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샘(淸泉)
1990년대 서울에서 발굴된 유적들 3: 경복궁과 창덕궁 본문
경복궁
경복궁景福宮 복원·정비를 위한 발굴조사는 1990년에 시작했다.
침전寢殿 지역에 대한 발굴이 1990년에 시작하여 1992년까지 3차에 걸쳐 이루어졌으며, 이후 동궁東宮[왕세자궁] 지역에 대한 조사가 1994년에 2차에 걸쳐 실시되었다.
1차 조사에서는 동궁의 전각으로 공부방이자 사무실로 쓰인 비현각丕顯閣 터에서 기초 적심[건물 붕괴를 막기 위해 주춧돌 밑에 자갈 등으로 까는 바닥다짐 시설] 유구遺構[옛날 토목건축의 구조와 양식을 알 수 있는 실마리가 되는 자취] 일부와 주변 행각行閣[월랑月廊: 궁궐의 정당正堂(왕이 조회를 하던 궁전) 앞이나 좌우에 지은 줄행랑] 터의 기초 적심 유구 일부가 노출되었고, 2차 조사에서는 1차 조사에서 나타난 건물의 위치를 좀더 확신할 수 있는 유구들이 발굴되었다.
대부분이 기초 적심이었으며, 기둥과 기둥 사이의 배수로 유구, 자선당資善堂[왕세자 즉 동궁의 처소] 터 앞쪽 함실函室[부넘기가 없이 불길이 그냥 곧게 고래로 들어가게 된 아궁이 구조] 위치로 보이는 부분의 기초 적심 유구, 그리고 자선당 북쪽 행각 터의 굴뚝으로 연기가 빠져나가는 통로인 연도煙道 유구 등이 발견되었다.
이번 발굴조사 지역인 동궁 지역 일대는 1999년에 복원되었다.
경복궁에 대한 발굴조사는 1995년에도 이어진다.
이번 발굴조사는 일제강점기의 상징인 조선총독부 건물의 철거와 관련이 있다.
1995년 8월 15일 광복절 50주년을 맞이하여 경복궁을 복원하기 위해 옛 조선총독부 건물의 철거가 선포되었다.
그날 상징적으로 청사의 중앙돔 랜터의 해체가 이루어졌다.
이처럼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사용하던 조선총독부 건물의 해체 계획에 따라 박물관의 사회교육원으로 쓰던 건물을 증개축하여 국립중앙박물관이 신축되기 전까지 사용하기로 하고, 부족한 사무공간의 확보를 위한 앞쪽 공간에 별동의 신축계획이 수립되었다.
이 부지는 경복궁 서문인 영추문迎秋門의 남쪽 궁궐 담장 안쪽의 500여 평의 대지로 발굴 당시 문화재연구소 건물의 서쪽 지역이다.
1986년까지 국립영화제작소가 있었으나, 여러 기록에 남아있는 건물배치 상태를 보니 훈국訓局(훈련도감) 군영軍營[군대가 주둔하는 곳]인 직소直所[숙직이나 당직을 하는 곳] 터와 초관哨官[한 초哨를 거느리던 무관] 직소 터가 들어서 있던 곳으로 건물 터의 유구가 남아 있을 가능성이 있었다.
파괴되지 않고 부분적으로 남아 있는 토층을 분석한 결과 건물의 건립과 철거가 3차례에 걸쳐 이루어진 결과 3개의 인위적 성토층이 형성되어 있었으며, 전체적으로 중앙청 시기, 일제강점기, 고종대 중건 시기, 고종 이전 시기 등 4개의 문화 토층을 확인하였다.
유구 또한 많이 확인되었다.
일제강점기에 거의 파괴되었을 것으로 생각했던 훈국(훈련도감) 직소 터의 주춧돌[초석礎石]과 적심 외에도 고종대의 경복궁 중건 때에 건립된 훈국 군영 직소보다 앞선 시기에 지어진 건물 터의 유구가 4개소 발견되었고, 콘크리트 하수관 북쪽에서도 유구 1기가 확인되었다.
발굴조사가 끝난 지 1년이 지난 1996년 11월 13일, 옛 조선총독부 청사는 완전히 철거되었다.
1997년 10월 18일부터 1998년 4월 4일까지 경복궁 태원전泰元殿 권역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졌다.
태원전은 처음에는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초상화를 모시던 건물로 지었지만, 나중에는 빈전殯殿[왕실에 돌아가신 분이 있을 때 관을 모셔두는 곳], 혼전魂殿[종묘에 모실 때까지 만 2년 동안 위패를 모시는 곳], 영전靈殿[돌아가신 분의 초상화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곳] 등의 용도로 쓰였다.
