분조를 맡겼다. 분조란 말 그대로 조정의 분소 즉 일종의 임시정부였다. 선조가 명나라로 망명하거나 화를 당할 경우까지 대비한 것이다. 선조가 이끄는 조정은 의주와 평양 등에 있었고, 광해군의 분조는 전국 방방곡곡 현장으로 옮겨 다녔다. 왜군이 주둔하는 위험한 지역을 지나야 했고, 한여름 뙤약볕을 견디며 고갯길을 넘어야 했다. 노숙을 할 때도 잦았다. 하지만 광해군은 풍찬노숙 고생길을 마다하지 않았다. 2년이 넘는 기간 동안 전선을 돌며 백성들의 형편을 살폈다.

 

"평안도에서 강원도로 나와 이천 지방에 머물면서 여러 고을에 격문을 돌려 원근의 인사를 불러모았다. 이에 산곡에 도망가 숨은 백성들이 그 부름에 응하여 구름처럼 모여들면서 모두들 우리 임금의 아들이다 하였는데, 열흘도 못 되어 그 성세가 크게 떨쳤다."-선조실록,선조 32년(1599) 8월 21일

 

나라가 다 망했다고 여겼던 백성들에게 광해군은 구세주와 같았다. 그는 민심을 다독였고, 경상도나 전라도로 내려가 군량을 모았으며 병사를 모아 왜군에 대항했다. 그는 민심과 하나되는 것이 위기극복의 본질임을몸으로 깨우쳤고, 전쟁은 어떻게든 피해야 한다는 생각을 굳히게 되었다.

 

7년 만에 전쟁은 끝났다. 광해군은 세자로 능력을 인정받았다고 여겼지만 아버지 나라인 명은 그를 세자로 승인하지 않았고, 선조는 백성들이 자신보다 광해군을 더 믿고 따르게 되자 그를 시기했다. 한양을 떠나 의주까지 피난을 가는 동안 도망가는 임금이라며 차갑게 등 돌리던 민심에 선조는 깊은 상처를 입고 있었다. 그뒤 왕후의 죽음으로 홀로되었던 선조는 새로 맞아들인 정비 인목왕후에게서 늦둥이 영창대군을 얻자 노골적으로 광해군을 멀리했다. 조정은 곧 광해군파와 영창대군파로 갈렸다. 하지만 1608년 선조가 세 살배기 영창대군을 남기고 세상을 떠나면서 논란은 의외로 빨리 마침표를 찍었다. 그러나 이는 또 다른 파란의 예고였다.

 

 

<광해군의 실리외교, 후금과 명 사이에서>

 

열일곱 살에 세자가 되었던 광해군이 왕좌에 오른 건 서른세 살 때였다. 그는 16년간 왕세자를 경험한 준비된 왕이었다. 그러나 왕의 자리는 위태로웠다. 이복동생인 영창대군은 광해군에게 큰 부담이었다. 왕위에 오르자 그는 먼저 영창대군을 지지했던 세력들을 제거해나갔다. 영창대군을 옹호하는 역모사건이 일어나자 영창대군을 강화도로 보내 아홉 살 어린 나이에 죽게 만들었다. 영창대군의 외할아버지인 김제남에게는 사약을 내렸고, 생모인 인목왕후는 평민을 뜻하는 서인으로 격하시켜 경운궁에 가둬놓았다. 이 일은 광해군을 포악한 임금으로 평가하게 하는 출발점이 되었다.

 

왕권에 걸림돌이 되는 것을 하나둘 제거해가면서 광해군은 자신의 지지세력을 만들어나갔다. 임진왜란 때 의병활동에 적극적이었던 정인홍 등 이른바 대북파들이었다. 이들은 명의 위세가 점차 기울어가는 것을 눈치챘고 있었다. 만주지역에 근간을 둔 세력들의 성장을 목격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 조정은 사대주의 명분론에 사로잡힌 서인 세력이 주도했다. 광해군의 입지는 좁았지만 그는 군주로서 소신을 갖고 해야 할 일을 챙겨나갔다. 임진왜란 동안 평안도와 황해도 등지를 다니면서 북방의 정세에 밝아진 광해군은 왕위에 오르자마자 북방 경계에 각별히 신경을 썼다.

