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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역사상 최고의 이론과학자이자 실험과학자인 뉴턴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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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역사상 최고의 이론과학자이자 실험과학자인 뉴턴

새샘 2015. 7. 15. 18:00

<뉴턴이 고안한 톱니 모양은 지금도 세계 각국의 주화에 널리 사용되고 있다.>

 

전(주화) 가장자리에는 톱니 모양의 장식이 있다. 과연 이 톱니의 용도와 고안한 사람이 누군지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이 글의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고안한 발명가는 바로 인류 역사상 최고의 과학자로 평가되는 영국의 아이작 뉴턴 Isaac Newton(1642-1727)이다.

 

1699년 영국 왕립조폐국의 조폐국장이 된 뉴턴은 주화의 순도를 보장하기 위해 금화와 은화의 가장자리에 톱니 모양의 장식을 도입했다. 주화를 받았을 때 이 톱니 모양이 없으면 사람들은 받으려 하지 않았다. 뉴턴의 조치는 주화 모서리에서 귀금속을 조금씩 깎아내는 행위를 방지해 주화 가치의 손상을 막기 위한 보호책이었다. 그 이전까지는 주화를 교환할 때 항상 무게를 달아 정량인지를 확인해야 했는데, 톱니 모양은 이런 불편을 일거에 해소해 주었다. 깎아내면 금세 표시가 나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동전에도 톱니 모양의 장식은 여전히 남아 있다. 뉴턴은 과학계에만 공헌한 것이 아니라 우리 실생활에도 큰 공헌을 한 것이다.

 

뉴턴이 과학자로서의 비범성은 여러 가지 뛰어난 재능이 한 사람에게 동시에 나타났다는 사실이다. 과학의 역사를 보면, 일급 실험과학자 중에서 저명한 이론가가 배출된 경우는 없었다. 그리고 최고 수준의 이론과학자 가운데 탁월한 실험과학자가 배출된 경우도 거의 없었다.

 

이를테면 20세기 최고의 과학자로 꼽히는 아인슈타인은 탁월한 이론과학자임에 틀림이 없지만 실험과학자는 아니었다. 그러나 뉴턴은 '탁월한 실험과학자'인 동시에 '최고 수준의 이론과학자'였다. 더욱 놀라운 것은 세계사를 빛낸 위대한 과학자들 가운데 오직 뉴턴만이 수학 부문에서 최고 수준의 뛰어난 실력을 발휘했다. 오직 극소수의 과학자들만이 그중 한 분야에서 겨우 업적을 이룰 수 있는데 말이다.

 

그는 언제나 말수가 적었다. 말을 많이 한다는 것은 필요 이상으로 증명 단계를 늘리는 것처럼 세련되지 못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듯햇다. 누군가가 어떻게 그 많은 발견을 해냈느냐고 뉴턴에게 질문하자, 그는 이렇게 답했다.

 "언제나 그 문제를 곰곰히 생각함으로써."

 

논박의 여지가 없는 답변이다. 그 자신의 표현을 빌면, "점차 빛이 떠오를 때까지" 며칠이고 한 문제에 놀랍도록 정신력을 집중했다. 이렇게 해서 떠오른 '빛'은 과학사를 통틀어 가장 기념비적인 업적이 되었다. 뉴턴이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과학자라는 것은 논란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며, 실제로 그는 '가장 위대한 과학자'라고 불리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다.

 

뉴턴이 가장 좋아했던 분야는 광학이었다. 그는 케임브리지대학의 연구실 덧문을 닫아걸고, 덧문에 지름 6밀리미터 가량의 '둥근' 구멍을 냈다. 이 구멍을 통해 가느다란 햇빛이 그의 어두운 방으로 들어왔다. 그는 구멍 가까이에 프리즘을 갖다 대어 반대편 벽에 스펙트럼이 투사되도록 했다. 그는 관찰했다. 벽에 비친 스펙트럼은 둥근 모양이 아니라 '기다란 직사각형'이었다. 놀랍고도 신기한 현상이었다.

 

빛을 에테르의 파동으로 간주했던 기존 가설에 따르면 프리즘을 통과한 빛은 반대편 벽에 지름 7센티미터의 동그란 스펙트럼을 만들어야만 했다. 그런데 뉴턴이 실험에서 관찰한 직사각형 스펙트럼은 가로가 7센티미터, 세로가 33센티미터였다. 세로 길이가 예상치보다 거의 다섯 배나 길었다. 기존 가설에 무언가 큰 결함이 있다는 증거였다.

 

그러나 당대의 주도적 과학자들은 기존 통념과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뉴턴을 신뢰하지 않았다. 자신의 지적 우월성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던 뉴턴에게는 한 가지 방법만이 남아 있었다. 마치 어린 학생을 가르치듯 과학계의 거물들에게 과학의 방법을 가르치는 것이었다. 그는 말했다. "첫째, 사물의 성질을 직접 탐구하고 실험에 의해 그것을 확증하라. 그런 다음 그것을 설명하기 위한 가설로 나아가라. 왜냐하면 가설이란 사물의 성질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지, 그것에 대해 결정권을 갖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관찰과 실험의 중요성! 그것은 근대과학의 신호탄이었다. 19세기 영국의 계관시인 윌리엄 워즈워스 William Wordsworth(1770-1850)는 뉴턴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는 사상의 낯선 바다를 홀로 항해했다."

 

※이 글은 박상익이 지은 <나의 서양사 편력 1>(2014, 푸른역사)에 실린 글을 발췌한 것이다.

 

2015. 7. 15 새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