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샘(淸泉)

여행하는 인간, 호모 비아토르 본문

글과 그림

여행하는 인간, 호모 비아토르

새샘 2020. 10. 6. 20:47

사진 출처-https://www.amazon.com/Homo-Viator-Introduction-Metaphysic-2010-12-10/dp/B01FGMYQ9C

 

미래의 로롯들은 여행을 하게 될까?

인공지능이 지금보다 더 발전하고, <블레이드 러너>(1982)에서처럼 로봇과 인간을 구별하기 어려운 그런 세상이 왔을 때, 로봇들은 지금의 인간들처럼 당장 자기 삶의 절실한 필요와는 별 상관없는 이유로 잘 알지도 못하는 먼 곳으로 길을 떠날까?

업무 출장이라면 혹시 모르겠지만, 인간들의 배낭휴가나 배낭여행 같은 것을 로봇들은 하지 않을 것 같다.

이런 여행은 피곤하고 비용이 많이 들며 때로 위험을 초래한다.

로봇의 설계자는 이런 여행이 가능하지 않도록 만들 것이고, 만약 그런 일이 벌어진다 해도 소프트웨어 이상이나 기계의 반란으로 간주할 가능성이 크다.

 

그러고 보면 인류는 이상한 종족이다.

인터넷이 막 보급될 무렵 여러 미래학자들이 여행 수요가 줄어들 것이라 예견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제 뉴욕이나 파리에 몸소 가지 않고도 자기 집 소파에서 충분히 다 구경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TV는 영화관을 대체할 것으로 예상되었다.

비디오플레이어가 대중화될 때도 비슷했다.

그러나 영화관을 찾는 관객수는 아직까지도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여전히 사람들은 굳이 옷을 차려입고 밖으로 나가 공기도 별로 좋지 않은 극장까지 가서 옆자리 사람의 팝콘 씹는 소리르 견디면서 영화를 보고 있다.

 

구글은 전 세계 유명 미술관을 실감나게 체험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오래전부터 운영 중이다.

인기 있는 미술관에서는 관람객에 치여 그림을 상세히 보기 어렵다.

구글 아트앤컬처 Google Arts & Culture 앱이나 웹사이트로 들어가면 세계의 유명 미술관을 마치 실제 들어가서 둘러보는 것처럼 360도로 가상 체험할 수 있는 코너도 있고,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요하네스 페르메이르 Johannes Vermeer의 작품들을 마치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듯이 꼼꼼하게 살필 수 있는 코너도 있다.

직접 가지 않는다는 점만 빼면, 모든 면에서 현장에서 감상하는 것보다 낫다.

다리도 아프지 않고, 티켓 값도 아낄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떠난다. 가서 거기 있고 싶어하고 직접 내 몸으로 느끼고 싶어한다.

 

철학자 가브리엘 마르셀 Gabriel Marcel인류를 '호모 비아토르 Homo viator', 즉 '여행하는 인간(걷는 사람)'으로 정의하기도 했다.

인간은 끝없이 이동해 왔고 그런 본능은 우리 몸에 새겨져 있.

인류는 대형 유인원과 97퍼센트 이상 유전자를 공유하지만 그들과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 있다.

고릴라, 오랑우탄, 침팬지 등은 활동량이 인간에 비해 현저히 적다.

그들은 하루의 대부분의 시간을 가만히 있는다.

열 시간 정도를 털을 고르거나 쉬고 아홉 시간에서 열 시간 정도를 잔다.

 

유인원을 연구한 학자들은 궁금했다.

어째서 이들은 운동이라고는 거의 하지 않는데 인간과 같은 대사증후군이나 심혈관 질환이 없을까?

동물원의 침팬지조차도 고혈압이나 당뇨병에 거의 걸리지 않는다고 한다.

그런데 인간은 왜 매일같이 엄청난 활동을 하지 않으면 병에 걸리는가?

유인원과 달리 초기 인류는 나무에서 내려와 걷고 뛰었다.

탄자니아의 하드자족 Hadza people은 하루 평균 9킬로미터에서 12킬로미터를 이동하는데, 이는 평균적인 미국인이 일주일 동안 걷거나 뛰는 거리와 비슷하다고 한다[새샘은 하루에 적어도 8킬로미터(1만 보)를 걷는다].

