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샘(淸泉)
코핀과 스테이시의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 1부 고대 근동 - 1장 서양문명의 기원 10: 이집트 문명 2-고왕국 본문
이집트 왕조와 시대 구분 | |
왕조 이전 시기 | 서기전 1만 년경~3100년 |
초기 왕조 시기 | 서기전 3100년~2686년경 |
고왕국 | 서기전 2686년경~2160년 |
제1중간기 | 서기전 2160년~2055년 |
중왕국 | 서기전 2055년~1650년경 |
제2중간기 | 서기전 1650년경~1550년 |
신왕국 | 서기전 1550년~1075년 |
1. 머리말
고왕국古王國 Old Kingdom(서기전 2686년경~2160년)의 남아 있는 일상 기록이 극히 드물어서 이 시기의 역사를 쓴다는 것은 지극히 어렵다.
지배 엘리트 무덤에서 출토된 장례 문서를 통해 특정 개인의 업적과 일상생활의 흔적을 엿볼 수는 있지만, 이집트 보통 사람들의 삶에 대해서는 알아낼 도리가 없다.
고왕국 시기 이집트인의 역사에 대한 태도는 이 문제를 더욱 어렵게 만든다.
변화하지 않고 순환하는 우주의 본질에 대한 믿음 때문에 그들은 우리가 중요하다고 여기는 역사적 사건에 거의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 역사를 상새하게 재구성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이 시기의 문헌과 예술을 개개인의 관습과 신앙에 관한 자료로 이용할 여지는 얼마든지 있다.
이런 자료를 통해 명백하게 떠오르는 한 가지 모습은 제3왕조(서기전 2686년경~2613년)의 파라오 Pharaoh[고대 이집트의 왕이라 불리우는 최고통치자]들이 오로지 파라오의 영광을 위해 헌신하는 강력한 중앙집권적 행정체계를 이미 구축해 놓았다는 사실이다.
파라오 자신이 곧 이집트였기 때문에 이집트의 모든 재원은 그에서 속했다.
원거리 교역은 전적으로 파라오의 통제 아래 있었고, 세금 부과와 노동력 징발 체제는 이미 잘 발달되어 있었다.
왕국을 통치하기 위해 파라오는 중앙에서 주지사들—그리스어로 노마르케스 nomarchés—을 임명했다.
그들 중 상당수는 파라오의 친족이었다.
고왕국의 파라오는 주지사와 그의 군대를 철저히 통제했다.
지방에 세력 근거지가 조성되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한 조치였다.
고왕국 이집트이 서기는 문자를 해독할 줄 알았다.
글쓰기 능력은 이집트의 방대한 재원을 관리하고 활용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했기 때문이다.
문자 해독이 가능한 관료가 이집트의 중앙과 지방 정부에 절대적으로 필요했으므로 행정 서기는 권력과 지위를 누렸다.
이제 막 서기 교육을 받기 시작한 어린이마저도 큰 존경을 받아 마땅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서기가 되는 훈련은 몹시 어려웠지만, 중왕국 시기에 작성된 ≪직업의 풍자≫란 책은 훈련 중인 서기에게 그가 받는 교육이 결국 나라에 얼마나 큰 이익을 가져다줄 것인지, 그의 직업이 다른 직업에 비해 얼마나 더 훌륭한지를 일깨워주고 있다.
2. 임호테프와 계단식 피라미드
고왕국이 막 시작된 여명기에 이집트 역사상 가장 위대한 행정관에 속하는 임호테프(임호텝) Imhotep(서기전 2650년경~서기전 2600년경)가 등장했다.
임호테프는 파라오의 행정관을 거쳐 재상의 지위에 오른 인물로, 고왕국 첫 번째 왕조인 제3왕조 Third Dynasty of Egypt(서기전 2686년경~서기전 2613년)의 두 번째 파라오 조세르 Djoser의 오른팔이었다.
임호테프는 의학, 천문학, 신학, 수학 등에 조예가 있었짐나 무엇보다는 그는 건축가였다.
