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샘(淸泉)
1990년대 서울에서 발굴된 유적들 2: 경희궁 터 본문
경희궁 터에 대한 발굴은 1990년 발굴에 이어 제4차 발굴조사가 1991년 11월 18일부터 1992년 8월 6일까지 이루어졌다.
이번 조사 범위는 북쪽 월랑 터, 자정문 터, 그리고 동서 회랑의 북쪽 부분으로 전체 250평 정도 범위로서 이 가운데 100평 정도를 전면 발굴조사하였다.
발굴 결과를 보면, 먼저 일제강점기에 건설된 기존 벙커 시설물 때문에 북쪽 월랑의 오른쪽 면은 완전히 파괴된 것으로 보이고, 남아 있는 것은 앞면 기단석이 2줄로 1단씩 나온 것인데, 이것도 벙커 근처에서는 완전히 파괴되어 유구를 확인할 수 없었다.
경희궁의 편전便殿[임금이 평상시 거처하면서 일상적 업무를 보는 궁전]인 자정전資政殿의 정문 자정문 터에서는 왼쪽 기단선이 발견되었고, 기둥 칸을 확인할 수 있는 적심[건물 붕괴를 막기 위해 초석 밑에 자갈 등으로 까는 바닥다짐 시설]을 4개 발견하였다.
또한 문 터의 적심 자리 4곳도 발견했는데, 3곳은 같은 수법으로 적심하였고, 나머지 하나는 적심 수법이 다르고 위치가 불확실한 것으로 보아 시대가 다른 것으로 보인다.
1993년에도 경희궁 터에 대한 발굴은 계속 이어졌다.
발굴 기간은 1993년 11월 15일부터 1994년 2월 25일까지로 이번 조사는 앞서 조사에서 제외되었던 지역인 YMCA 어린이회관과 유류탱크 시설물을 철거하고 서북쪽 회랑 터와 자정전 터로 추정되는 지역을 발굴했다.
서북쪽 회랑回廊[건물과 정원 등을 둘러싸도록 만든 복도로서, 한쪽에만 벽이나 창문이 있고 다른 한쪽은 아무런 막힘 없이 뚫려 있는 형태] 터는 어린이회관에 오르는 계단 자리와 지하 유류고가 설치되었던 곳이었기 때문에 유구가 모두 파괴되었을 것으로 추정하였지만 지표면 6미터 아래에서 발굴된 유구는 보존 상태가 비교적 양호하게 드러났다.
서쪽 회랑 터는 주초석柱礎石[기둥 밑에 기초로 받쳐 놓은 돌] 4기와 화방벽火防壁[화재를 막기 위해 불에 타지 아니하는 재료로 만들어 세운 벽], 기단열基壇列[건축물의 터를 반듯하게 다듬은 다음 터보다 한 층 높게 쌓은 단인 기단의 열] 등이 노출되었으며, 서쪽 회랑의 마지막 기단열로 보이는 장대열長臺列[섬돌 층계나 축대를 쌓는 데 쓰는, 길게 다듬어 만든 돌인 장대석의 열]과 북쪽 회랑의 적심 흔적 등이 노출되었다.
자정전 터는 발굴 당시 소운동장 지반에서 약 5미터 아래에 유구 흔적이 확인되었으며, 자정전 터의 좌우측 천랑穿廊[2개의 건축물을 중간에서 연결하는 복도]과 자정전 터로 보이는 지반을 확인할 수 있었다.
천랑은 비교적 양호한 상태였으며 바닥은 잔돌이 깔려 있고, 초석 5기가 온전하게 발굴되었다.
이어진 1994년에서 1995년까지의 조사는 시립박물관 건립부지 안의 유구를 노출시켜 그 성격을 밝히고, 보존 방법과 전시 방법을 제안함으로써 이 박물관이 역사적 유구와 함께 살아 숨쉬는 역사적 문화환경이 될 수 있는 방안을 찾기 위한 보존·정비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조사지역은 박물관 설계에 지장을 주지 않는 범위로 ㄷ자형 건물의 내정된 40×40m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발굴 결과를 살펴보면 건물지 2개소와 우물, 담장 터, 어구御溝[대궐 안에서 흘러나오는 개천], 배수구, 목재 유구 등이 확인되었다.
이어서 1995년 7월 24일부터 1996년 1월 10일까지 실시된 발굴조사는 앞서 1993~1994년에 발굴조사한 자정전 터와 서북쪽 회랑 터에 대한 연장조사라 할 수 있다.
즉 서북쪽 회랑 터와 자정전 터를 발굴하면서 그때 제외되었던 자정전 터 회랑을 중점으로 하여, 자정전 월대月臺[궁궐의 정전, 묘단, 향교 등 주요 건물 앞에 설치하는 넓은 기단 형식의 대]와 계단, 천랑의 기단 및 화계花階[건물 뜰에 층계 모양으로 만든 화단] 등의 조사를 위해 소운동장, 철거된 YMCA 건물 자리, 자정문 터 뒷부분 등을 포함한 300평 정도를 전면 발굴조사하였다.
