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샘(淸泉)
코핀과 스테이시의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 1부 고대 근동 - 1장 서양문명의 기원 11: 이집트 문명 3-고왕국의 종말, 중왕국, 1장 결론 본문
코핀과 스테이시의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 1부 고대 근동 - 1장 서양문명의 기원 11: 이집트 문명 3-고왕국의 종말, 중왕국, 1장 결론
새샘 2022. 2. 10. 14:20
이집트 왕조와 시대 구분 | |
왕조 이전 시기 | 서기전 1만 년경~3100년 |
초기 왕조 시기 | 서기전 3100년~2686년경 |
고왕국 | 서기전 2686년경~2160년 |
제1중간기 | 서기전 2160년~2055년 |
중왕국 | 서기전 2055년~1650년경 |
제2중간기 | 서기전 1650년경~1550년 |
신왕국 | 서기전 1550년~1075년 |
1. 고왕국의 종말
아직 완전히 밝혀지지 않은 여러 원인 때문에 고왕국의 제5왕조(서기전 2494년~2345년)과 제6왕조(서기전 2345년~2181년) 동안 파라오의 권력이 서서히 쇠퇴했다.
피라미드 건축이 계속되었지만 이 시기의 건축물은 기술, 숙련도, 규모 등에서 평범한 수준에 머물렀다.
이는 파라오의 위축된 권력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네켄 Nekhen(히에라콘폴리스 Hierakonpolis)에서 태양신 라 Ra를 섬기던 사제들은 허약한 파라오에게 적대적인 태도를 보였으며, 급기야 파라오를 호루스 Horus/라 Ra의 화신에서 끌어내려 단지 신의 아들에 불과한 존재로 격하시켰다.
파라오의 지위 하락을 가장 극적으로 드러낸 것은 주지사가 세습적인 지방 귀족계급으로 변질되기 시작했다는 사실인데, 전성기의 강력한 제3왕조(서기전 2686년경~2613년)와 제4왕조(서기전 2613년~서기전 2494년)의 왕이라면 이런 상황을 결코 용납하지 않았을 것이다.
귀족세력이 강해진 나머지 제6왕조의 파라오였던 페피 1세 Pepi I는 귀족 출신 여성과 결혼했고 그 결혼으로 태어난 아들이 후계자가 되기도 했다.
학자들은 지방 관료와 사제가 어떻게 파라오의 권력을 흡수했는지에 대해 확실히 알지 못한다.
추측건대 제4왕조의 어마어마한 건축비 투입이 경제적 침체를 초래한 나머지 수도 멤피스 Memphis 바깥에서 물질적 결핍과 더불어 불평불만이 쏟아졌을 것이다.
기후 조건의 변화로 나일강의 범람이 불규칙해지고 그 결과 지방에 기근이 닥쳐 아사자가 발생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도 있다.
고왕국 후기의 한 돋을새김(부조浮彫)에는 눈이 튀어나오고 갈빗대가 앙상하게 드러나 울부짖는 이집트인들이 묘사되어 있다.
이 고통스런 이미지는 오늘날 동북 아프리카를 황폐하게 만들고 있는 기근과 고통을 연상시킨다.
사태를 더욱 악화시킨 것은 남쪽 누비아 Nubia에서 소국들이 등장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아마도 이집트인이 이웃을 침공한 데 대한 반응이었을 것이다.
뛰어난 조직과 장비로 누비아인은 제1폭포 일대의 귀금속 광상鑛床에 이집트인이 접근하는 것을 차단했고 그것은 이집트 경제를 더욱 악화시켰다.
이렇듯 이집트가 어려움을 겪게 되자 자연히 여신 마아트 Ma'at의 연결고리를 자처하던 파라오의 입지도 약화되었다.
그리고 파라오를 대신해 지방 지배자와 종교 당국이 지방의 안정과 질서의 유일한 실질적 보호자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제1중간기 First Intermediate Period(서기전 2160년~서기전 2055년)가 시작되던 서기전 2160년 즈음 이집트는 더 이상 하나의 통일국가가 아니었다.