 

"오랑캐의 속셈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으니 방비함에 있어 모든 노력을 다 기울여야 할 것이다. 척후를 보내고, 봉수를 관리하며, 적들의 첩자에 대비하고, 우리의 첩자를 잘 운영하라. 군의 기강과 규율을 엄격히 해야 한다."-광해군일기, 광해군 1년(1609) 10월 16일

 

조선, 명나라, 일본 3국이 총력전을 벌인 임진왜란은 동북아 질서를 뒤흔든 거대한 국제전이었다. 당시 북방은 크게 요동치고 있었다. 황제의 나라로 자부하며 영원히 권력을 휘두를 것 같았던 명은 임진왜란 때 조선에 파병한 것이 부담이 되어 휘청거렸다. 반면 압록강 북쪽에서는 누르하치가 이끄는 여진족이 무섭게 힘을 뻗어가고 있었다. 마침내 1616년 여진족은 국호를 후금이라 칭하고 누르하치를 왕으로 추대했다.

 

광해군은 국제 정세를 냉정하게 보려 했다. 이빨 빠져 가는 늙은 호랑이 명나라냐, 무섭게 성장하는 아기 호랑이 후금이냐. 현실을 객관적으로 보기 위해 광해군은 고려사를 읽으면 과거의 외교정책을 유심히 살폈다. 송과 요, 금, 원 등과 고려가 어떻게 관계를 만들어갔는지를 연구했고, 그 결과 고려가 존재할 수 있었던 힘이 명분이나 의리가 아닌 명확한 현실 인식에 바탕을 두고 있음으로 발견했다. 당시 동북아의 중심은 여진의 후금, 나중에 청이 되는 만주세력으로 옮겨가고 있음이 분명했다.

 

광해군이 왕이 된 지 10년째 되는 1618년, 그의 외교력은 첫 시험대에 올랐다. 명이 조선에 파병을 요청한 것이다. 신하들은 파병을 당연하게 생각했다. 아버지가 망하는 것을 자식이 보고만 있을 수 없다는 이유였다.

 

"중국은 부모의 나라로 멸망할 지경에 이른 조선을 다시 세워준 은혜가 있는데, 지금 외부로부터 수모를 당하여 우리에게 군사를 요청해왔으니 당연히 달려가 응원해야 하지 않겠습니까?"-광해군일기, 광해군 10년(1618) 윤4월 24일

 

신하들은 한 목소리로 재조지은再造之恩(거의 망하게 된 것을 구언하여 도와준 은혜)을 외쳐댔다. 생전에 선조가 입버릇처럼 써오던 표현이었다. 하지만 광해군의 생각은 달랐다. 조선이 파병을 감당할 상황이 아닐뿐더러 명의 국운은 이미 기울었다고 판단했다. 일단 광해군은 시간 끌기 전략을 펼쳤다. 황제가 칙서를 보내야 움직일 수 있다, 섣불리 조선 병사가 참전했다가는 오히려 명에게 피해만 준다는 등의 논리를 앞세워 파병을 늦추려 했다. 다른 한편으로 북방으로 사람을 보내 현장의 긴박한 상황을 파악했다.

 

이런저런 묘책으로 파병을 피하려 했지만 결국 명 황제의 파병 요구 칙서는 도착했다. 더이상 피할 길을 없었다. 파병 요청을 받은 이듬해 1619년 2월, 광해군은 왕의 통역관으로 일해온 충신 강홍립을 충사령관인 도원수에 임명하고 명으로 1만 3천여 명의 병사를 보냈다. 더불어 강홍립에게 은밀하게 메시지를 전했다. "전쟁 상황을 보아 후금에 투항해도 좋다"는 내용이었다. 다른 신하들은 일체 모르게 한 왕의 밀지였다.

 

광해군의 심중을 헤아린 강홍립은 우선 명의 편에서 전투에 임했다. 얼마 되지 않아 광해군의 예측대로 조선과 명의 연합군은 후금에 크게 패하고 말았다. 속전속결로 들이닥치는 후금의 날씬 기마대를 당해날 도리가 없었다. 조선 병사 대부분은 전사했고 강홍립은 남은 조선군을 이끌고 후금에 항복하였다. 의도된 항복이었다. 강홍립은 '후금과의 전쟁을 원치 않는다'는 조선 임금의 뜻을 전달했다. 후금의 공격대상이 되지 않기 위한 광해의 이중외교였다.

