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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 신무기 'V1' 발사 개시, 전쟁 이길 것으로 착각

새샘 2020. 10. 5. 20:45

<V1 비행폭탄 - 나치 독일이 준비한 대망의 '경이로운 무기' V1 비행폭탄. 1944년 6월 초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성공하자 독일군은 그 보복으로 6월 12일 런던을 향해 10발의 V1을 발사했다. 독일은 1945년 3월까지 8,000발이 넘는 V1을 런던으로 발사해 약 2,400발이 명중했다. 그러나 경이로운 무기의 활약도 전쟁의 결과를 바꿀 수는 없었다.>

1944년 6월 6일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대한 독일군의 대응은 혼란 그 자체였다.

독일 공군 기상관측관들은 6월 5일의 악천후를 이유로 침공 임박 가능성을 일축했다.

히틀러는 새벽 3시에 잠자리에 들었고, 노르망디가 아닌 파드칼레가 연합군의 공격 목표라고 믿은 참모들은, 어디까지나 '양동작전'에 불과할 노르망디 상륙 때문에 히틀러를 깨울 수는 없었다.

운이 안 따라 주려는지, 대서양 방어를 책임진 롬멜 원수는 휴가차 독일에 가 있다가 13만에 달하는 연합군의 상륙이 거의 끝난 오후 5시가 되어서야 전선에 돌아왔다.

 

6월 12일에 이르러 연합군이 확보한 5개 해변의 교두보는 단일 전선으로 굳어졌고, 독일군은 조금씩 뒤로 밀렸다.

하지만 나치 지도자들은 '경이로운 무기' V1에 큰 희망을 걸었다.

히틀러는 이것이 전쟁의 운명을 바꿔놓을 것이라고 믿었다.

50여 개의 발사대를 만들어 V1 비행폭탄을 런던으로 발사할 작정이었다.

V1 비행폭탄은 제트 엔진으로 움직이는 세계 최초의 순항미사일이었다.

작은 비행기에 제트 엔진이 하나 달린 형태였고, 실제로 목표 지점까지 비행기처럼 날아갔다.

조종사 없이 원시적인 유도장치에 의해 날아가서는, 폭탄을 탑재한 채 목표에 직접 충돌하는 것이 비행기와 다른 점이었다.

 

컴퓨터도 없던 시절에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는지 의문이 들 수도 있지만, 독일 공군이 요구한 수준은 그저 1,000~1,500미터 정도의 고도를 정해진 방향에 맞춰 똑바로 날아가다가 일정한 거리에 이르면 그냥 떨어져 주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이 정도면 원시적인 관성유도장치만으로도 어떻게든 가능한 수준이었다.

게다가 제작비는 영국이나 미국의 중重폭격기에 비해 200~300분의 1에 불과했지만, 그 안에 장착된 폭약은 847킬로그램으로 결코 만만치 않았다.

히틀러는 이 신무기를 한꺼번에 수백 발씩 영국으로 퍼부을 작정이었다.

그러나 생산 과정에 문제가 생겨 제조가 늦어졌다.

히틀러는 서두르라고 채근했다.

 

6월 12일,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성공을 축하하는 분위기가 채 가시기도 전에 프랑스의 파드칼레 해안에서 10발의 V1이 발사됐고 그 중 4발이 영국 땅에 떨어졌다. 피해도 경미했다.

영국은 V1에 신경을 쓰느니 노르망디에서의 싸움에 집중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영국의 독일의 능력을 과소평가하고 있었다.

첫 공격이 있은 지 불과 사흘 뒤부터 영국은 그 대가를 톡톡히 치렀다.

 

6월 15일에는 V1 244발이 영국으로 쏟아졌고, 6월 29일까지 무려 2,000발이 영국을 향해 발사되었다.

전쟁 초기의 맹렬한 폭격이 준 악몽이 아직도 생생하던 런던 시민은 이 뜻밖의 날벼락으로 6,200여 명이 목숨을 잃었고, 그 몇 배에 달하는 인구가 부상을 당했으며, 2만여 채의 가옥이 파괴되었고, 150만 명이 6~7월 사이에 런던을 버리고 피난을 가야 했다.

 

V1 발사를 놓고 독일 국방군 보고서와 언론 보도는 마치 전쟁에서 다 이긴 것처럼 기세등등했다.

하지만 그것은 환상이었다.

선전장관 괴벨스는 여론의 추이를 보고 낙심했다.

위험한 낙관론보다는 어떤 희생을 치르고서라도 싸우겠다는 결사항전의 자세가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괴벨스는 전쟁이 곧 끝나기라도 할 것 같은 낙관적 분위기가 조성되었다고 개탄하면서 이런 환상을 깨야 한다고 봤다.

 

히틀러는 V1 덕분에 새로운 기회가 열리는 것처럼 보이자 참모들을 거느리고 베르히스가덴의 별장을 떠나 서부전선으로 날아갔다.

V1의 위력을 강조하며 흔들리는 독일군의 사기를 다잡을 참이었다.

하지만 롬멜은 전력이 압도적으로 우세한 연합군을 상대로 싸우는 것은 가망 없는 일이며, 서부전선에서 더는 버틸 수 없으니 정치적 해결을 모색해달라고 애원했다.

 

그날 오후 잘츠부르크로 돌아간 히틀러는 롬멜이 비관론자가 되었다면서 보좌진 앞에서 실망감을 드러냈다.

"오직 낙관론자만이 일을 해날 수 있다"고 히틀러는 강조했다.

하지만 선전장관 괴벨스의 생각이 맞았다.

히틀러의 낙관론은 환상에 지나지 않았다.

결과는 우리가 다 아는 바와 같다.

 

현실을 외면한 공허한 낙관론은 언제나 패배를 부를 뿐이다.

 

※이 글은 박상익 지음, <나의 서양사 편력 2>(푸른역사, 2014)에 실린 글을 옮긴 것이다.

 

2020. 9. 9 새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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