멤피스의 중앙 정부는 붕괴되었고 이집트 역사의 이전 패턴이 다시 나타났다.
헤라클레오폴리스(헤라클레오폴리스 마그나 Herakleopolis Magna)에 기반을 둔 북부 권력[제9왕조(서기전 2160년경~서기전 2130년경)와 제10왕조(서기전 2130년경~서기전 2055년경)] 중심지와 테베 Thebes[제11왕조(서기전 2134년~서기전 2061년경)]에 거점을 둔 남부 체제가 서로 대립했다.
이 두 권력의 왕조는 제각기 이집트 전체를 대표하는 정당한 파라오임을 주장했다.
정치적 혼란에도 불구하고 제1중간기에는 이집트 사회에 중대한 발전이 있었다.
부는 고왕국에 비해 훨씬 더 넓고 고르게 분배되었다.
문화, 특히 예술 부문도 마찬가지였다.
한때 멤피스의 파라오 궁정이 독점하던 재원을 이제는 지방이 차지했고, 지방 엘리트는 지방 사회의 보호자이자 지방 예술가의 후원자로 등장했다.
그 결과 이집트는 사회 전역에 다양한 형태의 문화가 급속히 전파되었다.
이런 문화는 원래 파라오의 궁정에서 발전된 것이었지만 이제는 이집트 사회 전체가 향유하게 된 것이다.
대립하는 두 파라오 왕조 사이의 전쟁은 서기전 2055년까지 계속되었다.
바로 그해에 테베의 멘투호텝(멘투호테프) 2세 Mentuhotep II가 북부를 정복하고 통일 이집트의 지배자임을 선포했다.
그의 치세와 더불어 이집트 역사의 중왕국 시대가 시작되었다.
2. 중왕국
남부의 테베를 중심으로 한 통일정부 수립과 더불어 이집트는 중中왕국 Middle Kingdom(서기전 2055년~서기전 1650년경) 시대로 접어들었다.
멘투호텝 2세가 죽은 직후 재상인 아메넴헤트가 왕권을 찬탈하여 아메넴헤트 1세 Amenemhat I 파라오로 등극하면서 이집트의 찬란한 제12왕조 Twelfth Dynasty(서기전 1991년~서기전 1782년)를 확립했다.
아메넴헤트 1세는 테베를 권력 중심지로 유지하면서 멤피스 남부에 새로운 수도를 건설했다.
새 수도 이름 잇토이 Itjtawy는 '아메넴헤트가 두 땅을 소유했다'는 뜻이다.
제12왕조는 약 200년 동안 권력을 유지하면서 탁월한 파라오를 연이어 배출했다.
제12왕조에서 이집트인은 남부의 교역 잠재력을 한층 철저하게 활용했다.
그들은 푼트 Punt(소말리아 해안으로 추정) 지역 원정에 나서 누비아 국경까지 근접했다.
그 후 서기전 19세기에 이르러 누비아는 이집트 지배권 아래에 들어갔고, 팔레스타인 Palestine과 시리아 Syria의 소국 및 공국은 이집트의 정치적·경제적 영향력에 휘둘리게 되었다.
그러나 이집트의 세력 회복에도 불구하고 이집트인은 동북 지역을 자국 영토로 통합시키지 못했다.
대신 아메넴헤트 1세는 시나이 Sinai에 '왕의 성벽'을 축조해 근동 접경으로부터의 침략에 대비했다.
제12왕조 시기에 이집트 변방을 따라 건립된 거대한 방어 요새는 파라오가 풍부한 재원을 갖고 있었음을 보여주지만 동시에 이집트인의 세계관에 급격한 변화가 있었음을 드러낸다.
마아트로 표상되는 평온함과 고요함은 이미 사라졌다.
중왕국 이집트인은 국경선 밖의 세계를 의심과 두려움으로 바라보았다.