초기의 파라오들은 일찍이 아비도스 Abydos에서 파라오 무덤 축조에 막대한 재원을 투입한 바 있다.
그러나 임호테프는 돌을 다듬어 쌓아올린 역사상 최초의 건축물인 계단식 피라미드 Step Pyramid를 설계한 인물이었다.
그것은 파라오 조세르의 마지막 안식처였을 뿐만 아니라 파라오로서의 초월적 권능을 상징적으로 표현해준 건축물이었다.
오늘날 사카라 Saqqara[카이로 남쪽 30킬로미터 지점] 부근에 있던 행정수도 멤피스 Memphis 서쪽에 세워진 계단식 피라미드는 사막 위 60미터 높이로 솟아 있다.
이 건축물은 기존 무덤 형식인 마스타바 Mastaba—꼭대기가 평평하고 옆면이 경사진, 벽돌로 지은 나지막한 직사각형 건축물—를 토대로 설계되었다.
임호테프도 아마도 처음에는 마스타바를 염두에 두고 건축을 시작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후 생각을 바꿔 마스타바 위에 작은 마스타바를 쌓아올리고 구조물의 재료를 모두 석회석으로 바꿨다.
이 인상적인 기념물 주변에는 거대한 사원과 묘지가 건립되었는데, 그것은 수도에 있는 조세르의 궁정을 본뜬 것으로 보인다.
이 건축물은 두 가지 목적을 갖고 있었다.
첫째는 조세르의 사후 영혼인 카 ka가 사후 지배에 필요한 수단을 갖게 된 것이었고, 둘째로, 움직이지 않는 문과 미로처럼 복잡한 통로를 가진 이 건축물의 설계는 도굴꾼—파라오 무덤의 부장품이 화려해지면서 도둑이 들끓어 골칫거리가 되었다—을 막아낼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었다.
임호테프는 피라미드 설계를 통해 생명의 원천인 태양의 빛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모습을 형상화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또는 파라오의 카가 하늘로 올라가 내세에서 서쪽으로 여행하면서 태양과 일체가 되게 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피라미드를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설계의 신학적 의미가 무엇이건 간에 그 건축물 배후에 가로놓인 파아오의 어마어마한 권력을 알아차리지 못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임호테프의 피라미드는 고왕국 시대의 모든 파라오가 본받는 하나의 선례가 되었고, 더 크고 정교한 피라미드를 지으려는 파라오들의 경쟁심이 종국에는 자신들을 파멸로 이끌었다.
고왕국 이집트는 제4왕조 Fourth Dynasty of Egypt(서기전 2613년~서기전 2494년)에 이르러 전성기를 구가했다.
이 시기에 기자 Giza의 거대한 피라미드들이 건축되었다.
이 기자 피마미드군 건축물들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피라미드였고 이집트 문명의 영원한 상징이 되었다.
파라오 쿠푸 Pharaoh Khufu—그리스어로 케오프스 Cheops—를 위해 지은 대피라미드는 원래 높이가 147미터에 밑변 길이가 230미터였고 230만 개 이상의 석회암 벽돌로 지어졌으며, 부피가 258만 입방미터에 달했다.
몇 개의 환기구, 통로, 시신 안치실을 제외하면 구조물은 속이 꽉 차 있다.
고대에는 피라미드 외벽 전체가 빛나는 흰색 석회석으로 입혀져 있었고, 꼭대기에는 금박을 입힌 거대한 머릿돌(관석冠石)이 놓여 있었다.
쿠푸의 후계자인 카프레 Khafre와 멘카우레 Menkaure를 위해 같은 장소에 건립된 두 개의 거대하지만 다소 규모가 작은 피라미드도 같은 양식으로 마감되었다.
중세 이슬람 수도 카이로 Cairo의 지배자들은 피라미드 외벽의 석회석을 뜯어내어 신도시 건축과 요새 축조에 활용했다.