발굴지역은 기존 발굴조사 때 이미 유구 존재가 확인되었던 지역으로서, 그 주변으로 연결되는 부분과 기존 발굴 때 확인하지 못했던 자정전 회랑 부분과 그 주변 일대다.
발굴보고서의 표현대로 다음 발굴의 길을 준비하기 위함이라 할 수 있다.
이미 발굴한 지역 중 확인하지 못한 지역에 대한 추가발굴이란 성격 때문인지 뚜렷하고 구체적인 발굴 성과는 없다고 할 수 있다.
1996년 10월 1일부터 1997년 4월 24일까지 태녕전泰寧殿[조선 임금들의 초상화인 어진御眞을 모신 봉안소인 경희궁의 진전眞殿] 터에 대한 발굴은 그 정확한 위치 및 규모를 확인하여 그 결과를 토대로 정확한 복원 설계를 목적으로 하였다.
태녕전 터로 추정되는 부지는 자정전 서쪽으로 바위샘(암천巖泉)의 남쪽이 되며, 옛 서울고등학교의 유류고와 물탱크실이 있던 자리다.
발굴단은 처음엔 기존 발굴보고서의 결과와 조선시대 여러 기록과 그림 등을 바탕으로 경희궁 정전正殿[왕이 나와서 조회를 하던 궁전]인 숭전전崇政殿 서쪽 회랑의 서쪽, 옛 서울고등학교 신관과 화장실이 있었던 부지 일대를 발굴지로 선정하여 시굴하였지만 태녕전임을 확인할만한 유구는 찾지 못했다.
그후 태녕전은 여러 문헌자료와 그림 등만을 바탕으로 2000년에 복원되었다.
경희궁 터에 대한 발굴조사는 계속 추진되었고, 그 결과 경희궁 터에는 1994년에 숭전전과 숭정전 회랑, 그리고 숭전문이 복원되었고, 이번 조사에서 이루어진 시점에서는 자정전과 부속 회랑이 복원 중이었다.
그러나 경희궁 터에서 진행되고 있던 서울시립박물관 건립이 당시 문화재 관련자들에게 얼마나 많은 반감을 일으켰는지는 발굴보고서에 그대로 드러나 있다.
즉 "이는 많은 문화재 관련자들의 반대와 후회 속에서 이루어진 일이었으며, 지금 진행 중인 일이므로 앞서 복원된 숭전전과 그 일곽과 조화롭게 건립되고 조성되기는 바라는 마음이다"라는 보고서 앞머리에 있는 내용은 당시의 여론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지금의 우리들이 현재의 서울역사박물관을 보면서 느끼는 마음과 별반 차이가 없다.
1996년에 실시된 발굴조사는 서울시가 사옹원司饔院[조선 시대에, 궁중의 음식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관아] 터를 시립박물관 야외 유구전시장으로 조성하기로 하고 박물관 건설공사를 하던 중 이탄泥炭[토탄土炭: 땅속에 묻힌지 오래되지 않아서 완전히 탄화하지 못한 석탄으로, 광택이 없고 검은 갈색을 띠며 해면 모양이나 실 모양 또는 흙덩이 모양]으로 추정되는 토양이 나왔기 때문에 이를 분석하여 그 성격을 파악하는 것이었다.
서울시립박물관이 들어서는 곳은 경희궁 터의 동쪽에 해당하며, 서울고등학교 당시 대운동장이었다.
발굴조사 지역은 박물관 건물 주변 3개 지점으로 박물관 신축건물 주변의 동쪽(A 지구), 남쪽(B 지구), 북쪽(C 지구)이다.
이탄 시료 분석 결과 약 9천 년~6천 년 전 무렵에 형성된 이탄으로, 유기물 함량은 15퍼센트였고, 포함된 꽃가루 분석 결과 약 30여 종 이상이 나와 당시 생태환경을 복원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지층이 형성되는 시기의 기후 변화도 알 수 있었다.
이번 발굴 목적이 이탄층의 성격을 밝히는 것이었지만, 조사 과정에서 경희궁 관련시설 또한 확인되었다.
A 지구에서 확인된 석축시설과 석렬은 앞서 명지대 부설 한국건축문화연구소에서 발굴조사한 야외 유구전시장 건립부지 유구들의 위치와 비교해 볼 때 도면상으로 그 연장선상에 있어 그 관계를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서궐도안西闕圖案>에 따르면 이 시설들은 사옹원과 경희궁 정문 흥화문興化門 사이 회랑과 어도御道[임금이 다니는 길]일 가능성이 높다.
1998년 실시된 발굴조사 역시 앞서 꾸준히 진행되고 있는 경희궁 터 복원사업을 위한 발굴조사이다.