중왕국 파라오가 정복지를 왕국에 통합시키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집트는 아직 하나의 제국이 아니었다.
하지만 고왕국 이집트인과 달리 중왕국 이집트인은 이집트 국경 바깥에서 일어나는 사건에 적극적이고 직접적인 관심을 보였다.
파라오의 지위도 변화되었다.
중왕국의 파라오 중 어느 누구도 고왕국에서처럼 자신을 고요하고 확신에 차 있는 모습으로 그리지 않았다.
파라오는 신적인 왕으로서 특별한 지위를 계속 누렸지만, 그의 권위는 저 멀리 떨어져 우뚝 솟은 그의 존재 자체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다.
중왕국의 파라오는 자신을 선한 목자이자 이집트 백성을 돌보는 사람으로 묘사했고 또한 그렇게 비쳐지기를 기대했다.
마아트는 이런 의무를 이행하는 데 별 도움이 안되었다.
오직 이집트를 적대적인 바깥세상으로부터 힘써 보호하는 것만이 신민이 원하는 평화와 번영과 안정을 가져다줄 수 있었다.
제12왕조의 위대한 파라오의 초상화는 그 시대의 관심사와 고뇌를 통렬하게 반영하고 있다.
이집트인은 이집트를 완벽하고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낙원이라고 여겼던 고왕국의 이상을 상실했다.
중왕국의 문학은 이런 태도의 변화를 잘 보여준다.
가장 대중적인 문학 형식은 ≪메리카레 왕의 교훈≫, ≪아메넴헤트의 교훈≫처럼 왕에게 주는 교훈이었다.
예를 들면 파라오는 아무도 믿어서는 안된다.
형제도, 친구도, 제아무리 절친한 동료라도 마찬가지이다.
파라오는 무자비하고 잔인하게 지방 귀족의 야심을 분쇄해야 하며, 분란의 소지가 있는 모든 것에 대한 감시를 늦춰서는 안된다.
파라오는 연년세세 새로운 위험과 강력한 도전자가 국내외에서 출현하리라는 것을 각오해야 한다.
이집트의 국수주의는 지속되었다.
그러나 그들의 자신만만한 고립주의는 산산조각 났다.
중왕국 이집트인의 갑작스러운 태도 변화는 충격적이다.
그러나 그들의 불안감에는 근거가 있었다.
이집트인은 서서히 그들의 의지와 상관없이 훨씬 넓은 세계로 끌려들어가고 있음을 의식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집트가 여전히 지극히 독특한 문화권으로 남아 있었다는 바로 그 사실 때문에, 두 땅의 변경 너머에 있는 드넓은 세계는 더더욱 낯설고 두렵고 잠재적 위험성을 가진 것으로 비쳐졌다.
중왕국 파라오는 바빌론 지배자 함무라비의 세력 증대와 제국적 야심에 겁을 집어먹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곧 더 큰 위험이 가까운 곳에 있음을 알게 되었다.
3. 1장 서양 문명의 기원 결론
서기전 11000년경부터 동부 지중해 세계는 수렵·채취사회에서 정주 농업·목축사회로 서서히 전환되었다.
잉여농산물을 생산·저장할 수 있는 능력에 힘입어 큰 규모의 촌락이 등장했고, 그 결과 높은 수준의 기능적 전문화 및 재산과 지위의 차별이 나타났다.
수메르에서는 서기전 4천년기에 최초의 도시가 등장했다.
이 도시들은 정교한 신전 건물과 도시의 신들을 위한 사당을 갖춘 종교 중심지이기도 했다.
서기전 2500년경에 이르러 쐐기문자라고 하는 세련된 형태의 문자가 신전에서 이루어진 교역과 경영의 중요한 도구로 등장했다.
서기전 3천년기에는 대도시가 등장했고, 도시들은 서로 격력하게 전쟁을 벌였다.