 

인류는 치타처럼 빠르지 않고, 사자처럼 날카로운 이빨과 발톱을 갖고 있지 않았다.

대신 인간에게는 무시무시한 이동 능력과 지구력이 있었다.

BBC 방송의 다큐멘터리 <인간 포유류, 인간 사냥꾼 Human Mammal, Human Hunter>은 '인간은 특이한 타입의 포유류이다'라는 내레이션으로 시작한다.

초기 인류의 사냥 방식을 엿볼 수 있는 이 다큐멘터리에서 칼라하리사막의 한 부족은 집단으로 쿠두 kudu 영양 사냥에 나서는데, 이들의 방식은 내가 지금까지 생각해왔던 것과는 많이 다르다.

그들은 사냥감의 냄새와 흔적을 따라 뛰고 또 뛴다.

목표를 무리에서 고립시키면서 추적을 계속한다. 땡볕 아래에서 그들은 무려 여덟 시간이나 영양을 쫓는다.

그들이 사냥감을 마침내 잡게 되는 것은 누군가 활을 잘 쏴서도 아니고, 창을 잘 던져서도 아니다.

영양은 탈진하여 무릎을 꿇고 주저앉는다. 그러면 그들은 창을 들고 사냥감 가까이 다가간다.

탈진한 영양은 모든 것을 포기한 듯, 자신을 집요하게 추적해온 포식자에게 몸을 맡기듯 눈을 끔뻑인다.

사냥꾼은 창으로 단번에 사냥감을 죽인 후, 흙을 뿌려 여덟 시간 동안 자신들의 추적을 따돌린 쿠두 영양에게 존중을 표하고 머리와 몸을 정성스럽게 쓰다듬는다.

 

2007년에 하버드대 고고학과와 유타대 생물학과 합동 연구팀은 원시 인류가 사냥감이 지쳐서 쓰러질 때까지 뛰어서 쫓아가도록 진화했다는 것을 밝혀내 BBC 다큐멘터리와 비슷한 결론에 이른다.

우리는 이 다큐멘터리를 통해 초기 인류가 어떤 존재였을지, 우리가 어떤 이들로부터 진화해왔을지를 알 수 있다.

인류는 걸었다. 끝도 없이 걷거나 뛰었고, 그게 다른 포유류와 다른 인류의 강점이었다.

어떤 인류는 아주 멀리까지 이동했다.

아프리카에서 출발해 그린란드나 북극권까지 갔고, 몽골에서 출발한 어떤 무리는 얼어붙은 베링해협을 건너 아메리카 대륙으로 넘어가 마야와 잉카, 아즈텍 문명을 일구었다.

 

2003년에 나는 미국 아이오와대학에 머물고 있었다.

전 세계에서 온 작가들이 게스트하우스에 석 달간 함께 머물며 교류를 하는 프로그램이었다.

아이오와는 미국 중서부에 위치한 작은, 주로 옥수수와 대두 농사가 주력 산업인 따분한 곳이다.

그래도(혹은 그래서) 아이오와대학교는 창작 프로그램으로 유명하다.

글을 쓰기에는 이런 곳이 딱 좋다. 한 눈을 팔 것이 전혀 없다.

미국 문학계를 종횡할 작가 지망생들과 그들을 가르친 유명 작가들이 대학이 위치한 인구 오만의 소도시 아이오와시티를 거쳐갔다.

태산 같은 무료함과 권태로 신음하는 작가들을 위해 주최측에서는 가끔 소풍을 주선했다.

 

하루는 아메리카 원주민 유적을 보러 간다고 하길래 따라 나섰다.

≪검은 꽃≫을 출간한 직후였고, 그걸 쓰기 위해 과테말라의 티칼이나 멕시코 유카탄반도 일대의 대규모 마야문명 유적지를 다녀온 터였기 때문에, 아이오와평원의 아메리카 원주민 유적은 유적이라고 할 것도 없어 보였다.

에피지 마운드 국립천연기념물 Effigy Mounds National Monument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이 유적은 옐로강에 면해 있는 나지막한 언덕이었다. 그게 전부였다.

