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샘(淸泉)

傳 혜원 신윤복 "기다림" 본문

글과 그림

傳 혜원 신윤복 "기다림"

새샘 2015. 9. 4. 20:55

<당신의 사랑은 괜찮은가요?>

傳 신윤복, 기다림, 18세기 후반~19세기 초반, 종이에 채색, 소장처 모름

 

그림에는 머리로 보는 그림, 가슴으로 보는 그림이 있다.

화가가 머리를 써서 그린 그림이라면 감상자도 지적 유희를 즐기며 머리로 보는 것이 좋겠고, 화가가 가슴으로 그린 그림이라면 감상자도 촉촉한 가슴으로 보는 것이 좋겠다.

머리와 머리가 만나고 가슴과 가슴이 만날 때, 비로소 그림의 즐거움과 감동은 배가 된다.

 

혜원蕙園 신윤복申潤福(1758~?)의 <기다림> 앞에서 가슴이 절로 열리는 것을 보니, 화가도 가슴에 바람이 불던 어느 날이 이 그림을 그렸나 보다 싶다.

신통하게도 가슴으로 그린 그림은 가슴이 먼저 알아보기 때문이다.

 

그림에 한 여인이 있다.

만물이 기운생동하는 따스한 봄날에 그녀만 혼자서 그 어떤 미동도 없이 담 모퉁이에 붙박혀 먼 곳에 시선을 두고 있다.

담에 몸을 비스듬히 기대어 서 있는 여인의 모습을 보면서 저곳에서의 기다림이 꽤 오래되었나 보다.

그녀의 시선 끝에는 화면 구성의 비례를 맞추기 위함인 듯, 혹은 그림의 시적 정서를 고조시키기 위함인 듯 버드나무 한 그루가 그려져 있다.

어디서나 흔한 버드나무이지만 이 그림에서는 여인의 묘한 분위기를 더욱 북돋는, 안성맞춤의 특별한 나무가 되었다.

나무는 오랜 세월, 저 자리에 있으면서 여러 기다림을 보아 왔을 것이고, 기다리는 이들을 곁에서 말없이 지켜 주었을 것이다.

 

그림 구성은 이것이 전부다.

그런데 그림 속 여인의 키가 상당히 크다.

물론 화면의 중심에 위치한 탓도 있겠지만, 조선시대의 여인이라고 보기에는 키가 매우 커서 몸을 똑바로 세운다면 담장의 높이와 비슷할 정도이다.

그녀는 주름이 많이 잡힌 풍성한 치마 위에 앞치마를 둘렀는데, 그 고운 자태가 단정하고 깔끔하여 참 예쁘다는 생각이 들게끔 한다.

화려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수수한 옷차림이지만 멋스러움이 풍기는 것을 보면서, 품격 있는 옷맵시라는 것은 결코 화려한 옷, 비싼 옷이 아니라 옷 입는 사람의 성품과 언행에 달려 있다는 생각에 이른다.

 

기다림 부분, 그녀는 감상자에게 속내를 들키지 않으려는 듯 등을 돌리고 있는데, 오히려 그 덕분에 그녀의 짙은 외로움이 엿보이고 우리의 외로움이 되살아난다.

 

기다림의 기억

 

시선은 특히 여인의 앞치마에 한동안 머물게 된다.

그녀의 하반신 대부분을 가린 넉넉한 크기의 앞치마는 그림 속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따사로운 봄날의 햇살과 바람을 넉넉하게 다 담아내고 있다.

소박한 하얀빛이 순결해 보이기까지 한다.

하얀 앞치마를 두른 모습이 흡사 미사포를 쓰고 기도하는 여인처럼 귀하게 보임은 어쩐 일이지.....

 

본디 앞치마란 것은 여인들의 고단한 노동을 상징하지만, 이 그림에서는 고단함보다는 인생에 조용히 순응하는 여인의 상징처럼 보인다.

그녀의 마음처럼 아래로, 그리고 저 멀리로 흐르는 앞치만의 등장은 신윤복의 다른 그림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것이다.

 

화가는 이 여인에게 앞치마을 두르게 함으로써 그녀가 방금 전까지 분주하게 집안일을 했음을 암시하고 있다.

잔주름 하나 허용하지 않고 흡사 풀을 먹이고 다듬이질이라도 한 듯 깔끔한 앞치마가, 그녀의 바지런한 생활과 정신을 알려 준다.

 

또 당시의 여인들이 그러하듯 머리에는 인모人毛의 트레머리를 얹고 있는데, 한 올도 흐트러짐이 없고 너무 크거나 작지도 않으며 그 흔한 장신구 하나도 꽂혀 있지 않은 모습에서 그녀가 정갈하고 소박한 성품의 소유자임을 알게 한다.

 

이마와 목덜미의 솜털은 그녀를 사랑스럽게 보이게 하며, 목선을 따라 흐르는 좁은 동정 아래의 깃과 야무지게 맨 짧고 붉은 저고리 고름은 고개를 살며시 돌려 보이지 않는 그녀의 입술인 듯 붉기만 하다.