꼭대기의 머릿돌은 일찌감치 사라졌을 것이다.
그러나 아득한 고대에 번쩍이는 석회석으로 치장된 이 피라미드들은 작열하는 이집트의 태양 아래 찬란한 빛을 발하면서 사방 몇 십 리 밖에서도 누구나 바라볼 수 있는 장엄한 건축물이었을 것이다.
피라미드가 지어진 지 2천 년이 지난 뒤 이집트를 여행한 그리스 역사가 헤로도토스 Herodotus(서기전 484년경~서기전 425년경)는 대피라미드를 짓기 위해 10만 명의 노동자가 20년의 세월을 바쳤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아마 과장일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이집트 여행 가이드는 관광객에게 과장된 이야기를 곧잘 들려준다.
헤로도토스의 주장은 이집트 안내인이 한 말을 액면 그대로 믿었기 때문일 것이다.
한때 피라미드가 노예 노동력에 의해 건축되었다고 믿은 적도 있었다.
하지만 실제로 피라미드 건축 작업에 참여한 것은 몇 만 명에 달하는 농민이었다.
그들은 홍수로 농토가 물에 잠겨 있는 동안 집중적으로 피라미드 건축에 종사했다.
물론 일부 노동자는 징발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농민 대부분은 기꺼이 건축사업에 동참했다.
피라미드 건축 작업은 그들을 다스리는 신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었고 우주 질서에 자신들을 연결 짓기 위한 봉사였다.
제3왕조와 제4왕조 파라오의 기념물은 그들이 휘두른 권력이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그러대 거대한 피라미드 건축을 위한 대규모 노동력과 재원 투입이 이집트 사회에 엄청난 부담을 안겨주었다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처럼 고도의 집약적인 자연자원 활용은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이집트인 개개인의 삶에 대한 정부 통제는 나날이 강화되었으며 국가가 고용한 행정관료의 수는 갈수록 늘어났다.
그 결과 찬란한 문화적 성취로 빛나는 파라오의 수도 멤피스와 그 바깥 사회 사이의 대조는 더욱 극명해졌다.
제3왕조와 제4왕조의 지배자가 매의 신 호루스 Horus의 현현이자 태양신 라 Ra의 화신으로 자처하게 되면서 파라오 숭배는 더욱 정교하게 발전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파라오의 중앙집권적인 종교적 권위 주장과 이집트인의 지방 신 및 지방 지도자에 대한 지속적인 충성심, 이 둘 사이의 간극은 나날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런 중앙과 지방의 두 집단 사이의 긴장이 궁극적으로 고왕국의 종말을 가져왔고, 급기야 제1중간기에 이르러 중대한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다.
3. 고왕국 이집트의 사회
고왕국 이집트의 사회 피라미드는 지극히 경사가 가팔랐다.
꼭대기에는 파라오와 그의 가족이 있었다.
제3왕조와 제4왕조 시기 동안 그들의 위신과 권력은 대단한 것이어서 다른 모든 이집트인과 확연히 구분되었다.
귀족계급이 있긴 했지만 제5왕조가 등장할 때까지 그들은 명백히 종속적이었고 1차적 역할은 파라오 정부의 사제나 관리로서 봉사하는 것이었다.
서기는 통상 귀족 자제 가운데서 선발해 훈련시켰다.
그러나 파라오에 종속되기는 했을지언정 이집트의 엘리트 계층은 상당히 호화롭게 살았다.
그들은 넓은 영지를 소유했고 이국적인 물품과 화려한 가구를 즐겨 사용했다.
애완동물로 개, 고양이, 원숭이 등을 길렀고, 사냥과 고기잡이를 스포츠로 즐겼다.
극소수의 왕족과 귀족 아래에는 이집트의 나머지 모든 사람이 있었다.
대부분의 이집트인은 가난했고, 간소한 진흙벽돌 집에서 혼잡한 환경 속에서 살았다.