메소포타미아 도시국가들은 이제 왕들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각 도시의 왕은 자신의 지배권이 신의 승인을 얻은 것이라고 주장했고, 권력과 부로 말미암아 그와 신민 사이의 거리는 더 크게 벌어졌다.
서기전 2350년경 수메르인의 정치생활은 셈어를 사용하는 아카드인에 의해 변화되었다.
아카드인의 정복활동으로 세계 역사상 최초로 진정한 제국이 탄생했다.
이 제국은 향후 메소포타미아 지배자들이 열렬히 흉내 내고 싶어 하는 모델이 되었다.
이런 정치적 변화에도 불구하고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수천 년 동안 수메르의 뿌리를 간직하고 있었다.
근동 사람들은 쐐기문자를 자신들의 언어를 기록하기 위한 기본 문자로 계속해서 사용했다.
그리고 수메르어는 서기전 2000년경 구어로서는 사멸되었지만, 일상 언어에서 사라진 지 수백 년이 지난 뒤에도 문학과 교육을 위한 언어로 살아남았다.
새로운 사람들이 이 지역으로 옮겨왔지만, 그들은 수 백 년 전 수메르에서 확립된 도시생활에 적응해서 살았다.
그들은 수메르의 유산을 흡수했고 정치적·종교적 전통에 순응했다.
근동 문명의 또 다른 중심지인 이집트에서는 서기전 3000년경 정치적 통합이 이루어졌다.
통합과정은 나일강 체계의 중요성에 힘입은 것이었다.
그 후 이집트는 강력하고 중앙집권적이 관료제—살아 있는 신으로 추앙받는 파라오를 우두머리로 한—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그러나 상이집트와 하이집트가 구분되긴 했지만, 고왕국과 중앙국의 이집트는 결코 정복을 통해 유지되는 제국은 아니었다.
이집트 사회는 고도로 통합되었으면서도 지극히 지방적인 사회였다.
대대적인 규모로 재원을 동원할 수 있었지만 그것은 거의 언제나 국내적인 목적을 위한 것이었다.
메소포타미아 문명과 이집트 문명이 갖는 외견상의 차이 배후에는 근본적인 생태학적 차이가 있었다.
이집트인은 수메르인과는 달리 두려운 환경에서 삶을 이어가기 위한 불안한 투쟁을 할 필요가 없었다.
해마다 나일강의 범람이 계속되는 한 이집트인은 어려움 없이 먹고살 수 있었고 사회적 긴장도 비교적 적었다.
이런 사실은 이집트 예술에 신뢰와 안정의 분위기를 가져다주었는데, 이런 분위기는 메소포타미아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것이었다.
두 문명에는 많은 유사성이 있었다.
서기전 3천년기에 두 문명은 다 같이 정치적 통합, 정교한 종교생활, 종교적·정치적 리더십의 통합과정을 겪었다.
두 문명은 대규모 건축사업을 벌였고 거대 규모의 사원·기념물·관개시설 등에 재원을 투입했다.
그러나 동시에 이들 두 문명은 외부 세계에 대한 관심 없이 자국 문제에만 함몰되어 있었다.
서로 교역관계가 있긴 했지만, 그리고 얼마간의 기술 이전이 있긴 했지만, 두 문명 사이에는 이렇다 할 정치적 또는 문화적 상호작용이 거의 없었다.
의도와 목적이 무엇이든 간에 그들은 별개의 세계에서 살았다.
그러나 이런 상대적 고립에 변화가 일어날 조짐이 보였다.
다음 천년기에 근동 세계에는 영토에 기반을 둔 대제국이 등장해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에, 그리고 두 문명 중간 지역의 삶에 변화를 가져왔다.
우리는 2장에서 이러한 발전 과정에 대해 설명하고자 한다.
※출처
1. 주디스 코핀 Judith G. Coffin·로버트 스테이시 Robert C. Stacey 지음, 박상익 옮김,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상): 문명의 기원에서 종교개혁까지, Western Civilizations 16th ed., 소나무,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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