여인의 분위기에 홀려 사랑하는 사람 바라보듯이 자꾸 바라보게 되는 것은 나만의 경험일까?

 

그런데 그림에서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

전체적으로 단아한 분위기의 여인은 얼굴을 전혀 보여 주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녀의 얼굴 생김새는 물론이고 그녀의 심정도 전혀 읽어 낼 수 없다.

그녀는 감상자에게 속내를 들키지 않으려는 듯 단호한 몸짓을 하고 있는데, 역설적으로 그 덕분에 그녀의 짙은 외로움이 엿보이고 우리의 외로움은 되살아난다.

 

기다림, 기다림.......

그림 속 여인의 기다림이 전혀 남의 일 같지 않고 자연스럽게 공유되는 것은, 화가의 탁월한 그림 솜씨 때문임이 분명하다.

또한 우리네 삶 안에 수많은 기다림의 경험이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우리네 인생 자체가 수많은 기다림의 나날이 아니던가.

그 사람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좋은 때를 기다리고, 현재의 고통을 옛일로 회상할 날을 기다리고, 언제나 그 무엇인가를 기다린다.

 

우리의 이런 기다림은 어머니의 배 속부터 시작되어 인생 내내 계속되지만, 어떤 기다림도 그 시간이 너무 길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그 시간이 길어질수록 불안감은 점점 커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때로는 기다림의 끝을 희망이라고, 스스로 긍정적인 결과로 확정해 버리고는 한다.

안 그러면 고독한 기다림의 시간을 버텨 낼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기다림 부분, 우리는 여인의 시선 때문에 버드나무 너머의 화면 밖에서 성큼 들어설 누군가를 기다리게 된다.

 

리는 그림속 여인의 분위기에 동화되어 자연스럽게 여인의 시선을 따라 우리의 시선도 옮기게 된다.

여인의 시선과 우리의 시선이 뒤엉켜 닿은 곳은 늘어진 버드나무, 그 뒤쪽이다.

이 그림은 보이지 않는 화면 밖 공간이 존재하도록 구성되어 있다.

역시 신윤복이 참 대단하다는 생각을 하게 하는 부분이다.

그림의 공간을 치밀하게 계산했기에 보여줄 수 있는 공간 연출이다.

화가는 오래된 버드나무의 가지를 중간까지만 묘사하고 맨 꼭대기를 생략했으며, 나무 기둥은 오른쪽 화면 밖으로 빠지게 했다.

이렇게 나무를 따라간 우리는 그림 감상을 할 뿐인데도 또 다른 공간을 상상하게 된다.

이제 우리는 그림 속 여인과 함께 화면 밖에서 안으로 금방이라도 성큼 들어설 듯한 한 사람을 기다리게 된다. 아직은 비밀에 묻힌 그를....

 

이 그림의 기다림은 아무래도 한창 사랑에 빠진 사람의 설레는 기다림이 아닌, 스쳐 간 사랑이 남긴 아픈 기다림인 것만 같다.

 

 

여인, 사랑해서는 안 될 사람을 사랑하다.

 

그런데 그림 속 여인은 도대체 누구를 기다리기에 이 화창한 봄날에 고독해 보일까?

상대는 누구이고 그녀는 누구일까?

적당히 감추고 살짝 드러낸 이 그림 속 여인의 사연이 궁금해진다.

사실, 상대는 이 여인이 자신을 이토록 그리워하며 기다리는 줄을 알고나 있는지 모르겠다.

 

기다림 부분, 그녀는 자신이 기다리는 사람이 누군지를 암시하는 송낙을 들고 있다. 송낙은 불가의 승려가 평상시에 착용하는 모자다. 이 여인은 영원히 이루어질 수 없는 슬픈 사랑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어느 날 홀연히 그녀에게 다가왔고, 정표이었든지 아니면 의미없는 흘림이었든지 모자를 하나 남기고 떠나갔다.

그녀는 그 사람이 생각날수록 몸을 바쁘게 움직였지만 쉽게 잊을 수 없었나 보다.

오히려 몸이 고단하면 할수록 그를 향한 그리움이 간절해져 그의 유일한 흔적인 모자를 들고 나와 기약 없이 기다리고는 한다.

뒤로 들고 있는 모자는 이 기다림의 대상이 누구인지 암시하는 송낙松蘿.

송낙은 송라립松蘿笠이라고도 하는 불가의 승려가 평상시에 납의衲衣와 함께 착용하는 소나무겨우살이로 만든 모자다.

 

그렇다.

이 여인이 이토록 간절하게 기다리는 사람은 바로 불가의 스님이다.

그녀는 스님을 사랑하고 있다.

우리가 아는 불가에 대한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승려는 속세의 모든 인연을 끊고 수행에 정진한다.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이 여인은 영원히 이루어질 수 없는 슬픈 사랑을 하고 있다.

그녀의 아픈 사랑이다.

혹 지금 그녀의 눈가가 촉촉하게 젖어 있고 그녀의 갸날픈 어깨가 파르르 떨리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들키지 않으려고 얼굴을 보여 주지 않는지도 모르겠다.

