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샘(淸泉)
역사 기록의 오류들 본문
우리가 확인하고 넘어가야 할 역사적 오류의 예를 몇 가지 들어 보자.
선천적 시각 장애인이었던 호메로스가 ≪오디세이아≫를 썼다는 건 어불성설이다.
그는 음유 시인, 다시 말해 시를 쓰는 게 아니라 읊는 사람이었다.
호메로스의 숭배자들이 ≪오디세이아≫를 집필했을 것이라고 보는 게 타당하다.
통 속에서 살았다고 알려진 철학자 디오게네스는 나무통이 아니라 항아리에서 지냈을 가능성이 크다.
당시 아테네에는 아직 나무통이 없었기 때문이다.
클레오파트라는 이집트인이 아니라 그리스인이다.
그리스계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일원이었던 클레오파트라는 주로 그리스어롤 사용했고,
옷을 입고 꾸미는 것도 그리스식이었다.
샤를마뉴 대제가 학교를 만들었다는 것은 사실과 다르다.
읽고 쓸 줄 몰랐던 그는 폭력적인 군인에 가까웠다.
그에 대한 잘못된 신화는 모두를 위한 학교의 필요성을 정당화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한 아이작 뉴턴에게 영감을 준 것은 그의 얼굴에 떨어진 사과가 아니라 고양이 한 마리였다.
사과 이야기는 낙하 운동의 원리를 기억하기 쉽게 설명하기 위해 볼테르가 지어낸 것이었다.
<기요틴>이라고도 불리는 단두대의 발명자는 조제프 기요탱이 아니라 앙투안 루이라는 이름을 가진 의사였다.
기요탱은 사형수들의 고통을 줄여 주기 위해 교수형이나 도끼를 사용한 참수 대신 보다 <인간적인> 처형 방식인 단두대를 채택해 줄 것을 의회에 요청했다.
<루이제트>로 불린 단두대가 처음 등장했을 때, 처형이 순식간에 끝나자 구경꾼들은 재미가 없다고 고함을 지르고 야유를 보냈다.
기계에 흥미가 많았던 루이 16세는 단두대에 사선 칼날을 달아 효율을 높이는 방법을 직접 고안해 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단두대 위에서 최후를 맞았다.
알려진 것과 달리 군주제 몰락에 결정적 계기가 된 것은 바스티유 감옥 함락이 아니다.
1789년 7월 14일, 바스티유 감옥에는 일반수 7명만이 복역 중이었다.
감옥을 습격한 시위대의 대부분은 총기를 서로 차지하기 위해 싸우다가, 혹은 조작 미숙으로 총구의 방향을 자기 얼굴로 향하게 하는 바람에 목숨을 잃었다.
나폴레옹이 대중의 추앙을 받았던 이유는 그가 언론의 자유를 금지한 것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는 자신이 전투에서 세운 무공을 직접 글로 쓰거나 기자들을 불러 받아쓰게 했다.
나폴레옹은 <역사는 누구나 동의하는 거짓말을 모아 놓은 것이다>라고 말한 것으로 유명하다.
나폴레옹 1세와 정반대의 처지였던 이가 바로 나폴레옹 3세다.
그는 당대의 유명 작가 빅토르 위고에게 집중적이고 체계적인 비난의 포화를 맞는 바람에 대중에게 나쁜 이미지로 각인되었다.
하지만 그는 프랑스 통치자로서는 최초로 보통 선거에 의해 선출된 군주였다.
그는 철도와 도로망을 대대적으로 확충해 근대적인 경제 발전의 기틀을 다졌고, 은행의 탄생과 당시로서는 혁신적인 금융 시스템의 도입에도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화가 빈센트 반 고흐가 스스로 자신의 귀를 절단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여러 사람의 증언을 맞춰 보면 그는 친구인 고갱과 만취 상태에서 싸우다가 귀를 잃어벼렸을 가능성이 크다.
노벨 수학상이 없는 이유는 알프레도 노벨의 부인이 수학자와 바람이 났기 때문이라는 세간의 설이 있다.
그런데 노벨은 평생을 독신으로 산 사람이었다.
그가 노벨 수학상을 만들지 않은 것은 수학을 지나치게 추상적인 학문이라고 여겼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월트 디즈니가 딸을 즐겁게 해주려고 미키 마우스라는 캐릭터를 그렸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그는 자신의 밑에서 일하던 어브 아이웍스라는 애니메이터의 공을 독차지했을 뿐이다.
※이 글은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전미연 옮김, '기억 2'(열린책들, 2020)에서 발췌하였다.
2020. 10. 12. 새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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