고종 때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왕과 왕비, 대비가 죽은 후 발인할 때까지 관을 모시던 건물을 새로 지었다.
명성황후가 시해되자 시신을 이곳에 안치했고, 국상이 있을 때는 장례용으로 사용했으며, 보통 때는 궁녀들이 거주했다.
발굴조사는 1997년에는 유구의 범위와 위치를 확인하는 데 주력했고, 1998년에는 추가 확인된 유구의 범위와 이미 확인된 유구들의 성격, 그리고 다른 유구와의 관계 등을 파악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조사된 유구는 영사재永思齋[국상 때의 재실齋室로서 왕, 왕후, 후궁이 머무는 내별실] 터 등 건물 터 6개소, 담장 터 2개소, 화계花階[계단식 화단] 기초 2개소, 기단 1개소, 배수로 6개소, 원형의 깐돌[부석敷石: 집터나 무덤의 바닥이나 둘레에 한두 겹 얇게 깐 돌] 유구 2개소, 가타 유구 2개소 등 모두 22개소이다.
출토유물로는 재질에 따라 기와류, 자기·도기류, 금속류, 기타로 분류할 수 있다.
자기류는 청자, 분청사기, 백자 등의 출토되었는데, 청자와 분청사기는 극소수이고 백자가 주류를 이룬다.
그릇 종류별로는 대접, 사발, 접시, 잔, 제기 등 다양하였다.
도기류에는 병, 단지, 호壺[입구가 손이 들어갈만한 크기의 큰 그릇이며, 속에 보관된 것을 덜어내는 용도로 주로 사용] 등이 조사되었고, 흑갈유黑褐釉[흑갈색 유약]를 조잡하게 발라놓은 것도 있다.
발굴단은 태원전의 정확한 위치는 확인하지 못했지만 발굴보고서에 태원전 권역의 정비·복원을 위한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하였다.
이 발굴조사 이후 태원전은 위 사진에서처럼 2005년에 복원되었다.
이 발굴조사 이후 태원전 권역에 대한 발굴이 다시 이루어졌다.
발굴기간은 태원전 터에 대한 발굴조사가 끝난 1998년부터 2년이 지난 2000년 11월 15일부터 12월 30일까지였다.
보고서 이름이 ≪경복궁 태원전 권역 시굴조사 약보고서≫인 것으로 보아 태원전 터뿐만 아니라 그 권역에 대한 조사였고, 전면 발굴이 아닌 시굴조사였으며, 그래서인지 정식 발굴보고서가 아닌 '약보고서' 형태로 발간되었다.
그러나 발굴보고서를 확보하지 못해 그 발굴 내용을 직접 확인할 수 없었다.
1998년에는 경복궁 경내에 있는 수도 가압시설물을 경복궁 복원사업과 관련하여 서울시 종로구 세종로 1-28로 옮기기 위해 사전에 문화유적이 존재하는지 여부를 확인하기 위한 발굴을 실시하였다.
발굴 결과 조사구역 안에서 일제강점기 총독부 직원들의 관사와 관련된 것으로 보이는 배수로 유구 1기가 발견되었다.
발굴단은 근대 이후에 축조된 배수로이어서 공사에 지장이 없다면 보존하는 것이 바람직하며, 사용된 석재들은 사괴석四塊石[사고석: 벽이나 돌담 또는 화방火防을 쌓는데 쓰는 육면체의 돌]과 장댓돌[장대석長臺石, 장대長臺: 섬돌 층계나 축대를 쌓는데 쓰는, 길게 다듬어 만든 돌]인 것으로 판단하였다.
창덕궁
1980년대에 이미 창경궁, 경희궁, 경복궁 복원을 위한 발굴조사가 이루어진 것에 비해 창덕궁에 대한 발굴은 1995년에야 시작되었다.
아마도 창덕궁은 상대적으로 일제강점기에 자행된 궁궐의 파괴 행위 정도가 심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창덕궁昌德宮은 1405년(태종 5)에 건립된 왕궁이다.
처음에는 국왕이 거처하는 제1궁궐 즉 으뜸 궁궐인 법궁法宮(정궁正宮)인 경복궁에 이어 이궁離宮[행궁行宮: 임금이 나들이 때에 머물던 별궁]으로 창건되었지만, 이후 국왕들이 창덕궁에 많이 머물렀고, 임진왜란(조일전쟁) 이후에는 경복궁이 복구되지 못하면서 경복궁이 중건되는 고종 때까지 법궁의 기능을 했다.