 

기다림 부분, 불교와 관련이 깊은 나무인 버드나무도 그녀의 사랑이 이루어질 수 없음을 암시한다.

 

그림에는 송낙이라는 모자와 더불어 또 다른 불가의 상징물이 그려져 있다.

그녀의 사랑이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임을 더욱 못 박는 장치 같아서 가슴이 아려 온다.

여인 옆에는 큰 버드나무가, 담 옆에는 작은 버드나무 가지가 봄날의 커튼처럼 드리워져 있다.

버드나무는 불교와 깊은 관련이 있는 나무다.

혹시 불화를 관심 있게 봤다면, 버드나무 아래의 바위 위에 앉아 있거나 오른손에 버드나무 가지를 들고 대자비를 베푸는 자세를 취하고 있는 관음상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이 관음이 양류관음보살로, 이 이름은 자비심이 많고 중생의 소원을 들어주는 것이 마치 버드나무가 바람에 나부끼는 듯하다는 데에서 연유한 것이다.

 

그러므로 신윤복이 표현하고자 한 의도대로 추측해 본다면, 그림 속의 버드나무는 그냥 버드나무가 아닌, 육안으로 볼 수 없는 불가 세계의 상징물이라고 해석해 볼 수 있다.

슬프게도 여인의 사랑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임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종교인을 사랑하게 된 여인.......

어느 사랑이든 고통은 있기 마련이지만, 스님을 사랑하는 것은, 신부님을 사랑하는 것은, 수녀님을 사랑하는 것은......인간이 아닌 신이나 성인을 사랑하는 것은 몇 배는 고통이 큰 사랑이다.

어찌해 볼 도리 없이 가슴이 먹먹해지는 사랑이다.

이 그림은 여인의 얼굴을 보여주지 않음으로써 더 많은 이야기와 더 깊은 내용을 보여주고 있다.

 

 

꺾이지 않는 꽃

 

그렇다면 여인이 들키고 싶지 않은 마음으로 가늘게 떨며 숨죽여 기다리는 이곳은 어디일까?

혹 고택들을 방문한 경험이 있다면 그곳에서 크거나 작은 연못 혹은 우물 터를 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버드나무나 연꽃의 군집도 보았을 것이다.

이처럼 버드나무는 연못가, 개울가, 강가 등 물과 가까운 곳에서 자란다.

 

지금 이 그림에는 등장하지 않지만 버드나무 옆, 보이지 않는 공간에 작은 연못을 한번 그려 보자.

그러면 여인이 기다리는 장소는 연못이 있는 뒤뜰이 된다.

 

그림 속 버드나무를 해석하여 여인이 서 있는 장소와 여인이 사랑하는 사람의 신분을 알았다.

그렇다면 담 모서리에 기대어 선 그림 속 여인은 도대체 누구일까?

앞치마를 조신하게 두른 그녀의 자태가 하도 단정하여 혹시 몰락한 양반가의 여인일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그러나 그녀가 서 있는 그 자리, 담 모서리에 단서가 있다.

 

'노류장화路柳牆花'라는 한자어가 있다.

'누구든지 쉽게 꺾을 수 있는 길가의 버드나무와 담 밑의 꽃'이라는 뜻으로 창녀나 기생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그렇다. 그녀는 기생이다.

 

그러므로 이 그림은 봄기운이 절정에 이른 어느 날, 불가의 스님을 사랑하고 있는 기생이 집 뒤뜰에 나와 잔잔한 물소리를 들으며, 행여나 오늘은 사랑하는 사람이 오시지 않을까 기다리는 모습을 담은 것이다.

많은 남자들을 상대해야 하는 기구한 운명의 그녀이지만, 길가의 버들은 꺾이더라도 그녀의 마음은 그 누구에게도 쉽게 꺾이지 않을 것만 같다.

그 많은 사내들 중에 하필이면 불가의 사람을 사랑하게 된 마음이며, 문학과 예술에 등장하는 버드나무는 평화와 인내, 끈기를 상징한다는 점에서도 이런 해석에 무리가 없어 보인다.

 

신윤복은 이 그림을 자신의 다른 그림들과는 매우 다르게, 단조로운 화면 구성으로 조용하고 간결하게 그렸다.

하지만 이 그림에 담긴 이야기는 그 어떤 그림보다 애잔하고 묵직하게 감상자의 가슴을 움직인다.

<기다림>을 보며 불현듯 드는 생각이, 하늘을 나는 새라도 오늘만은 이 여인의 뜰에서 함부로 날개짓을 하거나 지저귀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혹 새의 무심한 날개짓에 버들잎이라도 움직인다면, 여인의 가슴은 기다리던 임의 인기척인 줄 알고 화들짝 놀라 콩닥콩닥 두방망이질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 글은 이일수 지음, '옛그림에도 사람이 살고 있네'(2014, (주)시공사)에 실린 글을 발췌한 것입니다.

 

2015. 9. 4 새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