 

 

<명보다 백성의 생명을 소중히 여기다>

 

아버지 명을 돕지 않고 오랑캐 후금에게 항복한 강홍립은 천하의 역적이 됐다. 처단해야 한다는 여론이 들끓었다. 이때 광해군은 강홍립의 편을 들면서 명분론에만 사로잡힌 대신들을 향해 크게 호통을 쳤다.

"적의 군사력이나 전략이 당해내기 어려우니 앞으로 어떤 환란이 닥칠지 예측할 수가 없다. 나라를 위해서는 상하가 합심하여 오로지 부국강병에 심혈을 기울여야 하는데, 이는 생각하지 않고 강홍립의 처자를 벌하는 일에만 몰두하고 있으니, 내 속으로 헛웃음이 나온다."-광해군일기, 광해군 11년(1619) 4월 8일

 

다음 날, 광해군은 신하들 앞에서 향후 외교의 방향을 분명하게 밝혔다.

"명나라를 섬기기를 더욱 정성껏 함과 동시에 한창 기세가 왕성한 적을 잘 다독여야 한다. (....) 지금 적이 매우 사납게 날뛰지만 현명하고 유능하게 대응한다면 고려 때처럼 재앙을 막고 국가를 지켜 전쟁의 재난을 입지 않을 것이다."-광해군일기, 광해군 11년(1619) 4월 9일

 

광해군은 명과 후금 사이에서 조선에게 쏠리는 위험을 덜 수 있는 방식을 선택했다. 세자로 책봉된 후 27개월 동안 전쟁터를 다니면서 조선의 어느 임금보다 백성의 삶을 가까이에서 지켜봤던 그였다. 당시 백성을 삶은 처참했다. 논밭이 쑥대밭이 되면서 풀뿌리와 나무껍질로도 목숨을 이어가기가 어려웠던 조산 백성들은 인육을 먹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죽음과 삶의 경계가 따로 없었다. 그 참상을 바라본 광해군에게 무엇보다 우선이었던 것은 백성의 안정이었다.

 

결국 광해군은 자신이 정치적으로 고립될 것을 예상하면서도 명에서 요청해 온 2차 파병을 거부했다. 광해군의 의중을 파악한 후금은 조선으로 향하려던 발걸음을 명나라 쪽으로 돌렸다. 쇠퇴해가는 명과 신흥 강자 후금의 사정을 정확히 꿰뚫고 대처한 국왕 덕분에 조선은 전쟁을 피해갈 수 있었다.

 

광해군은 집착에 가까울 정도로 국방 문제에 관심을 쏟았다. 주변 국가의 동향을 예민하게 탐지하는 데 관심을 기울였고, 후금의 기마병에 대비하고자 화포를 비롯한 무기를 제작하는 데에도 힘썼다. 원수로 여겼던 일본과 국교를 재개하고 조총을 구입할 수 있을지 은밀히 타진하기도 했다. 정세 변화에 빠르게 대응하기 위한 조치였다.

 

한편 전쟁 이후 황폐해진 국가를 다시 세우는 데에도 주력하였다. 농지를 많이 소유하면 세금을 더 많이 내게 하는 대동법을 실시하는 등 민생을 돌보고 국가재정을 안정시키고자 했다. 개혁정치가들의 단골 주장이었으나 사대부의 반대로 번번이 무산되었던 법을 실행에 옮긴 것이다. 또한 백성의 건강을 돌보기 위해 선조의 죽음을 막지 못한 죄를 뒤집어쓰고 억울한 귀양살이을 하던 허준을 불러내 동의보감을 펀찬하도록 지원했다. 이 밖에도 임진왜란 중에 불타버린 궁궐을 다시 지었고, 전란으로 불타버린 사서들을 중국에 가서 구해오돌고 하는 등 문화사업에도 힘을 쏟았다.

 

그러나 명분론에 사로잡힌 서인 세력에게는 광해군은 은혜를 모르는 배은망덕한 인물이자 동생을 죽이고 어머니를 폐위시킨 패륜아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또한 광해의 개혁정치로 입지가 줄어들게되자 위기감을 느낀 이들은 광해군 탄핵 쪽으로 의견을 모으기 시작했다. 명에 파병을 보냈다가 강홍립이 항복하고 돌아온 뒤 4년 동안 서인 서력은 광해군을 끌어내리려 호시탐탐 기회를 노렸고, 끝내 인조반정으로 눈엣가시 같았던 광해군을 내쫓았다. 뼛속까지 중화주의에 사로잡혔던 세력의 쿠데타였다.