그러나 번영을 구가하던 시기에는 숙련된 공인들—보석세공인, 금세공인 등—의 신분이 상승되어 좀 더 나은 여건의 삶을 누렸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들을 부르주아 계급 비슷하게 생각해서는 안된다.
도기장이, 직조공, 석공, 벽돌공, 양조업자, 상인, 학교 교사 등도 어느 정도 인정을 받으면서 대다수의 다른 이집트인에 배해 높은 생활 수준을 누렸다.
하지만 이집트인의 절대다수는 농민이었고, 그들은 농업과 건축공사에 필수적인 육체노동을 제공하는 비숙련노동자였다.
그들 아래에는 노예가 있었는데, 그들은 토착 이집트인이라기보단 주로 전쟁포로였다.
파라오 지배가 신정적 성격을 갖고 있었고 파라오가 이집트이 재원을 어마어마한 규모로 소비했기는 했지만, 이집트 사회가 특별히 억압적이었던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노예도 재산의 소유, 처분, 상속을 하는 등 어느 정도 법적 권리를 누렸기 때문이다.
○고왕국의 여성
이집트 여성은 고대 세계의 수준으로 보면 매우 높은 수준의 법률적 지위와 보호를 누렸다.
그들은 서기 훈련을 받거나 주요 공직에 오를 수는 없었지만, 높은 신분의 여성들 사이에 오고간 짤막한 개인 서신들을 보면 여성도 어느 정도 문자 해독을 할 수 있었음이 짐작된다.
제6왕조(서기전 2345년~서기전 2181년) 말기 니토크리스 Nitocris/Nitokris 여왕처럼 위기의 시기에는 왕족 여성이 파라오의 권력을 떠맡기도 했다[대개 남장을 하고 등장].
이집트 여성은 단독으로 법정에 설 수 있었으며, (이혼 소송을 포함해) 각종 고소를 할 수 있었고, 자신을 변론하고 증언도 했다.
심지어 남성 보호자나 대리인—고대의 다른 사회에서는 반드시 필요했다—없이도 재산을 소유할 수 있었다.
이런 모든 점에도 불구하고 이집트가 본질적으로 엄격한 가부장적 사회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여사제직을 제외하면 여성은 공직에서 배제되었다.
대부분의 이집트인은 일부일처제를 견지했지만, 유력자는 첩과 여성 노예로 이루어진 하렘 harem[거룩한 불가침의 장소라는 뜻을 가진 집안의 공간으로서 아내, 첩, 여성 노예 등 가족의 여성 구성원들이 거주]을 거느릴 수 있었다.
더욱이 기혼이건 미혼이건 이집트 남성은 누구나 법의 저촉을 받지 않고 성적 자유를 누릴 수 있었다.
하지만 부인은 그런 짓을 했다가는 혹독한 법적 처벌을 받았다.
농민의 남녀 간의 성적 구분은 엘리트 계층에 비해서 한층 덜했다.
농민 여성은 수확기에 종종 들에 나가 일했으며, 비천했지만 중요한 많은 일들을 맡아 했다.
그러나 고대 세계가 대개 그렇듯이, 우리는 이집트 농민의 삶을 어디까지나 지배계급의 눈을 통해서만 살필 수 있을 뿐이다.
○과학과 기술
거대한 기념물을 축조하는 업적을 달성하긴 했지만 이집트인은 기술 전반에서 그랬듯이 과학과 수학에서도 수메르인과 아카드인에 비해 뒤쳐져 있었다.
하지만 시간 계산법에 관한 한 이집트인은 주목할 만한 발전을 보였다.
종교와 농업 때문에 이집트인의 천문학은 대체로 태양을 관찰하는 데 치중했다.
이집트인들이 발전시킨 태양력은 메소포타미아의 태음력에 비해 훨씬 더 정확하고 정밀했다.
수메르인은 하루를 나누고 계산하는 방법을 우리에게 남겨주었다.