일제는 창덕궁을 외국인에게 관람을 허가하면서 이에 따른 여러 시설을 수리하면서 전각이 많이 철거되었는데, 이 시기에 이번 발굴조사 대상인 외행각外行閣[전각 출입문들을 연결하는 줄행랑으로서 방향에 따라 동, 서, 남, 북행각 등으로 구분]은 파괴·철거되어 모두 변모된 상태였다.
따라서 이번 발굴조사 목적은 일제가 이처럼 파괴하고 철거한 외행각의 원형을 규명하여, 복원에 필요한 자료를 확보하는 것이었다.
발굴기간은 1995년 6월 29일부터 12월 19일까지였고, 발굴범위는 진선문, 숙장문, 외행각, 정청, 어도 등 820평이었다.
발굴조사는 크게 세 구역으로 나누어 실시하였다.
1구역은 진선문 터와 서쪽 행각[현 진선문 북행각과 남행각, 인정전 서행각] 터 , 어도御道[임금이 다니는 길: 현 금천교에서 시작하여 진선문을 거쳐 숙장문까지, 그리고 인정문 앞 진선문-숙장문 어도에서부터 인정전 앞까지 연결] 터이고, 2구역은 숙장문 터와 동쪽 행각[현 인정전 동행각] 터, 남쪽 행각[현 숙장문 남행각] 터, 3구역은 정청政廳[인사 업무를 담당하던 관서] 터이다.
진선문進善門은 창덕궁 정문인 돈화문敦化門을 지나 금천교禁川橋를 건너면 나오는 중문中門이고, 숙장문肅章門은 진선문을 지나 맞은편에 있는 중문이다.
창덕궁의 정전 인정전仁政殿 정문인 인정문仁政門으로 들어갈려면 인정문 동서쪽에 각각 설치된 이 두 개의 중문 중 어느 하나를 거쳐야 한다.
먼저, 1구역 조사에서는 어도를 확인하는 조사를 했지만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고, 서쪽 행각 터에 대한 조사에서는 서쪽 행각 중 북쪽 행각[현 진선문 북행각] 터의 동쪽 기단석基壇石[건축물이나 비석 따위의 기초로 쌓는 돌] 일부가 출토되어 전면 발굴조사를 실시한 끝에 진선문 터의 동북 모서리 기단석임을 확인하였다.
2구역 조사에서는 이미 노출된 유구가 있었는데, 숙장문 북서 기단 석렬石列[길게 줄지어 늘어선 돌의 무리] 일부와 주춧돌 3기가 그것이다.
이후 관람로를 이동하고 전면 발굴조사를 실시한 결과, 새롭게 주춧돌 3기와 적심·기단석 등을 발견함으로써 숙장문 터의 전모를 확인할 수 있었다.
동쪽 행각은 조사 결과 행각의 동서 양쪽 기단 석렬과 기단석 내부에서는 적심돌이 3열로 정연하게 노출되었고, 행각 터의 남쪽 끝 부분에는 ≪동궐도東闕圖≫[경복궁 동쪽 궁궐인 창덕궁과 창경궁을 전각과 궁궐 전경을 조감도 형식으로 1826~1830년 도화서 화원들이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그림]와 ≪동궐도형東闕圖形≫[동궐을 근대식 지도제작 기법으로 1908년 무렵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평면도]에 나타나 있는 한 칸 집에 사용된 주춧돌이 출토되어 동쪽 행각의 대략적인 윤곽을 확인할 수 있었다.
남쪽 행각은 남쪽 행각 터 서쪽 안에 세워졌던 옛 황실재산관리총국 자리에서 남쪽 행각 터의 서쪽 끝 부분을 확인할 수 있는 적심돌이 출토됨으로써 남쪽 행각 터의 규모와 전모를 어느 정도 추정할 수 있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3구역의 조사대상인 정청 터는 그 위로 후대에 축조된 담장이 동서 방향으로 가로질러 자리잡고 있었는데, 담장 남쪽 면에는 정청 터의 남쪽 기단석과 적심이 비교적 양호한 상태로 노출되어 있었다.
출토유물로는 기와와 도자, 그리고 동전들이 나왔다.
도자 종류에는 순백자, 청화백자, 상감청자, 분청사기, 흑유자, 옹기 파편 등이었고, 대다수가 백자 파편이었으며 상감과 분청 등은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출토유물의 제작시기는 15세기(상감청자, 양질의 인화분청 등)에서부터 조선 후기(청화백자)까지이다.
동전은 상평통보가 모두 14점 출토되었다.
※출처
1. 서울역사편찬원, '서울의 발굴현장'(역사공간, 2017)
2. 구글 관련 자료
2022. 2. 9 새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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