 

광해군은 왕이 된 지 15년 만인 1623년, 권좌에서 내려왔다. 그 후 재임 기간보다 길었던 19년의 세월을 제주에서 귀양살이했다. 궁에서 내쫓긴 왕의 말년은 비참했고 마지막 가는 길도 쓸쓸했다. 1641년 향년 67세를 일기로 죽음을 맞이했을 때, 계집종 혼자 염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광해군 다음으로 왕위에 오른 인조와 서인 세력은 오로지 재조지은을 고수했다. 광해군 때 편찬된 선조실록은 믿을 수 없다며 재조지은의 원조격인 선조의 실록을 선조수정실록으로 재편찬했다. 또한 명나라만을 바라보고 있다가 그들이 오랑캐 세력이라 부르며 무시한 후금의 침략을 당했다. 정묘호란가 병자호란이다. 백성은 다시 끔찍한 살육과 치욕의 현장으로 내던져졌다.

 

 

<성군인가 폭군인가>

 

조선 제15대 임금 광해군은 경기도 남양주의 산자락에 묻혀 있다. 무덤도 '릉'이라고 칭해지는 다른 왕들과 달리 '묘'라는 이름으로 찾는 이 없이 방치되어 있다. 실록을 편찬했지만 실록이라 하지 않고 광해군일기로 불린다. 광해군을 평가하고 기록한 이들은 그를 폭군, 패륜아로 매도한 서인 세력이었다. 오랜 세월 동안 그가 나라를 어지럽힌 군주로 평가절하되었던 이유다. 광해군이 자신의 왕권을 지키기 위해 형제들을 죽이고 계모인 인목대비를 유폐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광해군의 외교능력은 아버지 선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탁월했다.

 

광해군이 새롭게 조명받기 시작한 것은 20세기 들어서다. 일제강점기 한 일본인 학자가 광해군을 '실용주의 외교로 백성에게 은택을 입힌 군주'라고 평가했고, 이후 국내 역사학자들 사이에서도 광해군의 치적을 높게 평가하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오늘날 한국의 국사교과서는 물론 북한의 역사서도 외교 업적과 관련해서는 광해군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전후 강력하게 복구정책을 펼쳐나갔고, 현실을 냉정히 보고 외교력을 발휘해 조선이 전쟁터가 되는 것을 막았던 사실만큼은 분명히 인정하자는 것이다.

 

광해군은 21세기 들어 거듭 부활해 전성기를 누리고 있다. 대표적인 예가 지난 2004년 이라크 파병 여부를 놓고 찬반론이 나뉘었을 때다. 이후 2012년 대통령 선거를 앞둔 시점에 개봉한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가 1,200만 명이 넘는 관객을 모으면서 지도자로서 광해군에 대한 관심은 어느 때보다 뜨거워졌다. 광해군의 외교정책에 대해 연구해온 명지대 사학과 한명기 교수는 "광해군 시대의 한반도나 오늘 우리가 사는 한반도나 여전히 주변 열강의 입김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면서 "소명의식을 갖춘 지도자, 자주외교에 대한 사람들의 바람이 계속해서 광해군을 불러내고 있다"고 말한다.

 

이에 맞서는 다른 의견도 있다. 오항녕 전주대 언어문화학부 교수는 광해군의 외교정책은 강대국 눈치를 보는 기회주의 외교였다고 비판한다. 궁궐 재건 등 무리한 토목공사로 민생을 파탄 냈고 신하들과 국정토론을 하는 경연도 게을리했던 무능한 군주였다는 것이다.

 

광해군, 그는 과연 성군일까 폭군일까? 그 판단에 앞서 적어도 이것만은 확실하게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한반도를 둘러싼 외교의 격랑 속에서 광해군은 앞으로도 거듭 호출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이 글은 EBS·국사편찬위원회 공동기획, 역사채널e 지음, '세상을 깨우는 시대의 기록 역사 e'((주)북하우스 퍼블리셔스, 2013)에 실린 글을 옮긴 것이다.

 

2015. 9. 8 새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