하지만 율리우스 카이사르 Julius Caesar(서기전 100년~서기전 44년)에 의해 로마에서 채택된 이집트 태양력은 현대 서양 달력의 직계 조상이 되었다.
이집트의 교육은 대개 읽기와 쓰기에 국한되었는데, 이런 한계를 고려하면 임호테프 같은 지극히 박식한 인물이 출현한 것은 놀라운 일이다.
이집트인은 효과적인 관개·치수체계를 고안해냈지만, 바퀴 등의 노동력 절감 방안을 수메르인보다 훨씬 뒤늦은 시기에 이르기까지 채택하지 않았다.
이는 인구가 조밀했던 이집트에서는 농민 노동력이 사실상 무제한 공급되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고왕국 이집트에서는 메소포타미아 지배자인 루갈 Lugal이 제정한 법률이나 기타 민간 기록에 해당하는 것을 찾아볼 수 없다.
고왕국 이집트인은 기록된 법률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파라오, 즉 살아 있는 신이 선언하는 것이 곧 법이었던 것이다.
4. 이집트인의 종교와 세계관
고왕국 이집트인은 이집트가 다른 모든 문명권과는 전적으로 다르다고 여겼다.
인간의 종류에는 이집트인과 야만인 둘만 있었고, 둘 사이의 구분은 절대적이었다.
이집트인으로서의 정체성은 무엇보다도 중요했다.
이집트인과 이방인 사이의 근본적 차이에 비하면 그 밖의 모든 구분은 대단한 것이 못 되었다(물론 성적 차별만은 예외).
이집트인의 우월성에 대한 확신은 자국의 독자성에 대한 자의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집트는 나일강에 의해 양육되었으며, 강을 에워싼 잔인한 사막과 광대한 바다에 의해 보호를 받고 있었다.
이집트인에게 이집트가 세계의 중심이란 사실은 재론의 여지없는 자명한 것이었다.
이집트인은 다양한 세계 창조 신화를 만들어냈지만 인간이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다.
이집트인의 관심을 사로잡은 것은 '생명 그 자체'가 끝없는 쇄신의 순환 속에서 어떻게 재창조되는가 하는 것이었다.
이런 순환적 개념은 이집트인의 우주관에 반복적이고 예측 가능한, 그리고 궁극적으로 정적인 경향성을 부여했다.
이집트인은 많은 현상을 순환적인 사건으로 간주했는데, 이는 그들이 해마다 반복되는 나일강의 순환에 의존해 살았기 때문일 것이다.
이집트 종교의 핵심에는 오시리스 Osiris와 이시스 Isis 신화가 가로놓여 있다.
두 신은 오빠와 여동생이자 남편과 아내였다.
그들은 이집트 종교에 등장하는 최초의 아홉 신들 중 두 신이었다.
오시리스는 지상에서 왕권을 장악한 최초의 왕이었는데, 그의 동생인 세트 Set가 왕권을 탐냈다.
세트는 오시리스를 배신하고 그를 살해한 다음 관에 넣고 밀봉했다.
각고의 노력 끝에 이시스가 오시리스의 시신을 되찾았지만, 세트는 형의 시신을 다시 빼앗아 여러 조각으로 난도질해 이집트 전역에 뿌렸다(그러므로 이집트 전체를 오시리스라고 부를 수 있으며, 그를 위한 사당이 이집트 전역에 세워졌다).
단념을 모르는 이시스는 미라 제작의 신인 아누비스 Anubis에게 도움을 청했고, 둘은 오시리스의 시신을 한데 모아 재결합시켰다.
그런 다음 이시스는 오시리스를 부활시켰고, 이시스는 오시리스에게서 아들을 임신했는데 그가 자라서 고왕국이 받드는 매의 신인 호루스 Horus가 되었다.
호루스는 어머니의 마술에 힘입어 세트와 그 부하들의 공격을 막아냈다.
호루스와 세트는 공석이 된 오시리스의 왕좌를 놓고 경쟁했고 마침내 호루스가 승리해 아버지의 복수를 했다.