즉 임금의 침전인 집경당集慶堂, 회상전會祥殿, 융복전隆福殿 등과 금천교禁川橋[궁궐의 안과 밖을 구분하기 위해 흥화물을 들어서면 바로 앞에 있었던 인공 개천인 금천을 건너는 다리]와 금천의 용비천龍飛踐 샘에 대한 각 건물 터와 유적의 정확한 위치와 규모를 확인하여 복원 설계 및 복원공사를 위한 기초자료로 활용하는데 목적을 두었다.
발굴 결과 집경당, 회상전, 융복전 터(A 지구)에서는 건물 터로 추정되는 4곳, 배수시설 7곳, 우물 터 1곳, 담장 터 2곳을 확인하였고, 금천교 일대(B 지구)에서는 맨홀 아래에 배수시설을 확인한 결과 남쪽 부분은 유구가 상당히 변형되어 있었지만 북쪽 부분은 원형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즉 2개의 홍예虹霓[홍예문: 문의 윗부분을 무지개 모양으로 반쯤 둥글게 만든 문]로 이루어진 배수시설이 맨홀 바로 아래에 있었고, 남쪽 부분은 보수되어 홍예 부문이 없어졌지만, 북쪽 부분은 그대로 원형을 유지하고 있어서 이것이 금천교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1998년에는 경희궁 복원을 위한 발굴조사가 아닌 건축물 건립을 위한 구제발굴이 이루어졌다.
발굴 지역 범위는 발굴 당시 행정주소가 종로구 신문로 2가 1-107번지와 1-108번지로 경희궁의 옛 영역에 속하는 지역이었다.
발굴 지역에는 당시 3층 건물인 교원회관과 1층 건물인 주택이 있었는데, 서울교원단체총연합회에서 이곳에 새로이 교원복지회관을 건립하기로 했다.
이에 기초공사 중 매장 유구와 유물의 유무를 확인하기 위해 시굴조사를 했고, 그 결과 조선시대 백자 파편과 기와 파편 등 많은 유물이 출토되어 긴급하게 발굴조사를 시행하게 된 것이다.
발굴단은 이번 발굴조사 지역을 경희궁의 주요 전각인 장락전長樂殿 일대 지역으로 추정했다.
장락전은 임금 어머니인 대비大妃가 머무르며 생활하던 건물이다.
그러나 실제 발굴조사 결과 장락전 터로 단정하기에는 어렵다고 보고, 도리어 건물 간의 위치 관계나 대략적인 규모로 추정하면 융복전의 동북쪽에 위치하는 융무당 터가 더 가깝지 않을까 추측하였으나 역시 단정할 수는 없다고 했다.
융무당隆武堂은 내원內苑/內園[금원禁苑: 궁궐 안에 있던 동산이나 후원]의 별당이다.
다만 이번 발굴조사가 현재의 경희궁 영역에서 벗어난 예전 경희궁 영역에 대한 조사로, 일반 사유지로 전환된 경희궁 영역에 대한 최초의 발굴이라는 사실만으로도 조사의 의의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사실상 경희궁 터에 대한 발굴조사는 이번 1998년의 조사를 끝으로 더 이상의 발굴은 없었다.
그 결과가 지금 복원된 경희궁과 서울역사박물관이다.
이미 당시에도 역사학계와 문화재 관련 연구자들의 상당한 반대가 있었지만 박물관은 결국 예전 경희궁 자리에 2002년 개관하여 현재에도 많은 시민들이 이용하는 서울의 대표적이고 친숙한 박물관이 되었다.
당시 이 박물관에 대한 많은 반대 이유는 단지 박물관이 옛 궁궐 터에 자리 잡았기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
발굴보고서에서도 완전한 발굴이 어려워지면 대안으로 전시관 건립을 이미 방안으로 내놓았다.
문제는 서울시립박물관에 대한 공사가 먼저 진행되고 이후에 발굴이 진행된 점과, 또 다른 한편으로 경희궁에 대한 복원과 발굴이 진행되는 그 과정과 절차였다.
즉 발굴 이후 유적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아닌, 건물 공사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구색을 맞추기 위한 구제발굴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즉 공사와 복원, 발굴이 같이 진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당시 문화수준이 아니었을까?
지금도 서울의 5대 궁궐—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덕수궁(경운궁), 경희궁(경덕궁)—이라 하여 경희궁도 서울을 대표하는 조선시대 궁궐로 홍보하고 있다.
그러나 막상 경희궁의 정문인 흥화문 앞에서, 정전인 숭정전 앞에서 경희궁의 역사를 시민들에게 말하고자 할 때는 무엇부터 얘기를 해야 할지 모르겠다.
절름발이 된 경희궁을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할까?
서울에 남아 있는 가장 안타까운 유적 중 하나가 바로 경희궁이다.
※출처
1. 서울역사편찬원, '서울의 발굴현장'(역사공간, 2017)
2. 구글 관련 자료
2022. 1. 30 새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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