아이오와가 유명 관광지가 아닌 것은 다 이유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버스에서 내려 언덕을 올라갔다.

몇 달 동안 보아온 지평선에 지친 터라 그래도 초원과 굽이굽이 흐르는 강이 내려다보이니 다들 좋아했다.

 

"그들이 이 언덕을 쌓았어요."

안내를 맡은 아이오와 국제 창작 프로그램 관계자가 우리가 딛고 선 언덕을 가리키며 말했다.

아주 오래전 이곳에 살던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멀리서 흙을 실어와 강가에 인공의 언덕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고도는 높지 않았지만 중장비도 없던 시절에 사람의 힘만으로 쉽게 쌓을 만한 높이는 아니었다.

 

"왜요?" 내가 물었다.

"기본적으로 무덤이었죠. 선조들을 기리거나 그들의 정령과 소통하는 용도였다는 설도 있고요.

마운드빌더라고 불리는 이들은 수천 년 전부터 주로 미시시피강 동쪽에 이런 거대한 언덕들을 쌓고 신분이 높은 이들을 묻었대요.

아이오와주만 해도 꽤 돼요. 

왜 하필이면 강가에, 이렇게 큰 언덕을 인공으로 만들었는지 정확한 이유는 고고학자들도 아직 모른대요."

 

하지만 그게 뭔지 나는 바로 알 것 같았다.

"배산임수背山臨水네."

아무도 내 말을 알아듣지 못했고 나도 굳이 번역해주지 않았다.

동아시아의 어떤 민족들은 사람을 평지에 묻지 않고 산에 묻어요. 이왕이면 강이 보이면 더 좋지요.

그런 자리를 길하다고 생각하고 후손이 잘된다고 믿거든요.

 

장례 풍습은 대를 거듭해도 쉽게 바뀌지 않는다.

그래서 고고학자들은 매장의 풍습을 보고 그들이 어디에서 이주해 왔는지를 추적한다.

대평원을 가로지르며 흐르는 강가에 정착한, 엉덩이에 푸른 반점이 있는 종족들은 신분이 높은 자가 사망하자 언덕을 쌓아야 한다고, 왠지는 모르지만 그렇게 해야 한다는 강한 압박을 느꼈을 것이다.

사람을 어떻게 강가에 묻나, 생각했을 것이다.

 

언덕 위에는 봉분들로 보이는 부드러운 융기들이 잔디로 덮여 있었다. 익숙한 풍경이었다.

경북 고령이나 부산 동래의 가야 고분군들이 바로 떠올랐다.

그리고 끝없이 이동하는 인류의 운명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했다.

유전자에 새겨진 이동의 본능.

 

여행은 어디로든 움직여야 생존을 도모할 수 있었던 인류가 현대에 남긴 진화의 흔적이고 문화일 지도 모른다.

 

피곤하고 위험한데다 비용도 많이 들지만 여전히 인간은 여행을 포기하지 않고 있다.

아니, 인터넷 시대가 되면 수요가 줄어들 거라던 여행은 오히려 더욱 활발해지고 있다.

 

세계관광기구 통계에 따르면 인터넷이 아직 대중적으로 보급되기 전인 1995년에는 전 세계적으로 5억 2천만 명이 다른 나라로 여행을 떠났으나 2016년이 되면 12억 4천만 명으로 두 배가 넘게 늘어났다.

전 세계 항공 승객은 1995년에는 13억 명가량이었는데 2017년에는 39억 명으로 세 배나 폭증했다.

인류는 여행을 포기할 생각이 없을 뿐 아니라 기술이 발전하면 할수록 더 많이 이동하고자 한다는 것을 통계는 보여준다.

VR이니 AR이니 하는 가상현실 기술이 여행을 대체하리라는 얘기도 어디선가 벌써 하고 있을 것 같지만 지금까지의 역사를 돌아볼 때,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을 것 같다.

 

호모 비아토르는 지금 이 순간도 전 세계 곳곳에서 짐을 꾸리고 길을 떠나고 있다.

 

※이 글은 김영하 산문, '여행의 이유'(문학동네, 2019)에 실린 글을 옮긴 것이다.

 

2020. 10. 6 새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