이 신화는 이집트인에게 지극히 중요했다.
오시리스 이야기는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는 생명에 관한 신화다.
그러나 부활 이야기는 아니다.
오시리스가 일시적으로만 살아났기 때문이다.
죽음에서 되살아난 새로운 생명의 이야기는 이집트 초기 농업 정주지에서 등장한 관념이 구체화된 것으로 보인다.
농민은 시신을 풍성한 부장품과 함께 각별한 주의를 기울여 매장했다.
오시리스를 통해 구체화된 생명 지속—리드미컬하고 순환적이고 불가피한—의 약속으로 말미암아 그는 이집트에서 매우 중요한 농업신이 되었다.
○이집트인의 죽음 숭배
오시리스는 이집트인의 죽음 숭배에서 중요한 신이었다.
수메르인과 달리 이집트인은 죽음과 지하세계를 슬프게 바라보지 않았다.
죽음은 불쾌한 통과의례가 아니었다.
죽음은 현세의 삶과 비슷하거나 좀 더 나은 사후세계로 가기 위해 견뎌야만 하는 필수불가결한 통로였다.
그러나 그 통로는 저절로 갈 수 있는 곳이 아니며 온갖 위험으로 가득 차 있었다.
죽은 자의 영혼 '카 ka'는 두아트 Duat라는 사후 지하세계를 배회하면서 재판소를 찾아 다닌다.
그곳에는 오시리스와 42명의 재판관이 있어 카의 운명을 결정한다.
악마와 악령은 키가 재판소에 가는 것을 방해하며, 따라서 그 여행은 시간이 오래 걸린다.
그러나 재판소에 도착하는 데 성공해서 유덕하는 판정을 얻어내면 카는 오시리스의 한 부분이 되어 불멸을 누린다.
이런 이유 때문에 죽은 자를 '오시리스'라고 부르곤 했다.
죽음에 대한 이런 믿음 때문에 이집트인은 이를 다루는 정교한 종교의식을 발전시켰다.
무엇보다도 시신을 보존하는 것이 중요했다.
바로 그 때문에 이집트인은 시체를 방부 처리해서 미라 Mira로 만드는 복잡한 기술을 발전시켰다.
시체를 건조시킨 다음 내장을 모두 제거했다(심장은 그대로 두는데, 최후 심판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시체를 보존하기 위해 화학 처리를 했다.
매장하기 전에 장례용 마스크를 미라 얼굴 위에 놓았다.
수백 미터 길이의 아마亞麻천(리넨 linen 천)으로 온몸을 칭칭 감은 뒤에도 누구 시신인지 식별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다.
죽은 자의 지하세계 여행을 돕기 위해 음식, 옷, 집기와 그 밖의 중요 물품을 무덤 속 시신 옆에 두었다.
'관棺 문서' 또는 '사자死者의 서書'도 시신 옆에 두었다.
이 문서에는 죽은 자가 두아트를 여행하는 데 필요한 것—주문, 마술 등—을 기록했다.
이런 지식은 죽은 자가 온갖 위험을 헤치며 오시리스에게로 나아가는 데 도움을 준다.
그것은 또한 죽은 자의 심장이 최종 시험에 대비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오시리스를 비롯한 재판관들 앞에 도달한 죽은 자는 '부정 고백'을 한다.
죄악이 장황하게 열거되면 이를 부정하는 답변을 하는 형식이다.
그런 다음 아누비스 신이 재판관들 앞에서 죽은 자의 심장 무게를 잰다.
심장을 여신 마아트 Ma'at의 깃털과 함께 저울에 올려놓는 것이다.
심장과 깃털이 완벽하게 평형을 맞출 경우에만 죽은 자는 오시리스의 일부로서 영생을 얻는다.
서기전 3천년기에는 이런 죽음 의식이 왕족에게만 특별히 허용되었지만, 중왕국(서기전 2055년~1650년경)에 이르면 대부분의 이집트인이 이런 의식을 치를 수 있었다.
이집트인이 죽음을 대하는 방식을 보면, 마치 그들이 죽음 문제에 강박적으로 집착하는 유별난 죽음 문화를 갖고 있었던 것으로 오해하기 쉽다.
그러나 이집트인의 관습과 신앙은 대체를 삶을 긍정하는 것이다.
그들은 오시리스(그가 생명 회복의 신이라는 점을 기억하라)와 지하세계를 두려움이 아닌 희망으로 바라보았다.
우주의 순환적 본질과 생명의 원상회복능력에 대한 이집트인의 신념은 태양 활동주기에 대한 해석에서도 드러난다.
이 믿음에 따르면, 매일 아침 여신 누트 Nut로 인격화된 하늘은 태양신—종종 라 Ra 신과 동일시된다—을 출산한다.
그러면 태양신은 낮배를 타고 죽음의 땅을 향해 하늘바다를 가로질러 서쪽으로 항해를 한다(오시리스는 종종 '서쪽—죽은 자의 땅—의 지배자'로 일컬어졌다).
낮배를 탄 태양신의 진로는 관찰이 가능하다.
그것은 하늘을 가로지르는 평화롭고도 질서 있는 여정이다.
그러나 밤배를 탄 태양신의 여행은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다.
거대한 뱀이 지하세계를 지나가는 태양신의 항해를 방해하기 때문이다.
두 신—오시리스와 태양신—은 하나가 되고, 그 덕분에 태양신은 (그의 어머니 누트가 여명과 함께 다시 한 번 태양신을 출산할 수 있을 때까지) 여행을 계속할 힘을 얻는다.
생명은 언제나 승리를 거둔다.
삶, 죽음, 삶의 회귀, 어렇듯 끊없는 순환을 한데 묶어주는 존재는 여신 마아트였다.
이집트어의 많은 단어가 그러하듯 이 단어 역시 정확하게 번역하기 어렵다.
조화, 질서, 정의, 진리 등이 모두 마아트의 개념 범주 안에 들어가지만, 개별적인 어떤 단어도 마아트의 의미를 모두 포괄하지는 못한다.
추상적 개념인 동시에 마아트라는 이름의 여신으로 인격화되기도 하는 이 존재는 우주를 고요하고 반복적이고 예측 가능한 방식으로 운행한다.
그러므로 수메르인과는 달리 초기 왕조 시기와 고왕국 시대의 이집트인은 지극히 자신만만하고 낙관적이었다.
그들은 스스로 우주의 중심에 살고 있다고 믿었다.
그들의 땅은 마아트에 의해, 그리고 파라오를 통한 마아트와의 접속에 의해 안정과 평화가 보장된 낙원이었다.
그리고 파라오는 이집트인을 지배하는 신들이 지상에 현현한 존재였다.
서기전 3천년기에 장기간에 걸친 번영을 가져다준 나일강의 범람과 외부 세계와의 지리적 고립 덕분에 이집트인은 완벽하게 질서 잡힌 낙원에 대한 믿음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들은 그 낙원 안에서 거의 변화를 의식하지 못했다.
※출처
1. 주디스 코핀 Judith G. Coffin·로버트 스테이시 Robert C. Stacey 지음, 박상익 옮김,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상): 문명의 기원에서 종교개혁까지, Western Civilizations 16th ed., 소나무, 2014.
2. 구글 관련 자료
2022. 1. 23 새샘
'글과 그림' 카테고리의 다른 글
1990년대 서울에서 발굴된 유적들 3: 경복궁과 창덕궁 (0) | 2022.02.09 |
---|---|
단원 김홍도 "총석정도" "조어산수도" "소림명월도" (0) | 2022.02.08 |
1990년대 서울에서 발굴된 유적들 2: 경희궁 터 (0) | 2022.01.30 |
네이처가 선정한 2021년 과학 뉴스 (0) | 2022.01.28 |
단원 김홍도 "삼세불" (0) | 2022.01.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